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서 경기도체육대회 출전선수단장

부천에서 열린 경기도체전에 화성시 선수단장을 맡은 송영서 화성시체육회 부회장(1948년 만들어진 체육회는 시장이 회장이고 부시장, 교육장, 농협중앙회 화성지부장이 당연직 부회장을 맡게 된다. 여기에 가맹단체장이 한사람 부회장단에 포함된다. 송단장은 배드민턴연합회장 자격으로 부회장을 맡고 있다) 화성시 장학재단 이사도 함께 맡고 있다. 본업은 주택건설회사 (주)태영건설 대표이사.

“경기도체전은 31개 시군을 인구에 따라 1,2군으로 나누는데 화성은 20만 이상의 15개 시군에 들어가요. 15개 시군 중에 수원같은 곳은 시청 실업팀만 9개가 되는 곳이라 경쟁이 힘들어요.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선수단이 자랑스럽지요. 올해는 요트와 여자펜싱이 시범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했어요”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원없이 일한 젊은 시절

본래 우정에서 난 토박이다. 젊어서는 농사일을 하면서 4-H활동에 정열을 쏟았다. 당시에 사회계몽 활동 성격이 강한 4-H는 젊은 농부들이 모여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공부하는 분위기로 가득했다. 송회장도 69년 제대 후에 양계, 목장, 하우스 농사 등 신영농에 정열을 쏟았다. 그렇게 일하다가 우물을 파는 일을 하게 되었고 중장비를 동원해서 본격적인 토목공사에 투신하게 된다.

“IMF 전까지는 신나게 일만 했지요. 94년 무렵이 절정이었어요. 용인 지역에 관정공사가 그렇게 많았고 쏠쏠했으니까요. 그때 돈으로 우물하나에 2천만원이 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다가 99년경 IMF를 겪으면서 회사가 어려워졌어요. 지금은 크게 욕심내지 않고 내 능력이 닿는 정도에서 일하는 정도예요”

회사가 한창 잘나갈 무렵 지역 이곳저곳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고 나와서 활동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버는 대로 집어주는 맛도 누려 보았다. 그동안 받은 감사장만 1백 여 장이 넘더란다.


가장 큰 행복은 가족이 따듯한 밥상에 둘러 앉는 것

“그런데 한번 어려워지니까 세상 아주 우스워지대요. 사람들이 얼굴을 돌리는 거예요. 자존심에 피붙이들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않으며 마무리를 하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이 집사람과 세 아이들이 한상에 어울려 따뜻한 밥상을 나누는 것 이라는 걸. 젊어서는 아내가 말려도 대처로 나가 여기저기 오라는 곳이 많아서 떠돌며 흥청거렸지요. 지금은 집사람 주변에서 빙빙 돌아요(웃음)”

지금은 발안을 중심으로 가까운 곳에서 몇몇 친구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는 크게 일을 벌이지 않으려 한다는 송부회장은 체육회에 10년 넘게 봉사하며 애정을 쏟는다.(내년말까지 임기가 남은 시체육회 부회장은 경기도체육회 이사로도 참여해서 활동하게 된다.) 선거철인데 주변에서 가만히 두느냐는 질문에

“지금은 덜해요. 젊은 날에는 직접 나서서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대신에 내 능력이 닿는 한 많은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조직을 만들어 주곤 했어요.”

지면에 옮길 수는 없지만 기자는 지역 민심 동향과 전망에 대해 많은 도움을 따로 받을 정도로 탁견을 가지고 있었다. 삼괴중학교 총동문회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지역 풍향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신으로 살았다고 해야 할까요? 젊어서는 막노동을 하면 하루 1만원을 벌지만 기업을 하면 10만원을 벌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을 턱턱 벌렸지요. 때로는 운때가 맞아서 순풍을 맞아 잘나가기도 했구요. 하지만 모든 것이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안되는건가봐요”

인생 선배들에게 기자가 같은 질문을 항상 한다. 열심히 살면 좋은 끝이 있는건가요?


노력만으로는 안되는 운명같은게 있더라

“그렇지요. 하지만 똑같은 씨앗이 옥토에 뿌려지면 풍성하게 열매를 맺지만 돌밭에 떨어지면 힘들고 어려운 생을 살아야 하잖아요. 인생도 그런 면이 있어요. 자기 욕심만으로는 안되는 거예요”

달관한 스님이나 목사님에게서 들을 법한 말을 들었다. 봄비가 종일 내리는데 헤어지면서 “가까이 오면 전화해요. 따뜻한 밥을 내손으로 지어주던, 사주던 좋은 후배라고 생각할테니 다시 봅시다”하고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김용현 기자)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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