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분 어르신은 1926년 안양 박달리에서 났다. 15살 무렵 담안으로 이사했다. 장내동 중앙시장 인근이었다.

 

22살에 과천 이씨네로 시집왔다.

 

과천 부잣집이라는데 와보니 30칸 짜리 겹집이었어. 벌판 한 가운데 집이 네 채 있는 동네야..... 우리 서방님 바깥 일만 하시는 양반이라 일이 어찌나 많은지......”

 

전주이씨 효령군파였다. 조상 중에 무과급제하신 분이 계셔서 이선달네라고 불렀다. 지금 과천과학관 돔 아래가 그 집자리다.

 

위로 첫아들을 어려서 잃고 지금 장남 정달씨를 업고 과천에 들어서던 날 부리부리한 눈매를 본 동네 어른이 이선달네 자손이로구나하셨다.

 

김씨의 시아버지는 일찍 깨신 분이셨다.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우물이 대부분이던 시절에 동네서는 처음으로 뿜뿌(펌프)를 달았다. 그 집 물이 달고 벌판 한 가운데 있으니 오가며 농사짓던 이들이 모두 그 집에 들러 물을 마셨다. 그래 화장실을 하나 더 지어야 할 정도였다.

 

작은 아들(이정달님 작은 아버지)이 정신이 온전치 못해 병을 고치러 백방으로 찾아다니다가 의왕 학의리 성결교회에서 고친다. 병이 나은 후 정신이 온전해지다 못해 더욱 총명해져서 83세에 인터넷 검색을 익히실 정도였다니 짐작이 간다.

195022일 이기증씨네 사랑방에서 10여 명이 첫 예배를 드렸다. 과천에 교회가 생기게 된 첫 신호다. 호주선교사들이 서울에서 내려가면서 과천에 선교하러 왔다가 매를 맞고 돌아갈 정도로 어려운 지역이었다. 과천 최초의 교회는 논란이 있으나 감리회 벌떼교회 연혁을 보면 19547월 연세대학교 기독학생회가 하리에서 김창국 전도사를 모시고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을 보면 과천교회가 먼저고 그 앞에 이기증씨네 사랑채가 시작이었다.

 

시누이(이경녀)가 과천교회 예배당 지을 때 흙벽돌을 날랐지. 그 뒤에도 행상을 하면서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열심이었지. 나중에 미국가서 살면서도 멕시코에 예배당 짓는 일에 헌신했어.”

 

남편 이경승 씨는 나중에 서울공과대학이 된 태릉에 있는 서울공업전문학교를 중퇴했다. 시흥군에서 알아주는 달변이어서 선거 때면 선전부장이 되어 연설에 나섰다. 초대 과천면의원을 지냈다. 이윤형, 김창진씨 등과 함께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송재수씨가 관악중학교를 세울 때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이경승씨 동생은 서울공고 전기과를 나와 전기기사로 재주가 좋았다. 큰아들 이정달씨는

작은아버지는 안양 삼덕제지가 들어설 때 전기설비를 맡아 할 정도로 실력있는 기술자셨어요. 나중에 설악산 권금성 케이블카 공사를 맡아 하셔서 놀러가면 태워주시곤 했어요.”

 

이런 남편이 집안일을 전념할 리가 있나.

 

참을 해서 들에 이고 나가 보면 남편은 논둑을 베고 누워 자는 거예요. 그때는 농악을 한다고 일하다가 한바탕 풍악을 울리며 놀기도 했고......저녁이면 일 보러 나가신다고 나가 주무시고는 아침에 오셔서 식사를 하시고 눈을 붙이시면 뒷바라지 해야 하고....”

 

그 와중에도 김씨는 동네 여느 아낙들처럼 청계산에서 나물 해다가 엮어서 남태령을 넘어 서울로 내다 파는 일도 했다.

 

그땐 다 그랬어. 나중엔 동네 아줌마들하고 앉아서 내가 하도 넘어 다녀서 남태령이 낮아진거야하고 웃으며 얘기하지. 버스가 다니기 전이어서 남대문까지는 예사로 걸어 다녔지.”

 

일이 많아 나중엔 머슴을 얻어서 농사를 해야 했다.

 

당시 머슴 새경이 쌀 5가마였어요. 쟁기질 못하면 3가마.....모판 낼 때는 소두 2. 가을에 타작하는 날은 후하게 주어서 벼 한말이었지요. 그런 마당에 가게까지 열어서 바빴어요. 집에는 포도, 살구 과수원도 있었고......”

 

우리 논이 삼부골 아래도 다섯마지기 짜리가 있어서 참을 내가는 것도 큰 일이었지요. 우리 며느리(권혁희)가 처음 시집와서는 스탠그릇에 8명 밥을 이고 오다가 넘어져서 죽을 뻔 했다고 울기도 했어요.”

 

(2021.11.17. 과천교회 카페에서)

 

Posted by allin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