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주암동 은행나무길 16번지에서 난 김정도씨.

 

과천에 산신제 지내는 곳이 두 군데 남태령과 주암동 두 군데다.

10월 초하루 도당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제를 지냈다. 죽바위 대나무가 났었대. 그래서 죽바위.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축문이 6·25때 바뀐 걸로 아는데 석사논문 쓰는 학자가 3년을 드나들며 찾았지만 축문이 없어 아쉬워 한 적도 있다.

어려서 당제 지내면 떡을 받아먹던 생각만 난다던 김씨도 자라서 당주가 됐다.

 

당주도인이라고 당주노릇도 했어. 당제는 소머리가 제일이야. 30이 넘어야 해. 옛날 법에는 개인이 아니라 신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동네책임자가 누가 지내는 게 적임이냐 따져 골랐지.

깨끗한 사람이 지냈고 도당바위 앞에 우물이 있어서 그 물로 몇 일 전에 싹 가셔내고 그 물로 제사를 지내.

당시 80가구 정도였어. 간덴말 동네가 없어졌고 1반이 열 두 가구에서 지금은 30세대 정도. 전부 84가구 정도.

통장이 당주하고 건립을 택하고 집집마다 거둬서 쌀을 1킬로 정도 거둬서 지냈어. 99년부터 안 걷고 동네 돈으로 지내지.”

 

서초동이 80년대 초 개발 되서 싹 없어졌지. 그전엔 여기서 경운기 싣고 가서 고랑 내주고 그랬어. 여기서 채소를 기르면 차가 와서 실어가. 영등포 경신상회 아현동까지.....논 몇 마지기 하고 밭에는 콩 보리 밀보리 조금 개발되면서 채미, 고추 많이 하고......”

그전엔 나무장수, 신목장수를 했지. 말죽거리로 쪽꼬리(장작) 장사했어. 사당동으로 청계에서 신목장수는 살구나무를 해다 파는 거야. 한남동에서 나룻배를 탔지. 선가가 1백원, 낭구는 2백원. 하루는 팔지 못해 도루 오는데, 누가 1백원 주고 가져가더라구 그래서 배 타고 돌아왔어. 나무 팔면 국밥은 비싸서 못 사먹고 빵 5원 짜리 몇 개......”

 

새마을운동 1975년 노깡(콩크리트 배수관) 놓고 하던 생각 나. 부역을 나갔지. 방앗간 앞 길 한내서 부터 자갈을 깔아야 했어. 먹구 살게 없어도 그건 나가야했어. 면에서는 마을로 동네이장은 집집마다 몇 미터씩 정해주지. 자갈로 깔으라고......,내 동네는 마차만 다니기 때문에 안 해도 큰길은 나가서 부역했지. 당시 동네 경운기가 우리 작은형이 하나 갖고 있었지. 70년엔 그리곤 마차 몇 대 있었고. 내 선배들은 마차 타고 다녔어. 작은 형은 딸딸이 끌고......”

 

어머니께서 13남매 낳으셔서 일본사람한테 상까지 받으셨어. 내가 끝으루 셋째 아들로는 넷째야. 아버지는 여기분이셨고 어머니는 어디서 시집오셨는지 몰라. 큰아버지는 돌무께서 돌아가셨어. 장군마을서 나시고 1반에서 돌아가셨고.....”

 

“6·25때 피난 갈 데가 어디 있어? 장군마을 복숭아나무 많은데 외딴집 있었어. 그리 갔는데 중국 놈들이 왔더라구. 그리 갔다 이리 돌아왔지. 여기는 차가 못 다니는 곳이라 여기가 피난 오는 곳이야. 적군. 인민군은 없고 중공군이 들어왔지.

우면산 관악산 전투가 크게 벌어졌어. 아군끼리 신호가 안 돼 갖고 오인사격들을 했지. 한내에 큰 매형이 사셨는데 마루 밑에 숨었는데 날아든 실탄에 이빨 하나가 부러졌지.”

 

중국놈들이 곡식을 그렇게 뺏어갔어. 말에다 저녁에 곡식을 싣고 가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지. 피난도 멀리 못 가구 외지 나가 돈벌이도 못해 보구 고향을 지켰는데 결국 없이 사는 거지. 남들은 투기들도 하구 그랬는데 앉아서 산전수전 겪었지.”

“28살에 장가갔어. 1967년 강원도 사람하고. 인연이래는건 천리 밖에도 있는 거야. 연애했지. 편지로 연애를 했지. 사진사도 없었어. 말죽거리도 없어 흑석동가서 약혼사진 찍었지. 그땐 남산 드라이브가 유행이었어. 딴 덴 갈 데도 없구. 동네서 구식결혼식을 했지. 54년 됐네. 남매 뒀어요.”

 

당제 지내기 한 달 전에 당주가 쌀 걷으러 다니지. 없는 사람도 다들 냈지. 쌀 걷어다 여기서 빻고 쪄가지고 만들어서 지내. 소머리는 마장동 독산동 가서 사오지. 소머리 값이 지금 20만 원정도. 그날 되면 더 비싸요. 메뚜기도 유월이 한철이라고......,과일 밤 대추는 여기 있으니......,소머리 처음엔 마장동 나중엔 독산동가 사고. 아주 옛날에는 양재동 정육점에다 맞추지. 그 후에 마장동 생겨서 마장동으로 다녔지. 초하루에 제사 지내고 초이튿날 모여서 먹구. 나중에 문화원 보조 나온 게 10년 안쪽이지. 근래 들어. 처음보다 줄었다가 올해 다시 1백만 원이라네.”

 

건의할 건 죽바위 유래에 대한 비석이 없어 안내판이 없어. 지금 우리 없어지면 누가 말대답 해줄 사람도 없어. 산제 지낸 목록 노임 얼마, 장적이 얼마 목록이 있었대요. 통장이 가지고 있을 거야. 인건비 땔나무까지 돈을 쳐서 계산했기 때문에.......”

 

과천에서 산신제 지낸 데가 많아. 삼부골도 지냈어. 삼부골 지낸 건 내가 알아. 굿하는 건 흔하게 봤지. 문명시대에 귀신이 어딨어. 하지만 있던 없던 동네 하나 된 마음에서 정성을 드린다 이런 거지.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하고, 도당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드리는 거지.”

 

여긴 무지래기 산골이야. 전기도 1974년 유공 들어오는 바람에 덕 봤지. 육영수여사가 문세광 총 맞아 죽은 뒤에 72, 3년도 박정희하고 박근혜가 여기 와서 나무 심었는데 그 나무가 죽었어. 은사시나무 알아주지도 않는 나무.”

전쟁 땐 이 동네 지방 빨갱이가 해꼬지 심하게 했다는 소리는 못 들었어. 맥계 골짜기 인민위원장 누가 하다가 그 동네에서 쫓겨났다지? 3통에 미군 부대 있을 때 술 취해서 새총 들고 새 잡으러 갔다가 미군한테 잡혀서 죽을 뻔 했어. 말이 안 통 하니까......”

 

김씨가 땅값을 계산하는 방법은 요즘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다. 농사를 지을 땅을 기준으로 삼는다. 지금 보면 산비탈이지만 그 산에서도 농사를 지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양재동 일원의 땅값이 오르면서 주암동도 많이 올랐다.

 

문원동은 대지가 천만 원이지만 여기 그린벨트라도 전답이 천만 원 안주고 못 사.”

 

김씨에게도 땅을 팔아 돈 좀 만진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돌아 온 답은 팔고 나갔던 사람들이 그 돈을 들고 무엇을 했겠느냐?’는 선문답이 돌아왔다.

 

죽치고 있던 사람 밥술 먹어. 그래서 돈이 사람 따라야지 사람이 돈 따르려면 애로가 있어.”

 

(2020.11.24. 원주암경로당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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