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호씨는 19427월 하리에서 났다. 동네 이름이 지령고개였다. 큰길로 서울에 가는데, 산으로 질러가는 길이라고 지름길이 있었다.

 

고비군수를 지내신 선조께서 과천에 터를 잡으신 이후, 신태호씨가 13대다. 청계산에 누우셨다. 신학수 문화원장과 일가다. 신씨네 일가가 번성해서 하리 인근에 모여 살았다.

 

7남매 중 5째로 났다. 첫째 누님은 2020년 현재 아직 생존해 계시고 내년이면 92세가 되신다. 위에 형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1살 위인 누이가 6·25때 돌아가시고 아래 남동생도 죽어서 아들은 혼자인 셈이다.

 

7살에 과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한내를 건너지 않고, 둑길을 따라서 등교했다.

 

3학년 때 전쟁이 나면서, 학교가 불타서 운동장 바닥에 움을 파고, 가마니를 깐 움막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여름이면 학교 뒤 산소에서 나무그늘에 칠판을 걸어놓고 공부했다. 비가 오면 일찍 파하곤 했다.

 

선친께서는 생전에 베로 도포를 만들어 두시고는 당신께서 돌아가시면 입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옷을 기제사 때면 꺼내 입으시고, 기제사에 임하셨다고 전한다.

진짜 베를 구하시느라고 애를 쓰셨다고. 선친께서도 진짜라고 구해서 입고 돌아가셨던 그 옷도 나중에 납골당 하느라고 파보니, 나일론이 섞였더라고......

신씨는 가족 납골묘를 만드느라 50여 기를 파서 수습했는데, 근래에 쓰신 분들은 거의 다 나일론이 섞였더라고 말했다.

 

신학수 문화원장 부친 돌아가셨을 때, 과천장의사에서 보내온 수의로 최종수 전 문화원장과 셋이서 염을 했는데, 끊어지더라고.....베는 닥나무를 벗겨 가지고 만드는 거라서 끊어지는게 당연한 거였어. 광목이 섞였던거지.”

 

6·25 나서는 소 마차 끌고 청계산 응달말 종수네 동네 하루 자다가 비가 와서 도로 돌아오고. 9·28수복 무렵인가 가을에 사기막골 산꼭대기 광수네 집으로 피난을 갔다. 세 번째는 겨울에 지금 화성시 송산면 사강에 이모가 있는데 거기를 소 마차 따라서 걸어서 갔다.

 

신학수 문화원장네가 큰댁이라 함께 갔는데, 작은댁 소는 인덕원 못미쳐 세골(재경골)에서 내려오는 작은 개울에서 큰댁 소는 약해서였는지 그 개울을 못 건너서 못가고, 신씨네와 작은댁만 내려갔다. 사강 둥그리(동진마을 지금의 화성 송산면)라는 동네에서 겨울을 지냈는데 인민군이나 중공군은 보지 못했다.

 

중학교는 송재수 교장이 계셨던 관악중학교(나중에 한일중학교)를 다녔다.

지게를 교문에 대놓고, 공납금(사친회비) 내고 나오시던 아버지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술회한다.

 

나중에 양재동(당시 광주군 원진면 또는 과천 동면 그리고 말죽거리라 불렀다) 은광중학교(설립자 이강목. 현재 양재사거리에서 성남 방향 7,80미터 오른쪽에 원진국민학교와 같이 있었다.)

 

그때 과천에서는 채미(참외), 오이, 토마토 등 채소농사를 많이 했다. 신씨 선친 어르신들은 마차 끌고 상도동, 영등포, 남대문시장까지 내다 팔았다. 여자들이 이고 다니는 건, 가까운 흑석동이나 상도동, 노량진 잘 가야 용산까지 가는 거였고.....

 

1963년 강원도 인제군 소하면 소하리 최전방 군대에 가서, 1966년에 제대 포병대대 통신 주특기로 갔다. 서울 인근에서 복무하던 군인들은 휴가 나오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신씨가 복무하던 강원도는 사정이 달랐다. 집에 초상이 나도 당시 관보 아니면 집에 올 엄두도 못 냈다.

 

1967년 경기도 광주 색시를 아내로 맞았다. 처가는 신씨 형수 큰아버지와 처의 조부가 동서 간 이었다. 신혼여행은 택시를 타고 남산을 돌아오는 게 최고였다. 그렇게 결혼한 신씨는 아들 둘, 딸 하나, 삼 남매를 뒀다. 그때 한참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산아제한을 할 때였다.

 

1977년 이장이 되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동네일을 봤다. 마을회관을 지을 때도 정부에서는 시멘트와 철근만 주었다. 당시만 해도 부동산 거래가 활발할 때라 복덕방(중개사무소)을 통해 대지도 사고 비용도 거출해서 회관을 지었다. 삼거리에 복덕방이 많아서 그 사람들이 도와줬다. 80년대 초반까지 이장을 봤다. 신씨는 젊은 이장이었다.

 

당시 하리는 17개 반이나 되는 큰 동네라 이장이라고 안하고, ‘하리시장이라고 했어. 한 개 반에 20가구 정도 있었지. 과천서 민방위교육이라도 할라치면 줄이 제일 길게 서곤 했지. 하일리 막계리 유○○ 이장 장막교회 있는데, 관문리...... 문원리 김충원, 김도경씨, 이순기, 주암리 심정섭씨 등이 이장 볼 때였어.”

 

과천에서는 추석 다음 날이면 과천면 체육대회를 했다.

삼거리에 깡패들이 많아서 어거지로라도 이겨야 해서 소란스러웠지. 그리고 동네가 크니까 별의 별 사람들이 많았어. 이장 볼 때 이지익씨가 하일리 마을금고를 설립했어. 그전에는 김충원 씨가 농협을 했다가 강명희 씨가 조합장 할 때 금융사고가 나서 애를 많이 먹었다고..... 이장들이 영농회장 맡아서 메꾸느라 애먹었지.”

 

이장을 마칠 무렵 아내가 유방암에 걸려 11년을 투병하느라 신촌세브란스병원을 다녔다. 아내는 끝내 골수암으로 번져 별세했다.

 

위에 장남은 돌아가시고, 부모님 모시고 농사를 계속 짓고 있었지. 제사를 증조부터 제사를 지내고 있어. 원래는 고조까지 지내야 하는데 제천은 고조항렬이 없어져야 시제로 가는 건데, 큰집 장조카가 고조 5대조 시제로 모시는 걸로 했지.

종사 일을 하다 보니 남태령 쪽으로 산에 가기 어렵고 내가 부산으로 가서 사업을 하게 되니 어렵고....., 지금 자손들이 하나씩이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데다가 남태령 무네미길 올라가는데 있던 산소들을 관리도 어렵고, 그린벨트라 장례도 어렵고......,장사 지내는 인력관계도 어려워서 가족납골당을 3백기를 해서 선산들을 묘를 개장수습해서 모셨어.”

 

신씨는 평생 농사만 지었다.

 

지금 서초동 법원사거리 향나무 근처가 다 채소밭이었다구. 고속터미널 자리에는 일본사람들이 먹는 단무지무밭이었고..... 그 채소를 기르는 방법을 과천 사람들이 배워 와서 과천에서 조를 심던 밭에 채소를 심기 시작했고, 심어 놓으면 상인들이 트럭을 가져와서 가져다가 남대문시장에 가서 팔았지.”

 

직접 씨앗을 뿌리는 방법보다 발아율이 높은 채소모종으로 싹을 틔워 모종을 심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비닐이 없으니, 얇은 노루지에 들기름을 발라 종이가 젖어도 쉽게 찢어지지 않게 한다. 아직 비닐이 나오기 전이다. 들기름도 아까워 석유를 섞어 바르기도 했다. 그걸 씨를 뿌린 뒤 덮어서 발아할 때까지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이후로 오랫동안 과천은 서울사람들 채소 공급원이 된다. 양재에서 시작된 화훼도 그렇게 과천에 전해진 것이다.

 

신씨는 2002년부터 부산에서 특수작물을 재배한다. 부인이 돌아가시고 농장에 다니다가 부산에 시장 조사를 가서 보니 가락동 시장에서 사서는 내려다가 팔고 있었다. 부산에서 하면 운반비만 절감해줘도 되겠다 싶어서 시작했다. 부산에서도 농사지을 땅은 주로 강 서쪽이라 김해공항 쪽으로 부산 외곽에 땅을 구해 특수작물농사를 짓고 있다.

 

옛날에는 초상이 나면 지관이 일진을 봐 가지고 불길한 날 빼고 사흘 장 아니면 오일장이지..... 섣달 그믐에 초상나면 2일장. 해를 넘길 수 없다 해서.... 먹고 살 만한 집은 5일장..... 상 때는 동네서 팥죽, 탁주, 막걸리를 담갔어. 결혼식에는 감주를 담가 가기도 하고..... 부조라는게 국수 해가고 현금도 내고...... 결혼식 장부에 누구 국수 한관적혀 있었어.”

 

우리 형 장인이 신동면 의원 했어. 초등학교 교장이 정용섭 (이영구 전 문화원장이 다닐 무렵에는 교장 고이준)이었고......”

 

찬우물 고개가 높았어. 으능쟁이 고개도..... 그땐 꽁보리밥 싸갖고 금성방직 뒤 안양공고에서 걸어오면 초생달이 뜨지. 배고프니까 왜무 파란 것 뽑아서 까먹으면서 걸었지...... 그때 이웃집에 타작하면 고등어 굽는 게 반찬으론 고급이었어. 홍촌말 사는 친구가 고등어반찬 도시락 해가지고 학교 가는데 가다가 먹느라 한 시간이나 늦게 간 적 있지..... 자전거 타는 아이들 부러웠어. 동네서 안양중학교 다니는 셋만 자전차가 있었지. 훔쳐 타다가 매 맞고 배우려다 넘어져 부서지고......”

신씨네는 198117대조 할머니 글이 보물 728호로 지정된 바 있다. (설씨부인 권선문)

 

(2020.11.9. 과천문화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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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는 아버지가 과천에 이주하시면서 과천에서 자랐다.

 

백학윤 장로의 삶은 과천교회를 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친구를 따라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평생 배필을 얻었다.

 

과천교회는 1949년 토박이 이기증 씨 등이 노회에 청원하면서 시작된다. 이기증씨는 지금 과천노인학교장인 이정달씨 조부다.

 

청원을 받은 노회는 안양 인덕원에 있는 동은교회 전도사였던 조원국 전도사에게 도움을 받는다. 조전도사는 인덕원과 과천을 오가며 교회를 살피다가 전쟁이 끝나고 교인들과 양재천에서 모래를 푸고 산흙을 개서 흙벽돌을 만들어 교회를 짓는다.

 

과천교회에서 야학을 했어요. 정식 학교인가를 내려 했는데, 인근 학교에서 반대해서 못 냈어요. 우리는 돈을 받지 않으니까, 그리 갈 아이들이 우리교회로 오니까, 교육청에 반대의견을 내서 못 냈어요.”

 

읍내에는 동아일보 과천지국이 있었다. 백씨는 군대 입대 전후로 이 보급소 총무로 일한다. 북으로 주암리부터 남으로 재경골까지 걸어서 신문을 배달하고 수금했다. 당시 고 이송산 장로가 지국장이었는데 주재기자 역할도 했다. 백씨는 기사 쓰는 것도 도왔다. 당시에는 전부 걸어 다녔다. 후에 백씨가 사임후에 지국장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소천했다.

동아일보 보급소 일이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됐어요. 날마다 신문을 읽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걸 알 수 있었지. 어느 날 육군에서 타자병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났어요. 이거다 싶었지.”

 

용산 삼각지에 육군본부가 있고 그 부근에 한국행정기술학원이 있었다. 학원을 수료하고 시험에 합격하면 타자병으로 지원입대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등록했다. 저녁마다 학원을 다니며 타자를 익혔다. 시험 날 27명인가 응시했는데, 7명이 합격했다.

 

논산에서 기본훈련을 받고나니 춘천으로 데려가데. 그리곤 며칠 후 제2의무단으로 귀대하라는 명령서를 주는 거예요. 의무단 본부가 춘천에 있다고만 듣고 집으로 왔는데...친구와 과천 집으로 와 하루 자고, 다음 날 그 친구 집으로 가 하루 자고, 월요일 춘천으로 갔어요. 가서야 제2의무단이 춘천이 있다가 몇 달 전에 원주로 이동되었다는 것을 춘천에 가서야 알게 되었어요. 거기 가서야 원주 가는 차가 드물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하늘이 노랗더라구. 탈영병이 된 거야. 오후 3시에 차가 있는데 가면 귀대 마감시간인 5시가 넘게 생겼지. 차를 탔는데 하사들 몇이 타더니 어디 가느냐고 물어. 명령서를 보여주니까, ‘무슨 빽으로 그 좋은델 들어갔느냐?’고 되묻더라구. 그리고는 부대에 도착하면 5시가 넘게 생겼지만, 1군사령부와 의무대가 붙어 있으니 자기가 우리 부대 옆이니까 위병소에 잘 말해주겠다고 하더라구.”

 

부대에서는 신병이지만 나가서 기죽지 말라고 일병계급장을 붙여 주었다. 백씨는 본부 타자병이 됐다. 병원에서 약품수불에 쓰이는 영문타자를 칠 수 있는 수준이 되자 대우가 달라졌다. 당시 공문은 기름종이를 철필로 긁어 등사하는 가리방이 대부분이었는데, 5·16혁명 이후 군 위계질서를 잡는다고 규격과 양식에 엄했다. 규격과 서식이 틀리면 공문 접수도 안하고 규정위반이란 도장을 찍어 다시 해오라고 문서연락병에게 반송하였고 부대장은 시말서를 쓰게 했다. 3회 이상이면 진급이 안되었다. 그걸 상부에서 합격점을 줄 만큼 잘 만드는 부대는 백씨가 속한 부대라는 소문이 나자 주변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애를 썼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군 행정서식과 규정을 정부행정서식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덕분에 사병이지만, 장교들에게 사랑받으며 지냈지. 일거리는 쌓아놓고 하는 판이니까, 적절하게 조정만 하면 휴가를 다녀오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요. 15일 정기휴가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으니 다녀올 수 없지만 잠깐잠깐 짧은 휴가는 다녀올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군에서 행정을 배운 것이 일생 일하는데 큰 도움이 됐어요. 교회에서도 조직, 재정, 출판을 맡게 됐고 교단 노회 사무장을 하면서도 일 잘 한다는 소릴 듣게 됐으니까.”

 

과천교회 40년사를 낸다. 백씨는 실무를 맡았다. 과천 최초의 기록사인 셈이다. 당시 과천교회에는 장로가 없었다. 백집사는 제직회 서기를 7년을 보았다. 제직회 서기록, 주보, 사진, 청년회가 만든 [성화], 중고등부가 만든 [등대]지를 가지고 다닌 것이 도움이 됐다.

 

자료가 없어서 고생했지요. 내가 그때 고생을 해서 과천구술사 만든다길래, 선뜻 응해 준 거예요. 어른들 만나 일일이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서 40년사를 만들었어요. 이후 50년사에는 사진을 위주로 사진집이 나왔고......”

 

과천교회가 커져가면서 다시 크게 짓는 일에 참여하고 교회 행정을 맡아 했다. 과천교회가 노회에 영향력이 커져가면서 노회 사무장으로 추천됐다. 12년을 일했다.

 

회의 자료를 만들어 내고, 노회에서 갓 시작하는 교회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어요. 제도적으로 기금을 만들어 개척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지원 받는 교회에서 다시 개척교회를 지원하는 제도를 만드는 일을 했지요. 당시 노회는 220페이지나 되는 보고서를 연2회 발행해서 총대들에게 보냈어요. 그게 도움이 됐지요.”

 

백장로는 후에 4단지 상가에 부동산중개소를 내기도 했고, 반포에서 기독교백화점에서 덕산공예를 운영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내가 한 일은 없어요. 하나님이 계획이 있으셨고 저를 불러다 쓰셨던 거라 생각해요.”

 

(2021.9.30.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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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웅씨는 1941년생이다. 인덕원 사거리(안양읍) 못미처 갈현리 297번지(과천면) 경계지역인 재경골 마을에서 태어나 으능쟁이고개를 넘어 3km가 넘는 과천초등학교를 다녔다. 안양읍 말무덤(현 관양동)에 관양국민학교가 있었으나 행정구역상 과천면이 아니어서 먼거리 과천으로 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제외하고 안양읍과 생활권이 편리했다. 방앗간이나 시장이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7남매 중 장남으로 막내동생과는 26년 차이가 나는데 그 당시에는 대부분 자녀가 많은 때였기에 대부분 식구가 많았어요

 

다섯 살 때 마을에 일본인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6·25 전쟁이 나면서 재경골 앞 수원 가는 신작로는 서울 피난민으로 꽉차서 떠밀려가고 있었어. 인산인해로 아비규환이었어.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식구를 잃어버리고 목이 메이도록 식구를 찾는 소리, 아이들 우는 소리가 대단했지. 피난민 대열에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고 어머니가 업고 가던 갓난아이를 길가 산소 옆에 버리고 가는가 하면 서울에서 장사하던 분들이 상품(머리핀, 인형 등)을 자전차에 싣고 가거나 재봉틀을 이고지고 가다가 힘에 부쳐 내버리고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많았지......그런 와중에도 버린 물건을 주워오는 이들도 있더라구......이북에서 쳐들어 왔다는 소리에 동네주민들은 그날 밤으로 피난을 가야되지 않겠느냐고 하며 재경골에서 3집 식구들이 그 밤에 청계산 이미골로 멍석을 지게에 지고 가서 겨우 하룻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이튿날 귀가했지.”

 

그 후에 우리 선친께서 어머니와 3자녀 막내삼촌과 같이 안양역에 가서 피난열차를 타려고 하는데 그때 마침 마지막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들이 후방으로 후퇴하는 열차를 타게 됐지. 워낙 피난민이 너무 많아 할 수 없이 객차 지붕 위로 간신히 매달려 타고 가는데 터널을 지날 때면 석탄기관차라 연기로 뜨겁고 냄새로 숨을 쉬지 못할 고역을 겪었지. 대전이 종착역이라 내려서 충남 논산군 광석면 득윤리 외가까지 이틀을 걸어서 갔지. 하룻밤을 잤는데 이튿날 인민군이 그곳까지 점령했다고 또 난리가 났어. 외가에서 이틀 후에 선친께서 죽어도 고향에 가서 죽자.’고 하셔서 피난보따리를 짊어지고 걸어서 과천 재경골까지 하루 100리 또는 힘들면 60리도 걷고 그렇게 12일 만에 도착했지.”

 

돌아오니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더라고. 1·4후퇴 때 전쟁을 그대로 목격했다. 재경골 가루개 옥탑골은 인민군 없이 내무서원 몇몇만 있었고 중공군들은 전부 나이가 16,7세 정도였다. 재경골 앞 모락산이 격전지였다. 밤에는 중공군이 모락산으로 가는데, 대나무방망이 수류탄 들고 가고 낮에는 후퇴하고......중부전선에는 미군들이 전선을 지켰는데 모락산 옥탑골 뒷산에서 보름 정도 전투가 심했다. 지금도 유골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경골 앞 낮은 산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보름 동안 잔인한 전쟁터였다. 모락산과 마주 닿는 산에 밤에는 인민군이 재경골 앞 언덕길에 지뢰를 파묻고 말마차를 끌고 갔다. 내무서원들이 정보원 역할을 하고.... 일꾼으로 어렵게 살던 사람들 흔히 완장 찬 사람들이 누구네 집이 어떻다고 정보를 주었다.

 

나중에 찬우물 가루개에서 색출됐는데, 구뎅이 파고 복숭아나무 몽둥이루 마구 패서 죽여서 쓸어 묻었지. 억울하게 죽은 사람 많아. 치안 문제로. 그래도 갈현리 희생자가 많지 않았던 게 그 일을 맡은 이가 아군 편이어서 사람들을 뒤로 살려내곤 했어.”

 

내무서원들이 벼 이삭를 세는데, 물꼬 있는데 잘되는데서 훝어다가 수확이 많은 걸루 치니까.... 조 몽뎅이도 잘된 거 따다가 세어서 보고하고...... 다 빼앗기고 자기들은 공정하게 한다고.... 벼 안 찧은 거 방공호에 묻은 거. 걔들이 커다란 꼬챙이나 나무기둥으로 쿵쿵 굴러봐. 소리가 이상하면 파게 해서 다 파가. 그래도 쌀은 파가지만 메밀은 안 가져가. 그래서 피난 갔다 와서 메밀만 먹었어. 중국 애들 안 가져가. 걔들 군법이 그런가봐. 부녀자 희롱은 없되, 먹는 거만.....원적(소풍) 갈 때 처럼 자루 차고 그 속에 멸치, 꽁치, 쌀 담아 다니다가 그릇만 있으면 물 잔뜩 붓고 죽을 쑤었어.”

 

중공군들이 숫자가 적으니까 밤에 꼭 싸움을 해. 호적, 피리, 꽹가리를 막 쳐. 미군이 엄청 많은 줄 알고 겁을 먹고 못 들어와. 그리고 중공군은 따콩총 숫자가 적으니까 방공호를 파고 차돌을 들고 8~10명 들어가. 딱총은 하나야. 총소리가 적으니까 차돌을 부딪쳐서 소리 나게 하지. 여기저기서 꽹가리, 호적, 피리 소리로 숫자가 많아 보이게 야밤을 흔들면 겁을 내고 미군이 못 들어와....... 그리고 우리들은 무서움이 없었어. 3,4학년 때 그걸 구경 다녔어. 어른들은 나가면 죽는다고 야단하시고......”

 

전쟁통에 자란 아이들은 전쟁터 한가운데서 놀았다. 총알이 날아오는 소리만으로도 알았다. 고씨는 총소리가 ~’ 하는 소리를 내면 멀리 날아가는 거니까 안심해도 되고 ~’ 하는 소리가 나면 근처에서 떨어지는 거니까 몸을 피해야 한다는 걸 아이들은 다 알았다고 회고한다.

 

안양중학교를 걸어 다녔다. 과천국민학교보다 멀었다. 안양중 2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 쪽으로 가려는 생각에 영등포로 전학가서 4시 반 통근차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선친께서는 기술계통이셨는데 대구로 이직하시는 바람에 고교 3년을 대구서 다녔다. 대학을 동기들보다 1년 늦게 1961년에 갔다. 2학년 다니고 63년에 입대해 65년에 제대해 복학했다. 소득이 없으니 등록금을 못내 휴학하고 대구집으로 내려가 고등전수학교 선생을 1년 간 봉직해서 돈을 모아 등록금 내고 복학해 1968년 졸업했다.

 

고씨는 2020년에 부모 산소를 다시 수습했는데, 1967년도에 돌아가신 분들의 옷은 순수한 삼베라 전부 다 썩었는데 1986년에 먼저 간 부인의 경우 큰 돈을 주고 베옷을 입혔는데도 개장해 보니 나일론이 섞여 새까맣게 남았더라고 전한다. 그러면서 고씨는 장사하는 집에서 며느리를 얻어 오지 말라던 옛 말을 덧붙였다.

 

당시 어른들은 나무를 하고 채소농사를 해서 사당동을 넘어 동지기(동작동) 예수교(이수교)로 가거나 남태령 넘어서 신림동 쪽으로 해서 쑥고개를 넘어가서 팔고 돌아오곤 했다. 제일 많이 다니던 곳이 용산, 남대문시장이었다. 아낙네들은 관악산은 나물이 많지 않아서 청계산에서 다래순 같은 나물들을 뜯어다 삶아서 죽을 지어서 광우리에다 이고 남대문으로 갔다. 남대문 근처 가정집 대문마다 들여다보면서 나물 사세요, 나물 사세요.’했다. 그걸 팔아야 곡식 같은 걸 사서 돌아올 수 있었다. 솔가지나무 전을 쳐서 가져다 팔기도 했는데 그건 부피가 크니까 나무를 잘라서 쪼꼬리(장작)를 패서 팔았다.

 

68년 풍문여고에서 국민은행 입사시험을 치르게 된다. 당시 은행원은 월급이 박해서 다른 직군에 비하면 쌀 한 가마 반값이 적었다. 입행한지 3개월 만에 그만두고 교사로 전직했다. 첫 부임이 되면서 고3 담임을 맡아 근무했다. 영등포 방직회사 다니시던 삼촌의 중매로 결혼했는데 신부는 은행원과 결혼한 지 몇일 만에 교사 부인이 되어 있었다.

 

고씨는 14년의 교직 중에 대학원 석·박사과정을 이어갔다. 후에는 한양대학교 및 연성대학교에서 재직하다가 퇴직했다. 정년퇴직 무렵 1984년 영등포에서 안양 석수3동 충훈부로 이사했다. 재직시와 재직 후에 삼성전자, 중소기업연구소, 생산성본부, 표준협회의 출강과 초청강연 등 연구활동을 하였다. 안양문화원 요청으로 안양연구소장으로 있었다.

 

1984년 무렵에 고향인 과천에서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이 있었다. 향우회장을 4년 간 맡게 되면서 외지에 나간 사람들로 구성 되었던 향우회를 과천에 사는 사람도 포함되는 것으로 넓혔다. 과천시민회로 개칭한 2012년 명칭이 바뀌었고 참여회원은 30여 명이 안 될 정도였다. 과천초등학교 출신을 포함해 과천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범위 넓혀 놓고 시민회를 알리는 홍보 행사를 열었다. 동창인 40회 장학기금도 마련하고, 시민회 창립 힐링콘서트 행사도 성황리에 마칠수 있었다.

 

(2020.11.9. 과천문화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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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마을(삼부골)은 강씨네와 이씨네 두 성씨 집성촌이었다. 강씨는 1942년 생인데 호적에는 43년 생으로 등록됐다. 임오생 말띠다.

강신태 씨가 8대고, 아래로 4대가 더 내려갔다.

 

아버님 형제는 3형제였다. 큰집에서 딸만 다섯을 낳자 위로 큰형님은 큰집으로 양자로 입양됐다.

 

큰아버지는 그 시절에 양정을 졸업했을 만큼 배운 사람이었다. 과천면 시절 면의원을 지낸 유지셨다.

 

강씨네는 파주 장단에서 왔다. 콩으로 유명한 장단은 일부가 북한 땅 이었다. 파주에 남은 강씨네는 6·25전쟁 통에 불이 나 족보가 타버리는 바람에 기록이 없지만 파주에서 할아버지들이 조상 중에 과천으로 가신 분들이 계시다는 말을 기억하고 과천에 몇 번을 오셔서 과천 삼부골에 자리 잡은 강씨네를 찾으시고 가성(가계도)을 보시고 베껴 가시기도 했다.

 

파주에서 과천으로 오신 할아버지는 4대를 독자로 내려오셨다. 강씨 증조부가 3형제였다. 증조부는 조부를 양자로 들인 후에 아들을 보셨다. 그래서 강씨 조부는 세간을 내고 종가는 다른 사람으로 세우셨다. 그 아래로 강신우 씨가 종가를 지키다가 과천을 떠나고 강신태 씨가 종가 노릇를 하고 있다.

 

강씨 모친께서 11남매를 낳으셨는데 모두 잃고 다섯이 남았다. 위로 86세이신 누님이 있다. 강씨 부친께서는 36세 되시도록 아들을 기다리시다가 못 얻으시면 새장가를 드시겠다고 공언해 놓으셨다. 36세 되시던 해 겨울에 강씨가 태어났다.

큰집 장남을 대학 보내기 위해서 열 두 마지기(2,400여 평) 논을 팔아야 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한 큰집 큰형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리는 바람에 가문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대신 강씨가 집안 대소사를 챙겨야 했다. 큰집 농사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렇게 일해서 선산을 이천에 마련했다. 시향도 양자해 온 큰 집에서 지내야 하는데 안 지내서 강씨가 지내고 있다.

 

지금 시대에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만이라도 제사를 지내주면 고마운 형편이지. 우리 며느리가 윗 대조를 지내려고 애를 쓰니 고맙지. 아들에게도 손자가 안 지낸다면 시향으로 돌리라고 말하지.......손주 며느리 얻으려면 제사 많으면 안 온대. 시대가 변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말해. 자식들 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같이 살자고 말해주니 고맙지.”

 

삼부골에도 상여각을 지었지. 동네 끄트머리에다가. 초상이 나면 일할거 하다가 연장들 그대로 논밭에 두고 장사집으로 가는 거야. 가서 일을 봐주는 거야. 동네서 일을 안했어. 초상집에서 자고 머리 빗질도 안고 손톱도 못 깎게 하고......염을 해야 조상을 받게 되는 거야. 오일장을 많이 지냈지. 지관도 부르려면 유명한 사람 배웠다는 사람 찾아 파주까지도 걸어서 갔어.”

 

과천 농협이 생긴건 시흥군 과천면시절 집안네서 설립을 했는데 얼마 못가 파산했어. 그리고는 강명희씨가 다시 설립해서 초대 조합장이 됐지. 그 집이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해서 돈 좀 벌었어. 당시엔 농사 안하면 죽는 줄 알았지. 공부보다 농사가 더 중요했어. 지금은 공부가 우선이지. 공부가 그게 재산 물려주는 거야.”

 

큰아버지가 양정 나왔어. 작은집 큰형을 고대 법대 보냈는데 염보현 서울시장과 동기였지. 중부서 남산 명동 330수사대 근무하다 그만두고 미국 가서 41세에 장가들어 성공 했어. 아들 딸 약대 나와 성공 했어.”

 

옆 동네 능안말 하고 하삼포가 열 집정도 경마장으로 들어갔어. 나도 그래서 외지로 나갔다가 9단지 아파트에서 2년 살다가 선바위 87세대를 관리 해줬지. 마사회 살 때. 출장소장 강택선 도우러 가고......”

 

경마장 앞 다리 개울이 마른개울이지만 장마 지면 물 많아. 관문체육공원 앞 큰 개울 나무다리 떠내려가면 매년 다리 놓고 학교 못간 날도 많지. 6·25 때 학교에 불이나 타고나서 각 부락에서 움 하나씩 파주고, 짚 깔고, 멍석 깔고, 위에 서까래 걸고 움 속에서 여름 지내고 온온사 뒤 팔팔 낙지 있는데 산소가 있었는데 가묘였대. 그 밑엔 아들이 들어가 있었어. 그걸 이번에 시에서 샀더라고. 그 잔디밭에서 공부하고 잿더미 옮기고 벽돌 옮기고 뭐 공부나 했어?”

 

과천초등학교 모습은 빨간 벽돌이었던 생각이 나. 원지동, 노량진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이리 오고.......신동면이야. 신중국민학교, 신동국민학교가 나중에 생겼지.......중학교는 은광 과천동 사람들은 은광이나 낙양 가고.......갈현동, 문원동 사람들은 안양으로 갔지. 은광은 남녀공학이야. 이광목 목사가 세운..... 지금은 여고지. 강한석 장군도 거기 다녔지. 내 조카야. 칠촌간이야.”

 

난리 때는 충주로 갔어. 큰어머니가 딸 넷을 낳았는데, 이번엔 아들이라고 같이 가고. 마차 따라 겨울 난리에 아홉에 가서 열 살에 돌아왔지. 쌀을 싣고 지고 가고 돈이 없으니 소 팔고 잡아서 먹고 싸게 사 먹고..... 자는 것도 한데서 짚가리 같은 데나 남의 부엌에서 자고.....충주 가니까 사람들이 좋아. 우리 소 자기네 소죽과 같이 먹여주고......아버지 어머니는 안가시고 큰어머니만 아들 낳을 거니까......나는 아들이라고 살아야 한다고 보내셨지. 그런데 피란 안간 사람들이 고생을 덜했어.”

 

마지막 후퇴 무렵 경마장 광창마을 뒷산은 북한군이 우리집 바로 앞에 있고, 국군은 삼거리 본수원갈비 개천 밤나무 밭에 있었는데, 서로 포를 쏴대니 광창이 불바다가 되고.....그래서 집들을 새로 짓고........ 막계 1리는 동물원 2리는 서울랜드 능안말은 경마장으로 들어갔지. 소방서 앞 궁말까지 막계3리야. 주암2리 여기 장군마을부터 주암리 1번지가 시작돼. 광창리부터는 과천동 번지가 삼거리로 나가지.”

 

인천 상륙작전이 되고 폭격은 한강다리 쪽이 심했지. 인민군들이 말죽거리로 후퇴하면서...... 폭격으로 남태령이 지금처럼 반은 낮아진 것 같아. 서초동 원지동 쪽으로 길이 넓어. 그 도로에서 많이 죽었어. 한강다리 끊어져 북한 사람들과 같이 내려 오는 거야. 송장 지근지근 밟고 넘어왔다는 거야.”

 

인민군보다 여기 사람 더 무서워 아무개 면에 다녔어. 순경 다녔어. 이장 했어.’ 손가락질 하면 죽였어. 눈으로 못 볼 일이었어. 잡으면 벗기고 팬티만 입혀 가지고 한 사람 삽 들고 따라와. 붉은산 골짜기에서 총으로 쏴. 그리곤 가서 묻으라는 거야. 제대로 묻어? 장마 지면 그대로 떠내려 가는 거야. 은광 다닐 적에 양재천에 모래가 많았어. 해골바가지가 돌아다니는데, 공처럼 차고 다녔어.”

 

졸업을 못하고 아버지가 53세에 병환이 있으셔서 일찍 돌아가셨어. 내 나이 20세에......큰아버지가 내 사촌형 고대 법대 가는데 돈들인거로 치자면 여기 땅 열두 마지기 2,400평 팔아서 작은집 조카 가르쳤지만, 미국에 있어서 자주 못보지.”

 

제사도 내가 전부 만들어 놓았지. 시향 지내는 거 집사람이 고생 많았지.”

 

군대 갔다 와서 27세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어. 집사람 고모가 원지동 사는데 우리 동네를 잘 아니까 선도 안보고 했어. 어머니가 보시고 고모 닮았으면 볼 것도 없다하셨지. 휴가 나와서 선보고 제대한 다음 달 결혼했어. 아들 하나, 딸 셋. 아들과 손자 같이 3대가 같이 살아.”

 

논밭보다 산 가진 사람이 부자였어. 농촌부자는 일이 많아. 우리는 논이 많았어. 채소를 많이 했어. 참외, 오이, 토마토...... 서초동 법원 앞에 향나무 있지? 거기가 멍도리라고 해 고속터미널 자리엔 왜무(다꽝)밭이었지. 양회(시멘트)로 노깡(배수관) 만들어 거기서 씻곤 했지.”

 

온상하는 것도 강한석 큰아버지가 배워 와서 여기서 하다가 전국으로 퍼졌지. 그 다음엔 꽃으로..... 과천에 와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어. 집집이 가고(광주리) 같은데 싣고 나가면 차가 실러와. 영등포 노량진 흑석동에서 실으러 와 중개해서 팔아 주지.”

 

“75년에 이장을 봤어. 김도경, 강규형, 동창 장흥수 씨 등과 같이..... 오화선 씨 면장 할 적에.......그만두려니 출장소시절인데 새마을회장을 하래. 86년인가? 그걸 나중에 사단법인이 만들어 지면서 다시 초대 회장이 신학수 씨야.”

 

이장에게는 보리타작하면 한말 벼 타작하면 벼 한말씩 주고.... 돈이 어딨어 봉사지. 새마을사업을 해도 양회나 몇 포씩 주면 모래 실어다가 여자들도 대야에 자갈, 모래 이고 다니면서 길 닦고 초가집들 고치고.......박정희가 수원 벼베기대회 갔다가 고속도로에서 내려와 서울랜드 저수지 간다고 이 앞으로 지나갔어........과천은 청사 들어오면서 부터 잘못 된 거야. 유공 들어오는 자리가 밤나무단지였는데, 처음에는 이장이 애먹었지. 거기다가 뭐라도 묻을까봐.”

“1987,8년에 이장 더 하라는 걸 안한다고 사양하고 강원도 가서 택시사업 하다 왔지. 홍천에 의암운수, 공신운수 등 4개 중 2개를 했어. 돌아왔더니 동정자문위원 해 달라, 선도위원장 해 달라.’ 여태까지 봉사로 왔지. 재산은 안 늘렸어. 꾸러가지 않을 만큼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에게 대학을 다니는 것보다는 자동차정비기술을 배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일주일 뒤 아들은 하겠다고 답하고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군대 가서는 자동차정비 병과를 택해 입대했다. 강씨가 보안대에 아는 이가 있어서 편한 곳으로 옮겨주려 했지만, 아들은 기술을 배우러 왔노라고 거절했다. 아들이 제대하고 부자는 카센터를 차렸다. 든든한 기술이 있었고 발이 넒은 아버지가 있어 시청을 비롯해 인근의 공공청사 자동차관리는 도맡아 했다. 이들 부자를 이겨보겠노라고 경쟁 정비소가 더 큰 돈을 투자해 달려들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손을 들고 말았다.

 

인구는 적어도 단합이 되는 삼포부락은 체육대회를 휩쓸었다. 상장 걸어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이기면 화물차에 사람들을 싣고 동네 와서 어르신들 모시고 잔치하게 했다.

 

다른 데는 후원금이 많아 음료수 사 먹지만, 우리는 커다란 다라(대야)에 물 붓고 얼음, 설탕 먹어가며 1,2등 다퉜어. 그 다음이 홍천말 이었지.”

 

“75년 이장 볼 때는 땅을 살 때, 농지위원 도장이 있어야 하니까 땅 사는 사람들이 돈을 내고 갔지. 그 돈은 부락 예비군에 썼지.”

 

출장소 시절에 북부, 중부, 남부지소로 나눠서 체육대회를 했지.유휴지에도 메밀 몇 가마 심었어. 새마을 할 때 우리 주머니 돈 털어가며 했어. 문원동 김순자 씨 부녀회장 할 때.....오현숙 어머니 나중에 양주부시장까지 했지. 전경환이 회장할 때, 새마을지도자들 외국 구경 갈 때 내가 안가고 우리 지도자들 보냈지.”

그렇게 동네 일에 선배들이나 친구들에게 먼저 하시라고 양보하며 살았는데, 어느 새 이제 내가 맨 앞줄이야.”

 

(2020.11.9.삼포마을경로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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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씨는 1941820일 생이다. 9남매 장남이었다. 위로 누나가 여섯. “종수를 데리고 다니라고 세 살 위 누이를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을 만큼 귀하게 자랐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에서 회군한다. 당시 청주 살던 최유경(崔有慶)이 군량미 운반책임자로 함께 출정 했다가 회군에 반대하고 낙향한다. 그런데도 이성계는 집권 후에 한양 천도를 하면서 그를 도성영축도감으로 불러올린다. 지금으로 하면 신도시건설 책임자다. 전주가 고향인 이성계는 최유경이 고려 때 전라도 관찰사를 하면서 전주 부성과 지금도 전주에 있는 호남제일성 풍남문을 건축한 걸 알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숭례문 상량문에 기록된 내용이다.

“[경기도지명유래집]에 그런 얘기가 나와요. 최유경이 막계 와서 농막을 치고 살았다. 그래서 장막 막자하고 시내 계자를 써서 막계 리(幕溪里)라고 하고, 농막(農幕)골이라는 지명도 아직 있지요.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때 말 막()자로 바뀌지요. 그 분이 21대조예요.”

 

그래서 막계리에 터전을 잡고 살게 됐는데, 최유경이 태종 때 돌아가지요. 그때 조정에서는 3일간 철조(撤朝:국상을 당했을 때 조회를 멈추는 일)를 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때 나라에서 사패지(賜牌地)를 하사합니다. 용인 기흥에 있는 공세리 산 1-1 번지 임야 43만 평이지요. 그 산이 왕가에서 쓰려고 잡아 놓은 명산이지요. 이 산에 임금이 돌아가면 사용하려던 명당자리가 있는데 그곳에 장사 지낼 수가 없어서 명당의 아래 자리로 내려와 최유경이 영면하게 됐지요. 최유경의 큰아들 최사위(崔士威)는 개경에 있을 때도 아버지하고 같이 출사하고 낙향할 때도 같이 아버지를 모시고 지냈지요. 최사위는 용인 공세리 산에 최유경을 예장한 후 3년간 시묘를 하고 내가 죽으면 시묘하던 여막터에 묻어 달라고, 내가 죽어서도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유언을 남기지요. 최유경은 말년에 처가인 진천에서 살다 돌아가신 후 용인에 묻히게 되고, 아들 최사위가 아버지를 모셨던 효행 일화는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의 유래가 되었고, 최근에 용인지역과 진천의 학자들의 조사, 연구를 통해 고증이 이루어졌고, 생거진천 사거용인 유래비가 세워 졌지요. 그런 이유로 용인 공세동 산 1번지에 21대조 최유경, 20대조 최사위가 묻히고......”

 

저희 19대조 부터는 막계리산에 모셔져 있었어요. 두 분만 용인으로 가신 거고 막계리에 세거하였지요.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 태조 임금 때부터 여기서 살았기 때문에 오래된 집안이지요.”

 

생거진천 사거용인 (生居鎭川 死居龍仁)은 살아서는 진천 땅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 땅이 좋다는 말이다. 최씨의 21대조 최유경은 청주사람이다. 청주에서 가까운 진천에서 고성이씨를 부인으로 맞는다. 아들 최사위가 모시고 진천을 오갔다. 그리고 용인에 묻혔다. 최씨가 전국문화원연합회장을 할 때 진천문화원에서 학술대회를 열었고, 그 이전에 용인문화원에서 생거진천 사거용인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아버지께서는 1973년에 돌아가시고 1977118, 과천 서울대공원을 건설한다는 보도가 신문에 났어요. 서울시에 수용된거죠. 지금 서울대공원 열대 동물관 자리예요. 그때 심은 편백나무, 밤나무가 아직도 있어요.”

 

1979년에 용인으로 종중 묘를 이장한다. 12개 비석은 옮겨갈 수 없어서 한곳에 모아놓고 사연을 적은 표석을 세웠다. 4-5개월에 걸쳐 이장한 사연이 비장하다. 수습한 유골을 관에 모시고 봄비가 오는 날 밤샘을 하며 부인이 시집올 때 가져온 이불로 덮어놓고 화장을 하는 날에는 함석을 깔고 불을 피웠다. 그렇게 120여 산소 중에서 60여 기를 용인 남사면으로 이장했다.

 

과천초등학교를 40회로 졸업한다. 당시 한 반에 35~40명 정도였다 반을 나눠 2반은 진학반이고, 1반은 비진학반이었다. 졸업하고는 영등포중학교를 갔다. 과천 한일중학교가 생기기 전이었다. 고등학교는 친구들과 서울공업고등학교 인쇄과에 간다. 3학년 때 남산동에 국제문화인쇄주식회사에 실습 나가서 1960년 졸업하고 사진제판이라는 전문분야에서 일하게 된다.

 

과천에서 학교 가는 길은 두 가지예요. 영등포중학교를 간 거는 그때 영등포역 근처에 이모뻘 되는 친척이 한 분이 있어서 그 쪽에서 하숙 겸 해서 다녔고, 노량진에서 자취도 하고 신길동에서 자취도 하고 마포에 고모 집에 가서 다니기도 하고 그게 안 되면 막계에서 통학을 했거든요.

 

막계에서 통학을 할 때, 장마가 들면 남태령 고개를 넘기 전에..한내 개울을 건널 때 가방하고 바지는 머리에 이고, 팬티만 입고 건너지요. 남태령 고개 넘어 가서 노량진까지 걸어가면 노량진에서 대방동까지 전차를 타고 가고 대방동에서 학교까지 지금도 한 15~20분 걸어가고 어느 경우에는 사당동에서 숭실대학교 쪽 고개를 넘어 장승배기로 해서 대방동 학교까지 걸어가기로 했지요. 남태령 너머 사당 사거리 가기 전에 채석장이 있었지요. 지금은 상당히 넓은 데 그때는 길만 있었고 좌우에 채석장이었지요. 아침에 가면 돌을 싣는 차가 있어요. 그러면 아저씨한테 차 좀 태워 주세요.’ ‘그럼 너희들 돌 실어 그럼 태워 줄게.’ 그러면 돌을 집어다 주면 태워주고......,흑석동에서 노량진 고개 넘어가는데 그 언덕 위까지 태워줘요. 노량진 가면 전차가 다니는데 검문소가 있었어요. 그래서 노량진 고개까지 돌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요. 그러니 공부가 되겠어요? 그렇게 6년을 다닌 거예요.”

 

나중에 충무로로 출퇴근 할 때는 용산까지 버스가 다녔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안에서는 종갓집, 종손이라고 고모가나서서 최씨를 장가보내려 한다. 최씨는 군대로 달아난다. 196158일 동기, 동문들이 기술병으로 지원 입대한다. 논산 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받을 때 5·16 군사혁명으로 얼마동안 술렁거렸다. 훈련을 마치고 부산 육군인쇄공창에 배치됐다. 생전 처음 갈치국을 먹어 보기도 했다.

 

1963년 복무하고 있는 부대로 어머니 위독 빨리 집으로 오라.’는 전보가 온다. 가짜 전보가 많던 시절 과천면장 도장이 찍힌 우체국관보, 집에 와보니 어머니께서 남양 외가에 가셨다는 것이다. 외삼촌께서는 어머니께서는 화성 비봉면 이모댁에 가셨다는 것이다. 그래 비봉까지 갔더니 향남면 도이리 누님댁으로 가셨다는 것. 누님댁 문 앞에서 어머니와 마주쳤다. 사실 어머니는 앓고 계셨는데 약으로도 안 되니 마지막으로 옛 홍천말 만신을 찾아가 치성을 드리시고는 회복이 되신 것이었다. 누님 댁에 오신 김에 며느리자리를 선 보셨다는 것이었다. 향남면 도이리 신부 댁에 따라가 장인 될 어르신과 인사를 나누고는 그날로 발안 장터에 나가 사진을 찍는 것으로 약혼을 했다. 그 날이 음력 77일 견우직녀 만나는 칠석날이었다. 그리고 8월 추석에 휴가 와서 사주단자를 가져가고, 음력 913일 혼인을 한다. 그리고는 3남매를 두었다.

 

군에서도 인쇄병으로 입대했지만 행정병이 되면서 병장에서 시험을 봐서 일반하사로 근무했다. 평생 여러 조직에서 일하는데 유용한 행정과 관리를 몸에 익히게 된다. 여기에 어려서 배운 한문에 더해 회사에서는 일본어 공부를 더하고,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정신교육을 받기도 하고 삼화왕관에서 근무를 하였다. 1988년 삼보해운 경영에 참여 하였다. 과천문화원과 인연을 맺은 후에는 고위정책과정 등 공부를 그치지 않았다. 90년대에는 석전대제 이수자 과정, 성균관유학대학원 지도자과정 등 부단한 자기개발 의지가 최씨를 이끌어갔다. 1966년 경화기업()에 입사해 10년을 다녔다.

 

“1976년도에 사표를 내고 농사를 지을 계획이였으나, 시작도 못하고 서울대공원 건설로 집, 전답, 600년을 살아온 모든 것과 조상 산소들, 모두 정리하고 떠나게 되었죠.”

 

1977년 삼화왕관에 입사한다. 37세에 제판계 말단으로 입사했지만, 성실하게 일하면서 빠르게 승진이 된다. 회사는 최씨를 일본으로, 영국으로 연수를 보낸다. 다녀오면 직책이 높아지고, 이장하는것과 모든 일을 정리할 수 있도록 배려 해 주었다. 나중에 회사가 두산으로 넘어가고 지금 그 자리에는 두산벤처다임이 들어선다. 지금도 삼화회라는 친목회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 당시 1977년 이제 막 다니기 시작한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서 있는데,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시던 이윤영씨를 만난다. ‘네 아버지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알거 아니냐. 이제 네가 과천 문화에 대해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하신다. 과천무동답교놀이를 배우고 지켜 나가야 된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최씨 인생 후반을 문화에 헌신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86년 과천시로 승격하고, 1990년 문화원이 설립된다. 2003년 과천문화원장이 된 후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말년을 살았던 추사를 기념하려던 과천시는 전시회를 최원장에게 부탁한다. 이렇게 추사 김정희선생 사업을 시작하면서, 일제강점기 때 경성제국대학교 교수를 지내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지츠카 치카시 교수의 일화를 알게 된다. 그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 씨는 그의 아버지를 통해서 추사선생을 알고 있었다. 2006년 후지즈카 가문이 가진 추사 관련 자료를 모두 과천시에 기증하도록 일본을 오가며 큰 역할을 했다. 정부는 아키나오 씨에게 국민훈장목련장을 수여한다. 그 공로로 최원장은 국민포장을 받는다. 2004년 추사연구회를 조직하여 운영하고, 추사학회로 발전시키며, 추사와 관련하여 학술회의, 전시회, 번역사업, 서예대전, 콘텐츠 제작, 방송, 추사공연 지원을 이어 갔고 추사박물관을 세우게 되었다. 추사기념사업회 회장을 하며 국제 학술회의, 추사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송하고, 추사 출생지 예산, 유배지 제주 대정읍, 말년을 보낸 과천에 추사 동상을 건립하면서 추사를 기리는 사업을 이어갔다.

아키나오는 최원장에게 유물을 기증하는 조건으로 몇 가지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을 다 지키지 못한 최씨는 지금도 해마다 일본으로 건너가 아키나오의 묘에 인사를 간다.

 

최씨 네는 효자집안이다. 조선중종 때 최사립이 손가락을 베고 피를 내어 아버지를 구했다는 효행과 칡꽃의 효행담, 수박 이야기로 전해지는 선대의 효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의 효자 정려판이 과천시 향토유적 4호로 지정되어 과천문화원 옆에 있다. 동네에서는 최씨 내외가 백수(白壽)의 모친을 모시던 정성을 안다. 며느리가 효부상을 받았다.

 

최씨는 한국효문화센터를 설립해 잊혀져 가는 효의 가치를 전하는 일에 몰두한다. 서양 어디에도 없는 단어 를 붙들고 산다.

 

과천향교 전교를 지냈고 성균관 부관장, 경기도향교재단 이사장,전국향교재단협의회장 등 성균관 유림들과 교분이 오래됐고, 과천향토사연구회장, 과천문화원장을 거쳐 한국문화원연합회장, 추사기념사업회장으로 문화와 함께 살아 왔으며, 강화도 마니산에서 열리는 개천대제를 28년간 집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개천절에만 단군을 생각하지만, 최씨는 수시로 강화를 오가며 국가행사에 힘을 보태고 있다.

 

(2020.11.15. 과천문화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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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숙 씨는 1941년 하2리 뒷골에서 났다.

 

과천초등학교 41회다. 8남매였다. 딸 여섯, 아들 둘, 딸로는 셋째. 어머니는 54살에 돌아가시고 새어머니가 낳은 아들이 둘이었다.

 

대대로 뒷골에서 사셨다. 뒷골 이서방네는 20여 호가 있어서 신서방네보다 컸다. 대 여섯 명씩 같이 초등학교를 다녔다. 한내 따라 밤나무 밭이었고 개울둑 타고 가다가 성당 위로 올라가곤 했다.

 

초등학교는 가운데로 있었고 남쪽으로 교장사택이 있었고 반대편에 작은 건물이 있었다. 6·25로 불나서 움을 파고 봄여름에는 향교 개울가에 돌 깔고 공부하고 여기저기 다니면 야외수업이 많았다. 학교는 졸업하기 전 4학년 때 쯤 다시 지었다.

 

읍내는 드문드문 집들이 있었고 관문리 학교동네는 몇 집들이 있었다. 읍내에 장흥수씨네 담배가게 그 옆에 임한영씨 제중의원과 우체국이 있었다.

 

삼각지 상명중학교를 다녔다. 6학년 때 중학교 가야 하는데 초등 6년 담임이 도중 군대 가버려 담임 없는 클라스가 되었다. 남궁선생이 6-1 담임이어서 이씨가 있는 6-2을 돌봐주셨다.

 

내가 반은 선생 노릇을 하고 지냈어. 올 백점 상태여서 경기를 가고 싶은데 남궁선생은 경기 가면 자가용에 치여 죽어라고 하셨어. 사대부중 전형이 끝나서 가지 못하고 사촌오빠가 신흥대학에 보결 다니고 있었는데 남궁선생이 가까운 상명을 가라고 써줘서 다녔는데 버스도 안 다녀서 걸어 다니고 반포에서 한강이 얼면 질러서 얼음 위를 걸어서 삼각지 교문까지 걸어서 세 시간을 걸려 다녔어. 그때 노량진 한강다리는 전쟁에 끊어져서 고무다리를 놨어. 가고 오는데 여섯 시간이 걸려. 공부를 단어장을 들고 다니면서 공부했어.”

 

중학교 졸업 후 이씨는 안양의 한 상점 점원으로 들어가 1년 동안 돈을 모아서 종로 3가에 있는 명성고등학교(동대부고)를 다니다가 검정고시로 편입해 명성여고를 졸업했다.

고대 여학생 무시험 전형 시기를 놓쳐 성균관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다.

법대를 진학한 것은 자라면서 집안과 이웃에서 억울한 일들을 당하고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 하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쳤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당시 교사가 모자라 학교마다 대학교 졸업자들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 정부는 대졸자에게 교사가 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씨는 과천 관악중학교 교사가 된다. 이어 강남 낙생국민학교의 교사로 옮겨간다.

그러다가 해외개발공사 직원이 된다. 박대통령의 독일방문 이후 간호사, 광부 등 인력파견이 성황을 이룬다. 이주공사에서 그녀에게 유학 가기를 권한다. 독일가서 일하면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유학을 결심하고 수속을 했다. 출국 3일 전 날. 모친께서 한 밤중에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사당동에서 새벽에 자동차에 치셨는데 18살 먹은 아이가 운전연습 삼아 끌고 나온 차에 횡액을 당하셨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고 여동생은 1년 넘게 입원해야 하는 큰 사고였다. 그때 어머니 54세 되시던 해였다.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하던 이씨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추스리고 독일로 떠났다.

처음 베를린으로 가려던 자리 대신에 남부 지방으로 배정되어 갔다. 3년 뒤에 돌아왔다. 그 사이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맞으셨다.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씨는 과천 집을 세를 주고 갓 입주를 시작한 잠실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한다. 새마을부녀회에 관여하게 된다. 5단지 주공아파트 자치관리였다. 5년이 지나 분양전환이 될 무렵 당시 주택공사(LH)와 시비가 붙었다. 주민들은 모임을 만들어 항의를 하게 되고 이씨는 대표가 되어 주민 권익을 대변하는 일을 하게 된다. 데모하다 집시법 위반으로 영창도 갔다. 삼십 대 후반이었다.

 

이를 지켜 본 정치권에서 78년 잠실에서 82년 국회의원 선거때 그녀에게 공천을 줄 테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라는 제의를 한다. 41세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반포에서 역삼동, 천호동, 고덕동 까지 넓은 지역에서 2명을 뽑는 선거였다. 14명이 입후보를 했다. 지금은 선거공영제라 선거비용을 국가에서 지원하지만, 당시는 개인 재력 싸움이었다. 당시 2,500만 원 정도인 아파트 두 채 값을 썼지만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 뒤에 다시 과천에 돌아와 현재까지 옛 집에 그대로 산다. 김영삼당 갔으면 가능성 있었는데 김대중당으로 갔다. 약자 편에 선다고 김대중당을 택했다.

 

과천에서도 지구당 위원장을 맡게 됐고 다시 91년에 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었다. 정주영당이 나와서 박제상 씨에게 2천 표차로 졌다. 국회의원에 3번 도전 했었다. 지방선거에서는 이정찬씨를 공천해 시의회 의장이 되게 했다. 그 뒤에도 이인제 당 후보로 과천시장에 도전했었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는 과천시애향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남태령 본래 길로 이어지는 지령고개가 있었고....뒷골에서 남태령 가려면 서골고개를 넘어야 했고, 성 뒤로 넘어가면 방배동으로 바로 가는 길이 있었다.

 

이 동네는 소들을 많이 키웠어. 젖소. 나무하고 채소 팔러 사댕이 고개 넘어 상도동 흑석동으로 다녔지. 깡조밥이나 깡보리밥을 보리만 두 번 삶아서 깡보리밥을 먹었지.”

 

10살에 피란 갔다. 아산 안골까지 걸어서. 아버지는 제2국민병으로 제주도 가시고 작은아버지는 군대 가다가 꾀병으로 돌아와 함께 갔다. 군포로 해서 마차 뒤를 따라 병마골로 해서 갔다. 둔포에서 폭격을 맞았다. 1·4후퇴 때 였는데 밤에 불들을 피우니까 내리 쏴서 끌고 간 소가 죽었다. 시체를 밟고 다녔다. 작은 집 세 식구, 이씨네 다섯 식구가 피란을 함께 갔었다. 소가 끌고 가던 걸 이고 지고 험한 길을 걸어서 갔다. 아는 사람 아들이 흑석동 살았는데 그 고향을 찾아가 3개월을 지내고 걸어서 돌아왔다.

 

쌀을 묻어 놓고 갔는데 누군가 다 파내갔어. 그래도 경마장 주유소 건너 묻어 둔 무가 효자 노릇을 했지. 아버지는 뒤에 제주에서 장질부사 앓고 돌아오셨지. 나중에 미국 양쌀이 나와 밥을 해서 한 사발씩 먹었어. 여기도 완장 차고 다닌 사람이 인민위원장 하던 이가 아직도 이 동네 살아있어. 인민군 둘이 후퇴할 때 요 산과 요 산에 맞총질해서 논바닥에 사람이 엎어져 죽어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해.”

 

(2020.11.14. 뒷골경로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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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복 씨는 1941년생이다. 생일이 음력 917일 양력으로는 116일이다. 과천 원주민이지만,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다녔다.

 

중학교를 서울 흑석동에 있는 낙양중학교를 다녔는데 작은아버지께서 철도국에 다니셔서 흑석동 집을 사셔서 그 집에서 다니게 됐다. 그런데 입학 6개월 뒤 철도국에서 화물차 붙이고 떼고 기를 들고 신호하시던 작은 아버지께서 겨울에 미끌어져 다리 한쪽이 레일에 걸려 잘린다. 운전수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 2년 가까이 입원하시는 바람에 작은어머니께서 맨날 병수발 다니는데 있을 수 없어서 6촌 형과 자취를 했다. 동양중학교 위 산꼭대기에서 셋이서 3년을 자취생활을 했다.

 

장작은 마차로 실어다 주시면 끌어다 때고......, 곤로에 밥 하고 반찬 갖다 주는 거 겨울 김장김치 먹고 여름이면 냉장고가 없어서 하루 지나면 쉬고......,고추장에 비벼 먹고 셋이 위장병 나기도 하고......,그렇게 3년 뒤 졸업할 즈음엔 집에서 다니는 게 낫겠다 싶었지. 안양공고를 다녔는데 염색과, 전기과 둘 뿐이었어. 진공관 라디오 만들고 하는 전기과를 걸어서 다녔어. 당시 동네서 대학은 한 둘 정도지. 8촌 형들이 중앙대, 고려대. 형들이 잘됐으면 나도 갔을 텐데 형들이 소 팔고 취직 못하고 땅만 날려 버리는 걸 보고 대학 안가고 취직했지. 6촌 형이 종로 평화당인쇄, [주부생활] 나오던 곳이었어. 조각과에 입사해서 활자를 놋쇠에 새기는 자리에 취직했지. 처음에는 문선(원고 들고 활자 뽑는), 조판해서 지형 뜨고 인쇄하는 걸 했지. 1년 뒤에 옵셋인쇄가 생겨서 옵셋기술자가 되어서 결혼했지. 동창 중에선 2번째로......, 동창 최종수가 2년 전 제일 먼저 결혼했구.”

 

1965년 결혼했다.

 

보충역으로 영장이 나왔는데 입대 병력이 남아 순위가 밀려서 결혼하고 2년 지나 큰 애가 2살에 영장이 나온 거야. 1967년에 입대했지. 서울시가 조사해서 기술병으로 논산에서 6주 훈련 받고 강원도 춘천 103보충대로 갔지. 1주일 뒤에 각 부대로 팔리는데 25명 정도 줄을 세우고 지에무시 트럭(GMC)에 전방마다 몇씩 떨어 뜨려 원주 가니까 나 혼자 남아. 1군사령부 7지구 인쇄소 (육본에는 6지구 인쇄소)엘 가니까 입대 전 인쇄소에서 내 밑에 있던 친구가 상병 달고 있더라고. 거기서 3년을 근무했어.

그때 월남 가서 상사 중사로 온 사람들이 하사관으로 있었는데 나를 잘 본 거야. 결혼했지. 과천 농사 많이 짓는다 하니까 특별히 사무 보는 애들한테 얘기해서 이 사병은 1주일에 1번은 집에 보내줘라해서 외출증 하나 하고 23일 휴가증 2개를 끊어줘. 원주에서 외출증 보여주고 기차타면 완행이 용산에 27번째 정거장이야. 점심 지나 밤에 도착하지. 용산에서 과천오는 버스가 없어. 사당에서 내려 밤에 남태령을 걸어 넘어와. 집에서 자고 이튿날 열두시까지 가는 거야.”

 

선임하사집이 원주 시내인데 청자 담배 한 보루와 3만 원짜리 과자를 사서 그 분 집에 놓고 들어가곤 했다.

 

총 들고 근무 하는 게 아니어서 내무반에 카빈 총 하나 꽂아 놓고 가서 일하고 그랬어. 4:6 군속이 6 군인 4라서 군속들이 도시락 싸오면 1군사령부 식당가서 밥 타다 바꿔 먹곤 했어. 그렇게 3년 군생활을 마친 후 회사에 재입사했지.”

 

지금은 4색 칼라 6색 칼라 시대지만 그전에는 2색 그저 4칼라도 드물어. 단색기로 돔보 맞춰 8번 찍어야 하니 시간이 오래 걸려. 2부제야 일주일 밤일, 1주일은 낮일. 그렇게 회사 생활을 했지.”

 

제대 후에 인쇄소를 27년을 다녔다. 평화당인쇄가 양평동 해태제과 옆에 건물을 사서 윤전기를 설치했다. 그때 최종수씨가 그 옆에 삼화왕관에 있었다.

 

당시 칼라잉크라고는 국산은 대한잉크 하나여서 칼라인쇄는 일본 동화색소 도까시키소 잉크를 수입했는데, 두 사람을 초청 했어. 제판 하나, 인쇄 하나. 제판은 사장 동생이 갔지. 일본에서 1977년 겨울부터 78년 봄까지 3개월 연수를 했어. 잉크회사 초청으로 갔지만 마쯔다인쇄에서 근무했지. 다녀오니 옵셋 기술자 자리에 누가 있더라고 그러니 회사에서 사무실로 올라가 관리부장이 되고 2년 후에야 2부제 근무 면하게 됐어.”

 

그런 가운데 1994년 아버지 위암이 걸리셨다. 장남이라 부득이 57세에 정년퇴직을 하게 됐다.

 

남동생과 20살 차이가 나고. 어머니께서 일찍 결혼하셔서 나하고 19살 차이 나고. 어머니께서 내려와라 장남이니까과천 집 헐리면서 개봉동에 집을 샀는데, 동생 주고 1년 병간호 하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1975년에 정년을 2년 남기고 내려왔지. 동창들 만나고....., 1,200평 농사지었지. 구리안에 3단지가 들어오면서 별양동에 단독필지를 제비 뽑아 단독 2층집 짓고 살아. 1995년 아버지 돌아가시고 4년 정도 지났나. 박영재 초대문화원장께서 과천유도회 지회장이셨는데 나더러 총무를 보라 그러셔. 친구 신태호가 유도회 하다가 나보다 한참 먼저 총무 겸 재무를 봤는데.....,그 뒤에는 향교에서 재무를 봐달라고 그래. 초대농협조합장 강명희, 이규창이 총무를 맡았고 내가 재무를 맡은지 2년 후 전교 권광환씨(22)가 재무총무를 합쳐 사무장으로 자리를 만드셨지. 그때부터 사무장을 맡았지.

과천향교 사무장을 11년 봤는데 7개시 관내라 7개시 지회의 과천지부장으로 최종수 뒤에 3년을 지부장을 지냈지. 전교 연임 6년 하고 나서 99년부터 2019년까지 20여년을 전교를 끝으로 마무리 했어. 당시 이성환 시장이 예산을 크게 만들어 주어서 건물을 고치고 새로 짓고 했던 기억이 나. 내 인생은 인쇄 20, 군대 3, 과천향교 20년으로 이력서 끝이야.”

 

1·4후퇴 때 중공군을 피해 피란을 갔다. 의왕 바라산으로 가다보니 중공군과 같이 걷고 있었다. 수원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은 피란민 차지가 돼 있었다. 그 사람들 내보내고 중공군들과 같이 지냈다.

 

12시쯤 되면 쌀 가져가려고 난리야. 나무광 바닥 파내고 쌀가마 그 위에 덮고 해도 꼬챙이로 쑤셔 대는데. 낮에는 폭격하니까 안 오고......그래 피란 나온 젊은 사람하고 뒤란 장독 옆에 구덩이 2개를 파서 쌀가마를 하나씩 묻었지. 할아버지가 중공군들에게 하나를 파게끔 안내하고......,큰집에 방공호 파서 옮기고 그 속에 들어 앉아 있곤 했어. 그래도 중공군은 피해 준 게 없어. 쌀 가져가면서 준 이북 돈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

 

과천초등학교가 폭격 맞아 뼈대만 남아서 3년 뒤 지어질 동안 가마짝 깔고 공부했다. 수업은 조금 하고는 종일 벽돌을 깨는 게 일이었다.

 

개학 하니까 동창 하나가 팔목이 없어. 김종규라고 수류탄에...... 나무하러 갔다가 주워서 애들이 둘러앉아 두들겨 보다가.....구리안에 33집인가 있었어. 김충원 씨네 방앗간 자리 있었고. 윤재로라고 식당하던 3,4년 후배...... 그 형 윤기로가 동창인데 인민군하고 아군이 집에 총을 쏴 집에 불이 나 아침에 일어나니 죽었다는 소릴 듣고 비통했지.”

당시 한 반에 7,80명 신동면에는 은광중학교가 있었고, 광주군 경계까지가 신동면이야. 서초동엔 신중국민학교가 있었고......,80명 중에 중학교 갈 애들 안 갈 애들 따로 반을 했지. 밤에 남포 불 켜놓고 공부하면 부모들이 밤에 이고 와서 먹을 걸 가져다 주시곤 했지.”

(2020.11.9. 과천문화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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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환씨는 열일곱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삼남 일녀 중 장남인 이씨가 생계를 이어야 했다.

 

아버지는 과천초등학교 책상을 짜 주시는 등 알아주는 솜씨 좋은 목수셨다.

 

이씨는 화성에서 사슴농장을 하고 있다. 이씨가 사슴을 기르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다. 과천에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새마을운동중앙회에서 우리 농가의 수입 다변화를 위해 사슴을 수입해 키우기로 했고 이씨도 이때 분양신청을 해서 과천에 농장을 마련하고 기르기 시작했다. 한때는 과천농장에서 150여 마리까지 길렀다. 과천지식정보타운 개발이 시작되고 농장이 수용되자 이 사슴들을 옮겨 기른 것이 지금의 화성농장이다.

 

그때 전두환 대통령 동생 전경환 씨가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을 하면서 사슴을 수입하고 그랬어요. 그 바람에 나도 한 마리에 350만원씩 주고 두 마리를 수입해서 기르길 시작했지. 8,90년대 까지만 해도 어느 사슴농장에서 흰 사슴 나왔다 하면 신문사에서 와서 사진 찍어가고 그랬어요.”

 

선대부터 과천에서 산 이씨는 4년 전 화성으로 사슴농장을 옮겼다.

 

이씨는 지식정보타운이 들어서면서 땅을 수용 당하고 기반시설 공사가 끝난 뒤에 집을 짓고 되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정부가 나빠요. 70몇 년도 인가 그린벨트라고 땅을 묶어 놓고는 땅을 수용할 때는 몇 푼 안 쳐주고 되팔 때는 비싸게 팔면서......그것도 20년이 넘게 질질 끌면서.......이리 내려오면서 장안면에 집을 지었는데 여긴 살기가 힘들어요. 병원도 시원찮고......고향에 가고 싶어서 과천 토지수용자를 위한 대토로 땅을 샀어요. 거기에 집을 지어야 하는데 그것도 그래요. 집을 지어봐야 아직 먼지만 날리는 곳이니 세입자가 들어올 리도 없으니 당장 지을 수도 없고.......”

 

과천에서 땅을 수용당한 이씨는 토지중개에 눈을 뜨게 됐다. 이후 수원, 평택, 화성 등을 다니며 땅을 사고파는 일을 했다. 그 무렵 화성 농장자리도 사두었다가 나중에 과천농장 사슴을 옮기게 된다.

 

과천에서 아버지가 사신 땅하고 내가 벌어 산 땅하고 죄다 수용되면서 받은 돈으로 땅장사를 하러 다녔어요. 밥만 먹으면 수원으로 평택으로......집 한 채가 10만원, 5만원 하던 때니까 샀다가 되팔곤 했지. 수원 지금 화장장 입구가 옛날에는 소나무 밭 이었어요. 아래 저수지도 보이고 소나무가 근사해서 샀지. 그랬더니 화장장이 들어서면서 수용되어 버렸지. 지금 이 농장도 그때 사 둔 거였는데, 과천땅 수용되면서 사슴농장을 이리 옮긴 거지.”

 

여덟 살 무렵 피난을 갔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지지대 근처까지 내려갔다. 큰아버지가 손을 잘 못 쓰시는 장애인 이셨는데도 마차를 끌고 가는 길에 따라 갔었다. 아버지는 제2국민역으로 소집되어 나가셨었다. 지지대를 넘어 가니까 인민군들이 벌써 지키고 섰다가 돌아가라고 해서 과천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니까 인민군들이 들어와 차지하고 있었어. 잘해줬어. 장난감도 주고 같이 놀아도 주고......”

스무 살 이전 기억으로는 막계저수지를 막을 때가 생각난다.

 

이 모 의원인가 하는 양반이 그걸 한다. 그래서 구경들 가곤 했어요. 땅 한 평을 파는데 얼마 그랬어요. 웃개돌 이라고 표시를 해 놓고 사진을 찍고 그걸 파내고 지게로 져 나르고 그랬어요. 그러면 밀가루도 주고 설탕도 주고 그랬는데......”

 

스물여덟에 양평에서 군 생활을 했다. 상병이지만 병장 계급장 달고 다니며 군 생활을 했다. 낮에는 일하는데 동원되고 밤에 보초를 서려면 잠이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는 자는데 기간병들이 총을 거둬 갔어요. 아침에 일어나니 난리가 났어요. 총이 없어진 거야. 그때가 김신조 사건 나고 간첩이 왔다 갔다 했던 때라 실탄이 지급 됐었어요. 영창 가게 됐다고 난리가 났는데 나중에 보니 기간병들이 정신 차리라고 총을 숨겼던 거였어.”

 

이씨는 군대 갔다 와서 결혼했다. 부인 이금구씨는 동네 조합장 조카딸 이었다. 5살 아래인 부인과 결혼해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제대 후에도 농사를 지었다. 당시에는 살기가 어려웠다. 집집마다 장내쌀을 얻어다 먹고 가을에 추수해서 갚고 했다.

 

쌀 한 말을 갖다 먹으면 가을에 한 말 반을 갚아야 했어요. 그것도 아무나 안 줘. 아는 사람이나 주지. 그렇게 어렵게들 살았어요.”

 

그때 읍내에 짜장면집이 있었어요. 가끔 읍내 나와 짜장면 한 그릇 먹게 되면 최고였지. 삼거리에 장흥수씨네 담배가게하고 그 옆에 박영남씨네 사료가게가 있었는데 목장 하는 사람들이 아침이면 우유를 짜서 통에 담아다 가게 옆에 갖다 놔. 과천에서 하루 다섯 통이나 나왔을까. 여름이면 개울에 가서 찬물 퍼다 담아놔. 그래도 관리 잘못해서 변질되면 버리는 거지.”

 

당시 이장들은 추수를 하고 나면 리세를 걷으러 다녔다. 그렇게 머리수대로 거둔 리세는 정부에 냈다. 그러고도 기타 명목으로 거둔 돈들이 있었다. 살기가 어려운 지역에서는 이장이 대신 내기도 했다. 하리는 유독 사람이 많아 리세가 많이 걷혔고, ‘하리이장이 과천 면장보다 낫다.’는 말도 있었다. 추수가 끝나 리세를 걷고 나면 이장들이 택시를 대절해서 영등포로 술 마시러 가기도 했다. 대부분 이장 일은 마을을 위한 봉사로 여겨 서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사양하다 사양하다 일을 맡게 되면 그래도 인심을 잃지 않으려고 열심히들 일했다. 이장을 마치면 논을 팔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3단지가 입주를 하면서 세상이 바뀌어 통장제도가 시행된다. 2,3단지 아파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여자들이 통장을 맡게 된다. 많이 배운 젊은 여자들이 통장으로 나서게 되면서 예전의 이장들의 시대가 저문다.

 

궁말에 아버지가 사 놓은 땅하고, 내가 산 땅이 개발되면서 4,900원을 받았어요. 논바닥이라고 5천원이 안됐어요. 그러던 땅값이......”

 

화성 사슴농장에서 벌판을 건너면 나즈막한 야산이 있다. 그 산 일부도 이씨가 산 땅이다. 사슴농장에서 바라다 보이는 야산 모습이 지금 지식정보타운역 예정지에서 청계산 아래를 바라다보는 모습과 비슷하다. 고향 땅 모습과 비슷한 자리를 고른 건 우연일까?

 

인터뷰 초반 이씨는 지금 관문동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 안부를 묻는다. 화성에서 과천. 자주 오가는 거리지만 과천에서 왔다는 필자에게 고향 나무 안부부터 묻는 이씨가 달리 보였다.

 

(2021.6.7. 화성농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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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안에서 독자로 났다. 위로 누나가 넷이다.

 

동네에 옻 우물이 있었다. 지금 3단지에서 청계산 쪽으로 사기막골과 세곡마을 사이를 모템말이라 했다.

 

청계산에서 내려와 바위 밑에서 우물이 시원하고 맛이 있었다. 외지에서 옻이 오른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몸을 씻고 물을 떠가고 돈이나 과일을 놓고 가기도 했었다. 농사가 달라져 초식(채소)을 하면서 관정을 파면서 물이 마르기 시작했다.

 

청계산에서 나는 물은 암물이고, 관악산에서 나는 물은 숫물이다. ‘무게를 달아보면 암물이 무겁다.’ 일본사람들이 그랬대요.”

 

구리안에서 났어요. 구리안이란 말은 입 구()자를 써서 그랬다는 말도 있고, 정조대왕께서 수원 행궁에 가실 때 지지대 가기 전 옛길이 있었는데 세골 가기 전 방앗간이 가루개에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아홉 번째 맥이 끊긴 곳이라 해서 구리안 이라고 했다고 해요.”

 

구리안에서 새술막, 비석거리를 지나 학교 다녔지. 솜바지 저고리 입고....... 어머니와 큰어머니 밤에 고구마 삶아 학교로 가져오시는데, 늑대가 따라오더래. 그 다음부터는 무서워서 못 오셨지.......”

 

지에무씨(GMC) 트럭이 데꾸보꾸(울퉁불퉁한) 길을 다녔어. 으능쟁이고개(지식정보타운역 예정지)를 오르느라 차가 덜덜 거리면 차 뒤에 매달려 있다가 뛰어내리곤 했지. 근처에 성황당이 있었는데 누군가 배, 사과를 제물로 놔두고 가면 주워 먹곤 했어. 옛날엔 깡패가 많아서 도시락도 빼앗는 통에 잘 안 가지고 다녔어.”

 

갈현리에서 인덕원 지나 안양 가는 길 쪽에 지금 가압장 있는데 거기서 목 매 달아 죽은 사람 시체도 몇 번을 봤어. 옛날엔 소도둑이 많았는데 거기서 소를 잡아 가죽을 벗겨 놓고 가곤 했었어.”

 

“1·4후퇴 때 용인 고기리로 해서 지지대 고개 넘어 팔달문 있는 데로 피난을 갔어. 자루에 양은솥을 담아 가지고 지고 갔지. 솥 안에는 반찬으로 깨소금을 담고....... 큰 기와집에 노망이 난 노인네를 두고 가족들이 다 피난을 가버린 집이 있어서 거기서 잤어. 유엔군이 하늘을 장악해서 중공군들이 도망도 못가고 숨어 지냈지. 눈이 엄청 내리던 날, 밭에 수수깡을 베어서 세워 쌓아 놓았는데 거기서 중공군들이 숨어있다 나오더라구. 바닥에는 중공군들이 통신선인 삐삐선을 깔아 놓았고.....그때 처음 봤어. 의왕 청계리로 해서 구리안에 우리 종산이 있는데로 오는데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았어. 총소리가 들리는데 멀리 날아가는 총알은 하는 소리를 내고 가까이 떨어지는 총알은 소리가 조금 달랐어. 그런데 나무 옆에 솜이불을 둥글게 둘러 놓고 띠를 매서 나무에 묶어 놓고 솜이불을 덮어놨어. 뭔가 싶어서 열어보니 어린애가 미루꾸(캐러멜)을 먹고 있더라구. 눈이 무척 와. 어른들은 빨리 오래지. 총알은 날아오지...... 지금 강릉막국수 있는데서 한 300미터 떨어진데가 우리집인데. 집에 오니 중공군이 쪽마루에 말을 매놨어. 중공군은 미수가루를 담은 자루로 띠를 둘러메고 있었어. 군복을 뒤집어 입으면 하얗게 누빈 옷이 되더라구. 안에는 토끼털을 넣은 구두를 신고 나무 손잡이로 된 권총을 차고 나무방망이 수류탄을 차고.......행랑채에는 피난민들이 가득하고.......우리 어머니와 누님이 우니까 중공군이 이승만 박사가 불쌍해서 우느냐?’고 물어. 그래 우리 아버님이 아니다. 얘들이 불쌍해 운다그러시니까 돈을 주더라구.......피난 가기 전에 광(창고) 바닥을 파고 벼를 묻고 거적을 덮어 놨는데, 중공군들이 꼬챙이로 땅을 찔러 보고는 쌀을 파내더라고.....인천상륙작전 한 3일 동안 포사격이 계속 됐어. 포탄이 관악산을 넘어 연주대 지나 남태령 고개로 떨어지는 게 보여. 야광탄이 관악산 넘어오는 게 보였어. 그러고 나니 논두렁에 소총으로 단독무장한 국군 척후병이 들어오더라구. 그때 집 뒤에 방공호를 파고 있었는데 안쪽에는 굴을 하나 더 파서 여자들이 들어가 숨었고......군인들이 나오라하고 안 나오면 총으로 갈겼어. 그 뒤에 미군들이 모템말 쪽으로 들어오면서 지뢰를 묻고.......”

 

6,70년대 과천에선 채소농사가 잘 됐다. 커다란 가고(대나무로 짠 대형 바구니)에 담아 놓으면 시장에서 상인들이 실어갔다. 저녁에 상회에 가면 전표를 끊어주고 돈으로 받았다.

 

한 해 하면 땅 사고 한 해 하면 땅 사고..... 회사 다니는 것보다 낫다 싶더라구.”

 

그렇게 농사를 짓던 땅이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수용되고 이씨는 물 좋고 평지에서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평택에 땅을 샀다. 당시 평택에 논을 산 친구들이 여럿이었다.

 

구리안 세골은 70년 무렵 사당동 철거민들이 들어오면서 원주민들이 뒤로 물러나 앉는 형편이었다.

 

이씨는 20살이 넘어 안양에 있는 태흥화학이란 델 다녔다. 아버지가 폐암에 걸리시면서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29세에 늦게 군대 가서 수송대에 들어가는 바람에 전국을 돌아다녀보았다. 처가는 광창마을 송씨네다. 장가들고 농사만으론 안 되겠다 싶어서 부동산업에 나섰다. 이씨는 농사만 짓던 자신이 사업에 나서려면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인덕원 집을 지었지. 지으면서 커다란 술독 3개를 묻었어. 술이 익으면 친구들을 불러 술잔을 나누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지. 큰 도움이 됐어.”

그렇게 부동산업에 나선 이씨는 집을 지어 팔기도 하고 상가를 분양받아 임대를 놓기도 했다.

 

상가든 주택이든 위치, 유동인구가 중요해. 그 다음은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수준이 어떤가를 봐야 해. 동편마을을 예를 들어볼까? 처음 입주 초반에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출금 갚느라 돈이 없어. 그러니 상가가 장사가 되려면 한참 기다려야 해. 그걸 생각해서 투자해야지.”

 

이씨는 앞으로 한동안은 경기가 나아지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부동산들을 팔아서 목 좋은 상가를 분양 받아서 프랜차이즈 점포로 세를 주고 있다.

70년대 초에 과천에서 보상 받아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어도 그 뒤에 어떻게 관리했느냐로 갈리더란다. 인덕원 제일 부자가 죽고 나서 자식들 재산싸움에 재산이 3년을 못 가는걸 보면서 이씨는 신중하게 투자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다섯 가지면 셋만 투자해야 해. 전부 다 거는 건 위험해. 그리고 소문 난 데는 함정이 있어.”

 

(202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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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골 이씨네는 기골이 장대한 장사들이었다. 이씨의 부친도 씨름을 했다. 이씨는 18살에 과천면 체육대회에서 1등을 했다. 이어 면사무소 직원 오토바이를 얻어타고 안양 가서 시흥군체육대회에서도 1등을 했다. 면대회에서 1등하면 부상이 삽이나 괭이였단다.

 

씨름, 모래가마들기를 하면 삼부골 이기는 동네가 없었지

 

샅바를 잡고 흔들어 보면 감이 와. 이건 내가 자빠뜨릴수 있겠다.”

 

미군부대에서 더플백을 얻어다 쌀을 담았어. 한 자루에 여덟 말이 들어가. 그걸 들어다 마차에 올리면 마차바퀴에서 비명이 났지.”

 

피난을 가려고 마차에 짐을 다 실어놓고 출발하려는데 중공군이 들이닥쳤다. 마차 끌 소를 풀어다 뒷곁에 매고는 자기네가 타고 온 말을 집 앞에 매더란다. 그래 가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관악산, 우면산에서 이쪽으로 포를 쏘고, 이쪽에선 그리로 쏘고.......”

 

중학교를 다닐 무렵부터는 운동을 했다. 지금의 과천향교 아래 관악중학교가 있었는데 선배가 교장의 허락을 받고 교실에서 공수도를 가르쳤다. 4년 정도를 다니며 운동했다. 빨간 벽돌 2장 정도는 정권으로 깰 수 있었다. 양재동 ○○○학교에는 유도부가 있었고.....”

 

눈이 내리면 올무로 토끼를 잡곤 했어. 뒷산에 토끼가 많았어. 하루는 살쾡이를 잡았어. 진돗개를 데리고 낫을 들고 갔지. 사람을 보고 벼랑 위로 올라 가려고 바등거리는 걸 낫을 던졌는데 빗나갔어. 바위틈에 숨어 들어가는거야. 솔가지를 모아다 불을 피우니까. 연기에 못 견디고 뛰쳐나오는 걸 낫으로 목 뒤를 친다는게 빗맞아서 허리를 부러뜨렸더라구. 나중에 잡고 보니까 벼랑에 오르느라 발톱이 전부 뒤로 제껴져 있더라구.....”

 

살쾡이를 잡은 이씨는 그 겨울에 호랑이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발자국이 송아지 발자국 만큼 커. 발자국이 토끼처럼 이리저리 나는게 아니라 한 줄로 똑바로 나더라구. 눈이 쌓이면 눈을 밟고 올라가더라구. 눈 위에 싸놓은 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더라구.......몇 시간을 산을 헤매고 다녔는데 끝내 못봤어. 이듬 해 창경원엘 가서 호랑이를 보는 순간 아이고 저런 놈을 내가 쫓아 다녔구나싶더라구.......”

 

22살에 군에 갔다. 체육부대 격으로 전국으로 대회를 다녔다. 당시 한국전력에 실업팀이 있었는데 대회 때면 이씨를 데려가 출전시켰다. 제대 후에는 홍천군 선수로 강원 7개 시 대회을 거쳐 전국체전에 나가곤 했다.

 

“190cm160kg 나가는 장사야. 그때 내가 174cm105kg이었는데 지금처럼 체급이 나뉘어진 것도 아니어서 당해낼수가 있나........전국체전 나가면 송아지를 탔는데 돈으로 쳐서 8만원인가를 주더라구.”

 

스물여덟 되던 해에 방아다리 한씨네 규수와 중매로 결혼해 아들 셋을 두었다. 30년 방앗간을 해서 세 아들 모두 대학원까지 가르친게 일생 큰 일이었다.

 

강남역과 역삼역 사이에 국기원이 있지요. 그 아래가 방아다리였어요. 거기서 과천을 오면 말죽거리 지나 과천에 오면 10여 호 집이 모여있는 동네가 열두 군데라 해서 열두우마니라 했어요. 뒷골, 안골, 삼부골.......열 두 군데.......과천읍내에 제중의원이라고 병원이 하나였는데 거기 이만영씨가 용했어요.”

 

서울 금호동에 터를 잡은 이씨는 상계동에 제과점, 종로에 제화점을 하다가 성수쇼핑센터 관리주임 자리를 제안 받는다. 군시절 동료가 그의 운동실력을 알고 시장 운영질서를 잡기 위해 그를 추천했다.

 

상인이 거칠어서 임대료를 올리면 관리실로 몰려와서 같이 죽자고 덤벼들고...... 통로에 내놓은 좌판을 안으로 들이라고 하면 네가 뭔데하고 대들곤 했지. 한 놈을 메다 꽂으니까. ‘관리소에서 깡패를 불러왔다소문이 나대. 쇼핑센터 2층에 맥주홀이 있었는데 저녁마다 성수동, 화양리 건달들이 싸움이 붙어. 그래 나도 싸우고......그렇게 10년을 하다가 시장 한 쪽에 자리를 잡고 방앗간을 했지.”

 

새벽 2시에 일어나 6시면 쌀 두 가마를 떡을 만들어 놓고 낮에는 손님들의 주문을 받는 생활을 30년을 했다. 제법 장사가 잘 됐다. 그러다가 부인 한씨가 위암에 걸렸다.

 

병원엘 갔는데 응급이라며 바로 수술을 해서 위를 들어 냈어요. 그 참에 방앗간 문을 닫고 요양을 겸해서 한 10년 중국에서 지내다가 여기 용인으로 온 거예요.”

 

군시절 상관인 오모씨가 이씨를 장군이라 부르며 과천 집에 인사 오는 등 친하게 지냈다. 월남에 파병 가서 죽었다는 소릴 들었다. 충무로에서 제화점을 할 때 누가 오씨가 중령이 되어 중부경찰서에 있다는 얘길 하길래 찾아 갔더니 출타중이라 연락처를 남기고 돌아왔더니 잠시 후에 오중령이 전화를 해왔다. 다리에 총을 맞고 후송됐는데 전사로 처리했었단 소릴 하며 차를 보낼테니 보자더란다.

하사가 지프차를 몰고 왔는데 보안대 차야. 보안대 중령이 중부서에 파견 나가 있었던 거야. 그땐 보안대가 쎘어. 신호고 뭐고 내달려도 아무도 뭐라 안하고...... 그날 저녁에 술 한잔 같이 하는데 10만원짜리가 두둑한 지갑을 내보이며 재벌들이 술값 하라고 준 돈이니까 맘껏 마시자고 종로 니나노집에 데려 가더라구. 옆에 아가씨를 앉히고 양주를 마시고 노는데 거기선 희안하게 양주를 따뜻하게 데워서 내놓더라구. 나오면서 오씨가 10만원을 내니까 2만원을 거슬러 주더라구.......그렇게 다시 인연을 이어 가는데 어느 날 같이 과천엘 가자는 거야. 오중령 지프를 타고 과천에 와서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그랬는데 내게 삼부골 사정을 물어 누가 땅을 얼마나 가졌는지 동네 어른이 누구신지...... 그리고는 나더러 돈 있으면 초가집 하나라도 더 사라는거야. 그때 초가집 10만원도 안 가던 때지만 장사하고 먹고 사느라 그럴 여유가 있나?.......나중에 알고보니 오중령이 예편을 하고 마사회에 들어가서 삼부골 땅을 수용해서 마사를 짓는 일을 하게 된 거였어.”

 

그때 주암리 돌무께에서 삼부골을 지나 광창리로 가려면 곧바로 길이 있었어. 그래서 오씨에게 그 길을 그대로 쓸수 있게 수용해 달라고 했지만 그 아래 까지 수용되면서 지금처럼 길이 삼부골 아래로 빙 돌아가게 됐지.”

 

아랫삼부골은 마사회가 들어오면서 없어지고 윗삼부골은 1990년대 기무사가 들어서면서 지금의 동네가 작아졌다. 기무사로 종중산이 들어가면서 선산을 수습해 납골묘를 조성했다.

 

큰할아버지가 삼부골에 한약방을 하시며 전국을 다니시는 유명한 지관이셨어. 그 분이 6대조 할아버지부터 유실된 조상 묘를 찾아 주셨지. 장마로 개울이 넘쳐 떠내려간 묘를 어디 얼마쯤 내려가면 얼마 깊이에 있다그래서 수습할수 있었지.”

 

(2021.11.16.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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