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생이예요. 본적은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이고요. 거기가 원래 아버지 고향이시고.....아버님께서 서울로 이주를 하셔서 우리 형제들이 7남매. 그 중에 장남. 아들이 넷 딸이 셋이예요.”

 

휘경동에 태창방직이라고 있었어요. 아버님이 거기서 근무를 하셨어요. 그래서 거기 사택에서 살았어요. 바로 위가 청량국민학교. 중학교는 경동중고등학교.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졸업하고 군대갔다 와서 바로 시험봐서 공무원이 됐지.”

 

공무원 시험은 국무원 사무처 그 전에 내각사무처였어요. 혁명 전에 장면 정부때 그때 함석헌 씨, 김영선 장관 태완선 장관 장준하 씨 그 팀들이 주력부대였어요. 장준하 씨가 그때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사상계를 하시고 함석헌 씨는 씨알의소리 하시면서 주축이고 장관으로서는 김영선씨 태완선씨가 부흥부장관하고.....그때 국무원에서 대학출신 학사출신 공채를 했는데 그때 내 기억으로는 2,100명인가 합격을 했어요. 그때 희망부서를 내무부에 써 냈는데.....내무부 써 내면 내무부 본부 을지로로 가는 줄 알았지. 그랬더니 경기도에 배속을 한거야. 경기도에 떨어졌는데 경기도에 사업소에 떨어졌어. 안양 종축장이라고 있다구. 종축장이 뭐 하는지도 모르고 들어 간 거야. 종자개량하고 보급하는......종축장에 배속이 되서 5·16이 난 거야. 우리는 31일자로 해서 국토건설추진위원회라고 해 가지고..... 3개월 수습을 했는데. 용인에서 3개월 수습을 하고 51일에 안양종축장에 배속이 됐는데 거기서 5·16이 나가지고 내 자리가 없어졌어. 그런데 나를 화성군청으로 보낸 거야. 화성군청이 수원에 있었어. 그 다음에는 경기도청으로 갔지.”

 

그때 경기도청이 광화문에 있었어요. 청와대 경무대 앞에 지금 종합청사 맞은편에......집에서 다녔지. 근데 68년이 되니까 도청이 이전하는거야. 수원으로. 그래 또 이전을 하는 거지. 그래 출퇴근이 어려우니까 수원으로 이사 간 거지. 수원집 팔고 방배동으로 이사 갔다가 그 다음에 이제 또 방배동에서 87년도에 도에 국장할 때 과천으로 이사 한 거야. 그래 국장하면서 출퇴근 한 거지.”

 

몇 군데 군수를 하고 국장으로 경기도에 들어 온 거지. 가평군, 남양주군, 시흥군 하고 국장이 됐다가 국장도 두 번 거쳐 지역경제국 내무국 거쳐가지고 그 다음에 미금시장하고 교육 갔다가 오산시장 갔다가 과천시장 왔다가 기획관리실장 했는데.....또 그 다음해에 선거가 있게 되니까...이제 내가 그때 한 4년인가 남았어요. 그땐 만60세 정년인데 4년인가 남았는데 박제상 의원이 공천 줄 테니까 출마하라고 다 도와주겠다고.....몇 번을 처음엔 사양했다가.....4년 남았는데. 그땐 시장 임기가 3년이니까 손해란 말이야? 그러다가 나왔는데 그랬더니 도와주기는 뭐 다 자기가 하는 거지. 당에서 도와주는 건 뭐 없어. 다 자기가 하는 거야. 그래 가지고 초대민선 하고.....2대도 사실은 내가 할래서 한 게 아니구. 여기 이용석 사장하고 얽힌 얘긴데. 돈 주고 받고 주유소 허가 관련해서 투서가 검찰에 들어가 가지고 이사장하고 나하고 얽혀가지고 수원교도소에 가서 한 8개월 있었지.”

 

그래 가지고 그 고생을 하고 있었어요. 무죄로 나오고 나니까 주위에서 명예회복 해야 될 거 아니냐 그래서 재선 나오게 된 거고. 그 다음에 3선 나올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주위에서 권유도 하고 그랬는데 내가 뭐 명예회복하고 했으니 사양했지요.”

 

지금의 과천. 에어드리공원, 과천지식정보타운, 관문체육공원, 과천과학관...... 이성환 시장이 30년 전에 만들어 놓은 이름인데 지금도 전혀 낯설지 않다.

 

그때 시장하면서 이제 우리 과천의 교육, 문화, 체육 이 부문에 중점을 두고서 그래서 교육적인 측면에서 학교지원을 많이 했고, 초등학교 무상급식도 전국에서 처음으로 했지. 도서관도.....체육공원도 두 개.....거기 역점을 뒀지. 애향장학금은 내가 있을 때 원래 1천억 목표였어요. 그런데 내가 세워놓고 나온 게 200억원이었는데 지금도 200억원 그대로야. 소각장도 원래 그 전에서부터 지지부진 했어. 나 있을 때 짓기 시작해 가지고 사람이 죽기도 했잖아? 그래서 문원동에 보상도 여러가지 하고......그 새마을회관두 사실은 나 있을 때 시에서 지어줬거든. 건물은 시에서 지었지만 신학수 회장이기금을 많이 내고 해서 그래서 그게 세워 진거야. 그래서 과천시새마을회관 꺼떡없이 자생해서 잘 운영되고 있지.”

 

지금과 다르게 당시 공무원들은 이용석씨 표현대로 거의 미치다시피 일했다. 경기도 사회과장을 할 당시 안양·시흥지역에서 수해가 크게 났는데 수습하느라 20여 일을 꼬박 사무실에서 자면서 일하곤 했다. 일을 하기 위해서 예산을 타내기 위해서 상급기관을 찾아다니며 졸라야 했다.

나중에 민선시대가 되고나선 경기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일할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공무원을 시작하면서 다른 길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돈에 눈을 돌렸더라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회없이 일했다. 지방자치제가 시작되지 않았더라면 부지사까지는 했을거란 생각을 한다.

 

두 번째 선거때 당을 옮겼는데 그때 난 안 간다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 멤버들 있잖아 측근들이 너나 할거 없이 다 옮겨야 된다는 거야. 나 한사람만 반대야. 날 도와주는 사람들이 똑같이...... 그래 내가 그걸 어떻게 이기느냐고? 이구동성으로 그러는데 도리없이...... 그러고나니까 어려움이 산적했어. 근데 거기도 벌써 하려는 사람이 있고...... 그런데 지역위원장은 내가 온다면 아주 대환영이라는거야. 내가 감으로써 여러 가지 희생이 따르고.... 그러면서도 그때도 내가 그 사람들한테 공약한 거는 나는 이번 한번만 하고 말겠다. 거기서도 그 약속을 내가 한 거고. 내가 인제 그 약속한 게 가장 중요한 거고. 그 다음은 내가 날 돌아보더라도......내가 그러면 70이 넘어요 나이가. 3선을 해서 업무를 수행하면 70이 훨씬 넘는다고......그게 둘째고 그 다음에 시대가 많이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거 아니냐? 그러면 새사람이 해야지. 또 자라 나오는 사람도 있고...... 이런 이유가 합해져서 난 더 안 한다. 3개 군수하고 3개 시장하고 여기서 2번 민선시장 했으면 난 할 만큼 다 했잖아? 뭘 거기서 더 욕심부리느냐구.”

 

이시장 때 과천초등학교축구부, 문원중학교축구부, 과천고등학교축구부가 생겼다. 버스 사주고 합숙소도 만들어 주는 등 지원을 많이 했다. 그 결과 국가대표, 프로축구 선수들이 배출된다. 장애인단체 등 각종 단체들의 요구도 최대한 들어주려고 애썼다.

당시는 경마장 마권세가 있어서 여유가 있었다.

 

옛날 공무원 생활은 어땠을까? 대우는 좋았을까?

 

좋은 편이 아니었지. 우리 때 들어간 사람들이 30년 생부터 35년 생들이야. 들어간 그때 서너댓살까지 차이가 나. 우리 동기들 보면 34년생이 제일 많았어. 60년도에 시험봐서 합격자 발표하고 61년에 수습 나가고..... 그때 월급이 21,000원이야. 그때 광화문 공무원 할 땐데 그때 밀가루 배급도 주고 그랬어요. 내가 말단 아냐? 계장이 어디 출장 간다 그러면 수중에 돈이 없잖아? 그러면 전당포 가서 시계를 맡기고.....버스비가 없어서....그래 가지고 출장 다녀오고 나중에 정산되면 찾아오고 그랬을 때야.”

 

관선시장과 민선시장을 다 해본 그에게 장단점을 물어봤다.

관선시절이 좋았다는 얘기는 울타리가 있었다는 얘기야. 예를 들어 내가 시장인데 조금 뭐 불리한 게 있고 그러면 도지사가 커버해 주는 거야. 공무원끼리 커버해주는 거야. 민선은 그게 없지. 근데 민선은 일을 하는 데는 자기 소신껏 자기 책임 하에 일할수 있지. 지금이야 지방자치제가 발전되서 의회에서 통과 시켜주지 않으면 시장이 하고 싶어도 일을 못하잖아?”

 

(재임하시는 동안 큰 재난은 없었나요?)

 

수해 한번. 과천동에 수해 한번 크게 났었지. 그래서 그 뒤로 거기에 담을 쌓았잖아?”

 

(2019.10.22. 해원(옛 그레이스호텔 지하 일식집)

이용석, 정재성, 김용현)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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