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균은 1967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정읍은 예인들의 고장이었다. 용인민속촌 설립자가 이웃에서 살았다. 소리를 하시던 1935년생이신 아버지와 친구셨고, 용인민속촌 사장은 이종간이었다. 1974103일 용인민속촌이 개관하면서, 아버지는 용인민속촌으로 출근하시게 된다. 1년 반 뒤, 온 가족이 민속촌 안에 있는 전시가옥으로 이사한다. 2년 정도 전시가옥에서 살다가, 밖으로 나가 살게 된다.

어린 김대균은 늘상 소리, 기예 등 어른들이 펼쳐 보이는 전통문화 속에서 자란다. 김씨 뿐 아니라, 민속촌 안에 사는 아이들은 학교가 파하면 어른들은 풍물하고, 누나들은 춤추고, 아저씨들은 연주하는 속에서 살았다.

 

고 김영철 명인이 공연하시는 모습을 늘 보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줄타기에 입문하게 된다. 선생님과 상주하시면서 연주하시는 분들이 친분이 있으시고, 그 분들은 또 아버님과 친분이 있으시고, 아버님도 흥이 있으신 분이니까 자연스러웠다.

 

당시에는 꼬맹이들이, 공연 때 타시던 줄에 매달려 놀며 지냈다. 일상이었다. 그렇게 줄 타던 꼬맹이들이, 한 명은 1년 하다 그만뒀고, 대균 보다 세 살이 많은 형은 2년 하다 그만둔다. 김대균만 계속 하게 된다.

 

김영철 명인이 용인에 공연하러 오시면, 대균은 기본적인 걸 지도받게 된다. 13살 때 이버지께서 녹음기를 사셨다. 재담가가 소리하려면 녹음기가 있어야 한다시면서..... 2019년 기록화 작업을 하면서 발견한 옛 녹음테이프에는 아버님 소리하시던 육성과 13세 때 김대균이 했던 팔상여타령과 재담과 소리가 담겨있다.

 

나중에 한국기록원 연구원들이 들어보고는, 사료로써 가치가 있다고 인정했다. ‘줄광대 김대균이 열 세살에도 줄소리를 했었구나라는 인정을 받은 것이다.

 

2019년 김대균은 국립무형유산원에 자신이 가진 모든 자료를 기록화 하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줄타기 입문과정, 성장배경, 다양한 활동상황, 팜플렛, 사진자료, 동영상, 신문 보도자료 들이 들어가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8호의 소재지가 과천이다. 줄타기의 본향이 과천이 된 사연은 이렇다.

 

과천 찬우물에는 예인들이 모여 살았다. 갈현동이 생활 근거지이고, 학습 근거지였다. 경기소리 임정란 명인의 할아버지 임종원 어르신이 대동가극단을 만들었다. 대동가극단은 소리, 줄타기 등을 망라한 종합예술단이었다. 임종원 어르신은 단장이 되어 대동가극단을 이끌고 만주, 일본까지 공연을 다녔다. 제일가는 흥행단체였다.

 

팔도의 민속예인들은 시흥군 갈현면 임종원 어르신을 제일로 여겼다. 그중 임씨의 아들 임상문 씨의 줄타기 솜씨가 대단했다. 아쉽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맥이 인척인 김영철 명인에게 이어졌다.

 

임상문 선생이 1906년생이고, 김영철 명인이 1920년 생이다. 두 분은 옆 집에 살았다.

 

해방 전까지, 서울과 아래 지방 사이에서 갈현동이 민속예술의 거점이 된 것은 분명하다.

 

갈현동에서는 큰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전문적으로 줄타기를 지도했다. 이는 임종원 어르신의 영향이라 할 수 있겠다.

 

김대균은 이 대목에서 줄타기 정통성 확보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이영구 전 과천문화원장의 부친 이용진씨도 찬우물에 사셨는데, 마을에 놓인 줄 위에서 노상 줄타기하는 모습을 보셨다고 하셨다.

 

김대균은 이런 일들을 대학원 논문에 올려 놓았다.

 

문제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사대부나 글을 알아 기록을 남기고, 그것이 역사가 되지만, 민초들 예인들의 생활은 기록이 있을 리 없다.

 

열다섯에 선생을 모시고 살았는데, 그걸 기록으로 내놓으라 하면 어쩌는가?

 

김영철 명인이 용인에 공연 가면, 김대균씨 부친과 교분이 있으셔서, 함께 어울리시면서 줄에 매달려 놀던 어린 대균에게 가르친다. 동네에서 3명이 줄타기를 배웠는데 둘은 몇 해가 지나자 그만두고 김대균만 남는다. 선생님은 지방순회공연으로 바쁘셨다. 한 번씩 오시면 지도해 주시곤 했다.

 

김영철 명인은 1979년 겨울, 김대균의 집을 찾는다. 건강이 악화되자, 마음이 급해진 선생은 전수자로 대균을 지목한다. 대균의 집에 기거하시면서, 본격적으로 줄타기 수업을 받게 된다. 도제식 교육의 마지막 세대다. 학교를 거의 다니지 않고, 지도를 받는다.

 

198251일 중3이던 김대균은 데뷔공연을 하게 된다. 매일경제에 데뷔공연 기사가 난 걸 보고 알게 된다. 그 뒤로 용인민속촌에서 12년 전속공연을 하게 된다. 과천한마당축제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게 된다.

 

김대균이 과천에 둥지를 틀게 된 건, 12,3년 된다. 막상 과천으로 들어오려고 보니, 과천이 엄청나게 비싼 동네라는 걸 깨닫는다.

 

대균씨는 27살에 공부를 마치고 28살에 결혼한다. 부인은 화가였다. 당시 대균을 모델로 전시회를 하려는 부인과 화가와 모델로 인연이 되어, 수원에서 신혼집을 차린다.

 

이사하기 전에도 과천에는 노상 드나들었던 자리다.

 

전수관사무실, 기념비, 김영철 선생 묘소 모두 과천문화원의 도움이 있었음을 잊지 못한다.

 

2011년 줄타기는 한산모시, 택견과 함께 유네스코 등재에는 정부에서 원하던 데이터를 적절하게 제공한 그의 공이 컸다.

 

김씨는 줄타기는 줄광대, 어릿광대, 삼현육각, 음악편이 들어가는 종합예술이라고 강조한다.

 

줄광대는 연희 능력을 바탕으로, ·소리·재담·기예 등 연행술 능력을 발휘하고,무엇보다 관객과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천하없는 종합예술이예요. 그래서 예술로 인정받는 것이죠. 유네스코에 한번 등재되면,다른 어느 나라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긍지가 있어요. 유네스코 본부가 파리에 있기도 하지만,클래식으로서의 긍지를 갖게 되지요.”

 

김씨가 전수관에 애착을 가지게 된 것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지만 보존회 수장으로의 역할과 아동교육에 있다. 가슴 한 켠에 아이들 가슴에 문화유산을 심어주고 싶은 것이다. 전수관은 당연한 것이고, 무형문화재 전수관이 없는 데가 어디 있느냐? 전수교육관, 상설교육장은 오래 전부터의 꿈이다. 전수관에서 어려서부터 자치기, 제기차기 좋은 민속놀이 있는지도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체험과 교육을 통해 소고, 괭과리, 장구도 쳐보고 줄타기에 관심 갖지 않아도 문화자산이 쌓일 것이고, 그 아이가 자라 내려가면 전승이 될 것이고, 정말 줄타기에 관심을 가지는 아이들이 나오고 전문가도 배출되리라는 꿈이 있어서다.

현재는 공간이 열악해 체험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자생력 갖는 프로그램 운영이 가능하다고 자신한다.

 

흥미유발이 첫째예요. 지자체의 도움은 일부분이고, 스스로 운영될 수 있어야 해요. 100% 확신해요. 현재 4명이 상주하며 줄을 타고 있어요. 당진 세한대 5, 광주 8, 전부 18명이 배우고 있어요. 그들 개개인의 특성에 맞춰 재능을 길러가는 거예요. 그래서 재담도 짜주지 않아요. 자기 나이에서 줄 위에서 내려다 보는 세상을 재담하게 하는 거예요.”

 

김씨는 신학수 문화원장을 비롯해 전수관 건립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지역 어른들에게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2020.11.11. 사무실에서)

 

 

 

 

 

 

<편찬후기>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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