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씨는 아버지가 과천에 이주하시면서 과천에서 자랐다.

 

백학윤 장로의 삶은 과천교회를 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친구를 따라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평생 배필을 얻었다.

 

과천교회는 1949년 토박이 이기증 씨 등이 노회에 청원하면서 시작된다. 이기증씨는 지금 과천노인학교장인 이정달씨 조부다.

 

청원을 받은 노회는 안양 인덕원에 있는 동은교회 전도사였던 조원국 전도사에게 도움을 받는다. 조전도사는 인덕원과 과천을 오가며 교회를 살피다가 전쟁이 끝나고 교인들과 양재천에서 모래를 푸고 산흙을 개서 흙벽돌을 만들어 교회를 짓는다.

 

과천교회에서 야학을 했어요. 정식 학교인가를 내려 했는데, 인근 학교에서 반대해서 못 냈어요. 우리는 돈을 받지 않으니까, 그리 갈 아이들이 우리교회로 오니까, 교육청에 반대의견을 내서 못 냈어요.”

 

읍내에는 동아일보 과천지국이 있었다. 백씨는 군대 입대 전후로 이 보급소 총무로 일한다. 북으로 주암리부터 남으로 재경골까지 걸어서 신문을 배달하고 수금했다. 당시 고 이송산 장로가 지국장이었는데 주재기자 역할도 했다. 백씨는 기사 쓰는 것도 도왔다. 당시에는 전부 걸어 다녔다. 후에 백씨가 사임후에 지국장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소천했다.

동아일보 보급소 일이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됐어요. 날마다 신문을 읽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걸 알 수 있었지. 어느 날 육군에서 타자병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났어요. 이거다 싶었지.”

 

용산 삼각지에 육군본부가 있고 그 부근에 한국행정기술학원이 있었다. 학원을 수료하고 시험에 합격하면 타자병으로 지원입대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등록했다. 저녁마다 학원을 다니며 타자를 익혔다. 시험 날 27명인가 응시했는데, 7명이 합격했다.

 

논산에서 기본훈련을 받고나니 춘천으로 데려가데. 그리곤 며칠 후 제2의무단으로 귀대하라는 명령서를 주는 거예요. 의무단 본부가 춘천에 있다고만 듣고 집으로 왔는데...친구와 과천 집으로 와 하루 자고, 다음 날 그 친구 집으로 가 하루 자고, 월요일 춘천으로 갔어요. 가서야 제2의무단이 춘천이 있다가 몇 달 전에 원주로 이동되었다는 것을 춘천에 가서야 알게 되었어요. 거기 가서야 원주 가는 차가 드물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하늘이 노랗더라구. 탈영병이 된 거야. 오후 3시에 차가 있는데 가면 귀대 마감시간인 5시가 넘게 생겼지. 차를 탔는데 하사들 몇이 타더니 어디 가느냐고 물어. 명령서를 보여주니까, ‘무슨 빽으로 그 좋은델 들어갔느냐?’고 되묻더라구. 그리고는 부대에 도착하면 5시가 넘게 생겼지만, 1군사령부와 의무대가 붙어 있으니 자기가 우리 부대 옆이니까 위병소에 잘 말해주겠다고 하더라구.”

 

부대에서는 신병이지만 나가서 기죽지 말라고 일병계급장을 붙여 주었다. 백씨는 본부 타자병이 됐다. 병원에서 약품수불에 쓰이는 영문타자를 칠 수 있는 수준이 되자 대우가 달라졌다. 당시 공문은 기름종이를 철필로 긁어 등사하는 가리방이 대부분이었는데, 5·16혁명 이후 군 위계질서를 잡는다고 규격과 양식에 엄했다. 규격과 서식이 틀리면 공문 접수도 안하고 규정위반이란 도장을 찍어 다시 해오라고 문서연락병에게 반송하였고 부대장은 시말서를 쓰게 했다. 3회 이상이면 진급이 안되었다. 그걸 상부에서 합격점을 줄 만큼 잘 만드는 부대는 백씨가 속한 부대라는 소문이 나자 주변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애를 썼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군 행정서식과 규정을 정부행정서식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덕분에 사병이지만, 장교들에게 사랑받으며 지냈지. 일거리는 쌓아놓고 하는 판이니까, 적절하게 조정만 하면 휴가를 다녀오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요. 15일 정기휴가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으니 다녀올 수 없지만 잠깐잠깐 짧은 휴가는 다녀올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군에서 행정을 배운 것이 일생 일하는데 큰 도움이 됐어요. 교회에서도 조직, 재정, 출판을 맡게 됐고 교단 노회 사무장을 하면서도 일 잘 한다는 소릴 듣게 됐으니까.”

 

과천교회 40년사를 낸다. 백씨는 실무를 맡았다. 과천 최초의 기록사인 셈이다. 당시 과천교회에는 장로가 없었다. 백집사는 제직회 서기를 7년을 보았다. 제직회 서기록, 주보, 사진, 청년회가 만든 [성화], 중고등부가 만든 [등대]지를 가지고 다닌 것이 도움이 됐다.

 

자료가 없어서 고생했지요. 내가 그때 고생을 해서 과천구술사 만든다길래, 선뜻 응해 준 거예요. 어른들 만나 일일이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서 40년사를 만들었어요. 이후 50년사에는 사진을 위주로 사진집이 나왔고......”

 

과천교회가 커져가면서 다시 크게 짓는 일에 참여하고 교회 행정을 맡아 했다. 과천교회가 노회에 영향력이 커져가면서 노회 사무장으로 추천됐다. 12년을 일했다.

 

회의 자료를 만들어 내고, 노회에서 갓 시작하는 교회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어요. 제도적으로 기금을 만들어 개척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지원 받는 교회에서 다시 개척교회를 지원하는 제도를 만드는 일을 했지요. 당시 노회는 220페이지나 되는 보고서를 연2회 발행해서 총대들에게 보냈어요. 그게 도움이 됐지요.”

 

백장로는 후에 4단지 상가에 부동산중개소를 내기도 했고, 반포에서 기독교백화점에서 덕산공예를 운영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내가 한 일은 없어요. 하나님이 계획이 있으셨고 저를 불러다 쓰셨던 거라 생각해요.”

 

(2021.9.30. 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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