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은 우리 윗 또래가 해서 팔았어요. 나도 한번 친구들과 가마에다 구워다 팔았지. 과천 여기가 생견말 맥계 백미 여기가 제일 많이 나무장사를 했지. 서울 갔다 팔구.... 갈현리 사람들은 안양으로 많이 다니고.....”

 

마차 많이 끌었어요. 서울역 뒤에 거기까지 갔었어요. 애켠삼거리라구 해가지구 설렁탕집이 유명하구...... 낭구팔구...... 거기서 못 팔면 거기서 조금 올라가면 아현장이구 마포로 돌아서 팔구 그랬어요. 마포루해서 오늘의 교통부 철도국으로 해서 노량진으로 오죠.”

 

지금 그거 안 팔리는 날에는 무척 많이 다니는 거지. 늦어도 새벽 두시나 두시 반 안에는 나가야죠. 늦게 파는 날은 집에 열 시에도 들어오고....일찍 파는 날은 여덟시에도 오고...늦으면 저녁 때도 오고 그랬지. 그땐 차가 있었나요. 우린 소를 부렸으니 마차 부리느라 지게질은 안했지. 소 없는 사람은 지게로 지구......이리가면 상도동으로 가고 흑석동 노량진으로 가서 팔구 그랬지. 그때 남태령 길이 넓지는 않은데.....여간해서 마차가 가질 못해요. 여기서 상도정으로 노량진으로 나무를 팔러갈 수 있거든? 그럼 넘어오기는 해도 여기서 짐 싣고 넘어가질 못해요. 사람은 짐 지구래두 넘어가지...... 소 가지구는 마차는 못 댕기지......”

 

수청리 애트랑 너머 사당동으로 해서 이수교 다리 있는데루 해서 국군묘지로 그것두 왜정때 소화 아마 팔년 도에 길이 났을 거야. 남태령 고개. 지금 한강다리 가면 노량진서 서울쪽으로 들어가자면 표말뚝이 있어요. 소화 7년도에 준공이라고 써 있어요. 한강다리가 언제 준공하고... 우리 나이 또래도 모르는 사람 많아요......”

남태령 길은 그때 김면장이라고 있었는데....남태령 구 길로 다녔거든. 한강다리가 놓이면서 양쪽 모퉁이가 석벽이거든요. 그리루 못댕겼어요. 그래 가지구 그 위루 넘어 다니는데 국군묘지로 넘어 다니면 길루 못댕기기 때문에 시방 거기 지하철이 났죠? 지하철역 있죠? 거기가 고개예요. 고개. 한강다리 놓고 거기도 닦고 남태령 고개도 닦고 그랬어요.....과천 면소가 지금 중앙동인지.,,,..그거 새루 짓구 낙성식을 해 가지고 내가 그때 쪼끄매서 준공식을 구경했어요. 내가 아마 여덟 살인가.... 1925년 대정 14년생이거든.”

 

(그러면은 그때 거기를 마포를 돌아서 올 때는 어떻게 빈마차로 넘어 올수는 있는데 넘어가지 못 하니까....)

 

아니 그 길 닦기 전에는 마차가 없었지...과천에는... 그거 닦은 후루다가 질마소로 댕기든가.....마차루 변경이 됐지.....길이 닦어졌으니까.....거기 소에 싣고서는 상도동 고개로 댕기지....그러기까지 그냥 까마득한 벼랑을 깍아서..... 비탈.....시방은 이중으로 길이 나서 그렇지 그거 깨트려서 흘러 내려서...... 전부 돌이지요.”

 

당시 마차 가득 나무를 싣고 가면 그때 300원을 받았다. 쌀 한가마 값이었다.

 

솔가지가 열 단씩 싣거든요. 마차에......질마소는 세 섬 새술막서두 우리 국민학교 댕기는데 김태선 씨가 아주 부자죠. 소두 아주 잘 먹였어요. 그때 학교 댕길 때 낭구 싣구 국민학교 앞으로 지나가시기 때문에 봤는데 소두 살찌고 좋은 소만 부리더라구......”

 

지게에 지고 흑석동에 가서 팔면 20. 좁쌀 몇 되 살 돈이었다.

그래요 그때 잘 받으면 일당 사흘치까지 돼요. 이틀 반 이렇게두 받고... 하여간 과천서는 맥개비 이쪽으루다가 나무장사를 많이 했지만 하여간 굶어서 죽은 사람은 없어요. 다른 데는 농사짓고 나면 벌판이니까. 그래두 여기는 나무만 해 지구가면 잡곡이라도 팔어다 죽을 쒀서라두 먹고 살거든요. 넉넉하고 이런 사람이 소부리지. 동네두 밥술이나 먹구 농사 좀 짓는 사람이나 소부리지......”

 

그런 사람이나 몇 해만큼 돈 모아서 땅사지 어려운 사람은 몇 대가 가도 부자가 못돼요. 그때는 곡식값이 비싸서 땅금도 비쌌거든요. 좋은 논이라야 두섬 되면 쌀두가마 밖에 안 난단말예요. 잡곡두 남의집 가서 일 닷새 해줘야 쌀 한말 주구. 쌀두 잡곡하구 조를 많이 심었거든요. 수리조합 같은게 없으니까......그러니까 없는 사람이 생전가야 부자될수가 없어요. 하여튼 연탄 나오기전까지는 나무를 했죠.”

 

저수지 막기 전에 고 밑에 논이 아니고 밭이 한 2천평 있어요. 막고 나서 논이 됐지. 그 위에도 한 1천평 밭이 있고 해서 초식을 많이 했지. 그 공사할 때 그 여러 달 했는데 왜냐면.....막는 거 그거 할 때 물이 새지 않게 하느라 본토가 나오도록 파가지고 그 안에다 진흙을 다져야 하니까......길은 먼저 닦아가지고 아마 한 3년 했는데....”

 

저수지 공사는 잠실에 살던 이모 의원이 예산을 타와서 할수 있었다. 이의원이 여러 번 출마했다가 당선이 되었다. 막는 일을 인덕원 살던 이씨 3년 선배 김모씨가 맡아했다. 그 김씨는 나중에 강화에 가서도 저수지 막는 일을 했지만 견적을 잘 못내는 바람에 크게 손해봤다. 당시 공사는 지게로 흙을 져다가 내려놓는 방법이었다. 힘을 써야 하는 일이라 경상도 지역에서 올라 온 인부들이 일을 많이 했다. 흙을 져다 놓으면 한평에 얼마 하는 식으로 계산했다. 1년 쯤 지나서 바퀴가 2.5미터는 되는 커다란 차가 등장했다. 뒤에는 레미콘차량처럼 커다란 통을 달고 있었다. 나중엔 이씨 동생이 모터 기술자가 돼서 그 일을 맡아했다.

 

이게 산에 가서 토질검사를 해 가지고 산에 돌이 박힌데가 있고 안 박힌 데가 있고...감정을 해가지고 저수지 밑구녁에 궁말이라구 광창이루다가 거기 흙이 좋았던 모양이라. 근데 이 놈의 차가 바퀴가 우툴두툴해 그런데 이게 올라가서 내리니까 그냥 끄는거야.....자동이지. 그걸루다 했어요. 사람들은 떠나가고.....거기서 길은 이제 길산이라구 거기다가 흙을 갖다가 도락꾸(트럭)로 미워놓으면 그전엔 사람이 다져서 해야지 그냥두면 물이 새서......근데 그 차가 바퀴가 두꺼우니까 몇 번만 다니면 다져지는거야. 그래 그 사람이 아주 이익을 많이 봤다는거야.”

 

(이승태님 아들 : 그래서 국민학교 다닐 때는 작은아버지 그거 하실 때 차가 올라가서 흙을 담을 때 사람이 올라가서 밀어줘야지......그래서 대 여 섯 명이 차 안에서 흙 담는데 버킷속에 타고 다니고 그랬지.)

 

이장은 69년도서부터 저쪽에서 했고....그러다가 대공원이 되는 바람에 1단지 2단진데.....과천에 아름제지라는 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에 사서 있었거든.....그런데 그 일대 30만 평에 아파트가 되는 바람에 죄 헐렸잖아요. 과천경찰서 부근에서 임시로 살다가 1단지 집을 받긴 받았는데 어떡하다가 2단지 이 터로 사가지고 올라왔어요. 2,500만원에 산 거예요. 이주는 82424일날 올라왔어요.”

 

이장은 68년부터.....그전에 혁명 나 가지고 박정희 대통령 되던 해 5월에 제주도에 한 번 구경갔지요. 그때 비행기 타 봤는데. 그때 비행기 타 본 사람이 드물거예요. 우리 동네 사람 넷이......그때도 돈이 좀 있어야 가지. 그때 돈으로 25,000원이 들어가야 가요. 부산가서 도라지호 그거 550명 타는 거 타고 이제 저녁 5시 쯤 타면 그 이튿날 6시 쯤 되면 제주도 도착해요. 그래 가지고 예약을 해갖고 올 적에 비행기 타고 왔지.”

“72년 돈가 과천에 크게 홍수가 난 적이 있어요. 그래 느티나무집 문선출 씨네 가게 있던데 하나 있었잖아요. 장마가 져 가지고 관악산에서 이게 뭐야 홍수가 내려오고 나무가 내려오다 걸려서 양 쪽 동네 쪽으로 넘쳐가지고 수해가 나가지고 그래도 과천은 지대가 좀 높아서 맥계 청계산 물하고 찬우물 쪽 물하고 합쳐도 그렇게 수해날 일이 과천에 장마졌다고 크게 수해난 일은 없어요.“

 

(6.25 때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농사짓는 사람이 뭐가 뭔지 모르지. 해방되고 동네에도 빨갱이가 생겨가지고 웅성웅성하고 이런 적이 많았죠. 막계서 정 모라고 과천에 빨갱이 주동자하고 그랬어요. 그래 가지고 6.25가 나가지고 빨갱이가 된 사람이 많잖아요? 그거 뭐야 그때 그 2년 다녀서 빨갱이 명의를 벗어나는 거 그거 보도연맹이 생겨서 우리 동네도 네 사람이 빨갱이가 있다 그래가지고 별안간 밀고 내려와 가지고 군인이 한강 이남에는 주둔하고 있었거든요. 인민군들이 서울 와서는 바로 못 넘어왔거든요. 가칠목이라고 노량진다리 밑구녁으로다가 뭐야 이 철판으로 한 다리 만들어 가지고 이렇게 되니까 시간이 걸렸죠. 그러니 과천에도 헌병도 있었고 대비를 하고 있었을거 아녜요. 그러니 다리라는 건 한강다리 하나하고 광주 가면 천호동 다리라고 하나 밖에 없었어요. 천호동 다리도 제정(왜정) 때 놓은 거예요.”

 

그런데 보도연맹을 소집을 해가지구....보도연맹을 죽이려고.....왜 죽이려고 그랬냐면 이쪽 서울서도 빨갱이들 보도연맹 만들어서 제병 시키기로 해가지고 보도연맹이 생겼는데 빨갱이들 오자마자 보도연맹들이 죄 빨갱이가 됐다 말야. 그러니까 군인들이 빨갱이들을 그냥 쓸은 거야. 그랬는데 우리 동네도 넷인데 나보다 한 살이 아랜데 동창생 인데......○○라는 사람인데...

그때 내가 6.25나던 해 밭에 토마토를 많이 심었는데 밭에 빈 몸으로 내려왔어요. 과천서 총소리난 거 없느냐고......그래 못 들었다고......거기 간 사람 보도연맹은 다 죽었다 이거야. 그래 자네는 어떻게 살았어? 물었더니 그전 날 소집을 해서 갔는데......수단을 꾸민 거지.

사람을 많이 모으기 위해서..... 군인들 부식이 정부에서 조달이 안 되니까 호박, 오이 이런 거 동네 가서 구해서 그거를 좀 장만을 해달라고 그래 그날도 좀 나가서 대충 시늉도 했대요.

다음 날은 안 온 사람 다른 사람 데리고 내려오라고...... 죽이려고......그랬다니까 그 사람이 자기 어머니가 서울 뚝섬 사는데 그길로 뚝섬으로 간 거야. 또 하나는 송○○이라고 나보다 한 해 아랜데 그 사람도 눈치를 채고 안 갔단 말야. 그래서 그 보도연맹이 면사무소 뒤에서 다 죽여버렸어요.”

 

피난을 1차루 갔는데....그때 내가 청방위원이었거든요. 마을회관에 사무실 차려놓고 안양 사람들 하고 해서 여기 과천에 중대를 조직했다구. 각 리마다 소대구...각 리마다 국민학교를 나온 사람만 거시기루 맨들어서 했는데 그래 가지구 1차루 10월 며칠날인가 됐는데 피란 가라고 통지가 면에서 와서 저녁때 과천 가서 접수를 하고 하룬가 묵어가지고 저 안양공업학교 그리루 다 집합 모이라 그랬는데....그때 일행이 5천명이 더 내려갔으니까.....”

 

그래서 50명 마다 인솔자 소대장을 뽑은 거야. 200명에는 중대장이 있고.....난 소대장으로 갔는데 가다가 군자 사람을 만났단 말야. 여기서 수원으로 해서 용인으로 가던지 수안보로 해서 문경으로 걸어서 넘어갔거든요. 이쪽으로는 군인들 차가 다녀서 못가고.....김량인가 어딜 가서 이틀인가 갔는데 그 군자의 인솔자가 날 찾아왔어. 어떻게 알았냐고.....난 과천 청방위원으로 왔다고...과천청방위원들이 섞여서 50명이 됐단 말야. 그 사람이 자기하고 바꾸자는 거예요. 그래서 바꾸니까 나는 도로 저 과천사람들을 찾아오고 그 사람은 도로 군자사람들 찾아가고. 과천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니 낙오자가 없잖아요. 저녁때 가면 인원파악 해가지고 잘 사는 집 큰방에 20명두 자구, 10명도 자구 배치를 하거든..... 이튿날 새벽이면 밥해 먹고 또 이렇게 해서 14일 걸렸어요. 경상남도 함안까지...... 내 그때 조그만 수첩 가져가서 어디 가서 잤는지 그 기록을 적어 놓은 게 있었는데....”

충주에서 수안보가 30리예요. 거기서 문경까지 120......그렇게 해서 상주로 해서 군위, 경산으로 해서 함안까지 내려갔지. 처음엔 세 명씩 줄 지어서 갔는데 뒤로는 십리도 넘었나봐. 안보이니까 뒤에는, 그저 알아서들 갔어요. 나중에 가서 인원파악이나 해라 뭐 그렇게 됐어요. 내려가는데 사람 죽은 건 없고 탱크가 문경고개 넘어가는데두 있구, 어떻게 폭격을 맞았는지 길 옆에 비스듬히 있구, 벌판에는 뚝배기 모양으로 뒤집어진 게 있더라구요.”

 

피란은 12월에 갔다가 319일에 돌아왔어요. 우리는 거기 가서도 안양청방 패들이 52교육대를 맡았거든. 늦게 내려갔어. 일찍 갔으면 경찰대 좋은데를 맡는데......안양 편대장 교육대 맡은 사람이 무식했대. 주먹이 센 게 단장 노릇을 해가지고 협천 51교육대를 맡아가지고 안 모라는 안양사람이 창원에서 교육대를 맡아가지고 거기서 훈련을 하더라고......많이 집결한다고 소문이 나서 거기 있다가 칠소 낙동강 난지 있는데 내가 중대장 노릇을 했거든요.....그래 창원 거기 있다가 협천으로 갔지요. 다 배치되고 내려오는 사람 없으니까 몇 명 못 맡았어요. 그래 23차는 제주도로 갔잖아요. 나이 많은 사람은....”

 

“319일 날 돌아온 그날 동네 분이 돌아가셔서 장사를 지냈대요. 그래도 그전처럼 많지는 않아도 사람은 있었을 거 아녜요? 그래 미군 공군이 사람 폭격을 했는데 우리 집 앞에 한씨네가 좀 큰 집인데 기관총에 불탄이 있었나 봐요. 그게 타서 꼬약꼬약 연기가 올라가고,.....사람이 올라가서 딱 다른 사람 있으면......누가 물 한바가지라도 끼얹었으면 끄는건데......남자도 없고 후처 얻은 아줌마도 너댓살 먹은 아이랑 전실 딸하고 아들은 안양경찰서 다니는 말하자면 형부가 데리고 있고....그 아주머니가 애하고....그이두 기관총을 맞아가지고 서울 병원에 갔대잖아요.... 그러니 그렇게 와보니 홀랑 탔더라구요. 한 집만 탔어요.”

소화 16년도에 학교 졸업하고 영등포 크라운맥주 거기 1년 있다가 그때 돈 70원인가 주는데 군인 갈 나이도 되고해서 관두고 농사지었죠, 우리 형제가 오형젠데 바루 위에가 4살 위인데 그 형님은 제정(왜정) 때 일본으로 모집돼 갔죠. 석탄탄광에 갔어요. 그리고 내 아우는 네 살이 아래니까 열 서너 살 밖에 안 되고 그러니 그때부터 계속 농사 지은 거예요.“

 

(저수지가 축성 되고 나서 농사짓기가 수월해졌죠?)

 

그러니까 밭이 논이 됐으니 쌀밥은 좀 먹게 됐죠. 끼니도 두 번 먹고 그랬는데 그게 바뀌고.....안양서 버스......용산까지 댕기는 것두 나중이지....남태령고개 차가 다닌게....

소화 7년에 한강다리를 놨으니까 소화 8년에는 다녔을 거예요. 그거 닦구 면소 짓구 낙성 하는거는 봤으니까......”

 

일본 사람 오다 대정이 한테 공부를 해서.....그때야 학교 갔다가 집에 가는 거 밖에 없지 어디 다니는 것두 없고....제정 때 국민학교서 제일 멀리 간 게 4학년 때 인천. 여기서 상도정으로 해서 노량진까지 가서 거기서 기차를 처음 타봤지. 그때는 과천에서 서울로 가려면 새길 나기 전에는 사댕이라구 남태령으로 나가는 그 길 밖에 없었어요. 새길 나고도 안양 차가 1966,7년도에 버스가 생겼어요. 내가 이장 보기 전에..... 안양서 용산까지 다니는 거 그게 과천읍내에서 쉬었다가 가는거지. 그래도 그게 생겨서 남태령 한내사람들 묵장사.....그 바람에 거긴 묵장사가 활발했었지.....그리고 나물 해다가 파는데 새벽에 아마 서너 시쯤 되면 서울로 팔러 다니는 것 때문에 일부러 차가 댕겼다고......안양에서 남태령 넘어 사당으로 해서 용산 가는 버스가. 그전엔 그래서 이수교 있는데 거기서 장마 땐 거기서 배를 타고 가야 돼 물이 좀 적을 때는 지금 국군묘지가 얕으니까 거긴 물이 위에서 내려와 가지고 거기서 탁 쳐서 내려가기 때문에 항상 깊이가 있지. 거기가 나루턱이예요.”

문원동으로 이사해서도 이장을 지내며 마을회관을 지었다.

 

여기 와서두 이장 봤죠. 내가 노인회관 창설해 가지고 35년인데....그때가 57,8 무렵인데.....노인회도 60세 이상이라야 하는데 이장이니까.....복지회관, 마을회관을 83년도에 지어 가지고..... 추워서 원래 우리가 그 대지 받은데가 어디냐면 문원농협 자리 136평을 받은 거야. 그런데 마을 끝 아니예요? 리사무실이라도 지어야 된다고.... 여기 배랭이 본토배기 임 모라고 있어요. 그 사람이 동네 새마을사업으로 리사무실을 지으라고 500만 원이 나왔는데 500만 원 가지고 뭘지어요. 그래가지고 망설이다가 대지가 거기 끄트머리니까 이쪽에 빈 터가 많으니까 바꾸자고 그래 서울시청에 신청했더니 대답을 안 해. 바꿔 준다고도 안 하고 슬슬 끄는거야. 누구한테 승낙을 받고 해야한다고...그때는 돈 조금 찔러주면 나오고 그랬다구. 내 돈써가며 그럴수는 없었는데 한 석 달이 걸렸단 말야. 그랬더니 9월에 나왔어요. 그때부터 돈이 적으니 하청도 못하고 직영으로.....철근 뭐 이런거 사다가 인부 불러 짓다가 그때 만해도 추우니까 공구리를 못하고 세워놓고.....이듬해 해토 되면서 해가지고 410일 날 준공식을 했거든. 그래가지고 고생했어요. 2,750만원이 들어갔는데 100평이죠. 500만원 가지고 지으라니...그것 때문에 골치 아팠죠. 동네다가 집 가진 사람은 만원 셋방 든 사람은 3천원씩......이 동네가 본 주민은 여나무집 되고....굉맥이, 맥계리 이러는데....굉맥이 살던 사람들은 이주권이예요. 전부다 교인인거예요. 본주민은 1단지다 받고 이건 교횐데.....교인 때문에.... 굉맥이서 1년이면 6만 원씩 그때 월급이 6만원인데....그땐 세납이 뭐야 설 때 적십자회비, 산림조합비 이런게 나왔거든 호수는 많으니까 면에서는 호수대로 하니까...우리는 덜 준다고 100원씩 하면 30원씩 해줬는데도 다 못 받았어요.

어려운 사람이 거진 다지. 단 몇 백원도 없이 왔단말야. 우리는 반장 인제 5개 반장이지만 그 사람들은 구역장이예요. 구역장들을 사무실로 불러서 당신네들 있는데까지 내달라고....면에서는 12월 말이면 완납하라고.....이장이 대납하고 받아 쓰라는 거야. 그래 그 달 돈 한 6만원씩 고스란히 물었다니까요. 그래도 고맙단 소리 하나 없어요. 나쁜 사람들이야.

우리 큰집이 청계 140평 되는데 소주를 먹고도 그땐 4홉들인데.....그걸 넣고 댕기면서도 거긴 논이 좋지 않은데다 밭도 한 300평 있고.....이제 집 지켜 달라고 술 한 잔 사주면......하나도 낸 놈이 없으니까......”

 

1천 몇 백만원 남았는데 30집도 더 돌았어요. 그러다가 대공원이 되는 바람에 땅값은 소득을 봤어요. 논이 최고 좋은게 5천원 나쁜거는 3,500원에서 4천원까지....밭이 2,500원이 최고 좋은거 그랬는데 대지로는 7천원을 받았거든요. 그러니 그건 몇 배 아냐? 그러니 큰집이 그거는 소득을 받았지요. 그거는 시에서는 현상보상을 하지 등기 난 것으로 하진 않아요. 딸기밭을 1백평을 하잖아요? 그러면 권리서가 없어도 1백평값을 줬어요. 그러니 그걸 받아가지고 산 사람은......저기 평택 내려가서 산 사람은 평택은 1천몇백원에 내려가서들 많이 샀어요. 우물쭈물하다 이제 안 사고 그랬는데....그것이 뭐야 3년 뒤에 아파트가 나왔단 말이야. 그랬더니 그 땅값이 하루하루가 다르게.....과천 사람들이 밭,논이 7만원씩 받았잖아요? 내 바로 밑에 아우가 1단지 살다 죽었지만 논 서마지기 조금 넘는 것 집 한채 7백평 조금 넘는 것 7만원씩 받았어요. 우리는 5천원씩 받았는데 거긴 7만원씩 받았으니....그래 내 아우가 아이들 대학 죄 가르쳤잖아.....그때 관문리 사람들은 수 났어요. 아파트 들어간 사람들은.....”

 

그렇게 마을회관 지을 때 동네서 받은 거를 죄 적어가지고 있어요. 그걸 5백만원 가지고 했단 말이야. 그걸 짓는다니까 여기 이삭교회는 한 푼도 안내고 영보수녀원에서는 달래지도 않았는데 100만원을 내더라구. 여길 반을 갈라서 나는 아래 이장을 보고 위에는 이장이......둘이었어요. 지금은 통장이 됐지만 당시에는 이장.....지금 과천경찰서에 임시로....거시기....임 모씨가 지도자로 30만원 내고 최모 아주머니가 10만원, 내가 5만원 내고 권 모씨가 2만원 내고 그리고는 별반 낸게 없어요. 그래두 내가 한 2백만원 걷고 얻는데 동네서는 19만원 밖에 안 거둬주는거야. 공사비가 1천만원이나 남았는데.....그거 받아 가지고 오늘내일 하다가 아래를 가게를 세 주는거로 했지요. 5백만원씩인가 받고 전세를 놔서 갚았어요.”

 

(그래도 뭐 농사만 하신 게 아니고 사업수완이 꽤 좋으셨네요. 그렇게 큰일도 해놓으시고...)

 

그래서 그런지 2014년도에 회장을 그만두었는데 공로표창 총리상 받았어요. 경기도에서 둘인데 난 총리상 받고 남양주 사람은 대통령상을 받았는데. 그 사람은 부자래요. 신수도 좋고 나보다 젊더라구요. 돈이 많아서 노인회 돈도 많이 쓰고 아마 그런.....그래도 그 성적표 가지고 하는거. 경기도 31개 시군중에서 뽑혔으니까....노인회 일을 이렇게 30년 이상 본 사람이 없지. 아마 그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과천초등학교 다니실 때 이야기 해 주세요)

 

그땐 80명인데 4학년서부터 5학년은 80명이 넘었어요. 5학년부터는 저 오탄 사람, 동작구 사당동, 또 안양 인덕원, 청계 거기.....다른데는 4학년이면 중학 갈 사람들이거든요. 과천은 6학년 공부를 해야 중학교엘 가니까...거기 사람들 때문에 5학년부터는 거의 90명 가까이 되는....이 시흥군이 남면만 6학년이고 안양도 4학년이고 그래....여기도 신동면이 서울 가깝고 그래도 4학년이고 중학교 하나 밖에 없었어요. 동작구가 크죠 노량진까지가.....사당동은 신동면 이예요.”

 

그래서 요 부근에서는 과천으로 와야. 제정(왜정) 때 빨간벽돌 집으로 2층 지은덴 과천 밖에 없었어요. 내부는 나무로 했어도....그래 8학급까지 있어서 중학교 못간 사람은 2학년으로 했는데....그걸 설립을 못하고 그냥 사무실로 쓰고...2층이니까 8칸이예요. 아래가 4칸 위에 46학년이니까 여섯 쓰고 사무실, 연구실 쓰고 원래는 중학 못가는 사람은 2년을 하기로 만들어 놓은건데 그걸 시행을 못했어요. 선생님들은 6명 하고 교장, 교감 8분이죠. 면장은 한국 사람이래도 교장은 한국 사람이 없어요. 다 일본 사람쓰지......맹교장이 딱 한번.....우리 4학년땐가 교장하셔 가지고 얼마 안되 정년퇴직 하셔서 면장 되셨잖아요. 그리고 6.25때 납치 되가셔 가지고 종무소식이예요. 똑똑하다 그래서 과천면장은 시흥 군수 계급이래요. 그러니 한국 사람을 교장을 시키지 교장은 전부 일본 사람이예요.”

 

(숯장수 이야기도 해 주세요)

숯가마 지어서 나무 세워놓고 불을 때면 어디로 새는지 보다가 잘라서 넣어서 불 지르면 숯이 많이 나와요. 산 아래는 나무가 없으니까 위쪽으로 도토리나무....도토리는 낙엽이 지면 잎사귀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쪽걸이(쪼꼬리)라고 요렇게 굵게 잘라서 한단씩 묶어서.....그건 그 윗쪽 사람들이 하고 타동 사람들이 사가지고 하고 그랬어요. 크게 하는 거는 가마를 짓고 집에서 조금 하는 거는 두어 짐 갔다가 가마에서는 세워서 하지만 이거는 위에서 타 내려와 가지고 굴뚝이 저 뒤에 있는데......불을 때면 이 꼭대기로 돈단 말예요. 꼭대기로 불이 붙으면 구멍 셋을 내요. 불이 붙으면 구멍을 막으면 연기가 굴뚝으로 나오고.....연기가 나오면 덜 탄 거고 그러면 구멍을 열어서 불을 더 때야 하고....불을 많이 때야 해요. 그렇게 나오면 가방 크기로 묶어서 서울 가서 팔고....있는 집이나 숯을 만들지......없는 사람은 서울서도 숯불을 못 사 때고....나무만 때면 얼마 못가죠. 없는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나 집집마다 화로는 다 있는데 나무 때고 남은 불은 반나절을 못가요. 화로에 숯을 놓고 그 위에 불 땐 거를 덮으면 하루종일가요. 그러니 서울도 부자 아니면 숯 못 사 썼어요. 숯은 나중에 연탄이 나오면서는 인건비가 안나오니까 그만뒀죠.”

 

(2019.5.16.) 문원2단지 자택 정재성 배석

*2020년 작고하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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