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경씨는 1934년 갈현동에서 태어났다. 문원동 910번지는 샛골 제비울이라 불렸다. 5남매중 4째로 태어났고, 아래로 여동생이 하나 있다. 위로 8대조 할아버지대에서부터 과천에 사셨다.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에서 올라오셨다고 전해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때 해방이 됐다. 과천초등학교 35회다. 당시 6학년은 100명 정도였다. 1반은 남자반, 2반은 여자반이었는데 여자아이들이 수가 적어서 1반 남자아이들 몇은 2반으로 편성했었다.

 

안양중학교 가서 시험을 봐서 합격이 됐는데.....우리가 농사가 많고 소를 기르는데 어떻게 다니느냐고.....못갔지. 아침이면 친구들이 모자쓰고 안양으로 주욱 걸어가는데......나는 화장실로 숨었다가 애들 지나가면 나오고......2년을 놀다가. 죽어두 중학교 문앞에 가서 죽겠다 해가지고 안양중학교를 갔어요. 둘째 형수가 아들이 없고 딸만 5형제야. 그래 시동생 겸 아들처럼 챙겨주셨지. 학비도 대주고 군복 물들여 옷도 해주고 미군 가방도 구해다 주시고.....”

 

고등학교는 안양공업고등학교를 갔다. 나이가 들어 입학한 탓에 학교 다닐 때 입대영장이 나왔다. 그래서 졸업하고 가겠다 연기신청을 해서 졸업 후에 바로 입대했다.

군대 가던 해 724일 과천에서 5,6명이 함께 입대했다. 광주 포병학교 가니 삼각함수를 아는 이들은 실내교육을 받고 나머지는 땡볕에서 포병교육을 받았다. 의정부 3보충대로 가게됐다. 새벽 6시면 준위가 플래시를 번쩍 거리며 기상을 시켜서는 사방이 지뢰밭이니 나가면 죽는다고 겁을 주었다. 아침을 먹고나면 산에 가서 밥 지을 나무를 해오는게 일과였다. 26사단에 배치가 됐는데 집이 수도권이고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 사단 행정병이 되어 편안하게 군생활을 했다. 제대 무렵에 3·15부정선거가 있을 때였다. 휴가 나왔는데 부대에서 대신 투표해줄테니 귀대하지 말라고 해서 그대로 제대했다.

 

맹 교장이라고 왜정 때 교장을 하다가 나중에는 면장을 했었다구. 그 양반이 서울 사는데 마차에 짐 실러 갔다가. 거기서 그냥 납치 된 거예요. 그래서 그 어머니도 실성을 하셨어. 밤이면 산등성이에서 우리 집 내려다보면서 이름을 부르면서 재원아 재원아 하시는 거예요 악을 쓰고 우시는거예요. 멀쩡한 사람이 갔다가 없어졌으니.....”

 

김도경씨 부인 유재환씨는 친정이 화성 장전이다. 큰어머니가 조카딸을 소개했다. 딸 셋에 아들 둘 5남매를 뒀다. 신랑보다 5살 어렸다. 22살에 결혼했다.

37년을 정미소를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정미소를 하게 된 계기는 과천에서 방앗간을 하던 김충원씨 소개로 하게 됐다. 안산에 방앗간을 하다가 문을 닫게 된 것이 있었다. 그걸 뜯어서 마차로 실어와서 집앞에 설치했다.

 

우리 당숙이 여기다 해라 그래가지고 기술자 하나도 안 대고 집짓는거구 뭐고 거기서 다 뜯어다가 하나씩 하나씩 그냥 비닐루 덮어 놨다가 그냥 쌓는 거 그냥 하나씩 하나씩 맞춰 가지고....기술자 하나도 안 대고 했다고....눈썰미가 있어서 뭐든지 한번만 보면은 뭐든지 할 거 같아. 그래서 둘째 작은 아버지가 너 옛날서부터 열두 가지 재주 가진 놈이 조석이 간데 없다고 그러는데 너 재주 좀 덜 좀 부려라그래. 그래도 한번만 보면 뭐든지 하겠는걸 어떡해요.....그래가지고 방앗간 하면서 내가 또 집짓고 지붕하고....새마을사업 하면서 내 손 안 간데 없어. 갈현 2통이구 어디구.....”

김씨는 정미소를 하면서 이장을 9년 동안 했다. 노인회 총무를 9년을 하다가 회장이 되어서 8년을 더 봉사했다.

김씨는 전쟁 이야기를 하다가 찬우물에 있는 전사군인의 비석에 대해

찬우물 여기 군인들이 후퇴할 적에 무전을 잘못 쳐 가지고 아군들이 여기저기 길 옆에다가 차를 세워 놨는데 그냥 비행기가 우리 큰집 여기서부터 기관총을 내리 쏴서 소위가 전사했어. 그래서 찬우물 거기다가 묻었지. 지금 거기 비석이 있어. 비행기가 지에무씨(GMC) 트럭 수 십 대를.....과천부터 인덕원 내려가는데까지 수 십 대를 다 바숴 버렸다구. 그때 학교도 그냥 타버렸지. 읍내는 다 타고.....이쪽 동네는 괜찮았지.....”

 

김씨 또래 중에도 생일이 빠른 이들 몇은 제2국민역으로 끌려 나가서 고생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민군을 만나면 죽게 되니까 피난 가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미 동네에는 인민군, 중공군이 내려와서 마을 사람들과 같이 지냈다. 김씨도 밤에는 산에 가 있고 아침이면 밥먹으러 내려오곤 했다. 찬우물에 들어 온 인민군은 몇 사람에게 무슨무슨 위원장 감투를 씌워줬다. 나중에 수복이 되고 나서 동네사람들에게 맞아 죽기도 했다.

 

피난은 학의리. 거기 갔었는데 거기 그냥 간신히 걸어서. 소에다가 짐을 싣구서 나가는데 막 과천 여기까지 왔다 이거야. 막 내쫓길래......갔는데. 어두워졌어. 어떻게 아는 집이 가서 뭐 땔나무간 소외양간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그냥 노인네들은 방 한 칸 사랑방이 한 칸인데 그냥 빡빡하게들 앉아서 얘기들 하시고 그 옆에 책상 앞에 앉아서 얘기들 하시는거 듣고 하는데...근데 바깥에 왔다갔다 해 아침에 나가봤더니 그 앞에다가 굴을 팠는데. 눈이 이렇게 쌓였는데....어디 가서 굴이 있는지도 몰라 그냥. 밤새도록 우당탕탕 파더니 일개 소대가 들어가도록 굴을 팠어. 그러고 그 위에다 서까래 기둥 같은 걸....멍석을 해가지고 흙을 덮구서 구멍만 막으면 몰라. 감쪽같아. 아침에 밥을 끓여 먹고 지지대 고개를 넘어 가려고 그러는데 양쪽에 중공군하고 인민군하고 서 가지고......자기네가 이겼다고. 여기까지 처들어 왔는데 어디로 가려고 그러느냐. 집으로 돌아가라 이거야. 그래 이렇게 비행기가 뜨고 막 그러는데 어떻게 가느냐고....좀 쉬었다가 어둡거든 집으로 가야지......딱 못가게 하는걸 어떡해.”

 

집으로 돌아와 굴을 파고 숨어있다가 밥 먹을 때만 몰래 나와보는 생활을 몇 달을 했다. 영등포에 살던 둘째 형님은 인민군에 끌려가다가 돌아가셨다. 당시 폭격으로 읍내 여러 집이 불타는 바람에 집을 잃은 사람들은 폭격을 피한 집 문간방 신세를 져야 했다. 나중에 집을 지을 때는 흙 올리고 기와를 올릴 때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도와주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당시에 과천에 방앗간이 많았지. 과천면 소재지에 거기도 있었고 한내 거기도 있었고 주암리에도. 광챙이도 있었고 또 막계에도 있었고 거의 마을마다 있었다고 마을마다 허가가 되니까. 거기 동네에서 찧어 먹어라 했으니까......인덕원에는 없고 저 동편에는 우리 형님하고 동창이신 분이 계셔서 내가 가서 기계도 봐주고....그리고 평촌에도 큰게 있었고. 전기로 하는....그리고 요 포일리 들어가는 길 옆에도 있었고...... 또 저 한직골이라고 거기도 하나 있었고....그때는 우리 방아간 하던 사람들이 모임이 있어서 회장을 하나 뽑고 1년에 2번씩 회의를 해가지고....서로 만나서 인사하고 그랬는데 정부에서 수매를 하면서 다 파산했지.”

 

방앗간 하면서 한 3,500. 농사 지어서 애들 공부도 가르치고 그렇게 한 거야. 셋째 형님이 내가 제대하고 오니까 면에 다니시더라고. 나더러 면에 들어가라시는 걸 한달에 15만원 준다고 해서 안한다고 했지. 군대에서 3년 행정을 봤는데.....여기 과천 출신들 휴가증을 댓 개씩 끊어줘서 집에 다녀오게 하고 그랬어. 크리스마스가 되면 위문품이 들어오면 높은 놈들이 자루를 끌러서 좋은 거 꺼내가면 나는 밤새 앉아서 자루 꿰매고.....나중엔 잘 한다고 장기하사 하라는 걸 나는 집에가서 부모님 도와서 농사 해야 한다고 하고 나왔지. 인사계가 장기복무하면 전라도 사는 자기 처제를 소개 준다는걸 너무 먼데라고 거절하고는 그냥 제대했어.”

 

19717월 그린벨트가 지정되면서 김씨네 땅은 다 들어간다. 돼지우리 하나도 심지어는 화장실도 못 짓게 단속을 하고 극성을 부리더니 지식정보타운이 되면서 LH에 수용이 된다.

 

지금도 그렇지 뭐야. 지금도 정부에서 수용 했는데 그냥 강제로 뺏는 거나 마찬가지야. 거기에 양도세까지도 안겨놓으니까. 우리가 팔고 싶어서 파는거야? 정부에서 장사하려고 하는 건데 거기다가 양도세를....그리고 전에는 농사꾼들이 8년 이상을 짓게 되면 세금을 많이 면제해 줬는데 지금은 1억까지 해주는데 1억이라야 땅 몇 평이야? 300만 원씩 30. 괜히 감해준다는 말만 하는 거지. 그리고 여기 250만 원씩 보통 250만 원씩 도로변에는 300만 원씩 나가는데 지금 사려면.....그러니 우리는 그냥 내버린거지.”

 

70년 대에 과천신도시가 되면서 오른 땅값에 팔아서 돈을 들고 편하게 산다고 다들 외지로 나갔지만 김씨는 농사를 지으면 밥은 먹겠다 싶어서 그냥 주저 앉았다. 그런데 나간 사람들 대부분 그 재산을 다 지키지 못했다는 소문을 들을수 있었다.

 

내가 이장 볼 때 박정희 대통령 우리 동네 와서 모를 내고 그러는데 그걸 한달 전부터 경비를 하더라구. 그냥 겹겹이 겹겹이.....그러구서는 한 150평 그 정도 되는 땅에 물도 없는데 상수도를 끌어다가......그리고 그 가장자리로다가 뱀 나온다고 백반을 트럭으로 실어다가 뺑 둘러서......나도 그때 혼났다고. 직원이 나와서 그러는데 가만 있을수가 없어서. 같이....그땐 뭐 식당이 어디 있어요? 우리집 와서...집사람이 참 애썼지. 우리집에서 밥 안 먹은 직원들이 없어. 다 먹었지. 11시 반 만 되면 그냥 오토바이들 타고 우~ 오는거야. 우리집 사람 없으면 그냥 저희들이 꺼내다가 고추장 찍어 먹고.....”

(2019.10.4. 부인 유재환. 정재성 향토사연구회장, 김용현)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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