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는 4남매 중 막내다. 1939년에 사당동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이던 1955년 무렵 아버지를 따라 과천에 왔다.

아버지를 따라 한약을 짓다가 제대 후에 삼환기업에 입사해 키친아트로 유명한 경동산업으로 옮겨 30년을 다니다 퇴직해 20여 년 전 과천시청 옆에 사 둔 집으로 돌아왔다.

 

각세도는 황해도 문화군에서 태어난 이선평이 중국여행길에서 하늘에 나타난 글자를 받은 후 구월산에 들어가 10년 기도 끝에 깨우친 도를 전하는 신종교다. ‘착하게 정직하게 살라.’는 이 도는 한때 2,30여 만 명이 따르는 큰 세를 이루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교주를 두고 30명의 제자를 30()이라 부르며 시대변화를 내다보고 생활양식의 개선을 가르치는 등 융성했다. 6·25 전쟁으로 충청도로 피난을 가서는 충북 영동군 학산면민의 90%가 각세도를 따르는 세를 이루기도 했으나 전쟁이 끝나고 과천으로 돌아온 이후 급격하게 세가 기운다. 정부종합청사 뒤에 창시자 이선평의 묘가 있다.

매달 음력 1일과 16일에 고양시 삼송동에 있는 도관에서는 예배를 드리고 이선평 교주의 창시자 생일에는 과천 묘역에서 제사를 지낸다.

 

태어나기는 서울 종로에서 났어요. 지금 동숭동 서울대 의대 건너 낙산에 집이 있었어요. 황해도에서 내려오신 아버지가 거기 양철지붕 집을 짓고 사셨는데 6·25가 나기 직전에 동네 젊은 친구를 불러 집을 가지라고 주셨어요. 전쟁이 날 걸 아셨던 것 같아요. 전쟁이 나서 한강다리가 끊어지고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포탄이 낙산으로 떨어지면서 밤새 지붕으로 돌이 떨어지곤 해서 무서워서 닭장에 숨어서 밤을 샌 기억이 나요.”

그리고는 신문기자 하던 한 모씨, 국회의원 성 모씨가 찾아와 피난을 가셔야 한다고 재촉하셔서 성 의원 지프차를 타고 한강을 건넜어요. 한강에는 건너가려고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 있었어요. 국회의원 지프차라 강을 건널 수 있었어요.”

 

그렇게 내려간 곳이 성의원의 고향 충북 영동이었다. 성의원은 대전 유성에 집을 얻어 이선평 교주가 지내게 했다. , 땔나무, 간장을 사서 들여 놓고는 영동으로 갔다. 며칠 후 제자들이 모여 들더니 도인들이 많은 영동으로 모셔갔다. 영동으로 가자 제자들이 기둥이며 서까래 같은 자재들을 구해 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

 

아버님은 이상하리만치 신세지는 걸 싫어 하셨어요. 그래 몇 차례 이사를 다니다가 수제자인 30암 중 한 분이 과천에 땅을 잡아 놨다며 가시자고 하셔서 과천 정부청사 뒤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그 뒤에 자리를 잡으신 거지요.”

 

과천에서도 생활은 궁핍했다. 아버지는 한약을 지어 주곤 하셨는데 그게 유일한 돈벌이였다. 이동두 씨는 곁에서 처방을 받아 적고 약재를 사러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한약공부를 하게 됐다.

 

참 어려웠어요. 아버지, 어머니와 큰 형 그리고 나 넷이 살았는데 쌀 한 말을 가지면 나흘을 먹어요. 그런데 손님이 오시면 그 분 밥을 해드리면 쌀이 없는 거예요. 지금도 난 반찬투정 안 해요. 반찬이래야 소금 아니면 간장이면 돼요. 그때 제일 좋은 반찬이래야 오이소박이가 다였어요. 그나마도 아버지 상 물리시고 우리 먹으라고 남기신 오이소박이를 아버지 다음 날 드실 게 없을까봐 손을 대지 못 했어요.”

어느 날 수원에서 치과의사가 아들을 위해서 약을 지으러 왔다. 곁에서 들으니 허증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약을 지으라고 내어주는 처방을 보니 평소와 다른 처방이었다. 그래서 이씨는 자기가 아는 처방으로 약을 지어 손님을 보내고 아버지께 이유를 물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그럼 됐다. 일부러 그랬다하셨다. 그 약을 먹고 환자가 나았다. 소문이 수원 바닥에 퍼졌다. 손님들이 미어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자식 먹여 살릴 방도를 만들어 주신 거였어요.”

 

동네서는 신동 났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아버지뻘 되는 분들과 주역을 논하고 풍수를 이야기 할 정도가 됐다. 약방을 하기 위해 동양한의대학교엘 들어갔다. 낮에는 약을 지어주고 밤에는 버스타고 남태령을 넘어가서 수업을 들었다. 늦어지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기숙사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약물학 수업은 선생보다 더 많이 아는 편이라 더러 빠져도 됐다.

 

어느 날 이씨는 아버지 묏자리를 봐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뒤 산 끝에 자리를 보고는 아버지와 도인들 중 존경 받는 한의사였던 우 모씨에게 보였더니 그 자리가 제일 좋다하셨다.

 

그리고 1년 쯤 됐나. 돌아가셔서 매장 하는 날 아침에 막내인 내가 권 모씨와 마차를 끌고 안양으로 상포를 하러 가게 됐어요. 큰형이 묫자리를 물으며 우리 산 끝에 어떠냐?’ 하길래 아니요. 그 위에요.’했더니 다녀와서 보니까 딱 내가 짚었던 자리에 파놨지 뭐예요. 나하고 아버지 그리고 우씨 세 사람만 가 본 자린데.......지금 그 자리가 자리도 좋지만 그게 우리 산이 아니었어요. 당시엔 그런 생각도 못했는데 우리 땅에 묘를 썼더라면 나중에 정부청사가 들어서면서 수용되어 버렸겠지요. 신기한 일이예요.”

 

이선평 씨가 돌아가시던 날도 기이했다.

집에 사발시계가 있었어요. 전기도 없던 시대라 등잔불 아니면 촛불이었죠. 자정이 지나 갑자기 아버지와 자고 싶은 거예요. 안방으로 가니까 불이 켜 있길래 어머니께 왜 불을 켜놨어요? 불 끄세요.’ 했더니 . 아버지 뭐 하신다.’하시는 거예요. 그래 보니 자리 앞에 단정하게 앉으셔서는 앞에 놓으시던 작은 상을 정리 하시고 계시는 거예요. 사발시계도 닦으시고......‘뭐하세요?’ 했더니 나 잔다.’ 하시고는 그길로 귀계(歸界)하신 거예요. 그 밤부터 눈이 펑펑 내렸어요.”

 

이씨에게 약을 지어 달라는 주문이 쏟아졌다. 돈이 가방으로 들어오고......땅을 마련하고 집도 새로 지었다. 새 집에 구들장을 놓고 처음 연기를 피우던 날 신발 끈을 묶으면서 약을 처방하고 이씨는 군에 입대했다.

 

동네 친구와 같이 입대했다. 친구는 바로 배속이 되어 갔지만 의무병으로 간 이씨는 한참을 기다려 시험을 치고 나서야 의무대에 배속됐다. 아직 졸업을 하지 못한 학생이었지만 한의대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도 의무병으로 지낼 수 있었다.

 

제대 후에 한 동네 사는 동생과 결혼했다. 처음엔 그의 마음에 두었지만 내색하지 못했다. 그래서 장인이 약을 지으러 오면 일부러 처형을 데리고 종로에서 가장 큰 약재상으로 가서 처방을 주면서 직접 사게 했다. 당시 처가에서는 이씨에게 재산은 없으나 생활력은 있다.’ 싶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자격증도 없이 약방을 계속 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만두고 취직을 했어요. 삼환기업엘 들어갔는데 마침 문래동에 스테인리스 양식기를 만드는 공장을 짓는다면서 거기 십장을 맡게 됐어요. 번듯하게 직장이 있으니 결혼식도 올릴 수 있었지요. 공장을 다 지었는데 그게 지금의 키친아트예요. 거기서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이사까지 30년을 다녔지요. 열심히 했더니 회사에서 일본, 독일, 스웨덴으로 연수를 보내줬어요. 돌아와 보면 나보다 높은 사람들은 현장 경험이 없잖아요. 나는 이론과 현장 경험을 다 갖췄고.......”

 

근무하는 동안에도 공장 자동화에 관심을 가졌다. 스테인리스 식기를 연마하는 자동화기기를 개발해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수출의 날 표창을 받으러 세종문화회관에 갔더니 사회자가 오늘 이 시상식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컬러TV로 방송을 하는 날이라고 하던 기억이 나요.”

 

과천에 돌아오게 된 건 아들 장가 보내면서다. 20여 년 전 응봉동에 살 때였는데 아들 장가 보내려고 전세를 얻으려고 보니까 서울 전세 값이나 과천 집값이 비슷하더라는 것. 그래 과천 시청 옆 단독주택을 샀다. 문제는 당시 과천에 좀도둑이 극성이었다.

 

두 세 번을 도둑이 들었어요. 부엌 쪽창으로 들어와서는 화분을 깨서 열쇠구멍에 틀어 막아놓는 바람에 나중에 문을 열 수도 없게 해놓고......처남 환갑 한다고 돈 좀 있는 거 홀랑 도둑 맞기도 하고......,나중에 수표를 번호를 적어 놓는 바람에 되찾기도 했어요. 도둑 때문에 아들이 못살겠다고 하는 바람에 응봉동 집에 살게 두고 우리 부부가 내려 온 거죠. 40여 년 만에 돌아오니 옛날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

 

각세도 창시자의 아들이 보는 이선평 교주는 어떤 사람일까?

 

제자들에게는 하늘같은 교주시지만, 제게는 그냥 아버지예요. 하지만 세상을 앞서 가신 분이지요. 그 분 쓰신 글 중에 남자들의 세상은 가고 여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온다.’는 말이 있어요. 그 말 대로잖아요. 지금 코로나를 보고 그러셨는지 큰 병이 나서 전 세계가 고통을 받는다.’는 예언도 있구요. 아버지 어머니는 생식을 하셨어요. 두 분이 마주 앉아서 우리는 이렇게 사는데 쟤들은 어떡하지?’ 하시던 생각도 나구요. 동숭동 살 때 어머니는 몸이 가벼우셔서 축지법을 쓰셨는지 황해도를 하루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지금도 도관에서는 아버님 가르침 따라서 제사를 드릴 때 전을 부치거나 밥을 올리지 않아요. 생명의 상징인 밤, 대추, 곶감만 올려요. 지금은 며느리가 시부모 제사 올리는 것도 번거로워 하는 세상인데 일찍 깨신 거죠. 그때 이미 이렇게 간소화해 놓으셨으니까.”

 

각세도는 이선평 씨가 신격화 되지 않아서 종교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각세도는 동서남북 사관 체제를 두었는데 창시자의 법통을 이어 받지는 못했으나 같은 전주이씨 문중이었던 이 모씨가 학문적으로 정리를 하면서 각세도 원리교를 만들기도 했다. 이 모 씨가 어느 날 이동두 씨를 찾아와 전주이씨 족보에 이선평 씨를 각세도 창시자로 이름을 올리자고 했으나 이동두 씨가 거절한다.

 

아니예요. 전주이씨는 맞지만 아버지는 황해도 문화군에서 각세도를 시작하셨으니 문화이씨 시조로 기록 하는 게 옳습니다.”

 

그러자 이씨가 무릎을 치며 자네 말이 옳다.”고 했다.

 

(2021.2.19. 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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