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에 가일리 357-8에서 태어난 이순기 씨는 길 건너에 산다. 밭을 하던 자리에 집을 짓고 산다.

 

그렇지 과천에서만 살았지. 과천에 살고...원래 우리는 전주이씬데 태종대왕 헌릉가면...세곡동 가지? 그 태종대왕의 일곱째 아들.... ”

 

(정재성 : 아 세종대왕의 동생 되시는.....)

 

(김용현 : 그렇게 일곱 째 아드님 때부터 누대로 과천에서 사시고......이제 또 집안들은 용인시에 많이 살고 있고 산소들이 거기 많고..... 세곡동으로도 제사 지내러 가고 또?)

 

우리는 세곡동 헌릉 그 아래도 있고 용인 새로운 도시가 돼서 판교에서 용인으로 넘어가는 동네 좀 더 가서 왼쪽으로 더 가서 돼지고개라는 고개 거기에서 살았고....”

 

(김용현 : 어르신네 집안은 여기에 이제 터를 잡고 쭉 사시고 그러면은 어르신도 그 예전에는 농사 지으시면서 나무도 하시고 그러셨어요?)

 

그럼요 나무야 저 관악산에 가서 나무하고

 

(김용현 : 남태령 넘어서 내다 파시는 것도 하셨어요?)

 

그것도 했어요. 소마차로다가 해서 끌고 고개를 넘어가서 노량진 가서 팔고 영등포 가서 팔고.... 전철이 댕겼어요. 왜정 때 우스운 얘길 하면 나무를 해서 끌고 솔가지를 해서 그렇게 해서 열 덩어리를 해서 딱 실어서 가는데 이렇게 전철을 가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옆으로 이렇게 소를 끌고 가니까 이게 뭐 덩치가 묵직한 게 뚝 떨어졌어. 이상하다 하고는 솔가지로 건졌다고.....조금 있다가 어떤 놈이 헐떡거리면서 뛰어와서 돈 보따리 못 봤느냐고 하는 거야. 그래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그냥 내줬지. 전철 타고 가다가 돈 훔치느라고 빼서 던진 거 같아. 그렇다고 내가 돈을 달랠 수가 있어 뭐...... 그때 나이가 열 여덟 살이나 됐나.”

 

(김용현 : 그러면 나무 팔러도 다니시고 그렇게 지나시고 논 갈고 그냥 그렇게 지냈어요. 당시에 우마차 끄실 정도면 형편이 좋으셨네요?)

 

네 그땐 괜찮았었어. 6·25나기 전에는 장흥수, 강규형이 이기옥이 한기영이 다 같이 안양공업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국회의원 이영섭씨가 만들어서 그래서 그때 안양중학교 댕겼고 댕기다 열 여섯 먹어서 소마차 그놈을 끌고 다니고....학교는 여기서 아침에 보리밥 먹으면 둘러메고 그냥 뛰는 거야. 양짓말 거기서 이제 먼 사람들은 저기 하리에 이기옥이나 강규형이나 그런 사람들도 거기서 뛰어오고 난 여기서 가고 그렇게 댕겼어.”

 

(김용현 : 그 길이 동편마을로 가는 샛길이었나요?)

 

안양으로 해서 인덕원 사거리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 때는 도로가 왜 생겼느냐 하면 그때 인제 각 구역 구역 그 자갈을 이렇게 펴고 동네 사람들이 이렇게 예를 들어서 한 10미터 쯤 돌을 갖다 깨뜨려서... 부역으로 그거 해서 갖다 놓으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그때는 자갈을 깔고 길을 닦었고.... 안양길도 그렇게 닦고.... 여기 과천도 그렇게 하고....”

 

4남매 중 장남인 그는 여덟 살에 과천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왜정때다.

 

오병선씨가 교장 하실 적에 시험을 보는데..... 돼지 닭 뭐 이렇게 그려 놓고 이게 뭐냐? 개는 다리가 몇이냐? 그러고 물어 봐......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시험을 봤어. 그땐 나보다 두세살 더 먹은 사람도 있었어.”

 

한 반이 43명에 2개 반이니까 80명 뽑는데도 숫자가 많으니까 나중에는 그 전에는 이쪽에 강습소라고 향교에 올라가는데 느티나무 있고 우측으로 강습소가 있었어. 강습소라고(학교) 가기 전에 미리 가르치고...... 하도 모르니까...... 왜놈 말을 가르치니까 일본말을 가르쳐야 되니까 그때만 해도 왜놈 말을 가르쳤으니까..... 한국말로 하면 돈 내라 그러고 벌점 내라 그러고...... 그러다 해방 되서 2학년 올라갔지. 그 장흥수는 한 살이 아래지. 장흥수, 맹천호, 이형구, 이흥구 형제들이 나이가 한살 덜 먹었어. 그때 같이 들어왔어. 그런 사람들은 실력으로 들어온 거야. 흥수도 그렇고 한기영이도 한살 아래야. 장흥수 한기영이 맹천호 다 동기야. 맹교장님 손자....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16명인가 그것 밖에 없어. 외지 나가서 살고......”

 

(정재성 : 혹시 아버님 어렸을 때 과천 가일에 향교자리가 있었다그러던데 그런 말씀 들으신 적 있으세요?)

 

향교는 없고 향교는 지금 있는 향교가 있었고 그 아래 옛날에 과천이 그 아래 (관아가) 있었다 그랬는데 모르고 그 아래 가면 그 석씨네들이 살았어. 향교 있고 일본 놈들 덴노헤이까 라고 (신사) 그거 있고 거기에 인제 석씨네들이 살았고 그리해서 돌아서 내려가면 바로 옆에 면사무소 꼭대기에 면사무소고 그 옆에 바로 파출소 있고 바로 앞에 그 병원 제중의원 그이가 있었고 그러고 여기는 아무 것도 없었어.”

 

(김용현 : 그러면은 가일 그 때는 초등학교 다니실 무렵에 집 주변에 몇 집이나 있었어요?)

 

그때보다 지금 집이 줄었어. 왜 줄었느냐? 살기가 어렵고 이제 저거 하니까 그냥 나이 먹고 그러니까 집에 헐렸고. 요 건너에도 있었고 그 전에 있었던 집이 한 내가 알기로 한 70여 호 밖에 없었고..... 나 이장 볼 무렵에 70호 있었고......”

 

(정재성 : 그럼 컸네요. 마을이.)

 

군부대가 있어. 군부대도 들어온지 얼마 안 되고 헐렸지. 땅 뺐겼지. 그 위로 꼭대기 올라가면 함정희라고 있었어. 그 사람이 거기 이렇게 있었고 장문성이가 살았는데 오창서씨하고 거기서 살고 해서 너 덧 집이 거기 있었고 이 아래 집 있었고....그리고 가일 본말로 집 있다가 죄 헐려서......그래 오순묵 씨라고 면장 봤던 사람이 저 위에 있었고...요리로(가일경로당) 내려가서 넘어오면 면장했던 박시형씨......그 위로 집들이 지금 찬우물 새마을 사업해서 마을을 이렇게 옮기라고 해서 그래서 집을 한데 모으라 그래서 그것이 과천의 우리 갈현리 이기옥이네 동네 하리 하고 또 남태령 있는데 신양호가 나하고 셋이서 이장 뽑혀서 마을회관 지었지. 여기 박시영씨네 저 가장자리 쪽에 이원구 살고 그쪽으로 아홉 집인가 있었지 그래서 새마을 사업하면서 댕기면서 땅을 그 말죽거리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데 땅 주인한테 땅 간신히 팔라고 해서....변재현 이라고 있어 면장하던.. 그이하고 나하고 다니면서 같이 가서 그 취락구조사업 내가 그거 했지.”

 

(정재성 : 홍광표씨라고 아세요? 부면장 하시던...홍윤표씨는 홍촌말 사시던 분이시고 홍성웅이 아버님이시고....홍광표 씨라고 읍내 사시던 분이 계시더라고요.)

홍광표? 면사무소에 있었던? 부면장이 아니고 6·25전쟁 나서 그 사람이 이북사람이야. 이남으로 넘어와서 군대 들어갔다가 오갈데가 없으니까 면사무소에서 살았고.....그리고 지금 국수공장하던 용훈이가...바로 옆에 솜틀집이 있어 거기 외딸이 있는데 거기하고 결혼했지.”

 

(김용현 : 그러면 당시는 이 지역에서 크게 농사를 지으시고......)

 

농사를 크게 하고 소마차 크게 하다가 경운기로 농사짓고 한 백여 마지기 농사짓고 그렇게 지내고 콤바인 사가지고 벼 베다가 손을 다친 거야. 툭 건드렸는데 잠바가 딸려 들어가서 반이 잘렸지. 나이 59에 이렇게 됐어.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못하고....이장 보고 할 무렵에 내가 또 다니면서 여기 올라가자면 저쪽 마을회관이 있어. 그리고 이쪽 마을회관이 있는데 그거는 마을회관을 지을 제 큰 도로가 나가는 그 앞에 과천에서부터 큰 도로가 나가기 때문에 고기 마을회관이 손정태가 지었는데 도로가 나면서 헐리니까 돈을 안 줘. 돈을 줘야 그거를 갔다가 뭘 할 텐데. 그 노인정도 내가 제일 먼저 과천에서 노인회를 해서 노인정을...... 근데 뭐 돈을 줘야지 어떻해 땅도 없지 땅은 강원용 씨라고 이 옆에 있는 이가 안양 그 백화점 하는데 박준영 씨라고 있어. 안양역전 옆에 있어 화신백화점이라고 커. 그이한테 얻어서 처음에는 백 평 준다 그랬어. 준다 그랬는데 주변 사람들이 못 주게 해서 60평을 받아 가지고 와서 두 사람 세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얘기해 가지고 같이 강명수씨가 다니다가 이제 이기주하고 이제 같이 나는 나이가 적게 먹었으니까 나이 먹은 사람을 데리고 다녀야 할텐데......이기주라고 있었어. 지서주임 그이가 여기 살았어. 그이하고 같이 다니면서 그걸 얻어서 기증서를 받아가지고 마을회관을 짓는데......돈이 없어 내가 당기면서 그때는 여기 땅들을 서울 사람들이 많이 팔았어. 그 사람들한테 다니면서 마을회관이 없어졌으니까 좀 달라고 해서 찬조를 받은 것이 50만 원 100만 원 이렇게 받고......십 여 사람 받았어. 그때만해도 많은 돈을 그렇게 받고 그래서 500만원을 집터를 위에 여기 가면은 그 오○○씨네 면장하던...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밭이 있는데 새마을사업으로 도로를 내 달라고 그래 내주는 조건으로 해서 집 짓게시리 내 주는 조건으로 해서 500만원을 받아서 나중에 짓다가 돈이 없어. 그래서 개인적으로 2만원 1만원 다 받아서 집집마다 다니면서 돈 거둬서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이쪽에 건물이야.”

 

(김용현 : 6·25때 얘기 좀 해 주세요 어르신이 초등학교 졸업 하신 게 열 다섯 쯤에?)

 

“16살 때...모를 심는데 그해는 가물었어요. 논에 물을..... 과천 남태령서부터 탱크가 월그덕 월그덕 하더라구요. 인민군이 쫓아오고.... 그렇게 넘어와 가지고 대구 부산까지 갔다가 결국은 미군이 인천으로다가 포 쏘고 하니까 여긴 중간이 되고 하니까......이북으로다가 남한으로 쳐들어가니까 꼼짝 못했죠. 그래서 올라오면서도 걔네들이 이렇게 서로 맞불질하고 해서 남태령 고개에서 쏘고 이 아래에서 쏘고..,,,.그렇게 가면서 전쟁이 벌어졌지.”

 

(김용현 : 그때 이 동네에서 그대로 있는데 중학교를 다니시면서 농사 도우시고 그러실 때예요?)

 

아니 그때 난 학교 다니다가 6·25가 났으니까 못 다녔지 다닐래야 아버지가 나이가 잡숫고 그랬으니까 그 돈을 대줘야 가지. 2학년 올라가다 그만뒀지.”

 

(김용현 : 그 인민군들이 하리나 광챙이나 그쪽은 중공군도 들어와서 방 내놓으라고 하고 살고 그래서 광챙이나 막계 쪽에서는 동네에서 이렇게 피난두 내려가고 그랬단 말이에요. 근데 이쪽 동네에서는 그 동네 사람들 같이 이렇게 피난들 안 가셨어요?)

 

피난들 갔어도 얼마 안가서 도로 들어왔지.”

 

(김용현 : 이승태 어르신 말로는 지지대 고개 가니까 인민군이 막아서 우리가 다 점령했으니까 도로 가라고...)

 

그래 같이 살 거니까 도로 들어가라고...그래서 들어온 거고 그 당시 인민군들이 총 들고 집집마다 군인 있나 해서 돌아다니고...그러니까 탱크 타고 내려가고 그만이지. 가기 전에는 여기 한강에서 이제 호주 비행기 쌕쌔기들이 있어. 그 비행기가 여기 지금 가마솥회관 있는데 첫 집 있지? 도로 옆에 그 앞에서 군인차들이 국군이 여기 있었어. 한강 이북을 거기를 치래는데 여길 와서 폭격을 해가지고 장교가 하나 죽었어. 비석하나 거기 있어. 그래서 그 비석이 어린이회관 있는데 마을회관 들어가는데 공지가 남았어. 거기 있는 걸 외관상 보기 싫다 얘기해서 그 묘를 도로 옆에 거기다 썼어. 그렇게 했어. 올라갈 때는 뭐 여기는 하니까 남태령하고 저쪽 광챙이 저쪽으로다 우면산으로다가 그렇게 싸웠지. 여기는 별로....”

 

(김용현 : 그렇게 그래도 가일리 이쪽은 그렇게 크게 피해가 있거나하지는 않으셨네요?)

 

그건 없었어요. 지금 남태령 그쪽으로는 걔들이 올라가면서 쏘고 내리쏘고.”

 

(김용현 : 그리고 그 전쟁 중에도 부역한 사람들 청년대들을 해 가지고서 뭐 서로 이렇게 잡아다가 모두들 때리고 뭐 이렇게 인민군 들어와서 못살게 굴고 이렇게 그런 일들이 이쪽이 좀 덜 했나 봐요.)

 

그때는 그게 없었는데, 즉 치자면 양반 상놈이 있었잖아. 그거 차별을 많이 하니까 없는 사람이 머슴 살고 그러지 않았어? 이런 사람들을 갖다 감투를 씌워놨으니까 왔다갔다 그렇게 했었구. 여기도 그렇게 해서 원주민 하나하고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하고 세 명인가 죽었어. 왜 그러냐면 인제 인민군 다 올라가고 그러니까 빨갱이 짓 했다고 그런 일이 있어서 몽둥이로 패서 죽인 일이 있어. 서로 국군으로 올라와서 그 형이 그 죽였으니까 여기 와서 그 청년대장인가 본 사람 죽이려고 하다가 그냥 서로 그러면 안 된다고 그냥 말았어. 서로 죽이려고 들고 하다가 결국 몽둥이로 패서 죽였어. 세 사람을... 묻어놓으니까 사람이 벌떡벌떡하고....”

 

(김용현 : 그게 어디서 그랬어요?)

 

지금도 저쪽 건너보면 상회 있어. 지금 아파트 새로 짓고 있어. 거기가... 옛날 서낭당고개 저기서 오면 서낭당고개라고 과천 오면 여기서부터 긴다고 그랬거든. 성황당 고개 있는데 그 위에 상여막 있고 그랬으니까......”

 

(김용현 : 그래도 전쟁 때 가일리가 큰 저기는 없었고?)

 

큰 저거는 없었어. 그 세 사람만 죽이고... 저기 아랫녘 사람인데 죽고 그리고 여기 사람도 하나 끼워서 죽고, 김씨네... 죽었는데 그냥 서로 저거 하고 말았지. 피해가 없었어.”

 

(김용현 : 그렇게 전쟁 끝나시고 안양공고 생겨서 공고 가셨어요 아니면 군대 가셨어요?)

 

가지 못했지. 20세에 영장 나와서....휴전되고 바로 군대 갔지. 군대에서 336개월.”

 

(김용현 : 어디서 군생활 하셨어요?)

 

철원서 근무하다가 포천 이동 있어. 이동 철원서 인제 후방이니까 인제 포천 이동서 한 6개월인가 8개월인가 있다가 전방으로 또 들어가는 거야. 어디로 갔느냐 화천발전소 그 안에 거기 가서 근무를 하다가 제대했지. 2사단 31연대 3대대.”

(정재성 : 갔다 오셔서 결혼하셨어요?)

 

가기 전에 군대 있을 때 아버지가 환갑이 넘고 해서 군대 있을 때.”

 

(김용현 : 그러면 뭐 휴가 오셔서 선 보시고 그 다음에 휴가 받아서 결혼식 하시고 그렇게? 사모님은 아버님께서 그 어디 분을 어떻게 중신을 들어오신 거래요?)

 

동네 사람이 여기 하나 살았는데, 천안에 천안 성거읍면에 사는데 그이가 여기서 사는 것은 이제 밭도 그렇고 논도 남 주고 그걸 하니까 자기가 고마워서 그 사람이 정씨네서....그래서 천안 가서 보고 그렇게 했지. 여자가 귀해서....결혼해서 여기서 아버님 모시고 여기서 고대로 살았지.”

 

(김용현 : 제대하신 게 혁명 때가 아직 안 됐네요.)

 

혁명 나기 전에 나왔지 뭐야. 박정희 혁명할 적에는 그때는 우리는 군번이 96인데 그때는 100원짜리 들이지.......그래서 그렇게 해서 그냥 다 와서 농사짓고 45살에 내가 갈현2리 이장을 볼 때, 그때는 이게 동이 안 생기고 남부지소 북부지소 출장소 그랬는데 지금 생견마을 있는 데가 출장소고 그리고 저 지금 동사무소 자리가 남부고 북부지소는 저쪽 남태령 등기소 있는 자리였지.”

 

아침에 일어나면 면사무소에서 일하나? 각 부락마다 가서 풀 깎으라고 아침이면 일찌감치 나와서 풀 깎으면 밥 해대야 하잖아? 면사무소 면직원들 그러면 아휴~’ 아주 그냥 우리 마누라가 밥 해대기 죽을 맛이야......가면 또 어디가 밥먹나 그 사람들이....그렇게 한 10년을 했어. 그 후로는 새마을지도자 보고.... 동네 새마을사업 한다고 길을 닦잖아? 길도 60평 그대로 뺏겼어. 60평 앞에 있는 길이 조리로 나가서 여기 마당 주차장 있는 자리를 그건 그냥 시에 희사했지. 면에서는 찬조를 받아라고 했는데 그냥 희사했지.”

 

(김용현 : 그리고 71년엔가 그린벨트 지정되면서 온 동네가 땅들 다 꼼짝도 못 하고 그럴 때가 이장 보실 때 였나요?)

 

지정될 땐 이장 안 봤어요. 그것도 문원동 저쪽으로 하고 지정을 했으면 그 당시 그거를 들어가는데 도시다 개발이다 하니까 그까짓 것 쉽게 생각한 거야. 쉽게 생각 했는데 그린벨트 책정하고 보니까 지금하기 전에 문원동 그쪽으로 다 했거든. 들어가는 거 아니야 그렇게 과천시가 다 들어갈 건데 그렇게 설마 해서 그렇게 들어간 거야. 누가 도시 될 줄 알았나? 나중에 그거 그린벨트 책정 하다 그렇게 된 거지.”

 

(김용현 : 같은 과천도 저쪽 광챙이나 막계 이쪽에는 그 77년에 인제 대공원 들어오고 그러면서 인제 한번 그 문원리로 이주를 하시잖아요. 그리고 난 다음에 82년에 여기 인제 신도시 한다고 그때 한번 또 그 토지 수용 하고 한참 난리가 나고 근데 희안하게도 이쪽 찬우물 이쪽으로는 그런 바람이 안 불었어요?)

 

그때 만해도 그린벨트 생기고 나서도 도시계획 한데만 이렇게 하니까, 이렇게 지금처럼 이렇게 개발이 되고 땅 바람이 불질 않았지. 땅 바람 불기 전에는 지금 저기 말죽거리에서 저 쪽으로 내려가면 나루터...... 압구정하고 이 아래 이수교 그리고 그 북쪽에서부터 다 수용하다시피 땅금이 올라서 판 거야. 그 사람들이 판 그 돈 가지고 와서 산 사람들이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이 마을회관도 지은거야.”

 

(김용현 : 서울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산 땅 가지고 땅주인들을 찾아서.....)

 

그래서 돈 찬조를 받아서 그렇게 해서 집 지은 거야. 그때 한참 저거 할 적에... 과천 사람들도 땅을 가지고 용산 가서 판 거야. 저기 뭐야 다방에서 쓰고 다방에서 두 번, 세 번, 네 번 씩 넘어가고... 등기권리증만 가지고 가면.... 막 팔았으니까......”

 

(김용현 : 근데 그때 어르신은 여기서 그때 그 땅 팔고 떠나실 생각은 안 하셨어요? )

 

안했지. 여기 떠나면 죽는 줄 알고. 그냥 아버지가 지었으니까 그냥 여기서 살고, 열심히 그 논갈이 하고 경운기 가지고 논갈이 하고, 그렇게 해서 남고 그러면 과천 가다 보면 이장 보니깐두루 땅 어디 나오는 거 있느냐고 말죽거리 사람들이 하면 여기 어디 온다는 게 있다고 하고 그땐 뭐 팔지 못해. 그때는 뭐 씨지. 그거 파는 거 지금 가지고 있다가 지금 한 300만원 받았으니 얼마예요? 50만 원 40만 원 그거 받아서 한 것이 지금 몇 배가 올라갔으니......”

 

관악산을 떠난 사람은 못 돌아와요. 사람 욕심이... 남이 장에 간다니깐 홍시 팔아 가지고 간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아. 왜냐면 여기 고향을 떠나면..... 안양 가면 잘 살 줄 알고 팔아 가지고 가서 비싸게 주고 샀는데 그게 올라야 뭐 얼마나 올라. 그러니 여기는...... 그렇게 해서 못 산 거예요. 여기서 떠난 사람들은 못 사는 거야. 오씨네가 한 집만 살고 요기가 오씨네 터거든. 오씨네 하고 김씨네가 많이 살고 했는데 그이들 다 떠나고 외지사람들이 다 차지 한 거예요. 사람들이 다 앞으로 내가 치는 거예요. 돈은 돌고 금전은 왔다 갔다 한다고 그러잖아요.”

 

혁명 직후 부천에 있던 통신사령부가 가일리로 들어 온다. 남태령 아래 미군부대는 그 뒤에 들어 온다. 그때는 반대도 못했다.

 

반발할 수가 있나? 뭐 몇 몇 집 거기 들어가니까 돈 주고 뺏으니 뭐... 아야 소리도 못하지.”

(김용현 : 그렇게 해서 그러면 910년 이장 보시고 그러시고 이제 그 이장 마치실 무렵에 팔 다치시고 그러니까 농사일도 조금 덜 하시게 되고......)

 

그 전에는 그냥 꼬박 그냥 아침에 나가면 그냥 점심 한 숟갈 먹으면 종일 일했지. 뭐 그래도 내가 이렇게 산거는 그래도 그때 다치는 바람에 일을 덜하니까 지금 살아 있는 거야.”

 

이 동네에선 내가 지금 나이 제일 많이 먹고 그렇지만서도 사실 6·25 전에 얘기하자면 이 그 향교란 것이 그 양반들만 그 향교에 다녔던 거야 나이 먹고 한 사람들이 양반이나 갔지. 못 가. 거기에 보면 여기 과천에도 보면 그 유지 이름들이 다 있고...요기 오씨네 보면 효부상이... 향교에서 주는 것이 있는 집이 오학선 이라고 오학선씨 어머니가 넓적다리를 칼로..... 옛날엔 고기를 못 먹어서 베어서 드렸어. 그래서 그 효부상 받았고... 여기 우리 아버지도 공부는 못하셨는데 한내 신씨 그 나이 먹은...신 누군가 있어. 그 할아버진가 아버지한테 배웠어. 그전에는 서당 다니고....아버지가 그리로 다녔어.”

 

그래서 신성재는 지금 농협에 다니는 아버지 재작년인가 죽었고, 그리고 그 윗집인가 누군가에게 아버지가 거기서 하고 그래서 한문을 제일 잘 알고 하기는 우리 아버지가 가르쳐서 여기서도 공부를 가르쳐 줬던 동네서도...가르쳤으니까...지금 김갑권이 우리 아버지한테 배워서 선생님 선생님 그러고...”

 

이씨는 서른 한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생계를 맡아서 고생을 했다.

 

그렇죠. 그러느라고 농사만 하느라고 애들하고 이럭저럭 크면 내 동생하고 사니까 한 십 여 명이다 보니까, 가서 하루 물 푸고 하루 종일 일해야 돈 500, 쌀을 사려면 1,500원 아녜요? 사흘 품 팔아야.....사흘 가서 낑낑 매고 가서 사다 놓으면 돌아서면 없고.... 그때 생각하면 참 기가 막혔어. 그래도 이러니 저러니 해도 박정희가 정치하면서 외국 저거하고 월남 전쟁에 해서 들어온 돈 하고........그래서 그 박정희 때문에.....밥도 잡곡 밖에 없었어. 조밥.....”

 

(김용현 : 그때 만해도 남태령 나무해갖고 건너가면 조 두된가 그저 쌀도 못 사고 조 한 두 어 되 바꿔 가지고 온다셨다는데 그래도 어르신네는 그때 마차로 가니까 열 짐 이상은 이렇게 싣고 갈 만큼 됐잖아요?)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괜찮게 사셨으니까....그런데 나이 잡숫고....전에는 왜정 때 그 돈 많은 사람 만나서 땅들을 사주고 그래서 논 좀 갖고 계셨어. 그래서 해서 일 안하고 일꾼 두고 했었는데 우리 자라서는 애들하고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까 못 찾고 있는 거 팔아가지고 그러다 이제 우리 자라고 나서 이제 내가 장남이니까 벌어서 그거 낑낑해야 사흘 품 팔아서 쌀 한 말 갔다가... 있는 집 가서 두말 서 말씩 갖다가 먹으면 그 일을 죽도록 해 주는 데 바구미난 쌀... 그거를 갖다가 까부르면 얼마가 없어져? 그런 시절을 참....”

 

(2019.11.12.) 자택에서 정재성 과천향토사연구회장, 김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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