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안에서 난 윤씨는 6남매였다. 위로 15대부터 과천서 살았다. 지금 3단지에서 청계산 쪽으로 세곡마을 입구쯤이다.

 

머루와 으름을 따 먹으러 산으로 다니던 때가 최고였지. 밤이면 닭을 노리고 내려오는 살쾡이를 쫓기위해 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고..... 이른 아침에 읍내에 나가는데 커다란 개가 따라와. 돌을 주워 던지니까 달아나는데, 그걸 쫒으러 가니까 원두막에서 참외를 지키시던 동네 어르신이 이 놈아, 저건 개가 아니고, 늑대다.’ 하시던 생각이 나.”

 

휴가를 나왔는데,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어. 세곡마을 동네 아이들이 산에 올라 갔다가 고양이 새끼 같은 걸 안고 내려왔어. 어른들이 범새끼라고 큰일 났다는거야. 그래 장정 여럿이 산에 올라가 주워왔던 자리에 내려놓고 오기도 했어.”

 

초등학교 2학년때 6·25가 났다. 마을에 들어 온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했다. 그해 짓고 있는 농산물은 현 경작자가 갖게 하고 이듬해 부터는 땅을 전부 몰수해서 그 마을 사람 수대로 나누어 주었다.

 

학교엘 갔더니 음악선생이 장백산 줄기따라...... 김일성 장군님......’ 노래를 가르치는 거예요. 지금도 가사를 보면 부를 수 있어요. 학교가 파해서 집에 오니 마루에 비스듬히 누워 계시던 아버지께서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으셔요. ‘학교에 다녀 온다고 했더니, 베고 계시던 목침을 냅다 제게 던지시는 거예요. 달아났죠. 해가 지고 들어가니, 어머니께서 낮에 땅을 모두 빼앗기셨다고 그러시더라구요.”

 

가을이 되자 인민군들이 공출을 나왔다. 밭에서 여물기 시작하는 벼, 조 이삭을 잘라서 낱알을 세고는, 그 밭에서 나올 양을 가늠하고는, 거기 맞춰 자기들에게 내야 할 양을 정해 통보하는 식이었다.

 

나를 밭에 들여 보내 이삭을 뽑아오게 하고는, 저희들이 세는 거예요. 호박도 넝쿨을 따라가며 순을 세어서 이 밭에서 1천개 나겠다. 700개를 공출내라.’는 거예요. 막상 수확해보아서 6백개 밖에 안나면 옆집에서 빌려다 700개를 내야 했어요. 호박은 전시물자였어요.”

 

그렇게 가을이 지나고 1·4후퇴 때 윤씨네도 피난을 갔다. 10살 윤씨는 집안 재산인 회중시계를 업고 충청도 직산까지 갔다.

 

의왕 갈미에서 하루 자고 수원역으로 갔어요. 역앞에 아는 이가 사는 집을 찾아갔는데, 피난가고 집이 비어서 빈 집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아침 수원역으로 갔어요. 열차에 사람이 가득 차서 지붕에 이불이며 짐보따리를 올리고 오르려는데, 아버지께서 날이 춥고 위험해서 안되겠다고 걸어가자셔서 짐을 다 내리고 기찻길을 따라 걸어갔죠. 한 시간쯤 걸었나. 먼저 출발했던 기차가 폭격을 맞아 탈선한거예요. , 머리가 따로 나뒹굴고 피가 흥건해요. 그 곁을 지나서 내려갔어요. 오산 쯤 가다가 쉬는데, 젊은여자가 애기를 업고 머리에는 짐을 이고 아이 하나는 손을 잡고 걸어가더니, 길 옆에 애기를 내려 놓고는 이불로 싸 놓고는 걷는 아이만 데리고 가더라구요...... 평택에 갯골이란데가 있어요. 뻘이예요. 저녁 무렵 건너가다가 빠지면 사람들이 잡아당겨도 빼낼수가 없을만큼 깊은 늪이더라구요. 그 밤에 건너가다가는 죽겠다 싶어요. 아버지께서 날이 밝으면 건너가자 하셔서 그 얼음판에 짚을 깔고 누웠어요. 밤새 누군가 돈암동 아무개야하며 잃은 사람을 찾는 소리가 지금도 쟁쟁해요. 다음날 날이 밝아 다시 길을 나서는데, 얼음판 위로 팔이 나와있고, 저쪽엔 머리 뒤가 보이고, 좀 더 가면 등판이 보이고....., 처참했어요. 그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왔어요. 10살 난 내가 허리까지 찬 눈을 헤치고 걷기 힘들만큼......”

 

과천초등학교 41회를 졸업한 윤씨는 안양중학교 안양공고 전기과를 거쳐 서울 동양금속에 시험을 봤다. 150:1로 공무직에 입사한다. 동양금속은 알루미늄 회사였다. 방위산업체로 재편되면서 야간대학을 졸업한 윤씨는 국산 무기 개발의 주역이 된다.

 

진주에 출장을 가서 회식을 하고 숙소에 들어가니, 내일 아침 10시 전방 ○○고지에 무기 성능시험에 참여하라는 연락이 와있어. 진주경찰서 가서 사정을 설명하니 부산역 가는 택시를 잡아주었지. 부산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아침 6:40에 서울역에 내려서 회사에 전화를 하니, 사장이 차를 보내주대. 그걸 타고 전방까지 내리 달리는 거야. 검문소마다 신분증 내보이고 사정을 설명하고...... 그렇게 바주카포, 수류탄, 나중에는 국산미사일 1호까지 개발하는 일을 했어.”

 

바주카포에 들어가는 60mm 포탄에 화약을 넣고, 터뜨려보는 실험을 안산 고잔에서 했어. 한국화약이 간척한 땅이었거든.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비율은 어떻게 되는지, 아무것도 기본 데이터가 없는 데서 하나 하나 실험해보고 개선해가면서 했지.”

 

윤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농업사회를 중화학공업 사회로 바꾼 지도력을 높게 평가한다.

 

차관을 얻어서 기계를 들여 오고 군수품을 개발하는 회사를 차린 기업들이 처음에는 생산능력에 비해 터무니 없이 작은 정부의 주문에 적자를 면치 못하자, 불평을 해댔지. 그게 대통령 귀에 들어가자, 어느 날 청와대로 불러 모으고는 내가 총알이나 만들자고 기계를 들여오게 한 줄 아느냐? 왜 그걸로 산업장비를 만들어 팔 생각을 못하느냐?’고 야단을 치는 거야. 그때 동양, 풍산 같은 기업들이 선반, 밀링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지.”

 

회사를 나온 윤씨는 창업을 한다. 5명이 시작한 회사는 300여 명의 직원을 두고 코스닥 상장까지 하는 데 성공한다. 과천 출신 창업 기업인으로서는 흔치 않은 케이스다.

 

일본 제품을 수입하는 딜러를 겸했는데, 박람회를 하면 17개국에서 딜러들이 모여. 그 모임에서 회장을 몇 년을 했어. 자존심에 일본말을 않고, 한국말로 했지. 그런데 한국말을 영어, 일어로 통역을 하면 아프리카, 유럽, 남미.... 17개국 서로 다른 말을 하는 딜러들이 서로 통역을 해. 그러면 뜻이 통해. 참 재미있었지.”

 

한번은 내가 만든 밸브를 이탈리아에 수출했는데, 피아트에서 그 밸브를 단 장비를 브라질에 수출했네. 공장이 가동을 못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어. 그래 우리 영업담당하고 기술담당이 로마로 날아가서, 다시 브라질로 가서 고쳐 준 적이 있어. 13천원짜리 밸브를 고치러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찾아간 남한 사람을 보고, 놀라던 브라질 사람들이었어. 그때 남미의 기술력이 그랬어.”

 

65세에 은퇴한 윤씨는 노후를 보낼 곳을 찾아 2년 간 전국을 다닌다. 그러다가 평창 650고지에 자리 잡는다.

 

공기가 좋고 숲이 좋아. 진부까지 10분 정도면 돼고..... 구급차로 강릉을 가는 시간이면, 과천에서 안양 한림대병원 가는 것과 비슷할 걸?”

 

(2021.11.22. 과천문화원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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