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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에 사이버대학에 같이 다니자고 했더니 빼더라구요. 그런데 올해 입학했다고 하는 거예요. 대견해요. 콜센터에 이직해서 인정받는 사람이 된 거예요. 회사에서 진학도 도와준다고 해요"

 

조정숙 위원이 5년 전 이모가 되어 인연을 맺은 피해자 근황이다.

 

"처음 사무처장님 소개로 아이를 만났을 때는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못해서 힘들어 했어요. 그런데 이젠 적응해서 회사에서 우수사원 표창을 받을 정도로 밝아졌어요. 옆집 사시는 할머니를 자발적으로 도와드리는 데까지 나간 거예요

 

자기 감정을 드러내기 까지 5년이 걸리더란다. 5년 동안 조 위원은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실감했단다. 센터에서 지낼 곳을 찾아봐주고 챙겨주고......무엇보다도 누군가 곁에 있다는 느낌을 같게 해 준 것이 결실을 보는 것 같아서 흐뭇하단다.

"어떻게 보면 내 아들들보다 나아요. '날씨 추운데 이모 따뜻하게 입고 외출하세요'라고 문자를 보내와요

 

비결이라면 유난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지켜봐주는 거란다. 내 아들들 대하듯이 대하고 만나서 아이가 좋다는 국밥 먹고 같이 걷다가 맘에 들어하는 눈치면 티셔츠 하나 사주고......그러면 아이가 밥 사겠다고 하고......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어려운 일이라는 건 독자들이 알리라.

 

조정숙 위원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범계중, 평촌고 학교운영위원회 일에 관계하면서 청소년과 상담 봉사의 길에 발을 들였다.

 

학교운영위원회로 시작해서 스카우트를 오래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이모' 역할을 오래 했다. 학교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조정하고 중재하는 일을 했다. 지금도 복지관에 들렀다가 사회봉사자들 틈에 있는 중학생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말을 붙이는 사람이다.

 

지역봉사단체장들이 그녀를 민주평통으로 이끌었고 거기서도 새터민 아이들을 후견하는 일을 맡았다. 자연스럽게 안양법사랑 청소년 상담으로 이어졌고 안양범피 이종찬 사무처장은 그녀를 눈여겨 보았다. 그리고 상담에 그치지 않고 이모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었다.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 넉넉한 형편이었던 어린시절 그녀의 어머니는 복숭아 수확철이면 크고 좋은 것을 골라 대문을 열고 동네 아이들을 먹였다. 감자 수확을 위해 동네 아줌마들이 일하러 오면 어머니는 크고 좋은 걸 골라 들려 보냈다. "저 이들은 시간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하니까 깎기 좋은걸 주는 거야. 우리는 시간 여유가 있으니 작은 걸 깎아 먹으면 되지" 하시던 어머니셨다.

한동안 온나라에 알려진 큰 사건 피해자를 안양센터가 케어하게 됐다. 피해자 가정을 만나는 일을 조정숙 위원이 하고 있다.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언니, 센터가 아니었으면 나 자살했을거야. 누가 철마다 김치 담가주고 명절이라고 선물을 해주고 농장에 채소 심으러 가자고 말 걸어 주겠어. 그중에서도 이렇게 전화할 수 있는 언니가 있어서 좋아.' 하더라구요"

 

조정숙 위원이 바라는 건 센터를 돕는 이들 모두 잘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새해에는 이사님들 하시는 사업들이 더 잘됐으면 좋겠단다. 그래야 센터가 하는 일을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실 거라 믿기 때문이다.

(2023.1.16 안양 민주평통사무실에서. 조정숙위원은 평통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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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균은 1967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정읍은 예인들의 고장이었다. 용인민속촌 설립자가 이웃에서 살았다. 소리를 하시던 1935년생이신 아버지와 친구셨고, 용인민속촌 사장은 이종간이었다. 1974103일 용인민속촌이 개관하면서, 아버지는 용인민속촌으로 출근하시게 된다. 1년 반 뒤, 온 가족이 민속촌 안에 있는 전시가옥으로 이사한다. 2년 정도 전시가옥에서 살다가, 밖으로 나가 살게 된다.

어린 김대균은 늘상 소리, 기예 등 어른들이 펼쳐 보이는 전통문화 속에서 자란다. 김씨 뿐 아니라, 민속촌 안에 사는 아이들은 학교가 파하면 어른들은 풍물하고, 누나들은 춤추고, 아저씨들은 연주하는 속에서 살았다.

 

고 김영철 명인이 공연하시는 모습을 늘 보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줄타기에 입문하게 된다. 선생님과 상주하시면서 연주하시는 분들이 친분이 있으시고, 그 분들은 또 아버님과 친분이 있으시고, 아버님도 흥이 있으신 분이니까 자연스러웠다.

 

당시에는 꼬맹이들이, 공연 때 타시던 줄에 매달려 놀며 지냈다. 일상이었다. 그렇게 줄 타던 꼬맹이들이, 한 명은 1년 하다 그만뒀고, 대균 보다 세 살이 많은 형은 2년 하다 그만둔다. 김대균만 계속 하게 된다.

 

김영철 명인이 용인에 공연하러 오시면, 대균은 기본적인 걸 지도받게 된다. 13살 때 이버지께서 녹음기를 사셨다. 재담가가 소리하려면 녹음기가 있어야 한다시면서..... 2019년 기록화 작업을 하면서 발견한 옛 녹음테이프에는 아버님 소리하시던 육성과 13세 때 김대균이 했던 팔상여타령과 재담과 소리가 담겨있다.

 

나중에 한국기록원 연구원들이 들어보고는, 사료로써 가치가 있다고 인정했다. ‘줄광대 김대균이 열 세살에도 줄소리를 했었구나라는 인정을 받은 것이다.

 

2019년 김대균은 국립무형유산원에 자신이 가진 모든 자료를 기록화 하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줄타기 입문과정, 성장배경, 다양한 활동상황, 팜플렛, 사진자료, 동영상, 신문 보도자료 들이 들어가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8호의 소재지가 과천이다. 줄타기의 본향이 과천이 된 사연은 이렇다.

 

과천 찬우물에는 예인들이 모여 살았다. 갈현동이 생활 근거지이고, 학습 근거지였다. 경기소리 임정란 명인의 할아버지 임종원 어르신이 대동가극단을 만들었다. 대동가극단은 소리, 줄타기 등을 망라한 종합예술단이었다. 임종원 어르신은 단장이 되어 대동가극단을 이끌고 만주, 일본까지 공연을 다녔다. 제일가는 흥행단체였다.

 

팔도의 민속예인들은 시흥군 갈현면 임종원 어르신을 제일로 여겼다. 그중 임씨의 아들 임상문 씨의 줄타기 솜씨가 대단했다. 아쉽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맥이 인척인 김영철 명인에게 이어졌다.

 

임상문 선생이 1906년생이고, 김영철 명인이 1920년 생이다. 두 분은 옆 집에 살았다.

 

해방 전까지, 서울과 아래 지방 사이에서 갈현동이 민속예술의 거점이 된 것은 분명하다.

 

갈현동에서는 큰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전문적으로 줄타기를 지도했다. 이는 임종원 어르신의 영향이라 할 수 있겠다.

 

김대균은 이 대목에서 줄타기 정통성 확보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이영구 전 과천문화원장의 부친 이용진씨도 찬우물에 사셨는데, 마을에 놓인 줄 위에서 노상 줄타기하는 모습을 보셨다고 하셨다.

 

김대균은 이런 일들을 대학원 논문에 올려 놓았다.

 

문제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사대부나 글을 알아 기록을 남기고, 그것이 역사가 되지만, 민초들 예인들의 생활은 기록이 있을 리 없다.

 

열다섯에 선생을 모시고 살았는데, 그걸 기록으로 내놓으라 하면 어쩌는가?

 

김영철 명인이 용인에 공연 가면, 김대균씨 부친과 교분이 있으셔서, 함께 어울리시면서 줄에 매달려 놀던 어린 대균에게 가르친다. 동네에서 3명이 줄타기를 배웠는데 둘은 몇 해가 지나자 그만두고 김대균만 남는다. 선생님은 지방순회공연으로 바쁘셨다. 한 번씩 오시면 지도해 주시곤 했다.

 

김영철 명인은 1979년 겨울, 김대균의 집을 찾는다. 건강이 악화되자, 마음이 급해진 선생은 전수자로 대균을 지목한다. 대균의 집에 기거하시면서, 본격적으로 줄타기 수업을 받게 된다. 도제식 교육의 마지막 세대다. 학교를 거의 다니지 않고, 지도를 받는다.

 

198251일 중3이던 김대균은 데뷔공연을 하게 된다. 매일경제에 데뷔공연 기사가 난 걸 보고 알게 된다. 그 뒤로 용인민속촌에서 12년 전속공연을 하게 된다. 과천한마당축제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게 된다.

 

김대균이 과천에 둥지를 틀게 된 건, 12,3년 된다. 막상 과천으로 들어오려고 보니, 과천이 엄청나게 비싼 동네라는 걸 깨닫는다.

 

대균씨는 27살에 공부를 마치고 28살에 결혼한다. 부인은 화가였다. 당시 대균을 모델로 전시회를 하려는 부인과 화가와 모델로 인연이 되어, 수원에서 신혼집을 차린다.

 

이사하기 전에도 과천에는 노상 드나들었던 자리다.

 

전수관사무실, 기념비, 김영철 선생 묘소 모두 과천문화원의 도움이 있었음을 잊지 못한다.

 

2011년 줄타기는 한산모시, 택견과 함께 유네스코 등재에는 정부에서 원하던 데이터를 적절하게 제공한 그의 공이 컸다.

 

김씨는 줄타기는 줄광대, 어릿광대, 삼현육각, 음악편이 들어가는 종합예술이라고 강조한다.

 

줄광대는 연희 능력을 바탕으로, ·소리·재담·기예 등 연행술 능력을 발휘하고,무엇보다 관객과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천하없는 종합예술이예요. 그래서 예술로 인정받는 것이죠. 유네스코에 한번 등재되면,다른 어느 나라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긍지가 있어요. 유네스코 본부가 파리에 있기도 하지만,클래식으로서의 긍지를 갖게 되지요.”

 

김씨가 전수관에 애착을 가지게 된 것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지만 보존회 수장으로의 역할과 아동교육에 있다. 가슴 한 켠에 아이들 가슴에 문화유산을 심어주고 싶은 것이다. 전수관은 당연한 것이고, 무형문화재 전수관이 없는 데가 어디 있느냐? 전수교육관, 상설교육장은 오래 전부터의 꿈이다. 전수관에서 어려서부터 자치기, 제기차기 좋은 민속놀이 있는지도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체험과 교육을 통해 소고, 괭과리, 장구도 쳐보고 줄타기에 관심 갖지 않아도 문화자산이 쌓일 것이고, 그 아이가 자라 내려가면 전승이 될 것이고, 정말 줄타기에 관심을 가지는 아이들이 나오고 전문가도 배출되리라는 꿈이 있어서다.

현재는 공간이 열악해 체험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자생력 갖는 프로그램 운영이 가능하다고 자신한다.

 

흥미유발이 첫째예요. 지자체의 도움은 일부분이고, 스스로 운영될 수 있어야 해요. 100% 확신해요. 현재 4명이 상주하며 줄을 타고 있어요. 당진 세한대 5, 광주 8, 전부 18명이 배우고 있어요. 그들 개개인의 특성에 맞춰 재능을 길러가는 거예요. 그래서 재담도 짜주지 않아요. 자기 나이에서 줄 위에서 내려다 보는 세상을 재담하게 하는 거예요.”

 

김씨는 신학수 문화원장을 비롯해 전수관 건립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지역 어른들에게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2020.11.11. 사무실에서)

 

 

 

 

 

 

<편찬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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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덕, 심재학 모자를 찾게 된 것은 심재학 씨 부친 심정섭 씨가 워낙 유명해서다. 1990년대 중반 돌아가신 심이장은, 삼부골에서 이장을 43년 지내신 분이시다.

아버지는 하사관으로 제대 하시면서, 서울집을 처분하시고 과천에 자리를 잡으셨대요. 농지도 꽤 있는 집안이라 일이 많았는데,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으셨어요. 술 좋아 하시고, 사람 좋아하셔서, 읍내 나가서 지내시고, 이장 일을 비롯해 동네일에만 신경을 쓰셨지요.”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고단하게 살았죠. 20년 넘게 묵장사 해서 광주리에 이고 서울 가서 팔고 돌아오는 생활을 했어요. 남편이 집에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통에 술상 보는 게 일이었어요. 그래도 묵을 팔고, 버스타고 읍내에 돌아오면 애들 아버지가 마중 나오곤 했어요.”

 

삼부골은 돼지들을 많이 길렀다. 500마리를 키우는 집도 있었다. 마을 양쪽 작은 개울에 돼지똥 냄새가 가득했다. 경마장이 들어서면서 말똥냄새까지 더해지고는, 마을 사람 아니고는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돼지파동이 나면서 하나, 둘 돼지 키우기를 포기하는 집들이 늘어났다.

 

삼포마을은 본래 상삼포, 하삼포로 나뉘었다. 각각 대 여섯 집이 있었는데, 하삼포가 경마장으로 들어가 버리면서 땅을 팔고 떠났고, 상삼포로 집을 옮겨 짓고 산 사람들이 있다.

 

용흥덕 씨는 1936년 원지동에서 났다. 드문 성씨인 용씨는 수원에 세가가 있었고, 원지동 용씨네서 십오리 떨어진 동네로 피난을 갔었다.

 

움을 파서, 여자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숨어 지내다 왔어요.”

 

용씨는 스물두 살 때, 과천으로 시집왔다.

 

청계산에서 취나물 같은 나물을 해다가 팔았어요. 도토리도 주워 다 씻고 말려, 가루 내서 묵을 쑤어서 묵을 만들어 광주리에 이고, 서울 가서 팔았어요. 아이를 업고, 서울 신흥사 앞에 가면, 단골집에서 새댁이 애 업고 왔다며, 자기네 집에서 아기를 봐 줄 테니, 놓고 팔고 와서 아기를 데려가라고 했는데, 혹시라도 아이들 데려갈까 무서워서 업고 다녔어요. 묵에 일체 다른 건 넣지 않고, 값을 비싸게 부르지 않아서 잘 팔았어요. 나중에는 집에서 참외를 따면, 그걸 이고 나가 팔았어요.”

 

큰아들 심재학 씨는 연년생 동생을 1986년 아시안게임 직후, 교통사고로 잃었다. 주암리 앞 큰 길이 생기고 나서, 그 길에서 교통사고가 잦았다. 사고가 잦아 동네에서 굿을 할 정도였는데, 심씨 동생도 밤에 친구와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심씨는 농사를 돕다가 회사를 다녔다. FRP(강화프라스틱)으로 물탱크, 어선을 만드는 회사를 차려 포일리에 공장을 차리기도 했다. 납품하던 건설회사를 드나들다가 그곳 여직원과 결혼했다.

 

김 모 산림간수가 유명했어요. 외지인인데 셰퍼트를 데리고 다니며, 과천 일대 산을 돌며 무단벌목을 못하게 했어요. 나무를 베다가 그 분에게 걸리면, 지서에 끌려가 곤혹을 치렀죠. 그 분도 우리 아버님께는 꼼짝 못했어요. 청계산에서 나무 하다가 그 분이 나타나면, 지게를 숨겨 놓고 달아나곤 했지요. 그러면 아버님이 두둔하고 나서 주시고, 김씨가 사라지면 아버님이 지게 찾아 가거라.’ 하시면 사람들이 숨겨 놓았던 지게를 찾아 가곤 했지요.”

 

1960년 중반 막계리에 장막교회가 들어서면서, 동네가 소란스러웠다.

 

청계산에 기도터를 닦는다고...... 지금도 가면 산 속에 흔적이 남아 있어요. 대공원이 들어서면서 장막교회 근처에 살던 이들이 문원리로 이주했지요. 하삼포 인근에 살던 이들은 원주민들과 사이가 좋을 수 없었어요. 농사를 지어 놓으면, 말도 없이 따가는 통에 많이 다퉜어요.”

 

문원리로 이주하고서도 이들은 서울서 철거민들이 동네에 자리를 잡으려 하면, 자기네 교회로 나오라고 극성을 부렸단다. 문원리 근처 구리안에서 채소 농사를 짓던 이들도 오이가 채 익기도 전에 장막교회 사람들이 따 가는 바람에, 농사에 손해를 입어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삼부골 사람들이 건장하고 운동들을 잘 했어요. 면 체육대회를 하면 씨름, 달리기는 일등을 도맡아 했어요. 하리에 미군부대 사람들이 키가 컸는데, 배구를 해도 그 사람들을 이겼어요. 체육대회를 하면 아버지께서 나서서 젊은 사람들 해 먹이고, 나가서 우승을 하면 트럭에 선수들을 싣고 집으로 돌아 와서, 동네잔치를 벌이시고......”

 

남편이 아는 사람들이 원체 많으니까, 모를 내는 날이면 근처 부대에서 군인들을 대민지원이란 이름으로 자원봉사 인력으로 불러 내셔서, 사람들이 논에 가득했어요. 그 사람들 새참 해 내려면....... 동네 아주머니 몇 불러내서 하루 여섯 끼를 만들어 냈어요. 아침, 새참, 점심, 새참, 저녁을 먹고 일 마치고, 집으로 와서 술들 마시느라 또 한끼......, 반찬이 뭐 있어요? 나물하고 김치 두 어 가지, 돼지고기 볶아내고..... 읍내 학교 정문 근처에 있던 양조장에서 막걸리 두어 통 주문했다가 내고 그랬지요.”

 

(2021.11.4.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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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육군사관학교에 34기로 입학한 이준구 장군. 백골 부대장, 육군본부 군수참모부 장비정비처장, 39사단장, 국방부 군수관리관, 7기동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군 최초로 유엔군 사령부 주요참모로 앙골라에 파병 근무 후 한미 연합사 처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국제정치학박사.

이장군은 현 추사박물관 아래 건물 2채가 있는데, 그곳에서 1955년에 났고 분당에 산다.

 

예편 뒤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이 장군 사무실에는 광개토대왕비 탁본이 크게 붙어 있다.

 

일본인들의 트라우마는 섬나라로 단절되어 살아서 미개인으로 살았다는 거야. 하지만 일본은 왕조는 끊이지 않는다는 걸 자랑하지. 중국땅은 명칭을 동아시아 대륙으로 바꾸어야 해. 하은주 시절부터 동아시아 대륙의 생존 전쟁으로 요동칠 때 일본은 없었던 거야. 우리하고는 인식이 달라. 한족의 중국도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고 있고.......동아시아 대륙역사와 세계사를 보는 다른 시각이 필요해요.”

 

구글지도가 다른 한쪽 벽을 채운다.

 

고구려의 그 넓었던 영토를 가졌던 한민족 세력이 그 지역을 모두 잃고, 대륙을 감히 넘보지 못했어. 그러니 이성계 같은 인물이 나타난 거지. 절호의 기회였지.......당시 동아시아대륙의 북만주를 이성계는 통치할 자신이 없었지. 돌아보면 점령 후 원 과 명 관계를 이용해 통치가 가능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당시 한반도 지배층 머리에 서계전략이 없었던 이유는 어느 정도 까지는 굉장히 잘하면서도 그 이상 천정을 뚫고 나가려는 생각 자체를 못했기 때문이었을거야......”

 

군인은 행복한 직업이었다고 회고한다. 치열한 경쟁이지만, 그건 어느 선까지라는 규제된 경쟁이었다. 가장 투명사회가 군 밖에 없다고 한다. 군인은 사실상 개인 사생활이 없다. 자식, 부모, 상하 관계 전부를 노출시켜야 한다. 제대를 하고보니, 몇천 배 생존경쟁이 심각하더라고. 일말의 틈도 없고, 모든 공간이 이익 연결선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알겠더라고. 민간인들이 숨 막히게 사는 이유를 알겠더라고. 얼굴이 찌든 이유를 알겠다고 회고한다.

 

삼성이 세계시장에 1등하게 된 것이, 그간 한반도 종족의 수천 년 한()이 에너지가 되어 분출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한국인의 열정이 사그라지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은 이제 민주주의를 느끼고 있다. 과거 시대는 이익 아닌 공포와 강요, 부패의 시대였다. 지금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가는 이유는 시대 흐름을 잘못 이해한 지식인들과 정치세력들의 강요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부패행위를 대놓고 할 수 없으니, 이익으로 유혹하는 포퓰리즘이 나타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영원히 소멸할 수 없다. 원시시대부터 발전된 인간 공동체 생존사업기구 운영체제이기 때문이다. 국가통치 권력 중심이 정치세력 집단지배에서 서서이 소집단을 거쳐 개인으로 이동중이다.

 

그리스 페리클레스 이후 권력의 운영방식, 힘의 운영방식이 전략이야. 우리나라는 유럽보다 미국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지. 유럽 민주주의는 귀족, 대지주가 살아있어. 유럽 보수파는 귀족과 대지주를 보호하지. 테임즈 강가 곳곳에 이 강과 모든 부속물은 여왕 소유에 속한다.’고 써있어.

조선에서 왕이 준 봉토는 언제든 빼앗을 수 있었지. 북한의 자유는 왕이 허락하는 자유야. 이동도 못하는 자유인 것이지. 그 당시 일본에 갔다가 그 이유를 찾은 것이 이승만이야. 이후 박정희가 나타나 먹고 사는 거 해결했는데, 이명박, 박근혜가 실수하는 바람에 올바른 바른 정치세력이 없으니, 그러니 권력이 좌파로 갈 수밖에 없지. 지금 언론은 민주주의 위기로 보지만, 8,90년대는 독재의 연장이었어. 아직도 대통령을 왕으로 착각하지. 그러나 대통령은 내 대리인이다.’라는 생각을 한국인이 요즘 들어 조금씩 늘고 있지. 한국인이 진짜 자유를 느끼기 시작한 거야.”

 

이장군은 BTS가 세계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을 예로 들어 한국에 희망이 있다고 전망한다. 혼란이 있을지언정 독재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국가혁신지수 세계 1위가 최근 10년 사이에 한국에서 독일로 넘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ITIQ와 직결되어 있는데, 독일이 추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혁신을 주도하는 세력은 기업가들이라 단언한다. 이제는 군사력으로 땅따먹기하는 시대가 아니라, 경제력 기술과 혁신으로 한다는 것이다. 생존 군사전쟁을 경제전쟁이 대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현역시절 부터 목표를 세워 [생존 전쟁 선택 : 손자병법과 대한민국]을 집필 중이다.

 

“2050년이면 중국은 대국굴기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대전략 최정상 포인트는 미국이냐 중국이냐 결정되는 시기야. 그래서 부제를 [대한민국은 2050년 생존할 것인가?]로 달았어요. 경제력만으로도 안 되죠. 개방성, 투명사회, 경쟁 사회로 가야 되요. 한국은 평등을 강조해요. 일본, 중국은 절대 그렇지 않아요. 동남아 중 유일한 민주주의를 세운 나라예요.”

 

이스라엘은 군사력으로 경제력을 일군 나라예요. 군사기술을 경제에 이용한 나라지요. 미국은 독특한 식민지였음에도 영국 보호가 커서 독립하면서 공업기술을 들여와 영국을 벗어난 거예요. 미국의 독자적인 산업혁명은 1776년부터예요. 그 이전 1760년에 산업혁명이 시작됐지만, 영국이 미국개발에 열심을 내면서 영국이 자신들도 상상 못했던 제도를 만든 거예요. 영국이 만든 회사가 미국에 도입됐죠. 그전엔 강제노동 시대였어요. 그러나 잘하는 만큼 자유와 이익을 보장해주는 제도를 버지니아 컴퍼니가 제시하죠. 세계역사상 최초로 노동자들에게 제시하죠. 그것이 인센티브 제도예요. 기존 전통 구조 속에서 개인 자유를 뽑아 낸 거죠. 버지니아 컴퍼니가 스페인이 남미에 했던 유럽식 강제노동 강요로 안 되니까 인디언과 싸움을 하게 된 거예요.

완전한 자유을 보장하고 인센티브로 모든 노동 통제가 가능하다는 걸 버지니아에서 보여준 거예요. 주민들이 자유인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고 나니 우리 대표는 너희가 아니다. 임금 받고 일해 주는 거다라는 자치제도가 시작된거죠. 풀뿌리 민주주의가 확산 시작인 거예요.

그러다가 영국이 세금을 올리니, 티파티에서 반발하게 되고 독립혁명이 일어난 거죠. 워싱턴은 독립군 대장으로서 황제의 지위로 오르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어요. 될 수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백인들은 통제 불가능하다는 걸 안 거예요. 그래서 왕이 없는 대통령제를 선택하게 되죠. 워싱턴은 그래서 미국인들의 영웅이죠!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인 것 같죠? 오히려 그런 치열함이 강점이예요. 지금 혼란은 경찰이 수습하지 군을 투입할 생각도 안해요. 저러다 수습이 되요. 민주주의는 인류 지향의 가치라 없어지지 않아요. 인류의 지향점인 자유와 이익 기반으로 돌아 오게 되요.”

 

그는 지금 과천을 주시한다. 그걸 실현할 여건이라는 것이다. 주암동 인구가 폭발할 것인데. 그 이유는 이익 있는 도시에 몰리게 되있기 때문이라는 것. 대공원이 최고 강점이 될 것이며, 과천 전체가 공원이고, 그 가운데 아파트가 있으니, 집값이 비싸게 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군에 있을 때 부하들에게 자유토론을 하게 했다. 독일이 세계를 제패한 비결이 임무형 지휘라는 것. 1805년 나폴레옹 독일 점령 전까지는 프리드리히 대왕 아래 최강의 군사국가였지만, 피히테의 국민주의(내셔날리즘 민족주의가 아닌 국민주의라 번역해야 맞다) 아래서는 자진해서 입대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소통이 필요하고, 완전소통이라는 개념이 철저한 상명하복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극복한다고 생각하며, 임무형 지휘를 제대로 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한다.

 

과천의 발전을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게 길이라고 말한다.

 

역사의 전개는 이동통로에서 시작됐어요. () , 옛날 길은 육상통로가 거의 없었고 물길이 중심이었죠. 송파로부터 도로는 군사이동 때문에 도로가 닦여지기 시작했어요. 과천의 역사는 고대정부 정책결정 과정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결정되었는지 추적해봐야 해요.”

 

시흥군에 과천면을 편입시킨 이유가 뭘까요?’ 일본이 동양척식회사를 내세워 국가 지형 측량을 산악중심으로 경계를 설정했던 거예요. 최초의 과학적 행정구역 경계선이 능선을 중심으로 시·도경계를 이루게 된 거예요.”

 

과천 땅값이 서울보다 더 비싼 이유를 이익이 있는 지역으로 모인다는 원리에서 찾아야 해요. 그러면 미래의 과천 이익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요.”

 

과천향토사연구회도 앞으로는 사람보다 사건을 찾아야 해요. 서울랜드, 경마장이 없었으면 벌써 과천 인구가 30만 되었을걸요. 그건 과천을 쪼그라들게 만든 사건이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유치하려 했었지...... 과천은 수도권의 오지였어요. 전기, 버스도 안양을 통해 들어왔어요. 1번도로가 시흥군으로 나갔기 때문이예요.

결론은 중심도로나 중앙과 연결되는 중심길을 내야 한다는 거예요. 과천시장들이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내, 미래를 준비해야 해요.”

 

과천향토사연구회도 유교적 시각에서 전승을 보전하는 데만 골몰하지 말고 흐름을 뒤집어 보고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2020.11.18. 연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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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씨는 옥탑골에서 났다. 지식정보타운 학교부지가 그의 집터다. 5대조 할아버지께서 과천에 터를 잡으시면서 농사를 지으셨다. 고조할아버지께서 지으신 초가를 아버지께서 기와집으로 고쳐 지으셨다. 서울서 전에 살던 한옥을 해체해 옮겨와서 모자라는 나무를 더해 지으셨다. 그 집을 70년대, 90년대에 고씨가 고쳐 짓고 살았다. 지식정보타운이 들어서면서 땅을 내주게 되면서, 셋골에 옮겨 살고 있다. 대토를 받아 2023년에는 이주단지에 집을 지을 생각이다.

“3살 때, 6·25가 났어요. 아버지는 군인 나가시고, 할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와 내가, 피난을 가야했지요. 쌀 세말을 엿을 고아서 지게에 얹고, 그 위에 쌀 세 말을 얹고, 이불 얹고.....그리고 그 위에 세 살 난 나를 올리고 피난을 가셨데요. 인덕원 쯤 나가서 할아버지께서 무거워서 엿을 길 옆에 내려놓고 가셨는데, 따라 오던 동네 사람이 지고 오더래요. 그 해 겨울이 엄청 추웠대요. 만삭이신 어머니께서 가시던 도중에, 내 동생을 낳으셨어요. 길 가다 낳았다 해서, 그 아이 이름이 길자예요.”

 

우리집 부엌이 3칸 반이었으니, 제법 컸지요. 한가운데 땅을 파고, 쌀 세 가마를 묻고, 나무로 덮어놓고 피난 갔다 돌아오니 누가 다 파 가고, 집에는 피난민들이 방마다 가득 자리를 잡고 있었대요.”

 

대농이었다. 쌀농사도 지었고, 초식(채소)농사를 지으면 시흥 등지에서 상인들이 차로 실어 갔다. 고씨는 일찍부터 동네일을 봤다. 이장, 통장, 새마을지도자, 영농기술자회 등에서 회장직을 역임했다.

 

고씨는 과천소각장이 들어설 때도 일을 맡았다. 입지선정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박모씨가 시의원이 되고, 그의 집 자리를 중심으로 입지가 결정되자, 마을주민 44명이 반대기금을 모으면서 일이 커졌다. 정부는 소각장 반경 500미터 내의 주민들을 위한 보상을 하게 됐고, 대책위가 만든 조합에 소를 사 주고, 각종 농기구를 제공해 공동사업장으로 운영하게 했다.

 

소가 한 때는 500여 마리까지 됐지요. 소에게 먹일 밀을 심기 위해, 소를 팔아 근처 땅을 산 것이 문제가 돼서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어요. 나중엔 그 땅이 전부 지식정보타운으로 수용되면서 마무리 됐어요. 소각장 인근 언덕 넘어 세곡마을에서는 당시에 7가구가 소를 키우고 있어서 소는 필요 없으니, 마을길을 넓히는 등 몇 가지 사업을 해주는 것으로, 보상협의가 마무리 됐어요. 그때 70억 정도가 투자됐어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정부보조금 사업에 눈을 떴다. 당시 비닐하우스는 대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비닐을 씌워 놔서,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바람에 날아가는 판이었다. 고씨는 파이프하우스에 눈을 돌렸다. 작목반을 만들어 보조금을 통해 파이프하우스를 지었다. 당시 이성환 시장님의 결단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그 바람에 갈현동 말고도 문원동, 과천동, 주암동, 화훼단지 등 과천의 많은 농민들이 혜택을 받고 경제적인 기틀이 되어 지금의 시설채소와 화훼농가로 번창하게 되었죠.”

 

그 뒤에 농민들이 기른 채소들을 팔기 위해서, 지금의 굴다리 시장이 만들어졌다. 시장 아래쪽에는 상인들이 자리 잡고, 위쪽에는 농민들이 직거래용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거기도 판매를 위해 시설채소작목반이 조직되었다.

 

과천초등학교 총동창회가 창립되고,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시작할 때도, 선배들이 일은 벌여 놓고 도중에 문제가 생기면, 그를 불러다 뒷수습을 맡겼다. 그는 그렇게 묵묵히 뒤에서 수습하는 일을 감당했다.

 

어느 해엔가 박정희 대통령이 동네에 모내기 시범을 한다고 하더니, 한참 전부터 사복을 입은 형사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이장인 나한테 동네 개들을 좀 묶어 놓고 길러라.’고 참견하고.....그래서 그랬어요. ‘시골에서 누가 개를 묶어 놓고 기르느냐고.....’”

 

군사정권 덕을 보기도 했다. 지금 지식정보타운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당시 50미터 도로라 해서 넓게 닦아 놓는 바람에, 양쪽을 오가는 노인들과 학생들 여럿이 죽고 사고가 잦았다. 오죽하면 이웃동네에서는 사고 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길에서 굿을 다 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온다니까, 그 전에 김계원 비서실장이 내려왔어요. 동네 유지들을 모아 놓고는 무엇을 도와 줄까?’고 물어요. 그래서 ‘50미터 도로에 사고가 잦다. 조치 해달라. 그리고 동네 전화가 없으니, 사고가 나도 면사무소가 있는 읍내까지 나가야 한다. 불편하다.’ 했더니, 다음날 50미터 도로에는 사이카가 양쪽에서 나와 있고, 몇 일 뒤에는 마을회관에 백색전화가 나오더라구요.”

 

65년에 마을 마다 리동조합이 있었다. 농협사업의 시초다. 71년에 통폐합 되어 강명희 씨가 1대 조합장이 된다. 당시 농사를 짓던 이들 대부분이 조합원이 된다.

 

조합이사가 될 무렵에, 감사를 지내신 분이 대단한 어르신이셨어요. 70년 초반 신도시 수용에 땅이 수용되고, 거액을 과천농협에 맡기셨어요. 당시 그 분과 비슷한 거액을 보상 받으신 분은 다른 땅을 사두었다가, 건물을 짓고 값이 올라 큰 부자가 됐어요. 10년 넘게 예금해 두신 감사님은 이자로 생활하시고 계셨죠. 그런 선배를 찾아가 이제 다른 후배에게 감사 자리를 양보해 주십사부탁드려야 하는 일을 내가 하게 됐지요.”

 

2012년 고씨는 1,300여 명이 조합원인 과천농협 12대 조합장이 되어 14대까지 조합장을 역임했다. 들어가서 보니 부실대출이 너무 많았다.

 

조합장은 대출에 관여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결재는 상임이사가 하고, 조합장은 대출심사회의에도 참여할 수 없어요. 그래도 부실대출을 정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2021.10.28.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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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는 부천 대장동에 쌀농사를 하러 다닌다. 젊어서 마련해 놓은 땅에 하삼부골 집앞 논이 경마장으로 들어가면서 받은 돈으로 땅을 더했다. 남에게 맡겨 두었다가 은퇴 후, 과천에서 오가며 농사를 짓는다. 이번 가을에도 김포 정미소에서 도정한 쌀을 실어와 주문했던 이웃에 갖다주고, 한숨 돌리던 강씨를 만났다.

 

“‘저 놈이 강명희 조합장 큰아들이다.’ 라는 말 때문에 매사에 조심스러웠어요. 서울 직장 다닐 때도 술이라도 마신 날에는 행여 실수라도 할까 싶어서, 일부러 늦게 집에 돌아왔어요. 그래서 친구들도 최근에야 제가 술을 마신다는 걸 알아요.”

 

1946년 아버지가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하실 때 중림동 약현성당 근처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난 그는 1·4 후퇴 때, 전주로 피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과천 본가로 돌아왔고 전쟁이 끝나고 과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45회 졸업생이다. 150 여 명이 함께 졸업했다.

 

지금 경부고속도로 근처로 강남대로로 길이 나 있는데 왼쪽은 서초구 오른쪽은 강남구죠. 왼쪽은 시흥군 신동면이고 오른쪽은 광주군 언주면이었죠. 신동면에서도 과천초등학교를 걸어서 왔죠. 지금의 이수교 있는 데인 동작동에서도 왔고......”

 

삼부골에서 과천읍내를 나오려면 십여리를 걷는 중에, 강씨네 땅을 밟지 않고는 걸을 수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부자였다. 오촌당숙 댁에는 바쁠 때는 머슴이 둘, 한가할 때는 머슴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도 외지에 계셔서 외삼촌들이 농사를 도맡아 하셨었다.

 

큰댁 할머니께서는 시집오셔서 막내삼촌을 젖을 물려 키우셨대요. 막내삼촌에게는 큰형수가 엄마였죠. 아버님은 청진 소재 비스코스 인견공장에 다니시다가 경성전기(한전)를 거쳐 한국동란 무렵에는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하셨죠. 그러다가 할아버지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시고 난 뒤에 장사를 정리하고 돌아오셔서 농사를 맡으시고 동네일을 보셨죠.”

 

넉넉하게 지냈죠. 명절에 과천에서 설 쇠고, 다음 날 중림동 외가에 가면 어른들이 많이 세배하러 오시니까, 주머니가 두둑했지요. 남대문 아버지 가게에서 염천교 건너 가방가게에 봐 둔 가죽가방을 사러, 외숙모와 갔던 기억이 나요. 동네에서 가죽가방을 맨 사람이 없었어요.”

 

삼부골은 강씨와 이씨가 많이 살았다. 강씨네와 이씨네는 서로 도우며 우애있게 잘 지냈다.

 

전쟁 때 인민군들이 이 모씨에게 인민위원장을 맡겼는데, 동네 젊은이를 인민군으로 차출하는 일에 나서지도 않았고, 얌전했대요. 전쟁이 끝나고 부역한 사람들 재판하고 처형하고 그랬는데, 강씨네가 나서서 삼부골 이씨를 그런 사람 아니다나서서 변호해 주는 바람에 화를 면했대요. 이씨는 서울로 이사가셨는데도, 강씨네 일이라면 끝까지 나서서 해주셨고...... ‘강씨네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강조합장은 산으로 둘러싸인 과천에서, 마을마다 제수에 쓰일 어물을 흥정해 단체로 사다가 나누는 구판장을 만들었다.

 

삼부골 동네 구판장을 사람이 착실하다는 이 모씨에게 맡겼다. 구판장은 지역농협의 전신으로 마을마다 있었다. 그러나 마을마다 운영 노하우가 차이가 나니 자본금을 들어 먹고 적자로 주저 앉은 조합도 있었다. 그 중에는 금융사고도 있었을 테고..... 정부가 나서서 지역농협 통폐합에 나서고, 강명희씨는 초대 조합장이 된다.

 

당시에 금융사고가 난 걸 정리하려니, 사고 낸 사람을 형사처벌하던가 돈을 채워 넣던가 해야 했고, 강 조합장 재산이 많이 축이 났다. 아버지는 당신이 이룬 재산 네 아들에게 물려주는게 줄어들어 면목 없어 하셨다.

 

삼촌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길래 그건 아버님 재산이시니까 처분 하시는 건 아버님 뜻대로 하시는 거지요.’ 했어요.”

 

(2021.11.11.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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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준 씨는 1945년 갈현리에서 태어났다. 인덕원 경계 재경골이다.

 

순흥안씨 충의공파 승지공 포현파라 하는 세거리 순흥안씨네는 평택 진위면에 세거하다가 안방(安舫)17세기 전반에 세거리로 입향해 이후 후손들이 살아 온 지역이다. 안석준 씨가 14대째다.

 

17세 안방은 승지(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를 지내셨다. 지금 포일아파트 단지로 개발된 지역에 대부분의 땅이 수용되었지만 아직도 선산이 거기 있다. 안양, 의왕과 붙은 재경골은 3개 면에 접해 있는 동네라 선거 때면 3개 시 후보자 홍보물이 다 집에 꼽혀 있곤 했다. 세거리라고 불렸다.

 

석준씨 아버지는 엄한 양반으로 소문 났었다. 모를 낼 때는 열 명, 스무 명의 일꾼이 있어야 했는데, 어지간하면 안서방네 일하러 가기를 꺼릴 만큼 엄하셨다.

 

위로 누나가 셋, 아래 남동생이 하나다.

 

전쟁이 나서 1·4후퇴 때는 이불이며 짐들을 지고 피난길에 나섰으나 아버지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가지다. 돌아가자.’하셔서 식구들이 되돌아 왔다.

 

7살에 학교엘 갔다. 누이는 한 해 늦게 9살에 가서 함께 다녔다. 제 나이보다 1년을 늦게 들어간 누이는 공부를 잘해 5학년 때 월반을 했다. 동생도 공부를 잘해 1학년 때부터 반장을 도맡아 하곤 했다.

아버지는 안씨가 공부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늦게까지 공부라도 할라치면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와 석준이를 늦게 보내주면 소가 굶는다.”시며 데리러 오실 정도였다.

 

안씨네 안마당이 넓었다. 동네 아이들이 학교 갔다 돌아와 꼴을 베어서는 안씨네 마당에 내려놓고, 어울려 공을 차고 노는 모습이 부러웠다.

안씨는 종일 밭일을 하다가, 해가 꼴딱꼴딱 넘어갈 무렵에야 꼴을 베러 나갔다. 아버지가 밭일 다 마치고 어두워지면, 그 시각에야 내 모는 것이었다. 밤늦도록 꼴을 베어다가 마당에 내려 놓으면 작두질을 해야 했다.

스무 살 어느 날, 한 밤 중에 작두질을 하다가 안씨는 문득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분김에 작두질을 해대는데 밑에서 풀을 넣던 아버지가 손을 잘릴 뻔 했다. 화가 나신 아버지는 지게 작대기를 휘두르셨다. 그 밤으로 안씨는 세상 구경이나 하다가 죽겠다는 맘을 먹고 가출한다.

부산으로 갔다가 마산으로 해서 전주에서 한옥 처마에서 석양을 보고 있으려니 처량했다. 돈이 없어서 전주에서 기차를 훔쳐 탔다.기차 안에서 빵을 훔치다가 걸렸다. 시비가 붙었다. 중학교 다닐 때 당수를 배웠던 안씨였다. 처음 두 놈을 때려 눕혔는데, 떼로 달려들었다. 밀리다가 열차로 오르는 문 난간을 잡고 버텼다. 기억은 거기 까지였다.

 

눈을 떠보니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 수원의 한 병원에서 눈을 떴다. 기차가 병점 인근을 지나는 사이에 안씨는 걷어 채여 떨어졌고, 기차길 옆 전주에 부딪혀 돌아 떨어지면서 다리가 으스러졌다.

수원의료원에서 대충 맞춰서 붙여 놓은 다리는 짧았다. 당숙이 소개한 서울 제일의원을 3년을 다녔다. 잡아 늘리고 철심을 박아 놓고 기브스를 했다. 나중에도 논에 들어가 벼 밑둥이라도 밟으면, 전기가 오르는 듯 고통스러웠다.

논 일이 장화를 신고는 번거로운 것이어서 맨발로 들어가야 했는데, 다리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그 바람에 군대는 면제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릎에서 뼈가 닿는 소리가 난다.

어머니가 안씨 16살 때 돌아가셨다. 재혼하셨는데, 새어머니도 안씨 25살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누이들은 시집가고 동생은 서울로 유학을 가서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누이들과 이웃 사는 사촌이 번갈아가며 밥이며 반찬을 해주었다. 아버지는 입맛이 까다로우셨다. 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부터 아버지는 안씨에게 장가들라고 성화셨다.

혼담이 들어오면 아버지는 사주, 궁합이 맞아야 한다며 열 번도 넘게 상견례를 치르셨다. 그렇게 중매로 25살에 장가 든 안씨는 아들 형제를 두었다.

 

그렇게 엄하신 아버지가 이듬해 돌아가셨다. 장례를 집에서 치르는 사이에 각 처에서 문상이 오고 군에 가있던 동생이 오느라 5일장을 치렀다.

장례 다음 날 밥을 하려는데, 쌀이 없어졌다. 도둑이 들었다. 그 해에 처음으로 장리쌀을 먹었다.

더 기막힌 일은 안씨 보는데서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 간 사람이, 차용증이 없다고 빌려 간 적이 없다고 잡아떼는 것이었다. 그 돈은 아버지가 빌려다 꾸어 준 돈이었다. 졸지에 초상 치르고, 1천 여 만 원이 넘는 빚을 떠안게 됐다.

 

재경골은 재물 지을 해서 농사 지어 부자 동네라는 말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샘이 나는 곳이었다. 과천에서는 찬우물과 재경골이 물이 나는 동네였다. 농사짓기 좋은 물이 있는 곳이었다.

안씨는 논 이천 평을 직접 하고 밭은 전부 남에게 빌려 주었다. 밭을 빌려 채소를 심던 사람들은 화학 비료를 써서 농사를 하니 해가 갈수록 소출이 줄어들어 땅을 반납하곤 했다.

안씨는 직접 지어야겠단 생각으로 인분을 사들여 두엄 밭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곤 밭을 빌려간 사람들이 하는 농법을 보며, 영농일지를 써가며, 연구를 하고 밭농사를 배웠다. 천안 사는 이가 밭을 빌려 참외를 심더니, 큰 길가에 원두막을 짓고 신나게 장사를 했다. 그는 안씨에게 오이를 심으라고 일러주었다.

하지만 밭농사를 하려면 물을 퍼 올려야 했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때는 남자 둘 호흡이 맞아 밤새도록 졸면서도 퍼 올릴 수 있었다. 몸이 약한 아내는 하루 종일 물을 푸고 나면 밤새 앓았다. 어느 날 그렇게 부부가 마주서서 물을 푸다가 안씨는 두레박을 집어 던지고, 안양 나가서 양수기를 사 들고 온다. 동네에서 처음으로 양수기로 농사를 지었다. 호스도 없어서 천막집에 부탁해 천막지로 만들어서 물을 퍼 올렸다.

오이 농사가 그렇게 잘됐다. 아침에 따고 물 주고 나면, 그 다음 날이면 쑥쑥 자랐다. 아침에 경운기 가득 싣고 안양 남부시장에 가면, 경매인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현찰을 들려주곤 했다. 중매인들에게 값을 잘 받아 달라고 술을 사고, 함께 간 과천 친구들과 한잔 마시고는 오후 늦게 경운기를 몰고 관양동 길을 따라 돌아오곤 했다. 오이농사로 그 해에 1천 여 만원 빚을 거의 다 갚을 수 있었다.

 

인덕원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안씨네 문중을 대표하는 일도 18년을 했다. 과천소각장 뒤편에서 포일아파트 단지 부근 종중산이 대거 수용되면서, 흩어져 있는 산소들을 수습하는 일부터 해야 했다. 선산을 관리하는 일도 해야 했다. 가족납골당이 나올 무렵이었다. 안씨네 뿐 아니라 과천 외곽에 종중산을 가진 가문들이 대부분 종중산 관리로 골머리를 앓아야 할 때였다. 누구네는 산을 사서 가족납골당을 조성했는데, 물이 차서 다시 파내고 방수공사를 하는 일도 있었다.

안씨네는 수용되고 남은 산 속에 땅을 3미터 깊이로 파서, 양회로 채우고, 자갈을 깔고, 봉분형으로 앉히고, 140여 기를 조성했다. 자갈을 긁어내면 철심이 나오고, 그 핀을 들어 올리면 돌문이 열리고, 그 안에 유골함을 넣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종중 족보도 대구의 전문가를 찾아 정리해서 후임 종중 대표에게 넘겨주었다. 남은 일은 선산에 있던 조상의 묘비에 새겨진 옛 글을 해석해서, 축문에 반영하고 가문의 이야기를 글로 남겨 후손에 전하는 일이다.

 

 

(2020.11.28.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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