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석준 씨는 1945년 갈현리에서 태어났다. 인덕원 경계 재경골이다.

 

순흥안씨 충의공파 승지공 포현파라 하는 세거리 순흥안씨네는 평택 진위면에 세거하다가 안방(安舫)17세기 전반에 세거리로 입향해 이후 후손들이 살아 온 지역이다. 안석준 씨가 14대째다.

 

17세 안방은 승지(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를 지내셨다. 지금 포일아파트 단지로 개발된 지역에 대부분의 땅이 수용되었지만 아직도 선산이 거기 있다. 안양, 의왕과 붙은 재경골은 3개 면에 접해 있는 동네라 선거 때면 3개 시 후보자 홍보물이 다 집에 꼽혀 있곤 했다. 세거리라고 불렸다.

 

석준씨 아버지는 엄한 양반으로 소문 났었다. 모를 낼 때는 열 명, 스무 명의 일꾼이 있어야 했는데, 어지간하면 안서방네 일하러 가기를 꺼릴 만큼 엄하셨다.

 

위로 누나가 셋, 아래 남동생이 하나다.

 

전쟁이 나서 1·4후퇴 때는 이불이며 짐들을 지고 피난길에 나섰으나 아버지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가지다. 돌아가자.’하셔서 식구들이 되돌아 왔다.

 

7살에 학교엘 갔다. 누이는 한 해 늦게 9살에 가서 함께 다녔다. 제 나이보다 1년을 늦게 들어간 누이는 공부를 잘해 5학년 때 월반을 했다. 동생도 공부를 잘해 1학년 때부터 반장을 도맡아 하곤 했다.

아버지는 안씨가 공부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늦게까지 공부라도 할라치면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와 석준이를 늦게 보내주면 소가 굶는다.”시며 데리러 오실 정도였다.

 

안씨네 안마당이 넓었다. 동네 아이들이 학교 갔다 돌아와 꼴을 베어서는 안씨네 마당에 내려놓고, 어울려 공을 차고 노는 모습이 부러웠다.

안씨는 종일 밭일을 하다가, 해가 꼴딱꼴딱 넘어갈 무렵에야 꼴을 베러 나갔다. 아버지가 밭일 다 마치고 어두워지면, 그 시각에야 내 모는 것이었다. 밤늦도록 꼴을 베어다가 마당에 내려 놓으면 작두질을 해야 했다.

스무 살 어느 날, 한 밤 중에 작두질을 하다가 안씨는 문득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분김에 작두질을 해대는데 밑에서 풀을 넣던 아버지가 손을 잘릴 뻔 했다. 화가 나신 아버지는 지게 작대기를 휘두르셨다. 그 밤으로 안씨는 세상 구경이나 하다가 죽겠다는 맘을 먹고 가출한다.

부산으로 갔다가 마산으로 해서 전주에서 한옥 처마에서 석양을 보고 있으려니 처량했다. 돈이 없어서 전주에서 기차를 훔쳐 탔다.기차 안에서 빵을 훔치다가 걸렸다. 시비가 붙었다. 중학교 다닐 때 당수를 배웠던 안씨였다. 처음 두 놈을 때려 눕혔는데, 떼로 달려들었다. 밀리다가 열차로 오르는 문 난간을 잡고 버텼다. 기억은 거기 까지였다.

 

눈을 떠보니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 수원의 한 병원에서 눈을 떴다. 기차가 병점 인근을 지나는 사이에 안씨는 걷어 채여 떨어졌고, 기차길 옆 전주에 부딪혀 돌아 떨어지면서 다리가 으스러졌다.

수원의료원에서 대충 맞춰서 붙여 놓은 다리는 짧았다. 당숙이 소개한 서울 제일의원을 3년을 다녔다. 잡아 늘리고 철심을 박아 놓고 기브스를 했다. 나중에도 논에 들어가 벼 밑둥이라도 밟으면, 전기가 오르는 듯 고통스러웠다.

논 일이 장화를 신고는 번거로운 것이어서 맨발로 들어가야 했는데, 다리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그 바람에 군대는 면제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릎에서 뼈가 닿는 소리가 난다.

어머니가 안씨 16살 때 돌아가셨다. 재혼하셨는데, 새어머니도 안씨 25살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누이들은 시집가고 동생은 서울로 유학을 가서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누이들과 이웃 사는 사촌이 번갈아가며 밥이며 반찬을 해주었다. 아버지는 입맛이 까다로우셨다. 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부터 아버지는 안씨에게 장가들라고 성화셨다.

혼담이 들어오면 아버지는 사주, 궁합이 맞아야 한다며 열 번도 넘게 상견례를 치르셨다. 그렇게 중매로 25살에 장가 든 안씨는 아들 형제를 두었다.

 

그렇게 엄하신 아버지가 이듬해 돌아가셨다. 장례를 집에서 치르는 사이에 각 처에서 문상이 오고 군에 가있던 동생이 오느라 5일장을 치렀다.

장례 다음 날 밥을 하려는데, 쌀이 없어졌다. 도둑이 들었다. 그 해에 처음으로 장리쌀을 먹었다.

더 기막힌 일은 안씨 보는데서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 간 사람이, 차용증이 없다고 빌려 간 적이 없다고 잡아떼는 것이었다. 그 돈은 아버지가 빌려다 꾸어 준 돈이었다. 졸지에 초상 치르고, 1천 여 만 원이 넘는 빚을 떠안게 됐다.

 

재경골은 재물 지을 해서 농사 지어 부자 동네라는 말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샘이 나는 곳이었다. 과천에서는 찬우물과 재경골이 물이 나는 동네였다. 농사짓기 좋은 물이 있는 곳이었다.

안씨는 논 이천 평을 직접 하고 밭은 전부 남에게 빌려 주었다. 밭을 빌려 채소를 심던 사람들은 화학 비료를 써서 농사를 하니 해가 갈수록 소출이 줄어들어 땅을 반납하곤 했다.

안씨는 직접 지어야겠단 생각으로 인분을 사들여 두엄 밭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곤 밭을 빌려간 사람들이 하는 농법을 보며, 영농일지를 써가며, 연구를 하고 밭농사를 배웠다. 천안 사는 이가 밭을 빌려 참외를 심더니, 큰 길가에 원두막을 짓고 신나게 장사를 했다. 그는 안씨에게 오이를 심으라고 일러주었다.

하지만 밭농사를 하려면 물을 퍼 올려야 했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때는 남자 둘 호흡이 맞아 밤새도록 졸면서도 퍼 올릴 수 있었다. 몸이 약한 아내는 하루 종일 물을 푸고 나면 밤새 앓았다. 어느 날 그렇게 부부가 마주서서 물을 푸다가 안씨는 두레박을 집어 던지고, 안양 나가서 양수기를 사 들고 온다. 동네에서 처음으로 양수기로 농사를 지었다. 호스도 없어서 천막집에 부탁해 천막지로 만들어서 물을 퍼 올렸다.

오이 농사가 그렇게 잘됐다. 아침에 따고 물 주고 나면, 그 다음 날이면 쑥쑥 자랐다. 아침에 경운기 가득 싣고 안양 남부시장에 가면, 경매인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현찰을 들려주곤 했다. 중매인들에게 값을 잘 받아 달라고 술을 사고, 함께 간 과천 친구들과 한잔 마시고는 오후 늦게 경운기를 몰고 관양동 길을 따라 돌아오곤 했다. 오이농사로 그 해에 1천 여 만원 빚을 거의 다 갚을 수 있었다.

 

인덕원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안씨네 문중을 대표하는 일도 18년을 했다. 과천소각장 뒤편에서 포일아파트 단지 부근 종중산이 대거 수용되면서, 흩어져 있는 산소들을 수습하는 일부터 해야 했다. 선산을 관리하는 일도 해야 했다. 가족납골당이 나올 무렵이었다. 안씨네 뿐 아니라 과천 외곽에 종중산을 가진 가문들이 대부분 종중산 관리로 골머리를 앓아야 할 때였다. 누구네는 산을 사서 가족납골당을 조성했는데, 물이 차서 다시 파내고 방수공사를 하는 일도 있었다.

안씨네는 수용되고 남은 산 속에 땅을 3미터 깊이로 파서, 양회로 채우고, 자갈을 깔고, 봉분형으로 앉히고, 140여 기를 조성했다. 자갈을 긁어내면 철심이 나오고, 그 핀을 들어 올리면 돌문이 열리고, 그 안에 유골함을 넣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종중 족보도 대구의 전문가를 찾아 정리해서 후임 종중 대표에게 넘겨주었다. 남은 일은 선산에 있던 조상의 묘비에 새겨진 옛 글을 해석해서, 축문에 반영하고 가문의 이야기를 글로 남겨 후손에 전하는 일이다.

 

 

(2020.11.28. 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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