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호씨는 19427월 하리에서 났다. 동네 이름이 지령고개였다. 큰길로 서울에 가는데, 산으로 질러가는 길이라고 지름길이 있었다.

 

고비군수를 지내신 선조께서 과천에 터를 잡으신 이후, 신태호씨가 13대다. 청계산에 누우셨다. 신학수 문화원장과 일가다. 신씨네 일가가 번성해서 하리 인근에 모여 살았다.

 

7남매 중 5째로 났다. 첫째 누님은 2020년 현재 아직 생존해 계시고 내년이면 92세가 되신다. 위에 형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1살 위인 누이가 6·25때 돌아가시고 아래 남동생도 죽어서 아들은 혼자인 셈이다.

 

7살에 과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한내를 건너지 않고, 둑길을 따라서 등교했다.

 

3학년 때 전쟁이 나면서, 학교가 불타서 운동장 바닥에 움을 파고, 가마니를 깐 움막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여름이면 학교 뒤 산소에서 나무그늘에 칠판을 걸어놓고 공부했다. 비가 오면 일찍 파하곤 했다.

 

선친께서는 생전에 베로 도포를 만들어 두시고는 당신께서 돌아가시면 입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옷을 기제사 때면 꺼내 입으시고, 기제사에 임하셨다고 전한다.

진짜 베를 구하시느라고 애를 쓰셨다고. 선친께서도 진짜라고 구해서 입고 돌아가셨던 그 옷도 나중에 납골당 하느라고 파보니, 나일론이 섞였더라고......

신씨는 가족 납골묘를 만드느라 50여 기를 파서 수습했는데, 근래에 쓰신 분들은 거의 다 나일론이 섞였더라고 말했다.

 

신학수 문화원장 부친 돌아가셨을 때, 과천장의사에서 보내온 수의로 최종수 전 문화원장과 셋이서 염을 했는데, 끊어지더라고.....베는 닥나무를 벗겨 가지고 만드는 거라서 끊어지는게 당연한 거였어. 광목이 섞였던거지.”

 

6·25 나서는 소 마차 끌고 청계산 응달말 종수네 동네 하루 자다가 비가 와서 도로 돌아오고. 9·28수복 무렵인가 가을에 사기막골 산꼭대기 광수네 집으로 피난을 갔다. 세 번째는 겨울에 지금 화성시 송산면 사강에 이모가 있는데 거기를 소 마차 따라서 걸어서 갔다.

 

신학수 문화원장네가 큰댁이라 함께 갔는데, 작은댁 소는 인덕원 못미쳐 세골(재경골)에서 내려오는 작은 개울에서 큰댁 소는 약해서였는지 그 개울을 못 건너서 못가고, 신씨네와 작은댁만 내려갔다. 사강 둥그리(동진마을 지금의 화성 송산면)라는 동네에서 겨울을 지냈는데 인민군이나 중공군은 보지 못했다.

 

중학교는 송재수 교장이 계셨던 관악중학교(나중에 한일중학교)를 다녔다.

지게를 교문에 대놓고, 공납금(사친회비) 내고 나오시던 아버지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술회한다.

 

나중에 양재동(당시 광주군 원진면 또는 과천 동면 그리고 말죽거리라 불렀다) 은광중학교(설립자 이강목. 현재 양재사거리에서 성남 방향 7,80미터 오른쪽에 원진국민학교와 같이 있었다.)

 

그때 과천에서는 채미(참외), 오이, 토마토 등 채소농사를 많이 했다. 신씨 선친 어르신들은 마차 끌고 상도동, 영등포, 남대문시장까지 내다 팔았다. 여자들이 이고 다니는 건, 가까운 흑석동이나 상도동, 노량진 잘 가야 용산까지 가는 거였고.....

 

1963년 강원도 인제군 소하면 소하리 최전방 군대에 가서, 1966년에 제대 포병대대 통신 주특기로 갔다. 서울 인근에서 복무하던 군인들은 휴가 나오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신씨가 복무하던 강원도는 사정이 달랐다. 집에 초상이 나도 당시 관보 아니면 집에 올 엄두도 못 냈다.

 

1967년 경기도 광주 색시를 아내로 맞았다. 처가는 신씨 형수 큰아버지와 처의 조부가 동서 간 이었다. 신혼여행은 택시를 타고 남산을 돌아오는 게 최고였다. 그렇게 결혼한 신씨는 아들 둘, 딸 하나, 삼 남매를 뒀다. 그때 한참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산아제한을 할 때였다.

 

1977년 이장이 되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동네일을 봤다. 마을회관을 지을 때도 정부에서는 시멘트와 철근만 주었다. 당시만 해도 부동산 거래가 활발할 때라 복덕방(중개사무소)을 통해 대지도 사고 비용도 거출해서 회관을 지었다. 삼거리에 복덕방이 많아서 그 사람들이 도와줬다. 80년대 초반까지 이장을 봤다. 신씨는 젊은 이장이었다.

 

당시 하리는 17개 반이나 되는 큰 동네라 이장이라고 안하고, ‘하리시장이라고 했어. 한 개 반에 20가구 정도 있었지. 과천서 민방위교육이라도 할라치면 줄이 제일 길게 서곤 했지. 하일리 막계리 유○○ 이장 장막교회 있는데, 관문리...... 문원리 김충원, 김도경씨, 이순기, 주암리 심정섭씨 등이 이장 볼 때였어.”

 

과천에서는 추석 다음 날이면 과천면 체육대회를 했다.

삼거리에 깡패들이 많아서 어거지로라도 이겨야 해서 소란스러웠지. 그리고 동네가 크니까 별의 별 사람들이 많았어. 이장 볼 때 이지익씨가 하일리 마을금고를 설립했어. 그전에는 김충원 씨가 농협을 했다가 강명희 씨가 조합장 할 때 금융사고가 나서 애를 많이 먹었다고..... 이장들이 영농회장 맡아서 메꾸느라 애먹었지.”

 

이장을 마칠 무렵 아내가 유방암에 걸려 11년을 투병하느라 신촌세브란스병원을 다녔다. 아내는 끝내 골수암으로 번져 별세했다.

 

위에 장남은 돌아가시고, 부모님 모시고 농사를 계속 짓고 있었지. 제사를 증조부터 제사를 지내고 있어. 원래는 고조까지 지내야 하는데 제천은 고조항렬이 없어져야 시제로 가는 건데, 큰집 장조카가 고조 5대조 시제로 모시는 걸로 했지.

종사 일을 하다 보니 남태령 쪽으로 산에 가기 어렵고 내가 부산으로 가서 사업을 하게 되니 어렵고....., 지금 자손들이 하나씩이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데다가 남태령 무네미길 올라가는데 있던 산소들을 관리도 어렵고, 그린벨트라 장례도 어렵고......,장사 지내는 인력관계도 어려워서 가족납골당을 3백기를 해서 선산들을 묘를 개장수습해서 모셨어.”

 

신씨는 평생 농사만 지었다.

 

지금 서초동 법원사거리 향나무 근처가 다 채소밭이었다구. 고속터미널 자리에는 일본사람들이 먹는 단무지무밭이었고..... 그 채소를 기르는 방법을 과천 사람들이 배워 와서 과천에서 조를 심던 밭에 채소를 심기 시작했고, 심어 놓으면 상인들이 트럭을 가져와서 가져다가 남대문시장에 가서 팔았지.”

 

직접 씨앗을 뿌리는 방법보다 발아율이 높은 채소모종으로 싹을 틔워 모종을 심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비닐이 없으니, 얇은 노루지에 들기름을 발라 종이가 젖어도 쉽게 찢어지지 않게 한다. 아직 비닐이 나오기 전이다. 들기름도 아까워 석유를 섞어 바르기도 했다. 그걸 씨를 뿌린 뒤 덮어서 발아할 때까지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이후로 오랫동안 과천은 서울사람들 채소 공급원이 된다. 양재에서 시작된 화훼도 그렇게 과천에 전해진 것이다.

 

신씨는 2002년부터 부산에서 특수작물을 재배한다. 부인이 돌아가시고 농장에 다니다가 부산에 시장 조사를 가서 보니 가락동 시장에서 사서는 내려다가 팔고 있었다. 부산에서 하면 운반비만 절감해줘도 되겠다 싶어서 시작했다. 부산에서도 농사지을 땅은 주로 강 서쪽이라 김해공항 쪽으로 부산 외곽에 땅을 구해 특수작물농사를 짓고 있다.

 

옛날에는 초상이 나면 지관이 일진을 봐 가지고 불길한 날 빼고 사흘 장 아니면 오일장이지..... 섣달 그믐에 초상나면 2일장. 해를 넘길 수 없다 해서.... 먹고 살 만한 집은 5일장..... 상 때는 동네서 팥죽, 탁주, 막걸리를 담갔어. 결혼식에는 감주를 담가 가기도 하고..... 부조라는게 국수 해가고 현금도 내고...... 결혼식 장부에 누구 국수 한관적혀 있었어.”

 

우리 형 장인이 신동면 의원 했어. 초등학교 교장이 정용섭 (이영구 전 문화원장이 다닐 무렵에는 교장 고이준)이었고......”

 

찬우물 고개가 높았어. 으능쟁이 고개도..... 그땐 꽁보리밥 싸갖고 금성방직 뒤 안양공고에서 걸어오면 초생달이 뜨지. 배고프니까 왜무 파란 것 뽑아서 까먹으면서 걸었지...... 그때 이웃집에 타작하면 고등어 굽는 게 반찬으론 고급이었어. 홍촌말 사는 친구가 고등어반찬 도시락 해가지고 학교 가는데 가다가 먹느라 한 시간이나 늦게 간 적 있지..... 자전거 타는 아이들 부러웠어. 동네서 안양중학교 다니는 셋만 자전차가 있었지. 훔쳐 타다가 매 맞고 배우려다 넘어져 부서지고......”

신씨네는 198117대조 할머니 글이 보물 728호로 지정된 바 있다. (설씨부인 권선문)

 

(2020.11.9. 과천문화원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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