과천에서 태어나 어렵게 살았지. 아버지는 노력동원 나가서 나중에 돌아오시고.....,남들은 중학교 간다 그럴 때 못 가구 땔나무장사를 시작했어요. 농사 지어가면서.... 과천에서 안양으로 먼저 갔어요. 네 시에 일어나 안양 가면 다섯 시 반 구시장 다리 건너 소시장이요. 댕기다가 서울로 흑석동 전철정거장 옆으로 그때는 여럿이 갔지. 마차 끄는 거는 나중이야. 포장도로 말죽거리만 남태령은 도로가 없다고 양쪽 등성이 우측 뻘건 집 하나 있을 거야. 꼭대기에......,이렇게 겨우 사람 하나만 넘어 다니다가.....자꾸 사람이 많이 가니까......, 소 마차가 안댕기구 소등에다가 나무로 엮어서 양쪽에 나무 싣고 가운데 싣고 그리 올라갔다구. 시오리 가다보니까 과천에 아직 전깃불도 안 들어오고..... 전깃불은 청사 있는 쪽.....남태령은 내가 열 네 살인가 길을 뚫었어요. 전기가 늦게 들어와서 우리집 앞으로 해서 끌고 그랬는데......, 남태령도 안양서 버스가 하루에 세 번 다니고 과천에서도 용산까지 세 번 다니고.....,과천에 삼거리 묵장수가 많았어요. 묵 실어다주고 그랬지.....,국회의원 이재영이 이택돈 전에 세사람이에요. 국회의원 나오면 남태령을 뚫어주겠다 그래서 당선이 됐어요. 하루에 세 번 다녔지요. 해방 전에는 차가 다녔는지 생각이 안나. 말죽거리는 막 다녔고.....옛길에는 소 한 마리 다닐 정도였고.......

나무장사 다닐 적에 아버지가 돌아오셨어. 그래서 인사도 안하고 나 내일부터는 나무장사 안해요.’ 그랬던 생각이 나.”

 

그러다 농사짓다가 동네서 누가 돌아가시면 내가 수세를 거둬주고 그랬어요. 왜 수세를 거둬 줬느냐면 시흥사람이 과천 와서 장의사를 하는 걸 내가 지도자를 하기 때문에 과천 거를 웬만하면 다 끌어다 줬다구. 그래 누가 돌아가시면 수세 거둬주고 사잣밥하라 그러고 키에다 사잣밥 놓으라 그러고 동전하고...., 그리고 시체는 안방 윗목에 모시고 장 같은거는 다 내놓고....., 돌아가신 분 이름하고 적삼윗도리 하나 가지고 네 군데다 경기도 시흥군 뭐뭐 하면서.....,대문 앞에 나오면 오른쪽에 사잣밥을 놓고 밖에 나와서 윗도리를 세 번 흔들어. 초를 읽어 가면서......,그리고 지붕 위에 얹어 놓는다구....,

그걸 왜 올려 놓느냐면 시골에는 집들이 주욱 있는데 논,밭에 가다가도 지붕에 옷이 올라 있으면 누구네 초상 났구나.’ 하고 서로들 오지 말래도 다와. 그때는 전화가 없으니까..... 그러면 동네에서 일할 사람을 한 사람을 뽑지. 그때 아마 장대영이가 면장 했을거야. 그때 부고 이렇게 써주면 프린트하고 그랬지 옛날 얘기야. 그렇게 수세 거둬주고 그 이튿날 염도 해주고 염은 언제나 열 두시에 했어요. 돌아가신 날 안하고...,긴 삼일이니까 손님을 저녁때 받고 밤에 해주고 그랬지.”

 

그래 나도 소리를 안했어요. 노인네들이 계시는데 그러다 다 돌아가셔 가지고....., 뒷골 성만식이 어머님인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김충원 씨가 이장을 봤어요. 나는 동네일만 보고.....,근데 상여를 꾸며 놨는데 소리할 사람이 없는거야. 근데 산판이 어디냐면 청계 외미라는 곳이 있었어요. 서씨네 종중 뫼. 그래, 충원이가 몇 마디 하다가 못하겠다 그래. ‘자네가 나아그래 나는 뭐 언제 배웠나. 그래 내가 허구 갔어요. 문제는 뭐냐. 하관을 모신거야. 그래 달구소리를 해야 하는데 사람이 없어. 그래 내가 했어. 그랬더니 노인네들이 부전자전이라 그러더라구.....,그래 내가 할 줄 몰라도 안양까지 가고 주암리에도 가구, 최명식이 사는 동네까지 가서 하고.....,할 줄 몰라도 할 사람이 없어서 갔는데......끝나면 뭐가 나쁘냐 하면 초상나면 돈이 많이 나와......, 그러면 꼭 이 돈을 준다고.....,동네서 오야가 있어요. 오야가 돈을 받아가지고 북치고 그러니까 나 얼마주고 노인네들, 부녀회, 노인정 죄 나눠준다고....,그리고 남은 돈은 초상집에서 그렇게 먹어도 가겟집에 가서 또 먹는다고.....,그러다 80년도엔가 81년인가 내가 새마을지도자로 들어갔어요.”

 

우리 아버님 함자가 이 용자 운자이신데 삼거리 그 양반이 회장 해 가지고 그때도 대회 나가고 그랬지. 우리 아버님이 꽹가리를 잘 치셨어. 그래서 내가 뭘하면 부전자전이란다고.....,사실 소리도 좀 배워야 돼.....,과천수영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200745일 날 최종수가 전국문화원연합회장을 하고 이영구가 과천문화원장 하고 있었는데 찾아와서 좀 도와 달라는 거야. 매일 2시부터 4시까지 문원중학교 체육관에서 연습을 했어. 7,80명이 지게를 열 갠가 엮어 가지고 그걸로 상여를 해가며 소리를 하더라구.....,그리고 뒤에서 장구 치구 또 그 뒤에서 옛날에 그 광주리에 술 그런 거 내오잖아. 그렇게 하더라구. 그래 처음 갔으니까 뒤에 따라 하는데. 아니 이틀도 안 됐는데 종을 갖다 주는 거야. 목청이 좋다고......그렇게 연습을 한참 했어요.”

 

“92일 날 안산 호수공원으로 갔는데....,그때 면..시 그래 가지고 32개 시야. 근데 두 군덴가 한 군데가 안 나오고.....거기서 1등을 했어요. 1등을 해 가지고......,굉장하지 뭐. 그래가지고 도 대표로 뽑힌 거야. 그래서 도 대회를 나가야 되는데 연습을 하는데 청사 마당에서 하니깐 이 상여소리 장구소리 나니까 주민들이 소리 난다고 경찰서로 막 저기 해 가지고 경마장으로 간 거야. 전국대회 나가는데......., 제주도로 간 거야. 경마장에서 하루에 4시간씩 몇 개월을 연습을 했어. 그래서 제주도를 갔는데 한 백 여 명이 갔나봐. 많이 갔어. 거기서 삼일인가, 이틀 연습을 해가지고 이등을 했어요. 일등은 못하고....,이등도 잘 한 거지.”

 

그게 옛날에는 산판을 많이 쓰기 때문에 초상나면 꼭 상여로 해결을 해야 되는데 근데 지금 돌아가시면 화장터로 가니까......누가 배우려고 들지 않아...... 그때 인제 이복술이가 나를 회장을 시키는 걸 나는 회장을 못 한다. 집사람을 간호해야 하기 때문에.....그냥 나는 어디 갈 때는 나오고....., 그 회장은 맨날 나가야 되잖아. 그래서 이복술이를 시켰어요. 내가. 그래 이복술이가 하긴 해. 근데도 꼭 토요일 날, 일요일 날 행사 있으면 꼭 해. 오라 그런다고. 지금도 가서 허구 그러지. 가끔 시간 있을 때는 애들이 집에 있을 때는 가서 연습도 하고....”

 

내가 사실 확인은 그 새마을 때문에 일도 많이 했지만 그때 과천에 그 시청이 가건물이었잖아. 가건물이고 지금 어디냐면 거기가 시민회관 고 아래 가건물로 있었잖아. 그리고 인제 과천동으로 북부 이쪽으로 남부 이렇게 두 군데가 이제 말하자면 동사무소와 마찬가지야. 그때 내가 협의회장을 보고......사실 그때 일들 많이 했어요. 전부 다. 왜 그러냐면 3단지가 5층 건물 아냐. 연탄불 땠는데....,강원도 정선군 하고 자매 결연을 맺어서. 내가 그때 정선군 가서 놀란 게 뭐냐면 거기 지회장 하고 군수래......우리 차가 한 차 갔거든. 나물도 뜯고 그런다고......그런 군수 처음 봤어. 같이 이렇게 밥을 안 먹고 우리 새마을지도자 한 차 간 사람들은 한 군데서 먹고 군수하고 나하고 따로 가서 식사대접을 해주더라구.....,그렇게 잘해줘......그래서 저렇게 이렇게 하다 보니까 서루 거긴 농사 짓는 거 무 그런거 팔 거 있으면 과천에서 다 팔아줬어. 애들 많이 썼지. 쌀이 아무리 반 가마씩 담았어도 이놈의 아파트가 그때는 전부 5층짜리 지구 올라가야......왜 꼭 뭐 팔면 하필 4, 5층에 가......”

 

아버님께서 오시고 징용 나가서 다녀오시고...., 그때서부터 아버님은 농사 같이 지으면서 땔나무는 안했지.”

 

내가 그때 동네일을 시작을 해 가지고.....,그 때는 지도자가 다 전부 인제 일을 하고 그러면 방송을 해. 그러면 노인네가 그래 방송 한다 어이 가봐라.’ 그러면 일하다가 다 가. 그래 동네 뭐 일하면 내가 나이가 제일 어리고 그러니....,돌아가신 세 사람이 있었어요. 박부영이라고 보험 설계하는 사람하고 세 명 있었는데.....,동네 논 매고 그러면 심부름 다 하고.....,한상정은 야 태종아, 지게지고 얼른 가져와라.’ 그럼 벌써 난 알아듣고 누구네 집 가서 이제 꽹가리, 장구 지게에 지고 가는데 그러면 이제 술 먹고 이제 한번 두들기구 그랬어.”

 

왜 과천에 나무꾼 얘기가 많이 나올까? 이게 처음에 문원동에서 나무하러 다니는 사람이 한 대여섯 명 있었어. 그러면 언제든 개구쟁이들이 몇 명 있잖아? 다섯이 가면 지게를 엎어놔. 그리고 이제 작대기 있잖아 그 작대기를 뒤에다 이렇게 놓고 네 명이 이렇게 미는 거야. 그러면 나는 이제 작대기 두드려가며 소리 하고.......그래서 이게 이렇게 된 거야. 그게 과천 나무꾼놀이 아냐? 지금 문화원에 무동답교놀이가 있고, 나무꾼놀이가 따로 있고 그렇지.......”

 

옛날에는 동네마다 행여(상여)가 다 있었어요. 동네서 한 사람이 책임을 지고 동네서 초상나면 이 사람이 끌고 갔다가......,한번 빌려가면 돈 얼마씩 받았어요. 그때 얼마 돈 나온 거로 행여값 따로 주고...., 그 사람 행여 가지고 다닌 사람 얼마 주고 웬만하면 상제한테 돈을 받지만 웬만하면 여기서 다 하고 그랬어요. 과천서 어느 집 가면 누가 잘사느니 어떤 사위가 잘 사느니 하면 돈을 뜯어 가지고 그런 돈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았다가 삼오 날 그냥 그 집 식구들 안볼 제 그 집 큰 아들을 다 주지. 그건 웬만한 사람들은 몰라요. 몰래 몇 사람만 알지..... ”

 

초상이 나면 행여를 미리 꾸며놔. 꾸며놨다가 저녁에 장양을 해요. 그리고 이튿날은 초상날은 그냥 인사만 하고 바로 가고 이제 처음에 초상나고 뭐 하면 행여 꾸밀 때 제일 키 큰 사람이 뒤에 서고 작은 사람의 앞에 서지. 행여를 다 미고 나서 두 번 반을 절을 해. 그리고 상제들하고 전부 다 맞절을 하지. 미구 와서 2번 반을 절을 해. 절을 하면서 내가 이제 종을 치면서 나무아미타불....’ 하면 이제 절하고 또 흔들며 일어나며 두 번 반을 하지.....”

 

(과천홍수이야기)

그 때 관악산이 돌 개울 아녜요? 그래 가지고 그 때도 하천이 좀 좁고 그냥 이렇게 공구리 친 게 없잖아요. 그래 뭐를 걱정을 했었느냐면 이게 인제 하천아냐, 그러면 나무가 떠 내려온다고.....나무가 떠 내려오면 여기가 다 걸쳐서 막히니까 물이 위로 넘어가지고 과천에 집들도 떠내려가고 그랬지. 사당 쪽도 길이 없어지고....안양은 그 한번 되게 크게 망하고 사당동은 고개만...... 장마만 지면은 고개 넘어서부터 배 타고 가야 돼요. 그때들 노인네들 돌아가셨지만 그 배 타고 다닐 때도 고생들 많았지요. 그러고 나두 땔나무장사 할 적에 과천에서 남태령을 걸어 가지고 용산까지 갔었어요. 용산까지 가면은 대리로 안 가고 나룻배라고 있었어요. 뭐냐면 큰 이렇게 나무로 그렇게 뗏목 엮듯이 엮고 판자 얹어서 지렛대 같은걸루 이렇게 서서......”

 

(6·25 이야기)

 

과천 홍천말에서 이쪽 찬우물로 해서 수원으로 피란을 가는데 길에 발 디딜 데가 없어. 사람 죄 죽어서....,폭격을 해가지고.....,근데 그때도요 사람들이 막 뛰고 살려고 그러는데 비행기에서 뛰고 그러는 건 다 쐈어. 그리고 그냥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은 가만두고.....그래서 많이 죽었어요. 말도 못 했어요.”

 

피란 갔다 집에 들어오니깐 중국군이 차지하고 있길래 주인이라고 그러니까 안방을.....,피란꾼이 꽉 찼지. 근데 안방을 싹 비워주더라구.....그때 중국을 다시 본 거예요.”

 

나는 지도자도 하고 그랬지만 안 해 본 건 없습니다. 그 얘기지만 직장에도 기아산업 당기고...... 어디다 이렇게 딱 한 가지만 못한 게 원이 뭐냐면 연탄 장수.....장사도 배추 팔구 그런 것도 해 보고 원체 어려우니까 그냥 시간만 있으면 가서 뭐 하구 그랬어요. 나는 남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댕긴다고 할때 학교도 못 가고 저녁 때 인제 일하면 야간 중학교라고 있었어요.”

그때 한일 거기서 했는데....저녁 일곱시 나 여덟시에 가서 1시간은 하는데 하루 왼종일 일하고, 공부가 들어가?’ 그리고 또 와서 밤새고 또 가을이면 벼 털러 가면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가야 돼. 그러니 조금만 배우다 못한거지......그때 그 학교가 지금 한일고등학교라고 그 뒤에 있었어요. 거기 헐구 다시 지은거죠. 지금 과천 그때 우리 또래가, 향교라고 있죠? 향교 은행나무 밑에서 많이 했지요. 왜 그러냐 하면 학교는 불타서 없지 그 안에서 공부하다 덥고 그럼 관악산 가서 하고 그랬지. 우리가 한 반에 20명은 넘었어요. 1개 반이.....,그때는 2개반 있었거든. 그러면은 학년별로 다 2개 반씩 정도는......그러면은 책가방은 헝겊에다 해가지고 메고 비 오면 부대 이렇게 머리에 얹어 가지고......그리고 운동화 온전한 게 없으니까 집세기도 있구. 겨다(게다) 그런데 검은 신발도 그건 부잣집이나 있지.”

 

이씨는 농사지을 때 소를 몰면서 이려, 이려, 낄낄하고 소리를 내는 대신에 휘파람을 불어서 소를 부렸다. 그걸 지나가던 자가용을 탄 부부가 보더니 서울에서 공연을 하자고 해서 따라가서 공연을 한 적도 있었다.

 

(2019.5.14.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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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남 씨는 1940년생이다. 과천초 40회다. 안양중학교를 2년까지 다녔다. 지금 과천과학관자리에서 양계장을 했다. 닭이 3천 마리나 됐다. 일찍 영등포공구상가에 가게를 차렸다. IMF로 부도가 나서 살던 집까지 처분해 정리했다. 그 여파로 죽지 않으려고 운동을 했다.

 

박씨는 흑석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가 과천으로 이사 오시면서 과천에서 자랐다. 궁말에서 자랐다. 궁말에 박씨들이 많이 살았다. 형제가 사남이녀였는데 동생 하나가 뇌종양으로 일찍 죽었다. 서울대병원이 처음 문을 열 무렵 그리 데리고 다니며 고치려 했지만 살리질 못했다.

 

허약했던 소년은 안양중학교에 입학했다. 읍내 친구네 집이 삼거리에서 자전차포를 했다. 아침이면 소년을 뒤에 태우고 학교를 다녔다. 15km를 걸어서 다니기는 쉽지 않았다. 아침이면 선도부에게 걸려 혼이 나곤 했다. 2학년을 다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당시 월사금은 큰 부담이었으며 농사에는 일손이 필요했고 굳이 더 다녀야 할 이유도 없었다.

 

박씨네는 지금 과천과학관 자리에서 양계장을 했다. ‘지금 과학관 마당에 로켓이 서 있는 자리라고 지목했다. 닭이 3천 마리. 닭을 키우다보니 사료장사도 하게 됐다. 삼거리에서 사료가게를 차렸다. 지금 서울대공원 안쪽 맹금류관 근처에 살던 전 과천문화원장 최종수씨네가 닭을 키웠는데, 지금도 그 집 사모님이 삼거리에서 비료를 머리에 이고 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고.

 

아내 김씨는 같은 동네서 자란 9살 아래 동생이었다. 아내의 작은 아버지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면사무소 뒤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과천 보도연맹 사건은 동네에서는 큰 변고였다. 전쟁이 나고 밀려들어 온 북한군들은 보도연맹을 조직했고 그들이 앞장서 그해 가을걷이 때 동네를 돌며 추수한 곡식들을 수탈했다. 자의반, 타의반 동네사람들 중에는 심부름을 하거나 탄약을 옮기는데 동원됐다. 국군에 의해 수복이 되고 난 뒤에 청년단이 조직되었다. 북한군에 협조한 사람들과 보도연맹에 가담한 사람들을 잡아다 고문하거나 처형했다. 과천 뿐 아니라 온 나라 곳곳에서 벌어진 참극이었다.

김씨는 어려서부터 삼촌네서 자랐다. 한 동네서 자란 박씨는 김씨를 데리고 다녔다. 당시 읍내 ○○씨는 동네일을 보면서 노래자랑을 열었다. 마을의 큰 행사였다. 박씨는 노래 잘하는 김씨를 무대 위로 올려보내 상을 타게 했다. 그러던 그녀와 결혼해 21녀를 두었다.

 

청년시절 박씨는 이웃에 있던 장막교회를 기억한다.

 

부천신앙촌에서 사람들이 많이 과천으로 왔지. 몇 해 안가서 교회도 크게 지었더라구. 청계산 폭포 근처에는 유재열의 별장도 있었어. 유재열을 어린양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은 무척 표정이 밝고 거리를 다니면서도 활기차게 노래를 부르며 다니곤 했어.”

 

지금의 서울대공원 앞 청계호수는 본래 막계저수지였다. 해방 후에 일정 때 수리조합장을 지내신 분이 나서서 예산을 타내서 농업용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그 저수지를 지은 후에서야 과천사람들이 쌀 구경을 하게 됐다. 그리고 광창마을 일대가 논이 되면서 과천 최고의 부촌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저수지 축조를 놓고 사건들이 많았다. 저수지 공사를 맡은 이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저수지 아래 논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기극이 난무했다. 박씨네도 그중 하나였다.

 

술을 좋아하시던 부친이 동네 건달패에 속아 4천 평 논을 전부 날리게 된다. 술잔을 앞에 놓고는 형님네 논을 담보로 돈을 빌려다 사업을 해서 크게 불려 주겠다. 나중에 빌린 돈을 갚으면 논이야 그대로 있는 거니까 손해날게 없다.’며 꼬드겼다. 몇 해가 지나자 은행에서 압류가 들어왔다. 돈을 빌려 쓴 사람은 종적을 감춘 뒤였다. 박씨가 그 집을 찾아가도 아내는 남편이 집을 나가서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잡아뗐다. 박씨는 궁리 끝에 안양경찰서에 사기죄로 고발했다. 경찰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 그걸 받아든 그 집 부인은 외출을 하더란다. 박씨는 동네 친구에게 미행을 시켰다. 부인은 서울역 뒤 서부역 근처 다방에 가서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란다. 한참을 지나서 남자가 나타났고 미행 간 친구가 그가 지내는 여인숙을 알아냈다. 그리고는 다른 친구를 그 여인숙 옆방에 들게 했다. 당시 쌀 한가마 값을 수고비로 줬다. 며칠 뒤 날짜 약속을 하더라는 소리를 엿듣고 덩치 좋은 친구들과 여인숙 앞을 지키고 섰다가 잡아서는 안양경찰서에 넘겼다. 그러나 40여만 원을 받은 것을 끝으로 박씨네 논 4천 평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1978년에 영등포 공구상가에 기름가게를 차렸다. 유공의 윤활유대리점이었다. 동네서도 신 모, 이 모씨네 보일러에 기름을 넣어주곤 했다. 당시 기름보일러가 있는 집은 부잣집이었다. 곧잘 되던 장사였다. 하지만 IMF가 터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박씨뿐 아니라 당시 상인들은 가계수표, 당좌수표, 약속어음 세 가지로 거래했다. 길게는 6개월 뒤에 현금을 준다는 약속증서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로는 보편적인 거래관행이었다. 이 약속 증서를 결제할 현금이 걷히질 않았다. 그 어음들을 결제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

 

부도가 나니까 수금이 안되서...... 그때 내가 등촌동에 3층짜리 집을 지었어요. 입구에 돌기둥을 해가지고.... 그때만 해도 잘 지은 집이었어요. 그게 한중신용은행에 담보를 해가지고 어음을 끊었거든. 그게 넘어가고.....지금도 그리 다니면 눈물이 날 정도예요. 다 정리하고 친구들이 도와줘서 세를 들어갔어요. 지하로 15계단 내려가는 집. 지하2층에 빛이 안 들어와 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집으로 들어갔어요.”

 

당시 공구상가에서 장사하던 친구들 여럿이 죽었다. 돈은 수금은 안 되고 어음은 돌아오니 막아야 하고.......속이 상해서 술만 먹다가 죽은 친구들이 여럿이었다. 화를 풀 길이 없어 죽어 넘어가는 친구들을 보고 박씨는 안 되겠다 싶어서 몸을 움직였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대문이라도 발로 걷어차고 싶지. 그럴 때는 몸에 부하를 걸어줘야 해요. 등촌동 새마을운동본부가 있는 우장산엘 가죠. 산에 가서 몸을 혹사시켜요. 부도가 나서 남대문경찰서, 치안본부로 조사를 받으러 다닐 때였는데 저녁 일곱 시에 조사 받으러 오라 그러면 아침에 산에 가서 하루 종일 운동을 했어요. 그리고는 저녁에 경찰에 조사받으러 가는 거야.

그때 술로 풀던 사람들은 다 죽었어. 운동한 나만 살았지. 술이 나쁜 적 이예요. 지금도 저기 월드컵경기장 매봉산 둘레길이 7킬로미터야 1만보거든. 또 양수리 가면 물을 내려다보면서 걷는 자전거 길이 있는데 거길 걸어요. 지금도 약을 안 먹어 혈압약도 안 먹는다고 의사가 그래. 나이 팔십에 약도 안 먹고 건강하시다고......”

 

세브란스병원 경비로 취직했다. 밤샘 근무를 하고도 아침이면 신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의정부에서 내려서 사패산을 올랐다. 포대능선을 따라 우이동으로 내려 왔다.

 

지금 거기 길이 다 막혔어. 포대능선 그거 험하잖아. 산중이라 험한데 저번에 옛날생각이 나서 가보니까는 죄 울타리를 쳐놓고 막아 놨더라구. 집들이 죄 들어앉았어.”

 

지금도 박씨는 치과 기공소에서 수도권 치과로 보내는 물건을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전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사업이 망하고 돈이 없잖아요. 난 아프면 병원 갈 돈도 없고 죽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운동을 해요. 운동 때문에 살았어요.”

 

박씨는 집안에서도 할 수 있는 스쿼트 운동을 가르쳐 줬다. 싱크대 앞에 방석을 깔아 놓고 씽크대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몸을 좌우로 비튼다. 100번을 하고 다리를 바꿔 다시 100. 이렇게 하는 것 만으로도 혈압이 오르는 일이 없고 허리 아플 게 없다고 가르쳐줬다. 주변에 만나는 친구마다 이 스쿼트를 가르쳐 주었다.

 

운동에 빠진 박씨는 좋은 물을 마시는 것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영등포에서 유공 윤활유 대리점을 할 때 산악회를 다녔어요. 백두대간 종주를 몇 번 하고 한라산을 세 번 가고.....,설악산은 수도 없이 갔지. 갈 때는 페트병 큰 거 6개를 배낭에 넣고 가요. 그게 몇 킬로그램 돼요. 치악산 가면 산꼭대기에 약수가 나와 그걸 담아 지고 내려 오는거야. 전국의 약수를 다 찾아 다녔어. 진천가면 초정약수, 오대산 월정사 방아다리 약수, 설악산 오색약수, 제주도 가면 한라산 약수......,다 찾아 다녔지. 좋은 물이 효과가 있었나봐.”

 

(2021.6.4. 과천문화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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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주암동 은행나무길 16번지에서 난 김정도씨.

 

과천에 산신제 지내는 곳이 두 군데 남태령과 주암동 두 군데다.

10월 초하루 도당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제를 지냈다. 죽바위 대나무가 났었대. 그래서 죽바위.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축문이 6·25때 바뀐 걸로 아는데 석사논문 쓰는 학자가 3년을 드나들며 찾았지만 축문이 없어 아쉬워 한 적도 있다.

어려서 당제 지내면 떡을 받아먹던 생각만 난다던 김씨도 자라서 당주가 됐다.

 

당주도인이라고 당주노릇도 했어. 당제는 소머리가 제일이야. 30이 넘어야 해. 옛날 법에는 개인이 아니라 신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동네책임자가 누가 지내는 게 적임이냐 따져 골랐지.

깨끗한 사람이 지냈고 도당바위 앞에 우물이 있어서 그 물로 몇 일 전에 싹 가셔내고 그 물로 제사를 지내.

당시 80가구 정도였어. 간덴말 동네가 없어졌고 1반이 열 두 가구에서 지금은 30세대 정도. 전부 84가구 정도.

통장이 당주하고 건립을 택하고 집집마다 거둬서 쌀을 1킬로 정도 거둬서 지냈어. 99년부터 안 걷고 동네 돈으로 지내지.”

 

서초동이 80년대 초 개발 되서 싹 없어졌지. 그전엔 여기서 경운기 싣고 가서 고랑 내주고 그랬어. 여기서 채소를 기르면 차가 와서 실어가. 영등포 경신상회 아현동까지.....논 몇 마지기 하고 밭에는 콩 보리 밀보리 조금 개발되면서 채미, 고추 많이 하고......”

그전엔 나무장수, 신목장수를 했지. 말죽거리로 쪽꼬리(장작) 장사했어. 사당동으로 청계에서 신목장수는 살구나무를 해다 파는 거야. 한남동에서 나룻배를 탔지. 선가가 1백원, 낭구는 2백원. 하루는 팔지 못해 도루 오는데, 누가 1백원 주고 가져가더라구 그래서 배 타고 돌아왔어. 나무 팔면 국밥은 비싸서 못 사먹고 빵 5원 짜리 몇 개......”

 

새마을운동 1975년 노깡(콩크리트 배수관) 놓고 하던 생각 나. 부역을 나갔지. 방앗간 앞 길 한내서 부터 자갈을 깔아야 했어. 먹구 살게 없어도 그건 나가야했어. 면에서는 마을로 동네이장은 집집마다 몇 미터씩 정해주지. 자갈로 깔으라고......,내 동네는 마차만 다니기 때문에 안 해도 큰길은 나가서 부역했지. 당시 동네 경운기가 우리 작은형이 하나 갖고 있었지. 70년엔 그리곤 마차 몇 대 있었고. 내 선배들은 마차 타고 다녔어. 작은 형은 딸딸이 끌고......”

 

어머니께서 13남매 낳으셔서 일본사람한테 상까지 받으셨어. 내가 끝으루 셋째 아들로는 넷째야. 아버지는 여기분이셨고 어머니는 어디서 시집오셨는지 몰라. 큰아버지는 돌무께서 돌아가셨어. 장군마을서 나시고 1반에서 돌아가셨고.....”

 

“6·25때 피난 갈 데가 어디 있어? 장군마을 복숭아나무 많은데 외딴집 있었어. 그리 갔는데 중국 놈들이 왔더라구. 그리 갔다 이리 돌아왔지. 여기는 차가 못 다니는 곳이라 여기가 피난 오는 곳이야. 적군. 인민군은 없고 중공군이 들어왔지.

우면산 관악산 전투가 크게 벌어졌어. 아군끼리 신호가 안 돼 갖고 오인사격들을 했지. 한내에 큰 매형이 사셨는데 마루 밑에 숨었는데 날아든 실탄에 이빨 하나가 부러졌지.”

 

중국놈들이 곡식을 그렇게 뺏어갔어. 말에다 저녁에 곡식을 싣고 가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지. 피난도 멀리 못 가구 외지 나가 돈벌이도 못해 보구 고향을 지켰는데 결국 없이 사는 거지. 남들은 투기들도 하구 그랬는데 앉아서 산전수전 겪었지.”

“28살에 장가갔어. 1967년 강원도 사람하고. 인연이래는건 천리 밖에도 있는 거야. 연애했지. 편지로 연애를 했지. 사진사도 없었어. 말죽거리도 없어 흑석동가서 약혼사진 찍었지. 그땐 남산 드라이브가 유행이었어. 딴 덴 갈 데도 없구. 동네서 구식결혼식을 했지. 54년 됐네. 남매 뒀어요.”

 

당제 지내기 한 달 전에 당주가 쌀 걷으러 다니지. 없는 사람도 다들 냈지. 쌀 걷어다 여기서 빻고 쪄가지고 만들어서 지내. 소머리는 마장동 독산동 가서 사오지. 소머리 값이 지금 20만 원정도. 그날 되면 더 비싸요. 메뚜기도 유월이 한철이라고......,과일 밤 대추는 여기 있으니......,소머리 처음엔 마장동 나중엔 독산동가 사고. 아주 옛날에는 양재동 정육점에다 맞추지. 그 후에 마장동 생겨서 마장동으로 다녔지. 초하루에 제사 지내고 초이튿날 모여서 먹구. 나중에 문화원 보조 나온 게 10년 안쪽이지. 근래 들어. 처음보다 줄었다가 올해 다시 1백만 원이라네.”

 

건의할 건 죽바위 유래에 대한 비석이 없어 안내판이 없어. 지금 우리 없어지면 누가 말대답 해줄 사람도 없어. 산제 지낸 목록 노임 얼마, 장적이 얼마 목록이 있었대요. 통장이 가지고 있을 거야. 인건비 땔나무까지 돈을 쳐서 계산했기 때문에.......”

 

과천에서 산신제 지낸 데가 많아. 삼부골도 지냈어. 삼부골 지낸 건 내가 알아. 굿하는 건 흔하게 봤지. 문명시대에 귀신이 어딨어. 하지만 있던 없던 동네 하나 된 마음에서 정성을 드린다 이런 거지.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하고, 도당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드리는 거지.”

 

여긴 무지래기 산골이야. 전기도 1974년 유공 들어오는 바람에 덕 봤지. 육영수여사가 문세광 총 맞아 죽은 뒤에 72, 3년도 박정희하고 박근혜가 여기 와서 나무 심었는데 그 나무가 죽었어. 은사시나무 알아주지도 않는 나무.”

전쟁 땐 이 동네 지방 빨갱이가 해꼬지 심하게 했다는 소리는 못 들었어. 맥계 골짜기 인민위원장 누가 하다가 그 동네에서 쫓겨났다지? 3통에 미군 부대 있을 때 술 취해서 새총 들고 새 잡으러 갔다가 미군한테 잡혀서 죽을 뻔 했어. 말이 안 통 하니까......”

 

김씨가 땅값을 계산하는 방법은 요즘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다. 농사를 지을 땅을 기준으로 삼는다. 지금 보면 산비탈이지만 그 산에서도 농사를 지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양재동 일원의 땅값이 오르면서 주암동도 많이 올랐다.

 

문원동은 대지가 천만 원이지만 여기 그린벨트라도 전답이 천만 원 안주고 못 사.”

 

김씨에게도 땅을 팔아 돈 좀 만진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돌아 온 답은 팔고 나갔던 사람들이 그 돈을 들고 무엇을 했겠느냐?’는 선문답이 돌아왔다.

 

죽치고 있던 사람 밥술 먹어. 그래서 돈이 사람 따라야지 사람이 돈 따르려면 애로가 있어.”

 

(2020.11.24. 원주암경로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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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4남매 중 막내다. 1939년에 사당동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이던 1955년 무렵 아버지를 따라 과천에 왔다.

아버지를 따라 한약을 짓다가 제대 후에 삼환기업에 입사해 키친아트로 유명한 경동산업으로 옮겨 30년을 다니다 퇴직해 20여 년 전 과천시청 옆에 사 둔 집으로 돌아왔다.

 

각세도는 황해도 문화군에서 태어난 이선평이 중국여행길에서 하늘에 나타난 글자를 받은 후 구월산에 들어가 10년 기도 끝에 깨우친 도를 전하는 신종교다. ‘착하게 정직하게 살라.’는 이 도는 한때 2,30여 만 명이 따르는 큰 세를 이루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교주를 두고 30명의 제자를 30()이라 부르며 시대변화를 내다보고 생활양식의 개선을 가르치는 등 융성했다. 6·25 전쟁으로 충청도로 피난을 가서는 충북 영동군 학산면민의 90%가 각세도를 따르는 세를 이루기도 했으나 전쟁이 끝나고 과천으로 돌아온 이후 급격하게 세가 기운다. 정부종합청사 뒤에 창시자 이선평의 묘가 있다.

매달 음력 1일과 16일에 고양시 삼송동에 있는 도관에서는 예배를 드리고 이선평 교주의 창시자 생일에는 과천 묘역에서 제사를 지낸다.

 

태어나기는 서울 종로에서 났어요. 지금 동숭동 서울대 의대 건너 낙산에 집이 있었어요. 황해도에서 내려오신 아버지가 거기 양철지붕 집을 짓고 사셨는데 6·25가 나기 직전에 동네 젊은 친구를 불러 집을 가지라고 주셨어요. 전쟁이 날 걸 아셨던 것 같아요. 전쟁이 나서 한강다리가 끊어지고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포탄이 낙산으로 떨어지면서 밤새 지붕으로 돌이 떨어지곤 해서 무서워서 닭장에 숨어서 밤을 샌 기억이 나요.”

그리고는 신문기자 하던 한 모씨, 국회의원 성 모씨가 찾아와 피난을 가셔야 한다고 재촉하셔서 성 의원 지프차를 타고 한강을 건넜어요. 한강에는 건너가려고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 있었어요. 국회의원 지프차라 강을 건널 수 있었어요.”

 

그렇게 내려간 곳이 성의원의 고향 충북 영동이었다. 성의원은 대전 유성에 집을 얻어 이선평 교주가 지내게 했다. , 땔나무, 간장을 사서 들여 놓고는 영동으로 갔다. 며칠 후 제자들이 모여 들더니 도인들이 많은 영동으로 모셔갔다. 영동으로 가자 제자들이 기둥이며 서까래 같은 자재들을 구해 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

 

아버님은 이상하리만치 신세지는 걸 싫어 하셨어요. 그래 몇 차례 이사를 다니다가 수제자인 30암 중 한 분이 과천에 땅을 잡아 놨다며 가시자고 하셔서 과천 정부청사 뒤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그 뒤에 자리를 잡으신 거지요.”

 

과천에서도 생활은 궁핍했다. 아버지는 한약을 지어 주곤 하셨는데 그게 유일한 돈벌이였다. 이동두 씨는 곁에서 처방을 받아 적고 약재를 사러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한약공부를 하게 됐다.

 

참 어려웠어요. 아버지, 어머니와 큰 형 그리고 나 넷이 살았는데 쌀 한 말을 가지면 나흘을 먹어요. 그런데 손님이 오시면 그 분 밥을 해드리면 쌀이 없는 거예요. 지금도 난 반찬투정 안 해요. 반찬이래야 소금 아니면 간장이면 돼요. 그때 제일 좋은 반찬이래야 오이소박이가 다였어요. 그나마도 아버지 상 물리시고 우리 먹으라고 남기신 오이소박이를 아버지 다음 날 드실 게 없을까봐 손을 대지 못 했어요.”

어느 날 수원에서 치과의사가 아들을 위해서 약을 지으러 왔다. 곁에서 들으니 허증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약을 지으라고 내어주는 처방을 보니 평소와 다른 처방이었다. 그래서 이씨는 자기가 아는 처방으로 약을 지어 손님을 보내고 아버지께 이유를 물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그럼 됐다. 일부러 그랬다하셨다. 그 약을 먹고 환자가 나았다. 소문이 수원 바닥에 퍼졌다. 손님들이 미어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자식 먹여 살릴 방도를 만들어 주신 거였어요.”

 

동네서는 신동 났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아버지뻘 되는 분들과 주역을 논하고 풍수를 이야기 할 정도가 됐다. 약방을 하기 위해 동양한의대학교엘 들어갔다. 낮에는 약을 지어주고 밤에는 버스타고 남태령을 넘어가서 수업을 들었다. 늦어지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기숙사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약물학 수업은 선생보다 더 많이 아는 편이라 더러 빠져도 됐다.

 

어느 날 이씨는 아버지 묏자리를 봐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뒤 산 끝에 자리를 보고는 아버지와 도인들 중 존경 받는 한의사였던 우 모씨에게 보였더니 그 자리가 제일 좋다하셨다.

 

그리고 1년 쯤 됐나. 돌아가셔서 매장 하는 날 아침에 막내인 내가 권 모씨와 마차를 끌고 안양으로 상포를 하러 가게 됐어요. 큰형이 묫자리를 물으며 우리 산 끝에 어떠냐?’ 하길래 아니요. 그 위에요.’했더니 다녀와서 보니까 딱 내가 짚었던 자리에 파놨지 뭐예요. 나하고 아버지 그리고 우씨 세 사람만 가 본 자린데.......지금 그 자리가 자리도 좋지만 그게 우리 산이 아니었어요. 당시엔 그런 생각도 못했는데 우리 땅에 묘를 썼더라면 나중에 정부청사가 들어서면서 수용되어 버렸겠지요. 신기한 일이예요.”

 

이선평 씨가 돌아가시던 날도 기이했다.

집에 사발시계가 있었어요. 전기도 없던 시대라 등잔불 아니면 촛불이었죠. 자정이 지나 갑자기 아버지와 자고 싶은 거예요. 안방으로 가니까 불이 켜 있길래 어머니께 왜 불을 켜놨어요? 불 끄세요.’ 했더니 . 아버지 뭐 하신다.’하시는 거예요. 그래 보니 자리 앞에 단정하게 앉으셔서는 앞에 놓으시던 작은 상을 정리 하시고 계시는 거예요. 사발시계도 닦으시고......‘뭐하세요?’ 했더니 나 잔다.’ 하시고는 그길로 귀계(歸界)하신 거예요. 그 밤부터 눈이 펑펑 내렸어요.”

 

이씨에게 약을 지어 달라는 주문이 쏟아졌다. 돈이 가방으로 들어오고......땅을 마련하고 집도 새로 지었다. 새 집에 구들장을 놓고 처음 연기를 피우던 날 신발 끈을 묶으면서 약을 처방하고 이씨는 군에 입대했다.

 

동네 친구와 같이 입대했다. 친구는 바로 배속이 되어 갔지만 의무병으로 간 이씨는 한참을 기다려 시험을 치고 나서야 의무대에 배속됐다. 아직 졸업을 하지 못한 학생이었지만 한의대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도 의무병으로 지낼 수 있었다.

 

제대 후에 한 동네 사는 동생과 결혼했다. 처음엔 그의 마음에 두었지만 내색하지 못했다. 그래서 장인이 약을 지으러 오면 일부러 처형을 데리고 종로에서 가장 큰 약재상으로 가서 처방을 주면서 직접 사게 했다. 당시 처가에서는 이씨에게 재산은 없으나 생활력은 있다.’ 싶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자격증도 없이 약방을 계속 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만두고 취직을 했어요. 삼환기업엘 들어갔는데 마침 문래동에 스테인리스 양식기를 만드는 공장을 짓는다면서 거기 십장을 맡게 됐어요. 번듯하게 직장이 있으니 결혼식도 올릴 수 있었지요. 공장을 다 지었는데 그게 지금의 키친아트예요. 거기서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이사까지 30년을 다녔지요. 열심히 했더니 회사에서 일본, 독일, 스웨덴으로 연수를 보내줬어요. 돌아와 보면 나보다 높은 사람들은 현장 경험이 없잖아요. 나는 이론과 현장 경험을 다 갖췄고.......”

 

근무하는 동안에도 공장 자동화에 관심을 가졌다. 스테인리스 식기를 연마하는 자동화기기를 개발해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수출의 날 표창을 받으러 세종문화회관에 갔더니 사회자가 오늘 이 시상식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컬러TV로 방송을 하는 날이라고 하던 기억이 나요.”

 

과천에 돌아오게 된 건 아들 장가 보내면서다. 20여 년 전 응봉동에 살 때였는데 아들 장가 보내려고 전세를 얻으려고 보니까 서울 전세 값이나 과천 집값이 비슷하더라는 것. 그래 과천 시청 옆 단독주택을 샀다. 문제는 당시 과천에 좀도둑이 극성이었다.

 

두 세 번을 도둑이 들었어요. 부엌 쪽창으로 들어와서는 화분을 깨서 열쇠구멍에 틀어 막아놓는 바람에 나중에 문을 열 수도 없게 해놓고......처남 환갑 한다고 돈 좀 있는 거 홀랑 도둑 맞기도 하고......,나중에 수표를 번호를 적어 놓는 바람에 되찾기도 했어요. 도둑 때문에 아들이 못살겠다고 하는 바람에 응봉동 집에 살게 두고 우리 부부가 내려 온 거죠. 40여 년 만에 돌아오니 옛날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

 

각세도 창시자의 아들이 보는 이선평 교주는 어떤 사람일까?

 

제자들에게는 하늘같은 교주시지만, 제게는 그냥 아버지예요. 하지만 세상을 앞서 가신 분이지요. 그 분 쓰신 글 중에 남자들의 세상은 가고 여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온다.’는 말이 있어요. 그 말 대로잖아요. 지금 코로나를 보고 그러셨는지 큰 병이 나서 전 세계가 고통을 받는다.’는 예언도 있구요. 아버지 어머니는 생식을 하셨어요. 두 분이 마주 앉아서 우리는 이렇게 사는데 쟤들은 어떡하지?’ 하시던 생각도 나구요. 동숭동 살 때 어머니는 몸이 가벼우셔서 축지법을 쓰셨는지 황해도를 하루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지금도 도관에서는 아버님 가르침 따라서 제사를 드릴 때 전을 부치거나 밥을 올리지 않아요. 생명의 상징인 밤, 대추, 곶감만 올려요. 지금은 며느리가 시부모 제사 올리는 것도 번거로워 하는 세상인데 일찍 깨신 거죠. 그때 이미 이렇게 간소화해 놓으셨으니까.”

 

각세도는 이선평 씨가 신격화 되지 않아서 종교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각세도는 동서남북 사관 체제를 두었는데 창시자의 법통을 이어 받지는 못했으나 같은 전주이씨 문중이었던 이 모씨가 학문적으로 정리를 하면서 각세도 원리교를 만들기도 했다. 이 모 씨가 어느 날 이동두 씨를 찾아와 전주이씨 족보에 이선평 씨를 각세도 창시자로 이름을 올리자고 했으나 이동두 씨가 거절한다.

 

아니예요. 전주이씨는 맞지만 아버지는 황해도 문화군에서 각세도를 시작하셨으니 문화이씨 시조로 기록 하는 게 옳습니다.”

 

그러자 이씨가 무릎을 치며 자네 말이 옳다.”고 했다.

 

(2021.2.19.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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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생 송씨는 4형제다. 평생 농사만 짓고 과천 밖을 나간 적이 드물다.

 

청계산 저기서 낭구 해다가 널어서......그걸 또 죄 묶어서..... 흑석동까지 가서 새벽 두 시에 가서 팔구 아침에 또 나무 가서 또 해다가 팔고......땔나무를 하루에 한 두 번씩......아마 열여섯 살 부터 한 거 같아. 그땐 하두 없이 살아가지구.....”

 

(그 당시에는 과천에서 나무해서 내다 파시는 집이 몇 호나 되셨어요?)

 

동네가 거반 다......어르신네들이 땔나무 짊어지고.....여기는 옛날부터 나무만.......가지고 가면 좁쌀......그거 지게에다 달랑달랑 달고 오는거지.”

 

(그때 돈으로 하면 얼마나 받는 거예요?)

 

지금 돈으로 하면 한 15천 원 정도..... 땔나무 한 짐이 10. 아니지 십 환.......”

 

(팔러 가시던 자리는요?)

 

지금 흑석동 시장자리, 노량진 길 옆에 놓고 팔고 그랬어요. 새벽에 지고 가면 날이 훤히 밝아요. 그전에는 탄이 없잖아.....전부 나무 때고 그랬으니....그러면 사러들 나와요. 거기서 팔구 와서 또 땔나무 하러가고.....60년대죠.”

 

전쟁 때 여기도 아홉 채가 불에 탔어요. 그래서 이중계를 하게 됐지. 도와줄 길이 없으니까......방법이 없으니까......”

 

우리 아버지도 끌려 갔었어요. 노력동원인가......그 전에 말하자면 후생사업이지 갔다가 군대 갔다가 겁나니까 지금 나와서 사는 거야. 그러고 돈으로 때우는거야. 돈으로 바치고.....그게 후생사업이지. 붙들려가도 돈으로 메꾸는거지. 옛날에 우리 아버님이 그렇게 했대. 그때 땅 한평 천 원, 이천 원 갈 때야. 그러니 그거 팔아서 디밀고 디밀고 그러니 자식들만 고생이지.....”

 

(70년대 초반에 홍수가 났을 때 이쪽 광창마을이 많이 잠겼습니까?)

 

이 동네는 잠기지 않고 개울......관악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넘쳐서 훼손됐죠. 그 전에 양재동, 사당동 이쪽에는 다 물이 차 가지고 배 타고 다니고 그랬는데 여기는 그래도 지대가 높아 가지고 물은 안 찼어요.”

 

이중계는 어른들이 만드셔 가지고 우리가 보관해 가지고 복원을 한 거지. 마을에서 이거는 후손들에게도 해줘야 하지 않느냐 해가지고......젊은 애들은 몰라요. 옛날에는 기와가 아니고 전부 이엉을 엮어서 했잖아요. 10월 달이면 마을계가 있어요. 곗날이면 농사 안 짓고 나무하는 사람은 산에 가서 땔나무 가져오고 농사짓는 사람은 짚풀 열단씩 가져오고....그래 가지고 그거 모아 가지고 지붕 해 잇고 겨우내 때고 그랬어요. 동네 자금도 지금 이 마을회관도요. 이 땅도 여기 이게 다 그렇게 모은 돈 이예요. 그 끄트럭 가지고 맨들어 논거죠. 지금 젊은 애들 하나도 몰라요.”

 

그리고 여기 송인관 씨는 밖에 나가 사회활동도 하고 그랬지만 우리는 만날 먹구 일 밖에 몰라요. 어디 나가도 이거 대화도 못 해보고 누가 어디 가든 놀러도 못 가고 오로지 땅만 파고 옛날에 그랬더니 그 대신 자식들이 좀 잘살지.”

 

(자손은 많이 두셨어요?)

 

아들 둘, 딸 둘. 둘째 내가 데리고 있어요. 큰 애는 나가 있고 딸들 다 시집 보내고 손주 둘은 군대 가 있고......”

 

(경마장 수용된 자리에는 가옥이 많지 않았나요?)

 

삼부골 능안말 지금은 능안말이 없어졌지요. 마을 자체가 없어졌어요. 그리고 요 동네는 빠진거지.”

 

(송인관 : 여기 송억산 씨는 동네 터주대감이예요. 한 번도 마을에서 떠난 적이 없어요. 지금 오늘도 내가 와 보니까 혼자 지키고 있어요. 그래 가지고 이제 노인네들 이제 식사 같은 거 보게 되면은 반찬이 없잖아요? 집에서 농사를 짓고 그러니까 채소 떨어지면 김치 갖다 채워놔. 오래도록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이왕 그런 좋은 일도 하니 이중계 좀 맡아달라. 우리는 외부에 나가 다니고 나는 문인활동도 하고 그러니까 이건 송씨가 적임자가 아니냐 어렵지만 맡아 달라.’ 해 가지고는 이제 맡았어요.”)

 

(2019.5.13. 광창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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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초등학교 35회야. 과천농협조합장 이경수 아버지 이상용 어르신이 통장이셨어. 안골이 집이야. 과천문화원장 신학수 할아버지가 과천을 이끌어 가셨지.”

 

과천이 발전이 안 됐던 게 학군을 서울로 학교 가려고 유지들은 아들들을 서울로 전학 시켰지......과천에서 다닌 사람 많지 않아. 나중에 청사 들어오는 바람에 똑똑한 공무원 자식들이 들어와서 변하기 시작했지. 원주민 중에 빠진 사람은 서울로 다니고...”

 

전라경상 단합 잘 되지만 과천은 안 그래. 미국 원주민이 야만인 된 것처럼 옛날 대만에서 관동군들이 행세를 하는 것처럼 단합이 안돼.”

 

그린벨트가 78년 들어올 때 처음엔 사람들이 그게 뭔지도 몰랐어. 홍성기 면서기 다니다 아들이 안양공고 서울수의대 나와 안양서 살았지. 그린벨트 때 면장 했지만 뭔지도 모르고.....그린벨트가 빨리 풀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신동면은 기라성 같이 발전하는데 여긴 묶여서 40년을 지내다 여기 이제 조금.....불평을 많이 해. 이 집 4층 올린 것도 몇 년 안 돼. 1층에서 2층은 다락방으로 올라가게 할 수 밖에 없었지.”

 

의회활동 할 때도 30건을 발의 했어. 신천지 전에 장막성전이 들어와서 땅을 사서 우정병원 지을 적에 병원 지어놓고 수지타산 안 맞으니 형질변경 해달라기에 그거 해주려면 여기 그린벨트 풀어야 한다. 고집 부리고 반대 했어요. 도시계획위원 할 때 공대 교수들이 왔고 나는 원주민이라 해서 의회에서 내가 나가서 오해 받았어. 그때 해제 작업 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내가 오해 받았지. 여기가 대통령령으로 묶은 것을 자연녹지로 풀어 놨는데 그걸 반대해서 우리도 못 풀게 하는걸 반대해서......그린벨트 해제 관련 발의를 30건 넘게 했어. 관문동 쑥쑥 올라가고 해서 더 싸우고 그랬는데.....과천을 대변 한다면 청사 들어올 제 특혜를 받았어야 해. 도시개발 서울시도 아니고 청사 들어오면 위성도시로 발전되어 주민들은 아무 득이 안 된다 말이야. 말죽거리처럼 발전되길 바랬어.”

 

서울시 편입 얘기도 있었지. 김계현 서울시 도시국장이 박정희 정권 아래서 묶어 놓고는 나중에 와서 풀려고 그랬지......평지면 그냥 집을 지을 수 있고 낮은 곳은 메꿔야 하고 하는데 도로가에 닿는 사람은 풀자고 하고 저 끝에 사는 사람은 반대하고.....투기하고 다닌 사람은 풀자고 하고. 여기사는 사람은 풀면 뭐 먹고 사느냐고 반대하곤 했지.”

 

여기 사람들은 땔나무로 생계 이어왔어. 나뭇꾼 아들이라도 근면하고 부지런 하다는 걸 자랑스러워했지. 그 당시도 과천이 인심이 야박한 이유가 지금 국무총리 당시 현감이 남대문만 열어줘서 동대문이나 북대문으로 못 들어오게 해줘서 과천사람들만 장사를 할수 있게 했지. 나무가 기름보다 귀했으니까.....그때 열심히 땅뙈기라도 마련하고 자식들 가르쳤던 거예요.”

 

아버님이 52세에 내가 대학 1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위암 적병으로 못 잡숫고 계실 때 중외제약 포도당 천씨씨 짜리 매일 한 병씩 식사 대신 맞게 드렸는데.....재산 다 쓰고 돌아가시라고 그랬더니 아버님이 동생들 가르치라고 주사 안 맞고 6일 만에 돌아가셨어.”

 

이 자리가 아버지 세간난 자리야. 149번지 내가 난 자리에 살고 있어. 아버지 4형제 내가 3형제.......나이 19에 호주가 되어 동생들 세간 내주고.....한글 모르시던 아버지께서 나 대학교 보낸다고 애를 쓰셨지. 흑석동까지 걸어 다녔지. 과도 모르고 시험만 보고 그만 둘랬는데 땅 안 팔고 그대로 다녔어. 입학하고 그해에 돌아가셨어. 그래 더 못 다녔지.....우리가 어려서부터 체구가 크고 건강했어. 우리 형제들은 농사 쟁기 가래질 힘든 줄 몰랐어. 공부도 못하고 일도 뼈에 배지 못해 15년 농사짓다가 광화문에서 타자학원을 했지. 혁명나고 정치바람에 뭐 좀 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지. ‘대학교 나온 사람은 교석이 밖에 없어그랬는데.....”

 

강신태씨가 사촌형이예요. 강씨네도 삼형제야 큰집에 양자 보내 대학교 보냈지. 김진우가 동창 이예요. 능안말이 다 그 집 땅이었지. 신성재 씨가 할아버지가 신구장이라고 다 그 양반들 제자예요. 착하고 잘생기고.... 신성재 씨 동생이 나하고 동창이야. 형이 묶어 낙양을 같이 다니고....중대부고 갔지. 신성재씨 과천에서 존경 받는 분이었어요. 특전단 출신이야.”

 

광창이는 뜰이 좋아 부자동네야. 범말 땅 가진 사람은 다 부자야. 잠실서 온상 채미 농사 배워 와서 이 동네가 일 많이 했지. 비니루 대신 노루지에 기름 발라 온상 했지. 여긴 농지가 좋아 뭐든 심으면 잘됐어. 채미 수박을 남대문 북창시장이나 서울시청 앞까지 가서 염촌교 다리로 영등포 흑석동으로 나오는 거지. 마포까지 가고 그랬어요. 이버지가 쌀 한 됫박 사서 지게다리에 달랑달랑 매달고 오고 오전 짜리 호떡을 못 사먹고 동전을 물고 입에 와서 뱉으시면서 꿀맛이라고 그러셨어. 요 앞집이 막내 동생 걔가 오학년이었는데 여기 천 평 팔아 안중에 삼천 평 사가지고 돈 좀 벌었어요.”

 

서초동 멍도리에서 중신이 들어왔어. 시골 싫어 장가들기 어려울 때였어. 열심히 한다고 누님이 거기 살았는데 중매하셔서......촌뜨기도 아니고 부모 말씀대로 재산을 없애진 않았지.”

 

“15년 장사 잘 하다가 귀 도둑질 눈 도둑질 어지간해 과천에서 내가 제일 똑똑한 줄 알았지. 타자학원은 컴퓨터 나오기 전에 월남 사우디 보내는데 여자가 못가니까 남자들이 사무직 기술 배워 간다고 해서.....사무직원이 거기서 타자학원... 경기 좋아 시간이 지나도.... 그건 손해 안 봤는데 거기서 회사를 한다고 다 들어먹었지. 농사는 계속 지으면서 광화문으로 출퇴근했어. 대동 5마력짜리 발동기를 지고 다니면서 물 대고 그랬지. 일하는 대로 소득이 되니까 재미있었어.”

 

과천출장소 생기기 전에 4H클럽 만들었다. 당시 동네가 50호였는데 시흥군 대표로 가면 광창마을이 대표로 나가곤 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각종 체육대회마다 상을 휩쓸어 오는데 기여한다. 하지만 안양에 나가면 사정이 달랐다. 안양엔 금성방직팀이 있었는데 잘했다. 송씨가 골키퍼를 맡았지만 9:0으로 형편없이 지고 돌아오기도 했노라고 회고한다.

 

모래 가마 들고 서 있기 하면 1등하곤 했어. 밥 먹을 만큼 있고 하니 세상이 만만했지. 새마을운동 하고 창고도 짓고 동네 길 닦기 하는 때면 일 잘하는 사람이 가서 하고.... 우리 동네는 일꾼을 내보내고 주인은 와서 막걸리 사고 그랬지.”

 

마사회 들어 올 때 경마장 안에 우리 논이 들어 갔어. 고래 논 24등급.....갈현리에 24등급이 있었지. 주암리도 논을 하고..... 부자동네였어. 열심히 일하니까 딴 동네서 싫어해. 처먹고 노상 일만 하느냐고...... 그때는 똑똑하고 그러면 과천읍내 살고 그랬지. 우리가 나면서 휘잡아 시흥군 체육대회도 가고 그랬어.”

 

광창마을 이중계도 우리는 쪽수가 많아 내가 출마하면 유권자도 많으니 내가 되리라고 그랬는데.....어른들이 이중계 들어 올 제 쌀 한 가마 씩 내게 하고 나갈 때는 안 태워주는 거야. 나갈 때 안 주는 게 우리 동네 법이다 그러면서.......내가 시의원 할 때 마사회가 도와줘서 마을회관 짓고 그랬지.”

 

과천초등학교 35회 중에서 용산중학교 2명 갔어. 36회는 4,537회가 60명이 갔어. 6·25때 태어나서 부모들이 자식은 가르쳐야 한다고 많이 보냈지. 그전에 훈육소 생기기 전에는 안양으로 다 같이 다니고 그랬어. 그때 4H 바르게살기 하고 그랬지.”

 

우리 동네는 노름 못하게 뺐었어요.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 노름하는 돈 빼앗아다가 동네 돈으로 쓰고.....화투를 못하게 했어. 술 제사, 노름 못하게 하는 삼무운동하고 그랬어요. 그때는 제사 하면 제물을 남이 한자 괴면 두자 괴고 돈이 흔해 그랬는데 그걸 못하게 했지. 그 근덕이 여기까지 남아 있어.”

 

이장도 동네에서 보면 광챙이 이장 보면 논 서마지기 팔아야 하고 말하곤 했어. 면서기들이 점심때면 이리 와서 밥을 먹게 시간을 맞추는 거야......이장 보면 관문 김○○이장은 이백호나 되니까 면장 월급보다 많은데 우리 동네는 논 서마지기 팔아야 이장 잘 보는 거고......그래서 이 동네 사람들이 지금도 서로 안하려고 그러는 거야.”

 

내가 시의원도 하고 그랬지. 경마장 들어올 때도 싸웠어. 마사회 증축반대를 하니까 오경이가 왜 반대하냐고......그때 이성환 시장이 곁에 서 있다가 여기 시장한테 물어봐야지 내가 알아?’하고 농담하고 그랬지. 마사회 86아시안게임 때하고 88올림픽 때 증축했지. 국가사업이라고 그래. 오경이가 2억 주고 마을회관 짓게 하고 주차장도.....그래서 송의원 아니었으면하는 소릴 하지. 김혜경이가 초대하고 내가 3대 때 이정찬이가 4대째 했지. 일을 쑤시고 다니면서 했기 때문에.....”

이성환 시장이 제일 큰 문제가 쌍굴 터널 2대 때는 못 했어. 3대째 송의원 왔으니 한다는 거예요. 주암리 체육공원, 주차장 할 때도 사람들이 송의원은 하기 싫을 때까지 시의원 할 건데 뭘 그래?’하곤 그랬지.....장군마을도 과천시로 들어올 건 생각도 못 했어. 하지만 표가 되니까......”

 

송씨는 아들 넷 딸 하나를 두었다. 막내는 영국 유학 가서 시민권 받아 살고 있다.

 

1970년 초반 정부는 그린벨트를 발표한다. 자세한 내용도 모르고 장래에 미칠 영향도 몰랐던 과천 주민들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 송씨는 이 법이 과천 발전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될 거란 생각에 적극적인 반대운동에 나섰다. 지금은 그린벨트로 묶이는 바람에 땅 값이 형편없이 낮게 묶이는 바람에 팔지 못하고 지니고 있던 이들에게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한다.

 

송씨가 시의원을 지내는 당시 과천은 도시계획이 만들어지는 시기여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10여 년이 지나서 시의장이 된 윗마을 삼부골 이경수 (2022 현 농협 과천지부 조합장)의원은 만날 때마다 "형님이 현직에 계실 때 다 해놓으신 일들 저희 대에서 마무리 작업하는 거예요"라고 말하곤 했다.

 

똑똑한 사람은 땅 죄 팔아먹고 미련한 사람은 남아 있는 거지......서초동 법원 앞 향나무 멍도리 도시계획 할 때 원주민들이 약다고 코너로 받았지. 개발위원들이. 하지만 땅을 확장할 때 가각정리 하니까 대토 못 받아 보상은 현금보상 받게 된 거야.”

 

마을 창고도 괭맹이, 삼부골 세 부락 쓰라고 양회 5백포 나온 거 다 몰아서 짓고 남는 양회 팔아 스레트 사서 지은 거야.”

 

(2020.11.12. 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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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희씨는 1938년 새술막에서 태어났다. 과천초교 39. 지금 kt 건물자리 근처가 생가 터였다. 전씨는 집 앞 개울에서 친구들과 멱 감고 놀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과천에 살았다. 아버지는 청계에서 분가해서 과천으로 오셨다. 형제는 7형제 중 네 째로 났다. 동생 둘인데, 막내는 죽었고 바로 밑에는 서울에 살고 있다.

 

3학년 때 전쟁이 났다. 중학교는 과천에서 다니다가 영등포로 갔다. 60년대 초 서울로 나갔다가 94년 이사 왔다.

 

“1단지 지금 사는 집이 그땐 공터였는데...... 93년엔 집이 많지 않았지. 고향에 살고 싶어서 2단지 공터가 있다길래 집이 몇 채 있길래 94820일 집지어 이사 왔어. 상도동에서 살다가 이사 하던 날 비가 많이 왔어.”

 

옛날에 과천에서 출퇴근 할 때는 버스가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 세 번 다녔다. 시외버스도 없고 관문에서 안양, 시흥, 노량진 돌아서 갔다. 한 대는 반대로 돌고......겨울이면 차가 고장나면 엔진이 자주 꺼지곤 했다. 꺼지면 내려서 젊은 애들이 스타키(스타트모터)를 돌려야 했다.

 

처음엔 철도공무원이 됐다. 노량진 중계사업부에 근무했는데 60년 대 5만원에 3천 원짜리 집을 얻어 살았다. 당시 월급이 8,000. 그걸 박정희가 임금을 올린다더니 87년도에 12,000, 15,000원까지 갔다. 72년에 그만뒀다. 장학금 보너스도 없었다. 연가 안쓰고 돈으로 탔다. 희망도 없고 자녀교육을 어떻게 시키나 싶어서......

전씨는 자동차학원에서 3주 교육받고 면허를 따서는 기업체 대표 운전기사를 하기도 했다. 이민을 가려다가 월남전이 나는 바람에 못갔다.

 

다른 친구가 찾아와 과일장사 해보자 그래. 중앙선 타고 상주에 내려갔어. 철도공무원은 퇴직해도 얼마동안은 열차는 공짜니까. 사과를 사다 팔았는데 둘이서 열 짝은 가져왔나. 나무궤짝으로 열 짝인가를 가져왔어. 가져온 날이 장날이라고 폭락이네. 거기에다 비까지 왔어. 나중에 이십 짝을 가져왔어. 근데 산지에서 비싸게 가져오면 싸고......장사할 게 아니다. 그만두고 말았지.”

 

상도동에 살았는데. 무허가 벽돌집. 거기가 양녕대군 땅이 넓거든. 거기 막 짓는 거야. 후배가 하나 사라.’ 그래서 거기 살았는데 누가 을지로로 나오라.’ 그래. 갔더니 충청도 사람이 소장이래. 보험영업을 하면 개인사업이라고 하라는 거야. 언변이 없어 못한다고 그랬지. 교육시켜 준다고 그래 보험회사는 다 도둑놈으로 알고 있었는데......철도에서 나와서 동방생명 퇴직금 보험금 달랬더니 하나도 안주는 거야. 만기 되서 정년 되야 준다는 거야. 그래 한 푼도 못 받았어. 그래 도둑놈인줄 알고 있었지.”

 

소장이 여기는 생명보험이 아니고 손해보험이라는 거야. 기업에서 생명보험 하는 여자들은 재수 없어 안 만나고 그래 남자들만 있다는 거야. 회사로 다니면서 명예롭고 좋다는 거야. 안 간다는 걸 며칠 후에 친구와 소장이 다시 찾아왔어. 나가 보니 한 달 다니는 동안에 남들 하는 거 보니까 한 달 수입이 우리 공무원들 1년 봉급보다 많아.”

 

영업은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기업에 전화해서 힘센 기관이라고 하고는 화재보험 들었느냐고 묻는 거였다. 대연각 화재로 2백명이 죽고 나자 정부가 나서서 화재보험을 들게 했다. 수입이 좋았다.

영업 원칙이 첫째가 친인척을 찾지 말라그래 99.9% 거절이래. 화재보험은 전화해서 ○○청인데 보험 들었느냐고 사람 보낼 테니 상담해서 보험 들라고 하는 거지. 그런데 안 되더라고..... 변두리 공장 시흥, 상수동, 문래동 공장 많은 데를 갔지. 갔더니 명함 받지도 않고 던져 버리더라고......”

 

하루는 큰 기업체를 갔더니 벽에 하면 된다고 써 붙여 놨길래 여기 사장은 어떻게 이렇게 큰 회사를 일구셨느냐고 했더니 그 표어를 가리키더라고 저거 보세요그래서 ○○방직 하고 몇 군데를 찾아갔어요.”

 

○○라면 도봉동 공장. 비포장도로에 비가 와서 황토 흙이 묻어 가지고 수위실에 들어가서 ○○ 회장이 보내서 왔다고 했더니 들어가라고 그래. 마당 거쳐 들어가니 입구부터 카페트를 깔았더라고. 흙 묻은 걸 화장실 가서 닦고 말려서 들어갔어. 신을 신어도 되는지도 몰랐지. 처음 봤으니까 누가 밟고 들어가길래 나도 들어갔지. 비서실 거쳐 회장실 가니까 저 끝이 안보여. 으리으리해 주눅이 들어 어깨가 처지더라고. 키가 작은 이가 걸어와. ‘00 회장이 보내서 왔다.’하니까 놀래. 이 회사가 성실하게 커서 가서 얘기하면 도와줄거라고 그랬더니 이회장님이 날 어떻게 아시느냐고 그래. ‘잡아 가지는 않겠지.’ 하고 앉아 있었더니 정부에서 보험 들라기 전부터 공장은 다 들었고 자기 집 들겠다고 경리부장 부르더라고......”

 

○○방직에서도 들고 나서 소개해 주십쇼.’ 했더니 어딜 찾아가래. 호박넝쿨처럼 뻗어가. 큰 데만 한거야. 회사 랭킹 1위였어. ○○화재야. 지금 한화가 ○○화재야. 월말에 수당이 대봉투로 한 가득이야. 얼만줄 몰라. 집에 가져 갔더니 집사람이 도로 가져가라고. 어디서 뭘 했길래 이 많은 돈을 가져왔느냐.’고 그래. 집사람을 영업소장에게 데려가 확인까지 시켰지.”

 

“6대 도시 외에는 보험을 안 받았는데, ○○화재만 영국 보험회사에 재보험을 들었어.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거야. 1년을 그랬어.

남대문시장엘 가니까 의류 같은 데는 한 두평 얼마 안되는데 1, 2억씩 들어. 위층 창고에 가면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원단이 가득해. 77년도에 연납보험료가 2,3백만원이야. 보험금 12억이고 어음도 받았어. 현금이면 12% 떼고 입금 시키는 거야. 거기서 반을 먹는 거야. 3년이면 80%만 줘. 3, 5년 두 가지야.”

 

시흥 갔더니 공단에 강 모 라는 토박인데 공단 입구 삼거리 일대가 그 사람 땅이야. 빌딩 일곱 개를 지었어. 사무실에 갔더니 보험의 보자도 얘기하지 말라고 그래. 가면 고스톱치고 장기바둑 두고 그러길래 한 달에 2,3번 들러 다방에다 커피를 다 돌려. 1년 다니니까 노인네가 물어 봐. 불이 날 뻔 했었대. 거기서 6개 건물을 했어.”

 

동대문에서는 제일 어려운 게 호수가 있는데 찾아가질 못하겠어.

그래서 보험 받을 때 가보면 책상 만한 금괴가 있는데 위에 뚜껑 열고 돈을 꺼내서 세어 가라고 그래. 서서 영수증 끊어주고. 청약서에 사인도 안 받았어. 한 달 동안 코피가 나도록 돌아 다녔어.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몰랐어. 날아다니는 것 같았지.”

 

그렇게 1년 넘었는데 관리소장이 하고 싶었어. 5년을 하면 시험 봐서 영업소를 내준대. 총무부장을 만났어. 그때 마침 소장이 공석이야. 대리나 과장을 타사에서 스카우트 해주느니 나 대리만 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펄쩍 뛰어. 부장과 술 먹다가 정종을 끼얹었어. 사람을 몰라본다고. 그랬더니 중부영업소 전병희는 공갈협박을 한다고 소문났어. 영업이사가 듣고 불러 이력서와 사진을 가져오래. 그래 을지로 허바허바 사진관엘 갔어. 빠르면 이틀 아니면 삼일 걸려. 이틀 후에 가져가니 사업계획서를 써오래. 7,80명 되는 영업소 운영 계획을 알리가 있나? 먼저 소장이 면목동 살았어. 집에 가서 만나서 코치를 받아서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갔어. 그걸 보더니 많이 해봤나봐.’ 그러더라고. 대리를 준대. 사원 320호봉이 말단이야. 그래서 늙어 정년 할 때 대리 다느냐고 지금 안주면 그만 둔다고 했지. 과장 주려면 돈이 많이 들고 하니까. 310호야 사령장이. 타사로 간다고 그랬더니 결국은 1년 뒤에 대리를 달아 주더라고....”

 

전국에서 항상 상위권이야. 회사에서 나 모르면 간첩이야. 그렇지만 소장이 되니까 내 수입이 줄어드는 거야. 원래 내근직은 영업하면 안 되는데 나는 영업을 겸해서 했어. 토요일이면 간부들하고 어울렸어. 주말 저녁마다 같이 놀면서도 실적은 상위권이었지. 전국 소장들 분기별회의 가면 사람이 반은 줄어 3,4개월 실적부진이면 아웃이야. 직원들이 잘해줬어. 잘 먹였어. 운영비 나오면 다 썼어. 그리고나서 어려워지면 직원들한테 말하면 목표를 맞춰주고 그랬어.”

 

“1978년에 6백 평을 평당 5천원에 동생과 같이 샀어. 7,8년 뒤에 가락시장이 들어선다고 그래. 수용된대. 팔아서 나누자는데 땅을 산 사람이 ○○부 국장 하던 삼일빌딩 상임이사라 그래. 그 부인이 해약해달래 중도금 까지 받았는데 돌려 달래. 사정하다 안 되니까 남편을 만나달래. 갔더니 키 작고 베트콩 같은 사람이 내게 부동산 투기하는 사람이냐고 그래. 그 옆에 앉은 사람이 조사 좀 해봐야겠다며 더 이상한 분위기를 잡아. 모 기관 사람이라는거야.

그래서 그럼 땅 산 부인도 투기 아니냐고 당신네 청장이 나 같은 사람 내사하라고 그랬느냐고 쏘아 붙이고 일어서 나왔어. 나중에는 중도금 절반을 돌려주기로 했지. 보지도 않고 주소만 가지고 사고팔았던 시대야. 그 돈으로 몇 군데 땅을 사고 팔았지.”

 

93년에 55세 나이로 퇴직 후에는 촉탁직으로 근무를 1년 더 할 수 있었다. 3년이 지나자 회사는 촉탁해지를 통보한다. 전씨는 영업 1위의 기록을 앞세워 사장과 담판을 지었다. 모두 5년간 촉탁직으로 일했다.

 

과천문화원이 별양동에 있었고 박영재 초대 원장 계실 때 초대 멤버야. 향우회 초대회장 하실 때 경찰서 옛날 시청 자리서 발족했지. 나까지 9명이 발족했지.”

 

(2020.11.9. 과천문화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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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오복씨는 1938년 과천 광창마을(광챙이) 태생이다. 지금 광창마을에서 산 쪽으로 올라가 경마장 담장 안쪽에 마을이 있었다. 11녀 외아들이다. 위아래 3대가 독자로 아들이 귀한 집안이다. 송씨가 태어나자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가 생존해계셔서 오복五福이라 이름 했다.

 

1921년생이셨던 어머니 이숙자 여사는 16세에 시집오셔서 18명이나 되는 식구들을 농사를 하시며 뒷바라지 하셔야했다. 1985년 경기도지사 효부상, 1990년 과천시민대상 효부상을 받았다.

 

증조부께서 93세에 증조모께서 67세에 조부께서 59세에 조모께서 93세에 부친께서 58세에 돌아가시면서 초상을 치르는 일이 큰 행사였다.

 

송씨도 서울시장 효행상을, 2녀 효남도 효행상을 수상해 3대가 효부, 효자, 효녀상을 받았다.

 

당시 국민학교 입학은 시험을 봐야했다. 이웃에 사는 고모네, 이모네 아이들과 함께 시험을 치렀는데 송씨만 붙어서 입학을 했다. 한내를 건너서 학교를 가면 조선기와로 지은 이층집을 객사라고 불렀다. 아랫층은 훤하게 트인 건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6·25전쟁이 나자 송씨네도 피난을 가야했다. 전쟁 첫 피난에는 길이 막혔단 소리에 나가질 못했다. 1·4후퇴 때는 이불을 지고 평택까지 가야 했다. 평택을 지나 아산 근처에 가서는 바다를 걸어서 건너가야 하는데 이불을 진 소년 송오복을 어머니가 업고 뻘을 건너다가 나뒹굴면서 뻘 흙투성이가 되어서 몸만 빠져 나오기도 했다.

송씨는 과천국민학교를 37회로 졸업한다. 중학교는 흑석동 낙양중학교를 갔다. 한내를 건너다니기가 힘들었다. 남태령을 건너려면 가끔 커다란 세퍼트 같은 큰 개가 나타나곤 했다. 무서워서 어른들께 어째야 좋으냐고 물어보니 가방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천천히 걸으라고 일러 주었다. 그대로 해보니 한참을 노려보던 큰 개는 물러서더란다. 나중에 보니 개가 아니고 늑대였다.

 

가난한 시골 살림에 월사금이 자주 밀렸다. 부모님 모시고 오란 소리에 아버님이 과천 안골에서 흑석동까지 불려 가시기도 했다. 휘문고에 입학했다. 서울대 공대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서울대는 5대사립학교 출신에게만 가점을 주었다. 부득이 한양대 공대에 입학했다. 2학년을 마치고 돈 때문에 더 다니지 못했다. 군에 가서도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상사의 부탁으로 그의 집에 기거하면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1960년 경기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1965년 지적측량기술원을 수료했다.

 

김명자씨와 1967년 결혼했다. 송씨의 외가가 성남이었는데, 외가에서 참한 색시감이 있다며 선을 보러 오라고 불렀다. 과천에서 외가인 현재 성남비행장에 들러 도착한 곳은 지금 상대원 공단이 있는 산기슭.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걸어 들어가자 신랑감이 왔다며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처갓댁 식구들이 송씨를 반겨 맞았다. 낮 두 시 경이 되어 도착하니 시장하겠다며 밥상을 내왔다. 식성 좋게 밥그릇을 비우자 장인될 어른께선 신부될 아가씨에게 "네 밥이라도 덜어서 주어라"하셨다. 그 전에 신부댁에선 과천 본가를 다녀 가셨다. 살림이 크고 일이 많아서 힘들겠다고 걱정들을 하셨다 한다. 한 달 여가 지나 외가에서 어째 말이 없냐? 싫으냐?” 물으시기에 송씨는 아녜요. 결혼 하지요.”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그 길로 사주단지를 사다가 보냈다. 결혼은 종로5가의 예식장에서 했다. 주례는 연세대 부총장이신 과천 안골의 목사님이 서셨다. 당시 송씨는 안골교회 청년회장을 지냈었다.

 

제대 후에 과천 관악중학교(후에 한일중고등학교) 교사로 3년을 지냈다. 재단이사장과 종친이었다. 당시에는 교사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학교에선 송씨를 불렀다. 처음에는 수학을 가르쳤고, 나중에는 물상 같은 과학과목을 가르쳤다. 그때 제자들 중에는 아직도 스승의 날이면 식사대접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한 제자는 S생명 간부로 성장했는데 찾아오면 들어 준 보험이 3개나 됐다. 3년쯤 지나 이사장과 교장이 다투면서 학교를 그만뒀다.

 

그길로 기술직공무원시험 전문학원에 등록해 6개월 만에 자격증을 따고 1965841의 경쟁을 뚫고 서울시 공무원이 된다. 기술직으로 공직에 입문한 송씨는 서울시청에서 지적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지적계장, 과장을 거치며 지적과련 논문을 발표하고 공무원 창안상을 받는 등 일가를 이루었다. 서울시 공무원교육원에서 9년을 강사로 후진들을 양성했다. 지적관련 승진시험 감독이나 평가관을 하기도 했다. 한국지적학회 이사를 맡기도 했다. 서울시 역대 시장들의 표창에 이어 노태우 대통령표창과 김대중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송씨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재능이 있다. 휘문고를 졸업한 동기들이 사회에 나가 자리를 잡고 안부가 궁금해지면서 동창모임 휘3회가 만들어졌다. 산행을 가는 동안 차 안에서 동기들에게 들려 줄만한 좋은 글들을 모아서 유인물을 만들어 나눠주었다. 반응이 좋아 나중에는 책으로 엮어 내기도 했다. 그렇게 26년을 이어온 동기회는 2020년 코로나19로 정부가 친목산행 등의 모임을 금하는 조치를 취하자 더 이상 산행을 이어가지 못한다. 그때 돌아보니 남은 동기도 7명에 불과해 그저 매주 화요일에 밥이나 함께 먹기로 했다.

서울시 중견간부로 이름이 날 무렵 고향 과천에서 그를 불렀다. 2006년 과천농협 조합원수첩을 보면 자료정리에 열심을 보인 그의 노력을 볼 수 있다. 전 조합원의 주소와 연락처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다. 지금은 개인정보보호 운운하지만 당시로는 조합원들에게 요긴한 자료였다. 과천향우회가 생기면서 사무국장을 맡았다. 나중에 과천시민회가 된 과천향우회는 과천이 시로 승격되면서 중요한 구심체가 된 모임이었다.

과천향우회의 큰 일은 해마다 치르는 체육대회를 후원하는 일이었다. 마을 가장 큰 행사였던 체육대회는 한내를 두고 둘로 나뉘면서 반목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 갈등이 송 사무국장을 힘들게 했다.

 

이 무렵 광창마을을 터전으로 한 송씨네 문중일도 맡아야 했다. 종친회장이 된 송씨는 기존의 한문투성이 족보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사진기를 들고 전국으로 다니면서 가문을 찾아 누빈다. 송오복 종친회장이 1981년 발행한 [광창부락 회덕(은진)송씨 종친회 명부 (내외거주 완결판)]에는 가족사진이 먼저 보이고 그 아래 식구들의 생년과 관계를 넣은 신식 족보가 있다.

 

자식농사도 잘됐다. 딸 셋 아들 하나를 두었다. 모두 서울대, 이대, 숙대를 나와 대학교수, 금융기관 임원 등을 지내고 있다.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닌 아이들은 결혼을 하면서도 목돈을 내놓기도 했다. 팔순 되던 해 결혼기념일에는 자식들이 해외여행권을 내미는 바람에 비행기를 탔다. 송씨네 부부가 맞벌이하는 딸을 대신해 기른 손녀딸 김성이 양은 중학교 1학년이 되자마자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 손녀가 다닌 옥스퍼드 하이스쿨 공원에는 학교를 빛낸 공을 기리는 돌비석이 서 있다. 김양은 곧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송씨는 이렇게 가정을 지키고 아이들을 키워낸 아내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며 산다. 딸 셋을 낳는 동안 병원에도 못가고 집에서 할머니가 산후관리를 해 준 게 전부였다. 아들을 낳을 때는 공무원이 되어 과천을 떠나 신길동 살 때였다. 한 밤 중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해 10분 만에 낳은 아이가 아들이었다. 그렇게 종손을 얻었다.

 

송씨가 일생 잘 한 결정으로 꼽는 건 퇴직연금이다. 199834년 근무하고 퇴직 무렵 다들 목돈으로 퇴직금을 탔는데 나중에 보니 자식들에게 빼앗기거나 장사라도 하겠다고 나섰다가 털어 먹은 이가 대부분이었다. 송씨는 퇴직금 절반은 일시금으로 타고 절반은 연금으로 신청했고 그것이 노후 생활자금으로 긴요하게 쓰인다.

 

송씨 할머니는 항상 손주가 돌아 올 시간이면 대문앞에 나와 기다리셨다. 79세 되시던 해에 기다리시다가 넘어져 엉치뼈가 부서졌다. 워낙 고령이시라 포기하자는 걸 신씨가 신대방동 한독병원에서 40일을 입원하신 끝에 단장을 짚고 퇴원하실 수 있었다. 그때 정성으로 간호 해 준 간호사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다. 당시 간호사나 은행원은 결혼을 하면 퇴사해야 하는 게 보통이었다. 송씨는 김간호사 이력서를 받아서 모 구청 보건소에 넣었다. 나중에 김간호사는 과장으로 정년했다.

 

송씨는 할머니를 업고 설악산 금강굴을 올라가 부처님께 절하고 약수를 드셨다 제주도에 가셔서는 말도 타셨다. 93세에 돌아가셨다.

 

아내와 남쪽 여행을 가던 길에서 만난 청년을 차에 태워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7번국도를 따라 여행하며 숙식을 함께 했다. 나중에 보니 그는 큰 병원 의사였다. 청년의사는 나중에 커다란 상자에 옷가지와 여행용품을 가득 담아 서울시청으로 찾아왔다. 이후 그 의사는 송씨가 보내는 환자라면 더욱 정성을 다해 치료해주고 송씨의 부탁으로 여러 사람을 취직시켜 주곤 했다. 송씨는 좋은 일을 하면 돌아 온다고 믿고 산다.

 

(2020.11.5.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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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마골이란 이름도 내가 지은거야. 처음에 하1리였었지. 노인회장 할 때......행운길이란 이름은 집사람이 이 길 다니는 사람들에게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다 해서 행운길이라 지었지.”

 

서상희 씨보다 6년 아래인 조씨는 남태령 미군부대 자리서 두 집이 살았다고 기억한다. 두 집 다 밤나무를 길렀고 집이 미군부대로 수용되면서 삼거리로 나와 조씨의 형이 묵집을 했다.

 

대로변에는 전부 가게였고. 새마을금고 한 모씨가 상남소리사라고 라디오가게 했고......그 옆에서 이 모 회장님은 구멍가게를 했고.....또 그 옆에 호수미용실이라고 해서 미용실이 있었고......그 옆에는 형님하고 하던 남강부동산이 있었어.”

 

시흥군 과천면 하1리에서 1937년에 났어. 2리가 뒷골 3리가 광창마을.......5남매 중 막내야. 아버지가 천안 풍세면에서 과천으로 오셔서 터 닦고 밤나무 농사하고.....일본 왜정 때 비행기가 뜨고 그러면 지하로 숨고 그러던 기억이 나. 6·25 때 그 인민군이 과천국민학교로 들어가는 걸 보고 비행기가 폭격을 해서 국민학교가 탔어. 그 전에는 강습소가 있었구.....국민학교는 전쟁 후에 다시 지었지. 초등학교가 커서 우면동, 양재동, 말죽거리, 사당동까지 과천국민학교로 왔지. 졸업하고는 농사를 지었지.”

 

나무장사 많이 했지. 새벽 1시나 2시에 지구 사당동 가서 팔구 돌아오면 한 2,3시 되면 어머니 아버지가 해 놓으면 또 지구가서 팔구......우리는 밭농사만 지었어도 먹고 사는 게 걱정이 없었어. 콩 팥 수수 조 이게 많이 생산 되니까. 그러니까 가을에는 밤 팔아서 쌀 사서 먹고 그랬지. 밭농사 많으니까 잡곡이 많아 가지고 지내는 건 걱정 없이 지냈지.”

 

“21살에 6사단 금와 사창리에서 군대 생활을 했지. 제대하고 29세에 26살이던 김혜자와 결혼했지. 형수가 천안 광덕면 색시라고 소개해줬어. 아들 셋, 딸 하나. 큰 아들은 낳자마자 죽고.”

 

술집이 이 동네 색시두고 술장사하는 집이 한 일곱 여덟집 됐었어요. 양색시도 집집마다 둘 셋씩은 다 달았지. 지금 도로 위에 술집 이쪽으로 있었고....수원옥이 있었고. 도로 위쪽으로 해서 본수원갈비 쪽으로다가.....쭈욱 내려가면 네 집이 있었고.....빅토리아오토바이 자리가 원일여관이라고 그 여인숙 같은 여관이 있었고 그 다음에 지금 이 모씨네 집 자리가 댄스홀이 있었고......그때 홀이 두 군데가 있었어. 등기소 자리 그쯤에 약국도 하나 있었어. 술집 맞은 편이 삼원여객 종점이었지.”

 

읍내보다 미군부대 있고 그러니 더 번화했지. 사당사거리는 장마만 지면 물이 들어와서 배를 타고 나가서 이수 있는데로 나가서 노량진으로 가고 그랬지. 선바위는 벌판이었고......안양경찰서가 하나있고 과천파출소가 있었는데 지서. 지금은 경찰서가 생기구 그랬지. 그러니까 과천 우면동 막계리 일대에 술집이 많고 여기 색시들이 많잖아? 술 먹으러 오면 우리한테 승인을 맡아야 먹고 가고 그랬어. 우리 술 한번 사 주고 그 다음에 술 먹고 놀러 가고.....그러니까 여기 사람들 건드리질 못 했어. 막계나 우면동, 갈현동 쪽에서 건드리질 못했어. 서울을 가려면 여기를 거쳐야 가니까 건드리질 못했지.”

 

지금 요기 서울로 가는 길에 지금은 도로를 했는데 그게 다리가 끊어졌단 말이야. 홍수가 나가지고. 집들이 여기는 괜찮은데 이 아래루는 많이 떠내려가고...... 어렸을 때 학교 갔다 오다가 보면은 장마가 져가지고 돼지가 떠내려가서 개울에 죽어서 가라앉아 있는걸 보구 그랬거든....그러니까 지금 과천에서도 중학교쪽 올라가는 길에 하천이 있어 그 하천가에 있었던 집들은 다 떠내려 가고 그랬다구 홍수에 비가 많이 와 가지고.....”

 

우리 형님이 사냥을 많이 하셨어. 서울서 포수들 와서 몇 일 씩 묵고 그랬어. 그 미군부대 자리 살 적에.....그러면 산돼지 같은 것도 잡아가지고 그랬거든.....”

 

조씨는 집 뒤 산에서 돌을 캐다 팔기도 했다. 막계저수지가 생기고 양재천 물길이 달라지면서 장마가 지고나면 모래가 쌓였다. 조씨는 면장에게 말하고 그 모래를 내다 팔았다.

 

지금 사당동 가면 이수교 예술인 마을이라고 있어. 그 축대를 다 내가 쌓은 거야. 거기 모래 자갈 돌을 내가 다 들이대가지고 차루......”

 

미군부대에서는 하루는 보니까 휘발유 통이 철조망 바깥에 죽 나와 있더라고. 휘발유가 들었나 안들었나 확인을 해야 될 거 아니야? (손등을 가리키시며) 이 흉이 그냥 있잖아 지금 그때 드럼통이 폭발해가지고 다친 거야. 드럼통에 휘발유가 폭발하니 소리가 좀 커. 부대에서 미군들이 죄 뛰어나오고 사람 손이 피가 막 흐르고 피바다가 내가 아주 난리가......부대로 데리고 들어가 의무병한테 치료를 시키고 그때부터 미군부대를 내 집처럼 들락거린 거야. 미군들이 집에 와서 치료해 주고 그 바람에 6.25때 총 맞은 환자들 여럿 고쳐줬지.”

 

1987년 조씨는 주암리 농업용저수지에서 유료낚시터를 연다. 마을에서 회의를 해서 외지인에게 세를 주는 것보다는 조씨가 낫다는 결론을 낸다. 좌대가 80개나 될 만큼 크고 장사가 잘됐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이들이 그린벨트법 위반, 환경법 위반 등을 이유로 허구헌날 고발을 해서 관에서 나와 철거를 하고 철거반이 돌아가면 비닐하우스를 다시 짓고 영업을 하는 일이 반복됐다. 1990년 중반 손을 뗀다.

 

(남광부동산을 하실 때는 어떻게 돈을 버셨어요?)

 

땅이 하나 나오지? 나오면 전화를 해 서울로. 좋은 게 있으니까 빨리 돈 가지고 와라. 복부인들이 차에다 돈을 싣고 나와. 그래 놓고 영수증 써 달라면 영수증 써 주고 돈 받을 바에는 무슨 돈을 받느냐. 빨리 가지고 가라그렇게 배짱을 부리고.... 그러면 돈 보따리 그냥 놓고 가. 그럼 돈을 받아서 트렁크에다 운전수한테 넣으라고 그렇게 댕기면서 그냥 다 쓰는 거야. 그냥 쓰고 돈은 다 줬는데 땅을 사 줘야 될 거 아니야? 그러면 땅주인 불러갖고 예를 들어 만 원짜리면 만 오천 원짜리 써 가지고 계약서만 보내는 거야. 그럼 얼마 줬다고. 그러고 평당 예를 들어 5천 원씩 그때 돈 5천 원씩이면 땅 한 평에 만 원 할 때 컸다고. 그렇게 해가지고 억수로 벌었어.”

 

그래가지고 한참 계속 부동산이 잘 되는데 차를 두 대를 가지고 용산에 하나 사무실 삼거리 하나 과천에 하나 세 개를 두고 차를 두 대를 가지고 왔다 갔다 했는데.....우리 차 운전수 친구가 사장한테 얘기 했으니까 나가자하고 차를 끌고 나간 거야. 밤에 퇴근 시켰는데 영동 테헤란로에서 15톤 트럭하고 들이 받아가지고 즉사를 해 버린 거야. 동네 사는 놈인데....그러더니 안 되기 시작하더라고....그래서 두들겨 엎어 버렸지.”

 

자식교육에 공을 들인 조씨는 앞 못 보는 자식을 미국에 유학보내 미시간대학에서 박사까지 만든다. 귀국해서 대구대학교 교수로 있다. 막내는 IT개발자로 있다.

 

난 후회라는 건 하나도 없어. 그저 멋있게 벌어서 멋있게 썼구. 멋있게 살아서 후회라는 건 없어. 집사람한테 서운하게 한건 있지만 가정에 소홀하지는 않았어.”

 

따지고 보면 그래 지난 일에 돈 잘 벌고 좋은 시절을 헛되이 보냈다는 생각은 안 해. 후회는 없어. 후회 없이 살았고 남한테 손가락질은 받았을망정 내 가족들 한테는 최소한 하느라고 했어. 어디 나갔다 들어오면 쌀독에 쌀이 있나 연탄이 있나, 그것부터 해결해 놓고 나가서 돌아다녔지.”

 

(2019.10.11.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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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아버님이 과천에 처음 정착하실 때 세 집인가 네 집 있었대. 그때 오셔서 지금이 제일 융성한 거지. 지금 백 여 세대가 되잖아요. 우리 집안에서 박사도 여럿 나오고, 또 내 조카애는 지금 외무고시 합격해 가지고 외국에 나가 있잖아. 자손들이 지금 많이 활동하고 있어. 공무원도 있고...... 전에는 전쟁 나면서 먹구 살기도 어렵고 그 과정을 거쳐서 지금에 온 거지. 자식들도 맘대로 공부하고.....그때가 아무 것두 없을 때야. 먹을 것도 없구......”

 

여기가(광창마을) 송씨 집단취락지역 이예요. 과천서 송씨마을 물어보면 우리마을이예요. 은진송씨. 대전서두 우리 여기 세보들을 알구 있어요. 우리가 9대야. 9대조 할아버지가 요 뒤에 우리 선산이...... 경마장 있는 데가 우리 선산이었어요. 경마장에서 수용하는 바람에 이천 마장면으로 이장을 했지요. 경마장 들어올 때니까 80년도일거예요.”

 

(송억산 : 우리 종뫼 땅 한 삼만 평이 거기 들어갔어요. 거기서 이장 했어요 덕평으루)

 

(광창리 대동계를 소개해주세요.)

 

“6·25 나 가지고요. 9·28때 인민군들이 우리 산에......거기다 진지를 구축했어요. 우면산하고 우리 산하고 구축을 해 가지고 인천에서 상륙하는 그 유엔군 있잖아요. 여기서 교전이 벌어졌어. 마을에 한 10여 채가 불이 났거든요. 타버렸어. 그러고 나서 이제 생활을 하려니까 어렵지 않아요? 집이 10여 채가 타버리고 남은 사람들도 누굴 도와주고 그럴 수 없었어. 어려웠다구요 살기가......거기다가 이제 설상가상으로 언제 전쟁이 여기서 일어나 가지고 불이 타 버렸으니......그 사람들은 숫갈 하나두 못 가지고 나온 거야. 그래서 이제 동네에 어른들이 이대로 우리가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래서 만든게 이 이중계를 조직을 한 거예요. 정말 역사가 깊은 얘기예요.

이 명단이 이중계에 대한 계약이 다 있고 요게 이 계원명부가 있어요. 이 사람들이 만든 거예요. 노인네들 44분이 이렇게 작성을 한 거예요. 이중계를 만들어서 무슨 사업을 했느냐면 그땐 돈이 없잖아요. 그때는 은행이 없었어. 전쟁 통이고.... 그래 누가 병이 나든지 애들이 학교를 가도 돈이 없으니까. 그 당시에는 장리쌀 같은 것도 많이 있었잖아. 그거 가지고는 안 되니까......이 분들이 돈을 각출도 하고......마을에선 예를 들어서 소를 팔잖아요. 그럼 흥정하는 사람이 있잖아. 그럼 거 수수료를 가져가잖아? 그럼 거기서 무조건 10% 떼는 거야. 기금으로 내놓기로 해. 그게 명단이 다 있어요. 그리고 인제 채소밭 채소밭도 인제 팔게 되면 수수료를 얼마를 떼. 그 돈을 모은 거예요. 모아 가지고 10월 음력으로 1020일 날이면 매년 정기총회를 여는 게 여기 나와요. 그래 가지고 전에는 저쪽에 초가집으로 된 회관이 있었어요. 거기서 회원들이 다 만나. 만나 결산도 하고......”

 

그러고 돈을 이걸 갖다가 이제 어려운 사람 있으면 이제 빌려 주는 거예요. 차용을 해 주는데 보증이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냥 떼 먹으면 안 되니까. 꼭 두 사람을 보증을 세워 가지고 돈을 갖다 쓰는 거예요. 그때 돈이 귀해서 구할 수가 없으니까 안 그래도 그 돈을 쓰지 못해서 애쓰는 거야 그래 가지고 늘렸어. 돈을.....그게 하나의 지금 뭐 마을금고처럼.....그렇게 해 가지고 주민들을 자율적으로 이렇게 해결해 나간게 이중계 거든요. 내가 이거 이중계 수필을 쓴 것도 있어요. 금년에 책으로 내가 지금 내려 그러는데.....수필집을 지금 준비 중에 있는데......거기에 이제 정신이 담겨있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하고 마을도 많이 변했다. 마을사람 몇이 이중계를 보전하지 않으면 없어지겠다는 생각에 이어나가기로 했다. 시작한 44명의 마을 주민들 자손 중에 외부에 나간 사람들에게도 알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음력 1020일이면 총회를 하고 제사를 지낸다.

 

이중계비를 보면 계자가 이상하죠? 지나가다가 이게 무슨 계자냐고 물어보러 들어와. 이거는 이 분들이 작성을 할 적에 그게 볏단계예요. 뭐 없으니깐 농사 많이 짓는 사람은 볏단을 많이 가져오고 적은 사람은 적게 가져오고 이래 가지고는 그거를 갔다가 이엉을 엮어서 지붕도 만들고 또 땔감으로도 쓰고 그래서 볏단계를 쓴 거예요. 이거는 사연이 있어요. 나도 이거 좀 이거 찾아봤어. 옥편을 찾아보는데 안 나오는 거야. 계자가 이거 이거 이거 초서로 흘려 써서 보기가 어렵지 않아요? 볕화변이야. 초서로.....이게 볏단계자야. 왜 이 양반들 썼나 했는데.....어렸을 때 보면은 노인네들이 나와서 이엉을 엮어서 지붕을 잇구 그러고 나서 이제 음력 20일 날 인제 제사 지내고 마을 잔치 하고 돈 가지고 간 사람들 돈 또 상환하고 그 다음에 또 갈 사람 가져가고....빚을 가지고 갔는데 갚을 능력이 없는 거야. 그러면 없어져 버려 빚진 사람이. 그럼 노인네들이 보증서는 사람을 갔다가 빨리 가져오라 호통을 쳐.....그렇게 해 가지고 만든게 그 돈 이잖아요. 그 끄트머리로 남은 돈 있잖아요. 그 돈을 가지고 옛날에는 상여 같은 거 있잖아. 마을 밖에다가 놔 두고 놓을 데가 없어가지고 마을에서 땅을 100평을 샀죠? 그때? 100평을 사서 거기 창고를 지었어. 그래가지고 동네 북같은거 그런 걸 갖다 놨어요. 그리고 바깥에 상여를 놨어요. 그렇게 보관해 온거야. 근데 이게 또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그 100평 산데 또 경마장 옆에 있거든 옛날에는 외진데야. 집두 없구 외진덴데....그러니 거기다 상여를 놓은거 아녜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경마장이 생겨 가지고 거기가 요지가 되버렸어. 없던 도로가 확장되면서 땅이 한 30평 들어갔지요? 그리고 도로가 생긴 거지. 그걸 창고로 지금 세를 놨어. 그래 한 100만 원 정도 세가 들어와. 그 돈 가지고 이제 제사도 지내고 그래. 그 자리가 함지박가든 옆이야. 거기 창고 하나 있잖아? 그거를 이 분들이 하던 끄트머리야. 그 돈을 가지고 마을에서 땅을 사 가지고 이렇게 마을에다가는 상여를 놓을수가 없으니까 거기다가......”

여기 이건 차용증이야. 도장 찍고 차용하고 다 갚고 나면 인제 표 하고.....그 당시 세 사람이 동네일을 봤는데 이 김 모 씨가 지금으로 치면 회장이겠지. 여기 이게 문서고 또 색상은 인제 살림꾼 같아 내가보니 살림꾼 같아. 여기 송승준 씨가 우리 아버지예요. 어렸을제 생각해보면 가을 무슨 제사 지낼 적에 보면 이 양반이 저쪽 사셨는데 우리 집에 오셔서 아버지와 의논을 하시던 기억이 나더라구.”

 

1970년대에 송씨는 방산시장으로 출퇴근하며 장사를 했다.

 

서통화학이라고 있어. 옛날엔 거기가 가발하고 그랬어요. 서울통상이라고 거기서 잠깐 내가 있었어. 그러다보니까 회사생활하는 것보다 장사 하는게 낫겠더라구. 그래서 서통화학에서 대리점을 제1호로 가지고 나왔지. 방산시장에 70년도에 한참 경기가 뻗어 나갈 때, 내 서른 아홉인가 서울통상에서는 테이프, 셀로판지 이거 생산을 하고 그 물건을 총판 하는데 있었지. 내가 좀 있다가 총판이 부도가 났나 어떻게 돼가지고 서통화학에 우리 직원들이 회사 가서 일을 했었지. 가만히 보니까 내가 회사에 있어 봐야 발전이 없을 것 같아. 비전이.....그래서 힘은 들지만 위험을 안고 인제 방산시장에 가서 대리점을 열었지. 그게 1호야 서통화학 대리점. 그때는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로 참 좋았지. 미처 생산도 못하고....전국으로 다 이제 물건은 나가고 삼성 현대 큰 회사에 다 조금씩은 납품을 했다고......박스테이프, 셀로판테이프 이런 거.....그때는 없었어. 전부 수입해오던 거를......그런데 수출이 늘어나니까 물건이 없잖아....근데 그 기술이 없어가지고......조금 돈 벌구 그래서 봉고차 하나 끌구 댕겼죠. 그때두 그 봉고차가 드물었어요. 여기 시골에는......그렇게 아이엠에프 날 때 까지.....아이엠에프 나니까 하루 아침에 그냥 막 줄줄이 망해 나가는데 무섭더라구. 하루아침에.....”

 

그때는 전쟁통 아니야? 우리 초등학교 6학년 때 전쟁이 났잖아? 그리고 과천초등학교가 타 버렸어. 수업을 못 하니까 향교 명륜당에서 우리가 이제 수업 마지막 수업을 했지. 그래가지고 국가고시 제1회야. 우리가......안양중학교 밖에 없었어요. 안양중학교가 학생들 연합소야. 여기서 걸어 다니는 거야. 30리가 넘어. 안양중학교가 안양에서도 박달리 양짓말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상당히 거 안양서도 멀다고......여기서 걸어 다녔어요.”

 

옛날에 팔을 다쳐서 병역등급 병정을 받았어요. 어렸을 때 마차에서 떨어져 가지고.....그땐 뭐 병원이 없고....왜정때니까.....6,7세때 그런거예요. 마차에서 떨어졌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논에가서 일하시고 할아버지가 계셨나봐. 할아버지가 널판지 대고 버스나무 껍데기 벗겨가지고 척척 감아 놓은거야. 그때 제대로 뼈가 안 맞춰져서 나중에 내가 20세가 넘어서 백병원에 가서 다시 이거 수술을 받았다고....수술을 받았는데 시원찮더라고..... 너무 늦어서.....”

 

안양으로 학교를 댕기다가 서울 서운동 사는 이모가 있었는데, 나를 데려가서 대동상업에 편입을 시켜줬어. 거기서 고등학교 나온 거지. 그때 취직도 안 되고 대학은 능력이 안 돼요. 돈도 그렇고 먹고 살기도 어렵고......내가 대학을 가게 되면 좀 동생들이 공부를 못 하잖아요. 육남매...... 부모들이 얼마나 고생이 심했어요. 광주리에 뭐 이고 팔러 다니고 아버지는 땔나무 하러 다니고......그래서 고등학교 나온 거 가지고 직장 생활하다가. 또 집에 와서 농사도 하다가 70년도 되고 기업들이 막 일어나고 서통화학 총판을 하게 된 거야.”

 

퇴직하고 나서 사회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웠다, 과천문화원에서 중국 황하유역 문화기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 기행문을 컴퓨터로 썼다. 그것이 사회복지관에 발행한 [시니어헤럴드]에 나고 편집위원을 맡아보게 된다. 이어 과천시 실버기자가 됐다. 그렇게 쌓인 글들이 인터넷 카페에 올랐다. 그리고는 월간세계문학을 통해 등단하게 된다.

 

(2019.5.13. 광창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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