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자살은 자기 몸을 의지대로 못 움직인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문학사가들은 헤밍웨이의 자살을 종군기자로 작가로 현장을 지키던 사람이 노쇠해지면서 자기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기 때문에 자살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혈관이 딱딱해지고 막혀서 하지가 마비되고 종내는 썩어가기 때문에 제 발로 설 수도 없는 노인, 후두암으로 목안의 종양을 긁어 내면서 음식과 공기가 식도을 내려가서 위장으로 가는지 폐로 가는지를 구분하는 기능을 잃어서 음식을 삼키는 법을 배워야 하는 노인을 지켜 보았다.
삶에 대한 애착은 젊은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 평생 주변에 폐만 끼치며 산 노인도 주위의 눈총에도 생명줄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누웠다가 잠들면 깨지 못할까봐 앉아서 꾸벅꾸벅 졸지언정 눕지 못하는 것이었다. 뒤늦게 알아채고 “주무세요. 제가 곁에서 안자고 지켜볼게요”했더니 그제서야 잠에 드는 모습을 보았다. “행여 병이라도 들어 자리에 누우면 일부러 기계를 써서 생명을 연장하려 하지 말아라”고 말했다는 어느 스님은 정말 대단한 도를 깨우친 사람이었다.
니트로글리세린.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순간 혀밑에 넣으면 순식간에 혈관의 경직이 풀리면서 의사의 응급처치가 있기 전까지 시간을 벌수 있는 기적의 묘약. 니트로글리세린을 가지고 다닌다. 이제 그만 살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약이 필요해 지는 순간이 오면 “자. 이제 갑니다. 하나님”하고 웃으며 기다릴지 아니면 약병을 열기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지 모르겠다.
등에서부터 가슴을 꿰뚫는 엄청난 고통 때문에 내손으로 구급차를 불러서 다시 살아나본 나는 삶에 대한 애착이 없는 걸까? (201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