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환 씨는 1944년 관문리에서 태어났다. 과천성당 옆 개울이 흐르는 자리에 다리가 있었고 집이 몇 채 있었는데 그곳에서 태어났다. 읍내사람이다. 5남매 중 둘째다.

 

지금 온온사 앞에 있는 비석이 그때는 문원리와 관문리 사이에 있었는데 옮겼다는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과천동주민센터 옆 큰 나무를 본래 자리에서 옮겨다 심은 것을 기억한다. 지금도 101일이면, 마을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그 나무는, 6·25때는 다섯 명이 들어가 숨을 정도로 큰 나무였다고 한다.

 

제대하고 스물일곱에 영등포 사는 전인순 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삼거리 살다가 결혼하면서 살림을 냈다. 당시 독채 전세가 20만원이었다.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새마을운동이 시작됐다. 군대 가기 전부터 농촌계몽운동인 4-H 운동이 있었고, 젊은이들은 자연스럽게 빠져 들었다.

 

그때부터 동네일을 보기 시작했다. 이어 시로 승격이 되고 나서 통장, 주민자치위원 등 지역일을 맡아 하게 된다.

아 뭐 하고 싶어서 했나 할 사람이 없으니까 했지. 주위에서 하도 네가 좀 나서봐라.’ 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지.”

 

과천은 자원봉사가 활성화된 도시다. 자원봉사제도가 지금처럼 점수가 기록되고 포인트를 지역화폐로 환산해서 지역 내에서 쓸 수 있게 제도화된 도시다.

 

그런 가운데 김씨는 각종 자원봉사 기록에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88서울올림픽, 과천축제가 처음 시작할 때도 그는 청소, 질서유지 등 자원봉사자로서 현장에서 봉사해 온 이력이 곳곳에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부림동에서 과천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위해 아침이면 횡단보도에서 등교안전지도를 오래도록 했다.

 

내가 거리질서를 나서는 동안 교장선생님이 여섯, 일곱 명은 지나 갔었어요. 언젠가는 어떤 여자가 차에서 내려서 인사를 해. ‘아저씨 나 시집갔어요.’ 그래 보니 동네 아이야. 어려서 내 신호 따라 길을 건너던 아이가 커서 시집을 간 거야. 오래 했지. 그게 추억이야. 가끔 본수원갈비 가면, 강사장이 '아유 우리 봉사자 오셨어요' 그러고는 공짜로 밥을 줘.”

 

김씨는 자신이 일할 수 있었던 건 주위 사람들이 도와줘서라고 말한다.

 

"부림동에 아동센터를 지을 때야. 한 모씨가 동장할 때였지. 누가 터를 줘서 지을 수 있었어. 노인회관 지을 때도 그랬고...... 자기 땅들을 내 놓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했지.”

 

하지만 과천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고, 외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과의 갈등도 있었다. 지금의 부림동 일대에 지어진 아파트는 당시 원주민들의 농지를 수용해서 지어진 것이었다. 농지를 수용당한 원주민들은 대부분 과천을 떠났고, 지금 관문체육공원 인근 부림동 단독주택지역에 대토를 받아 집을 짓고 옮겨 살았다.

반장을 할 때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하고 갈등이 있었어요. 마을 일에 돈을 거두려면 단독에 사는 이들은 보상을 받아 돈이 많으니 그 돈으로 하라.’며 참여를 거부해서 애를 먹었어요.”

 

김씨는 과천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수용되고 보상 받은 돈으로는 평택 오성면에 땅을 샀다. 벼가 심겨진 논을 현물 포함해서 평당 2,900원을 주었다. 농사짓던 사람이 농사지을 땅을 사야 한다는 생각에 멀찍하게 떨어져서 안성, 평택 일대로 땅을 사러 다녔다. 당시 땅을 사려면 평택역에 내려서 복덕방을 찾아가고 거기서부터 수소문을 한다. 오성면이면 당시 오지여서 포장도 안 된 길을 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서 경지정리도 안 된 논둑길을 들어가야 했다.

 

김씨 혼자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도 과천 토박이 몇 사람은 오성면, 창대리, 안성시 공도면 등에 땅을 가지고 있다.

 

장흥수 면장이 있을 때 그해 가을에 벼를 수매 한다는데, 벼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 나보고 벼를 구해 오라는 거야. 그때는 실적을 내느라고 경쟁이 심했어요. 그래서 평택에서 추수한 벼를 과천으로 싣고 왔어요. 통일벼 공판하는 날 검사하는 사람이 당신 이거 어디서 가지고 왔어하는 거야. 그래 솔직하게 말했지. 수매하는데 쌀이 좀 모자라서 내가 평택에서 땅을 사서 거기 벼를 좀 싣고 왔다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좋은 걸 가져왔다면서 2등을 쳐주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당시 과천 일대 땅이 수용될 당시, 관문리 일대 논은 4,000원부터일 정도로 보상가가 차이가 났다. 김씨 기억에 당시 돼지가 한 마리 18,000원이었는데, 지금의 부림동 일대 논은 8,000원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주거지였던 과천초등학교 인근 주거지는 70,000원 정도였다.

 

김씨가 장가들 무렵엔 있는 집에선 결혼식에 참석하는 친척들 옷을 한 벌씩 해주고 택시를 대절해서 남산으로 드라이브 하고 오는 것이 다였다. 결혼식은 동네에서 구식으로 하거나 남대문에 있는 예식장에서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1961년 군사혁명이 나고 오○○이라는 사람이 시흥에서 안양을 거쳐 관문리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버스노선을 허가 받아 운행을 했다.

버스는 사람이 가득했다. 돈이 얼마나 흔했던지 버스정류장 화장실에 누군가 뒷일을 보고 돈으로 처리를 해서 그걸 본 다른 이가 건져다 씻어서 썼다는 애기도 있었다.

 

남태령을 넘어 다니는 차들은 과천 일대에 채소농사가 성행하면서 운행이 잦아졌다.

옛날 분들은 초식이라고 하는 채소농사는 본래 일제 강점기 지금의 서울 서초동 법원 일대에 일본사람들이 단무지 무 등을 재배하면서 시작한 온상기술을 과천 삼부골 사람들이 배워 오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씨앗을 밭에 직접 뿌리지 않고 발아율을 높이기 위해 따로 심어서 옮겨 심는 것이다. 비닐이 없던 때라 창호지에 기름을 발라 씨앗을 덮어 발아율을 높였다. 그렇게 키운 채소를 실어 나를 때 트럭이 필요했다.

 

고추, 오이 그런 걸 길러서 흑석동, 용산으로 가요. 염천교에 생선시장이 있었어. 거기서 차가 와. 순흥상회라고 있었는데 와서 싣고 가. 아니면 고추 푸대 지고 흑석동까지 걸어가는 거야.”

 

당시 관문리가 100여 호가 살았다. 반장을 하던 김씨는 리세를 걷거나 적십자 회비를 걷으러 다니면서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침에 밥 먹고, 집집마다 들러서 한 바퀴 돌고 들어오면 밤 열두시예요. 힘들었어요. 그렇게 살았어요. 새마을운동 한다고 마을마다 시멘트 보내와. 그러면 그걸 마을회관에 쌓아놓고....... 이게 마르면 굳어요. 그러니 한 번씩 들어서 뒤집어 놔줘야 해.”

 

가을에 하던 체육대회가 큰 잔치였다. 815일에 하는 마을 잔치를 위해 이장, 반장들이 준비며 뒷바라지를 위해 수고를 해야 했다.

 

준비하는데 돈이 없어 쩔쩔매는데 마을에 목장 하는 사람이 100만원을 냈어요. 큰 돈이야. 100만원이면...... 그 돈하고 우리 형님이 100만원 내고...... 우리 집에서 뭐 좀 끓여 갖고 선수들 먹이고 그랬어요.”

 

그렇게 세월이 지나 통장을 하고 주민자치위원을 하고..... 태어나 자란 동네에서 힘 닿는 데까지 동네일을 하며 지낸다.

 

(2021.6.18. 9단지상가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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