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남 씨는 1940년생이다. 과천초 40회다. 안양중학교를 2년까지 다녔다. 지금 과천과학관자리에서 양계장을 했다. 닭이 3천 마리나 됐다. 일찍 영등포공구상가에 가게를 차렸다. IMF로 부도가 나서 살던 집까지 처분해 정리했다. 그 여파로 죽지 않으려고 운동을 했다.

 

박씨는 흑석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가 과천으로 이사 오시면서 과천에서 자랐다. 궁말에서 자랐다. 궁말에 박씨들이 많이 살았다. 형제가 사남이녀였는데 동생 하나가 뇌종양으로 일찍 죽었다. 서울대병원이 처음 문을 열 무렵 그리 데리고 다니며 고치려 했지만 살리질 못했다.

 

허약했던 소년은 안양중학교에 입학했다. 읍내 친구네 집이 삼거리에서 자전차포를 했다. 아침이면 소년을 뒤에 태우고 학교를 다녔다. 15km를 걸어서 다니기는 쉽지 않았다. 아침이면 선도부에게 걸려 혼이 나곤 했다. 2학년을 다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당시 월사금은 큰 부담이었으며 농사에는 일손이 필요했고 굳이 더 다녀야 할 이유도 없었다.

 

박씨네는 지금 과천과학관 자리에서 양계장을 했다. ‘지금 과학관 마당에 로켓이 서 있는 자리라고 지목했다. 닭이 3천 마리. 닭을 키우다보니 사료장사도 하게 됐다. 삼거리에서 사료가게를 차렸다. 지금 서울대공원 안쪽 맹금류관 근처에 살던 전 과천문화원장 최종수씨네가 닭을 키웠는데, 지금도 그 집 사모님이 삼거리에서 비료를 머리에 이고 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고.

 

아내 김씨는 같은 동네서 자란 9살 아래 동생이었다. 아내의 작은 아버지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면사무소 뒤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과천 보도연맹 사건은 동네에서는 큰 변고였다. 전쟁이 나고 밀려들어 온 북한군들은 보도연맹을 조직했고 그들이 앞장서 그해 가을걷이 때 동네를 돌며 추수한 곡식들을 수탈했다. 자의반, 타의반 동네사람들 중에는 심부름을 하거나 탄약을 옮기는데 동원됐다. 국군에 의해 수복이 되고 난 뒤에 청년단이 조직되었다. 북한군에 협조한 사람들과 보도연맹에 가담한 사람들을 잡아다 고문하거나 처형했다. 과천 뿐 아니라 온 나라 곳곳에서 벌어진 참극이었다.

김씨는 어려서부터 삼촌네서 자랐다. 한 동네서 자란 박씨는 김씨를 데리고 다녔다. 당시 읍내 ○○씨는 동네일을 보면서 노래자랑을 열었다. 마을의 큰 행사였다. 박씨는 노래 잘하는 김씨를 무대 위로 올려보내 상을 타게 했다. 그러던 그녀와 결혼해 21녀를 두었다.

 

청년시절 박씨는 이웃에 있던 장막교회를 기억한다.

 

부천신앙촌에서 사람들이 많이 과천으로 왔지. 몇 해 안가서 교회도 크게 지었더라구. 청계산 폭포 근처에는 유재열의 별장도 있었어. 유재열을 어린양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은 무척 표정이 밝고 거리를 다니면서도 활기차게 노래를 부르며 다니곤 했어.”

 

지금의 서울대공원 앞 청계호수는 본래 막계저수지였다. 해방 후에 일정 때 수리조합장을 지내신 분이 나서서 예산을 타내서 농업용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그 저수지를 지은 후에서야 과천사람들이 쌀 구경을 하게 됐다. 그리고 광창마을 일대가 논이 되면서 과천 최고의 부촌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저수지 축조를 놓고 사건들이 많았다. 저수지 공사를 맡은 이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저수지 아래 논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기극이 난무했다. 박씨네도 그중 하나였다.

 

술을 좋아하시던 부친이 동네 건달패에 속아 4천 평 논을 전부 날리게 된다. 술잔을 앞에 놓고는 형님네 논을 담보로 돈을 빌려다 사업을 해서 크게 불려 주겠다. 나중에 빌린 돈을 갚으면 논이야 그대로 있는 거니까 손해날게 없다.’며 꼬드겼다. 몇 해가 지나자 은행에서 압류가 들어왔다. 돈을 빌려 쓴 사람은 종적을 감춘 뒤였다. 박씨가 그 집을 찾아가도 아내는 남편이 집을 나가서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잡아뗐다. 박씨는 궁리 끝에 안양경찰서에 사기죄로 고발했다. 경찰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 그걸 받아든 그 집 부인은 외출을 하더란다. 박씨는 동네 친구에게 미행을 시켰다. 부인은 서울역 뒤 서부역 근처 다방에 가서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란다. 한참을 지나서 남자가 나타났고 미행 간 친구가 그가 지내는 여인숙을 알아냈다. 그리고는 다른 친구를 그 여인숙 옆방에 들게 했다. 당시 쌀 한가마 값을 수고비로 줬다. 며칠 뒤 날짜 약속을 하더라는 소리를 엿듣고 덩치 좋은 친구들과 여인숙 앞을 지키고 섰다가 잡아서는 안양경찰서에 넘겼다. 그러나 40여만 원을 받은 것을 끝으로 박씨네 논 4천 평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1978년에 영등포 공구상가에 기름가게를 차렸다. 유공의 윤활유대리점이었다. 동네서도 신 모, 이 모씨네 보일러에 기름을 넣어주곤 했다. 당시 기름보일러가 있는 집은 부잣집이었다. 곧잘 되던 장사였다. 하지만 IMF가 터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박씨뿐 아니라 당시 상인들은 가계수표, 당좌수표, 약속어음 세 가지로 거래했다. 길게는 6개월 뒤에 현금을 준다는 약속증서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로는 보편적인 거래관행이었다. 이 약속 증서를 결제할 현금이 걷히질 않았다. 그 어음들을 결제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

 

부도가 나니까 수금이 안되서...... 그때 내가 등촌동에 3층짜리 집을 지었어요. 입구에 돌기둥을 해가지고.... 그때만 해도 잘 지은 집이었어요. 그게 한중신용은행에 담보를 해가지고 어음을 끊었거든. 그게 넘어가고.....지금도 그리 다니면 눈물이 날 정도예요. 다 정리하고 친구들이 도와줘서 세를 들어갔어요. 지하로 15계단 내려가는 집. 지하2층에 빛이 안 들어와 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집으로 들어갔어요.”

 

당시 공구상가에서 장사하던 친구들 여럿이 죽었다. 돈은 수금은 안 되고 어음은 돌아오니 막아야 하고.......속이 상해서 술만 먹다가 죽은 친구들이 여럿이었다. 화를 풀 길이 없어 죽어 넘어가는 친구들을 보고 박씨는 안 되겠다 싶어서 몸을 움직였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대문이라도 발로 걷어차고 싶지. 그럴 때는 몸에 부하를 걸어줘야 해요. 등촌동 새마을운동본부가 있는 우장산엘 가죠. 산에 가서 몸을 혹사시켜요. 부도가 나서 남대문경찰서, 치안본부로 조사를 받으러 다닐 때였는데 저녁 일곱 시에 조사 받으러 오라 그러면 아침에 산에 가서 하루 종일 운동을 했어요. 그리고는 저녁에 경찰에 조사받으러 가는 거야.

그때 술로 풀던 사람들은 다 죽었어. 운동한 나만 살았지. 술이 나쁜 적 이예요. 지금도 저기 월드컵경기장 매봉산 둘레길이 7킬로미터야 1만보거든. 또 양수리 가면 물을 내려다보면서 걷는 자전거 길이 있는데 거길 걸어요. 지금도 약을 안 먹어 혈압약도 안 먹는다고 의사가 그래. 나이 팔십에 약도 안 먹고 건강하시다고......”

 

세브란스병원 경비로 취직했다. 밤샘 근무를 하고도 아침이면 신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의정부에서 내려서 사패산을 올랐다. 포대능선을 따라 우이동으로 내려 왔다.

 

지금 거기 길이 다 막혔어. 포대능선 그거 험하잖아. 산중이라 험한데 저번에 옛날생각이 나서 가보니까는 죄 울타리를 쳐놓고 막아 놨더라구. 집들이 죄 들어앉았어.”

 

지금도 박씨는 치과 기공소에서 수도권 치과로 보내는 물건을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전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사업이 망하고 돈이 없잖아요. 난 아프면 병원 갈 돈도 없고 죽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운동을 해요. 운동 때문에 살았어요.”

 

박씨는 집안에서도 할 수 있는 스쿼트 운동을 가르쳐 줬다. 싱크대 앞에 방석을 깔아 놓고 씽크대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몸을 좌우로 비튼다. 100번을 하고 다리를 바꿔 다시 100. 이렇게 하는 것 만으로도 혈압이 오르는 일이 없고 허리 아플 게 없다고 가르쳐줬다. 주변에 만나는 친구마다 이 스쿼트를 가르쳐 주었다.

 

운동에 빠진 박씨는 좋은 물을 마시는 것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영등포에서 유공 윤활유 대리점을 할 때 산악회를 다녔어요. 백두대간 종주를 몇 번 하고 한라산을 세 번 가고.....,설악산은 수도 없이 갔지. 갈 때는 페트병 큰 거 6개를 배낭에 넣고 가요. 그게 몇 킬로그램 돼요. 치악산 가면 산꼭대기에 약수가 나와 그걸 담아 지고 내려 오는거야. 전국의 약수를 다 찾아 다녔어. 진천가면 초정약수, 오대산 월정사 방아다리 약수, 설악산 오색약수, 제주도 가면 한라산 약수......,다 찾아 다녔지. 좋은 물이 효과가 있었나봐.”

 

(2021.6.4. 과천문화원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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