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아버지(빛날 찬 쌍토 규)가 수원금융조합에 근무하시며 수원시 인계동 소재 셋집 사실 때인 19352월에 태어나 2개월 뒤 수원시 영화동 소재 일본식 독립가옥(북문밖 국도1호변 약 200M 서북쪽 지점)을 구입해서 그리 이사해 성장해 수원 신풍소학교 4학년 2학기인 19459월 아버지가 귀농(김녕김씨 충의공파 26세 지손으로 12대 종손)하신 해에 과천초등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서울 관악구 대방동 소재 서울공립공업중학교 2,3학년 시절에는 수원 영화동에서 형들과 같이 살며 기차통학을 하기도 했다.

 

수원 살 때는 과천 고향집에 오려면 버스나 기차를 타거나 걸어서 지지대고개, 사그네를 거쳐 군포까지 와서 안양형무소 근처 민배기 그리고 인덕원, 찬우물을 거쳐 오고 갔지요.”

 

“8·15 해방되던 날도 여름방학 중 큰아들 집에 오셨던 할머니(이원영씨 여주분)를 모시고 오는데 인덕원(당시는 산모퉁이 고개길)고개를 돌아오는데 관악산 쪽 높은 하늘에서 하얀 물체가 흰연기를 뿜으며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할머니께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지만 글쎄다. 그게 뭐냐?’ 하셨고 물체는 날아가서 안보였어요. 집에 당도해 할아버지(김형만씨)께 여쭈어보니 그게 미국비행기 B-29였을게다라고 알려 주셔서 미국비행기는 높이도 날아가는구나하고 생각했지요. 과천 할아버지댁에는 넷째삼촌이 라디오를 팔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는 가게를 하셔서 조그만 단파라디오를 듣고 계셔서 뉴스를 듣고 세상사 흐름을 잘 알고 계셨어요. 할아버지께서는 뉴스에서 대동아전쟁이 끝났고 일본 천황이 항복했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신사참배를 왜놈들은 진자 산빠이라고 그랬는데 그걸 방학때도 참배를 하고 도장을 받아가야 학교에서 수신점수를 깎지 않았어요. 조선말 했다고 수신점수 깎고...... 그런데 과천에 전학오니까 그리 심하지는 않더라구요. 수원은 도회지라 그랬는지 학교에서도 일체 조선말 못하게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방학 끝나고 학교가니까 담임선생이 우리 조선말을 하더라구요. 그래 이상하다고 말하니까 이제 해방됐다고’......태극기를 들고다니고 그랬지요.”

 

선친이 과천면 의회 의장도 하시고 연이어 과천수리조합장을 하시며 과천저수지를 건설하실 때 지금 대공원 자리 벌판에 천막을 치시고 거기서 지내시면서 공사감독을 하셨고 내가 주말에 어쩌다가 집에 오면 공사장에 가서 아버지 먼저 뵙고 산 하나 넘어서 집으로(지금 경마공원연습장) 가곤 했어요.”

 

제방을 만들 때는 암석이 나오도록 바닥을 파내고 진흙을 다져넣었다. 당시 민둥재(지금의 9단지 뒷산)에 그대로 굽기만 하면 빨간벽돌이 되는 붉은 찰흙이 있어서 그 흙을 가져다 물에 이겨 암석틈을 막았다고 전한다. 저수지 공사를 위해 허가까지 약 2, 공사가 약 4년 정도 걸렸다. 5·16 혁명이 나고 부친은 안양까지 불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김씨는 19618월 국가재건최고회의 행정요원으로 취직했다. 주말이면 동료들과 천렵을 하곤 했다. 과천저수지와 청계산 개울이 맞닿는 자리에 깻묵을 이겨 넣은 어항을 드리우고 2,30분만 기다리면 송사리가 가득 잡히곤 해서 능내 집에 미리 부탁해서 준비한 양은 솥에 고추장에 파, 마늘 등 양념을 넣고 매운탕을 끓여 먹곤 했다.

 

아버님이 낚시를 좋아하셨어요. 은행에 다니실 때도 토요일 출근하시면서 어머니께 낚시밥을 부탁하셨어요. 어머니께서 들깻묵을 사다가 어른주먹만하게 3개 정도 만들어 놓으시면 아버지께서 퇴근하셔서 점심드시고 자전거에 낚시도구와 미끼 그리고 저녁도시락을 싣고 나가시면서 가시는 곳이 수원 광교나 서호저수지 어디쯤이라고 말씀하시면 일요일 아침에 낚시 좋아하는 내가 도시락과 내가 쓸 송사리 낚시대 둘러메고 찾아가서는 아버지께서 조반 드시는 동안 그 근처에서 송사리 낚시 하루종일 하다가 아버지와 돌아오곤했지요. 일동저수지나 물왕리까지 다니곤 했어요.”

 

1990년대 초 박영재 문화원장이 과천시 재경향우회를 만들었다. 서울에 사는 과천출신 인사들이 1년에 3,4회 모임을 갖고 고향발전을 상의하곤 했다. 1996년 박원장이 김씨에게 향우회장을 맡아 줄 것을 강권한다. 극구 사양했으나 그해 6월 정년퇴임을 하게 되자 더는 피할 수가 없었다. 과천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도 19974월 정기총회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총회장으로 추대해 3,44년을 역임하고 그후로도 8회에 걸쳐 16년을 명예회장으로 자문에 응했다. 일을 제대로 하려고 과천소방서 근처 명문학원및 별양동 과천오피스텔에 사무실을 내고 2012.4.1. 역사적인 과천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사업등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도록 지원했다.

 

공무원으로 재직 중 월급만으로는 3,4명의 동생들과 같이 기거하기에는 어려웠다. 약사인 부인(변삼자)이 집을 고쳐 진삼약국이란 약국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약국이래야 김씨네 형제가 학교에 다니기 위해 아버지께서 흑석동 길가에 사두셨던 15평 크기 한옥이었다. 그 집을 당시 돈 500만원을 아버지께 빌려 5평 정도를 약국으로 고쳤다. 남들 보기에는 안팎으로 돈을 버니 넉넉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일가친척들이 오면 약은 전부 거저 가져가고 형제들이 공동으로 부담해야 할 일이 생기면 김씨네가 맡아야 했으니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아버님 병수발로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결혼 후 유산으로 받은 과천 산골 논 800(4마지기)을 팔아도 남는게 없었다. 그 무렵 6·25 전쟁 당시 함께 학도의용군으로 종군했던 선배가 고향집 뒷동산에 있는 적산임야를 불하 한다는 소식을 전해 줬다. 15천 여 평을 12만원 정도에 불하 하는데 6년 분할이라는 것이었다. 그걸 아버지께 사드리는 것으로 약국 한다고 빌린 500만원을 갚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 땅이 경마연습장 서남쪽 뒷산인데 예전에는 능안마을이었고 경마공원으로 편입됐다. 김씨는 그 뒤로도 7년을 봉급 때마다 조금씩 갚아나갔다.

 

지금도 경마연습장에 가면 옛생각에 눈물이 나요. 산 앞으로 연습장 바닥에 집들이 조르란히 있었는데....동북쪽에서부터 집들이 있었는데 우리집이 3번째 집으로 제일 크고 기와집에다 마당도 제일 넓었어요. 뒤곁에는 감나무 고목이 세그루 있었는데 지금도 감이 열리고 경마장 인부들이 관리하는 것 같더라구요.”

 

김씨는 돈 만드는 재주는 없었다고 자평한다. 그러니 절약을 하며 살 수 밖에 없었고 머리를 써야 했다. 해외근무를 세 번, 13년을 하는 동안 은행돈을 빌려 벤츠를 사서 2년을 타다가 팔 때 일본돈으로 80만엔을 더 받고 판 적도 있었다. 그렇게 아끼고 살았어도 아이들 학비 때문에 융자를 받기도 했고 1996년 퇴직금으로 청산할수 있었다.

19966월 김씨가 국가재건최고회의 행정요원으로 들어갈 때 12,000여 명이 응시해 1차로 75명이 합격했다. 그 중 4명이 서약서에 서명할 수 없다고 해서 합격이 취소됐다. 71명이 서약서를 쓰는데 3시간이 걸렸다. 이유는 최고회의 행정요원으로 응시했는데 임무가 특수(정보?)라니까 망설이느라고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이었다.

 

과천초등학교 뒤 좌측에 신사가 있었고 우측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었죠. 학교 오른쪽으로는 과천지서(경찰서)가 있었고 그 오른쪽 앞에 제중의원이라고 한옥을 일부 개조한 병원이 있었어요. 학교 앞 큰 길 오른쪽 사거리 근처에 조그마한 우체국이 있었고요. 학교 주변에 관공서가 모여 있으니 과천 변두리 거주민들은 민원일을 보려면 관문리로 오곤 했어요.”

 

옛날에 서울이 무서우니까 과천서부터 기어간다는 말이 있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도 우리 형들 친구들이 방학때 과천으로 놀러 오면 과천 주막거리에서 건달들이 시비를 걸어서 싸움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어요. 그래서 아무개 이름(할아버지 김형만씨)을 대고 그 집 손자를 만나러 왔다고 말하면 무사히 지나갈수 있었어요. 옛날에는 과거 보러 가려면 과천을 반드시 지나야 하고 시흥쪽 길은 왜놈들이 들어와서 만든 길이고 그 전에는 과천을 지나야 하니까 과천서부터 기어야 과거를 볼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과거도 보지 못하고 얻어맞고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여기 과천이 주막거리예요. 남태령고개쪽으로 가면 한내삼거리가 있는데 주막거리고, 고개를 넘어가면 남태령 전철역 있는데 거기도 집이 한 30여 호 있었는데 거기도 주막거리라. 또 그 밑으로 내려가면 사당사거리가 심방뜰이라는 동네였는데 집이 한 4,50여 호 있었는데 주막거리이고......주막거리가 4곳이나 조르란히 있었어요. 그러니 서울을 가려면 과천을 거쳐야 하고 지나는 곳마다 술을 한순배 내거나 선물을 주어야 지나갈 수 있었지요. 그때 동쪽으로 우면산 모퉁이에는 말죽거리(현재는 양재)가 있었지만 남쪽으로 뚫린 큰 길이 없었기 때문에 왕래가 많지 않았고 6·25 이후에 번화가가 되었지요.”

 

·고등학교 다닐 때 여름방학이면 참외, 수박을 팔러 서울 남대문, 영등포시장이나 멀리는 하인천시장까지 10번 이상을 다녔어요. 아버지께서 농업중학교 다니셨고 과천에서 농사를 지으실 때 쌀·보리 농사 만으로는 아이들 학비 조달이 어려우니까 참외, 수박, , 토마토, 호박, 당근, 고추 등 소채작물 밭농사도 겸하셨는데 트럭에 짐을 싣고 화주로 따라다니면서 아버지를 대신해서 한몫을 하곤 했지요.”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남들은 시계도 차고 가죽구두도 신고 그러는데 아버지가 은행에 다니실 때 같으면 떼를 써보겠지만 농사지으시느라 머슴 셋 데리고 허구헌날 애를 태우시는데 그거 사달라는 말이 안 나오더라구. 그래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작은형과 우리 산에서 나무를 해다 집 뒷켠에 쌓아 두었다가 나무장수에게 팔아서 일제 세이코 시계와 구두를 사서 형과 나눠 가졌죠. 작은형은 그 시계를 잘 차고 다니는데 나는 그 시계가 돌아가는게 하도 신기해서 분해를 했다가 다시 조립을 못해서 결국 시계병원에 가서 고쳐왔던 기억이 나요.”

 

6·25 전시에 고등학교를 다니던 김씨는 능안말 집에서 대방동 성남고등학교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어느 토요일 후배학생들과 삐삐선(군용야전 전화선)으로 직접 재 보았다. 300m 길이의 삐삐선 양 끝에 나무말뚝을 묶어 약 3시간에 걸쳐 재보니 14km 하고 750m가 나왔다. 왕복 70리를 매일같이 걸어다닌 것이다.

 

“9·28 수복후에 고향 선배들 종용으로 학도의용군(국방부 정훈국 소속)에 나가야 했어요. 3개월간 학도의용군 신분증을 갖고, 칼빈총에 대검도 차고 다니면서 공비토벌에도 참가하곤 했어요. 1·4 후퇴 때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과 피난을 가던지 군에 입대해 국방부 지시를 받던지 하라더군요. 그래서 15명 중 4,5명은 국방부로 갔고 나와 나머지는 식구들과 피난가는 길을 택했지요.”

 

피난은 친족 김녕김씨가 많이 사는 상주(거주마을 종가를 목표로)로 가기로 했다. 아버지와는 상주에서 만나기로 하고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동생 4명이 집을 나섰는데 출발 직전에 같은 동네 김대성씨네도 마차에 짐을 조금 싣고 떠나면서 김씨네 짐을 실어주길래 같이 떠났다. 과천읍을 나오기도 전에 길이 꽉 막혀 군·관에서 인도해 주는 길로만 갈수 있었다. 군포에서 수원쪽으로 가려 했으나 남양쪽으로만 갈수 있었다. 수원행은 오솔길이라 사람만 갈 수 있다고 해서 어머니와 식구 4명은 수원으로 가고 김씨는 마차를 따라 남양으로 갔다. 저녁 무렵 남양 쪽 길가 동네에서 노숙을 해야 할 참이었다. 김씨는 짐을 지고 30여 리 떨어진 수원을 향해 걸었다. 12시 경 수원 영화동 영말 외가댁(외삼촌 임수광씨)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식구들은 4시 경에 출발해서 남양으로 함께 걸어서 동네에서 함께 출발했던 이웃들과 만났다. ·관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평택 서편을 돌아 둔포 시내로 들어 선 것이 오후 5시 경이었다. 불과 30여 분 전에 앞서가던 피난민들 속에 중공군 선발대 2개 분대가 섞여 있었는데 발각되어 UN군 공중 기습으로 몰살당했다. 시신 수 십여 구가 보였고 길바닥은 온통 유혈이 낭자했다. 비위가 약한 누이(당시 21세 정도)가 구역질을 하며 혼수상태가 되었다. 우선 누이를 누이려고 길 가의 집을 찾았지만 집집마다 시신이 10여 명씩 쓰려져 있었다. 10여 곳을 뒤지다가 둔포초등학교로 들어갔다. 교실마다 피난민 2,30여 명씩 웅크리고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하룻밤을 지내고 날이 밝자마자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김씨도 지쳐 길옆에 쓰러져 애를 먹었다. 길 가 방앗간 창고에서 여섯 식구가 웅크리고 쉬었다가 날이 밝자 다시 2,30m를 가다가 쉬기를 반복하며 내려갔다. 남의 집 사랑마루를 빌려 밤이슬을 피하기도 했다. 김씨가 탈진해서 쓰러지자 어머니는 흰죽을 쑤어다가 머리맡에 놓고 신령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밤새 두손모아 비셨다. 그 밤 김씨는 돌아누워 울면서 어머님의 정성을 보아서라도 부모 앞에서는 아프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김씨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말짱해졌다.

다음 날 길을 따라 내려 간 곳이 봉담면 덕리였다. 오씨네 빈 집이 있었다. 마침 동내에서 같이 내려간 사람 중에 오씨가 있어서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안방에는 김대성씨네와 오차복씨 모친이 딸 2명과 같이 기거하고 건넌방 1칸에 김씨네 6식구가 피난생활을 하게 되었다. 덕리에서 온양쪽으로 1.5km 고개 하나를 넘으면 이순신 장군묘가 있었다.

피난길에 나설 때는 상주에서 아버지를 만나기로 했고 돈은 아버지가 갖고 계셨으니 김씨네 6식구는 생활이 곤란했다. 다행히 가져 온 짐 속에 누이 시집 보낼 때 쓰려고 사 두었던 혼수감이 있었다. 그걸 헐값에 팔아서 연명하면서 김씨는 솔가지 땔나무를 해다가 둔포시장에 내다 팔아서 쌀 1되를 사서 죽을 쑤어서 아침저녁 2끼만 먹었다. 말이 죽이지 쌀알이 수영한다고 할만큼 멀건 죽이었다. 그걸로도 안되서 온양시장에서 엿을 받아다 팔기도 했다. 3개월쯤 지나자 방물장수들이 서울탈환 소식을 전해주었다.

소마차를 끌고 함께 과천에서 출발했던 김대성씨네와 오씨네가 돌아가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출발해 성환, 공도, 양성, 용인, 기흥, 수지를 거쳐 돌아오기로 하고 떠났다. 짐은 1/3이 안될 만큼 줄어서 식구들이 나누어 지고 떠났다. 용인쯤 왔는데 아버지께서 마중 보내신 김형달 작은댁 할아버지와 집에서 잔일하던 머슴 박씨와 만났다. 모두들 무사하시다는 반가운 소식에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왔다. 해질 무렵 3개월만에 그리던 아버지를 만나고 고향집에 돌아오니 이젠 살았구나싶어 기분이 홀가분해지고 살 것 같았다.

아버지께선 일부러 늙어 보이라고 수염을 기르셔서 눈··입만 보일 정도였다. 아군이 서울을 수복할 때도 중공군 1개 중대가 동리에 주둔해 있다가 퇴각하면서 그날도 김형달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짐을 지워 남태령을 넘어 가다가 아군의 기총사격을 받게 되었다. 짐을 진 채로 길 옆 개울에 엎어져 30여 분을 꼼짝 않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중공군들은 달아나고 없었다. 형달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짐을 버리고 남태령 산길을 따라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 소리를 듣고 식구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전쟁터가 북으로 가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쟁기가 헐어서 쓸수 없었다. 밭이 15천여 평이 넘고 논도 8천 평이 넘었다. 아버지는 수원, 안양, 영등포 시장을 다니며 쟁기를 찾았으나 구할 수 없었다. 김씨는 아버지가 쟁기를 구하러 나가신 사이에 밤나무 통나무를 깎아 쟁기를 만들었다. 헌 쟁기를 옆에 놓고 집에 있는 연장으로 깎아나갔다. 지나던 동네 어르신들은 코웃음을 치셨다. 하지만 오후가 되어 쟁기가 모양을 갖춰 나가자 신통해 하시며 김씨의 손재주를 칭찬하셨다. 해질 무렵 돌아오신 아버지는 감격해 하셨다. 다음 날 대장간에서 쟁기 앞에 보습과 바닥만 만들어 붙여서 그해 농사를 무사히 지을 수 있었다.

 

김씨가 아버지를 놀라게 해드린 것이 더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수원농업중학교에 다니던 큰형이 일본 자매학교에서 새끼 암컷토끼 100마리를 보내왔다며 가져다 길러서 암컷 1마리만 학교에 돌려주고 나머지는 기른 학생이 가져도 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김씨가 등교 전후로 풀을 베어다 놓으면 어머니가 때 맞춰 먹이를 주며 길렀다. 반년도 안되서 토끼는 새끼를 낳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번 꼴로 한번에 열 마리 정도로 토끼가 불어났다. 김씨가 과천소학교로 전학할 4학년 무렵에는 어미만 27마리가 됐다. 팔려나가지 않을때는 마당에 10여 마리 토끼들이 뛰어 다니곤 했다. 한달에 세 번 서는 수원 장날이면 어머니는 돈지갑이 두둑해 져서 좋아하셨다.

 

초등학교 2학년 겨울이었다. 아버지는 큰형, 누이, 작은형까지 스케이트를 사주시고는 김씨는 어려서 위험하다며 사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형들이 스케이트를 타면 따라가서 형들이 쉬는 사이에 신어보고 타보려면 날을 버린다며 눈치를 주곤 해서 서러웠다. 어느 날 작정을 하고 식구들 모르게 곳간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버지가 학창시절 쓰시던 캐처용 야구글러브를 해체해 그 가죽을 이어붙여 구두를 만들었다. 구두바닥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가죽구두는 형편이 좋은 사람들이 신었고 보통은 헝겊구두에 종이창을 댄 것이었다. 구두방에서 헌 종이창을 얻어다 붙였다. 스케이트날은 형들이 타다가 썰매에 붙이라고 준 것을 다시 뜯어서 갈아서 붙였다. 하루종일 그 모습을 지켜 보시던 어머니께서 대견해 하시면서도 아버지께 야단 맞지는 않을까 걱정하셨다. 그날 저녁 자초지종을 들으신 아버지께서는 관대히 넘어가 주셨다. 2년 후 해방되던 해 겨울 작은형이 큰형에게서 물려받게 되면서 스케이트를 물려주어 과천의 김씨네집 앞 큰 논(한배미가 약200평 정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겨울을 보냈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2019.1.9. 과천오피스텔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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