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초등학교 35회야. 과천농협조합장 이경수 아버지 이상용 어르신이 통장이셨어. 안골이 집이야. 과천문화원장 신학수 할아버지가 과천을 이끌어 가셨지.”

 

과천이 발전이 안 됐던 게 학군을 서울로 학교 가려고 유지들은 아들들을 서울로 전학 시켰지......과천에서 다닌 사람 많지 않아. 나중에 청사 들어오는 바람에 똑똑한 공무원 자식들이 들어와서 변하기 시작했지. 원주민 중에 빠진 사람은 서울로 다니고...”

 

전라경상 단합 잘 되지만 과천은 안 그래. 미국 원주민이 야만인 된 것처럼 옛날 대만에서 관동군들이 행세를 하는 것처럼 단합이 안돼.”

 

그린벨트가 78년 들어올 때 처음엔 사람들이 그게 뭔지도 몰랐어. 홍성기 면서기 다니다 아들이 안양공고 서울수의대 나와 안양서 살았지. 그린벨트 때 면장 했지만 뭔지도 모르고.....그린벨트가 빨리 풀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신동면은 기라성 같이 발전하는데 여긴 묶여서 40년을 지내다 여기 이제 조금.....불평을 많이 해. 이 집 4층 올린 것도 몇 년 안 돼. 1층에서 2층은 다락방으로 올라가게 할 수 밖에 없었지.”

 

의회활동 할 때도 30건을 발의 했어. 신천지 전에 장막성전이 들어와서 땅을 사서 우정병원 지을 적에 병원 지어놓고 수지타산 안 맞으니 형질변경 해달라기에 그거 해주려면 여기 그린벨트 풀어야 한다. 고집 부리고 반대 했어요. 도시계획위원 할 때 공대 교수들이 왔고 나는 원주민이라 해서 의회에서 내가 나가서 오해 받았어. 그때 해제 작업 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내가 오해 받았지. 여기가 대통령령으로 묶은 것을 자연녹지로 풀어 놨는데 그걸 반대해서 우리도 못 풀게 하는걸 반대해서......그린벨트 해제 관련 발의를 30건 넘게 했어. 관문동 쑥쑥 올라가고 해서 더 싸우고 그랬는데.....과천을 대변 한다면 청사 들어올 제 특혜를 받았어야 해. 도시개발 서울시도 아니고 청사 들어오면 위성도시로 발전되어 주민들은 아무 득이 안 된다 말이야. 말죽거리처럼 발전되길 바랬어.”

 

서울시 편입 얘기도 있었지. 김계현 서울시 도시국장이 박정희 정권 아래서 묶어 놓고는 나중에 와서 풀려고 그랬지......평지면 그냥 집을 지을 수 있고 낮은 곳은 메꿔야 하고 하는데 도로가에 닿는 사람은 풀자고 하고 저 끝에 사는 사람은 반대하고.....투기하고 다닌 사람은 풀자고 하고. 여기사는 사람은 풀면 뭐 먹고 사느냐고 반대하곤 했지.”

 

여기 사람들은 땔나무로 생계 이어왔어. 나뭇꾼 아들이라도 근면하고 부지런 하다는 걸 자랑스러워했지. 그 당시도 과천이 인심이 야박한 이유가 지금 국무총리 당시 현감이 남대문만 열어줘서 동대문이나 북대문으로 못 들어오게 해줘서 과천사람들만 장사를 할수 있게 했지. 나무가 기름보다 귀했으니까.....그때 열심히 땅뙈기라도 마련하고 자식들 가르쳤던 거예요.”

 

아버님이 52세에 내가 대학 1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위암 적병으로 못 잡숫고 계실 때 중외제약 포도당 천씨씨 짜리 매일 한 병씩 식사 대신 맞게 드렸는데.....재산 다 쓰고 돌아가시라고 그랬더니 아버님이 동생들 가르치라고 주사 안 맞고 6일 만에 돌아가셨어.”

 

이 자리가 아버지 세간난 자리야. 149번지 내가 난 자리에 살고 있어. 아버지 4형제 내가 3형제.......나이 19에 호주가 되어 동생들 세간 내주고.....한글 모르시던 아버지께서 나 대학교 보낸다고 애를 쓰셨지. 흑석동까지 걸어 다녔지. 과도 모르고 시험만 보고 그만 둘랬는데 땅 안 팔고 그대로 다녔어. 입학하고 그해에 돌아가셨어. 그래 더 못 다녔지.....우리가 어려서부터 체구가 크고 건강했어. 우리 형제들은 농사 쟁기 가래질 힘든 줄 몰랐어. 공부도 못하고 일도 뼈에 배지 못해 15년 농사짓다가 광화문에서 타자학원을 했지. 혁명나고 정치바람에 뭐 좀 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지. ‘대학교 나온 사람은 교석이 밖에 없어그랬는데.....”

 

강신태씨가 사촌형이예요. 강씨네도 삼형제야 큰집에 양자 보내 대학교 보냈지. 김진우가 동창 이예요. 능안말이 다 그 집 땅이었지. 신성재 씨가 할아버지가 신구장이라고 다 그 양반들 제자예요. 착하고 잘생기고.... 신성재 씨 동생이 나하고 동창이야. 형이 묶어 낙양을 같이 다니고....중대부고 갔지. 신성재씨 과천에서 존경 받는 분이었어요. 특전단 출신이야.”

 

광창이는 뜰이 좋아 부자동네야. 범말 땅 가진 사람은 다 부자야. 잠실서 온상 채미 농사 배워 와서 이 동네가 일 많이 했지. 비니루 대신 노루지에 기름 발라 온상 했지. 여긴 농지가 좋아 뭐든 심으면 잘됐어. 채미 수박을 남대문 북창시장이나 서울시청 앞까지 가서 염촌교 다리로 영등포 흑석동으로 나오는 거지. 마포까지 가고 그랬어요. 이버지가 쌀 한 됫박 사서 지게다리에 달랑달랑 매달고 오고 오전 짜리 호떡을 못 사먹고 동전을 물고 입에 와서 뱉으시면서 꿀맛이라고 그러셨어. 요 앞집이 막내 동생 걔가 오학년이었는데 여기 천 평 팔아 안중에 삼천 평 사가지고 돈 좀 벌었어요.”

 

서초동 멍도리에서 중신이 들어왔어. 시골 싫어 장가들기 어려울 때였어. 열심히 한다고 누님이 거기 살았는데 중매하셔서......촌뜨기도 아니고 부모 말씀대로 재산을 없애진 않았지.”

 

“15년 장사 잘 하다가 귀 도둑질 눈 도둑질 어지간해 과천에서 내가 제일 똑똑한 줄 알았지. 타자학원은 컴퓨터 나오기 전에 월남 사우디 보내는데 여자가 못가니까 남자들이 사무직 기술 배워 간다고 해서.....사무직원이 거기서 타자학원... 경기 좋아 시간이 지나도.... 그건 손해 안 봤는데 거기서 회사를 한다고 다 들어먹었지. 농사는 계속 지으면서 광화문으로 출퇴근했어. 대동 5마력짜리 발동기를 지고 다니면서 물 대고 그랬지. 일하는 대로 소득이 되니까 재미있었어.”

 

과천출장소 생기기 전에 4H클럽 만들었다. 당시 동네가 50호였는데 시흥군 대표로 가면 광창마을이 대표로 나가곤 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각종 체육대회마다 상을 휩쓸어 오는데 기여한다. 하지만 안양에 나가면 사정이 달랐다. 안양엔 금성방직팀이 있었는데 잘했다. 송씨가 골키퍼를 맡았지만 9:0으로 형편없이 지고 돌아오기도 했노라고 회고한다.

 

모래 가마 들고 서 있기 하면 1등하곤 했어. 밥 먹을 만큼 있고 하니 세상이 만만했지. 새마을운동 하고 창고도 짓고 동네 길 닦기 하는 때면 일 잘하는 사람이 가서 하고.... 우리 동네는 일꾼을 내보내고 주인은 와서 막걸리 사고 그랬지.”

 

마사회 들어 올 때 경마장 안에 우리 논이 들어 갔어. 고래 논 24등급.....갈현리에 24등급이 있었지. 주암리도 논을 하고..... 부자동네였어. 열심히 일하니까 딴 동네서 싫어해. 처먹고 노상 일만 하느냐고...... 그때는 똑똑하고 그러면 과천읍내 살고 그랬지. 우리가 나면서 휘잡아 시흥군 체육대회도 가고 그랬어.”

 

광창마을 이중계도 우리는 쪽수가 많아 내가 출마하면 유권자도 많으니 내가 되리라고 그랬는데.....어른들이 이중계 들어 올 제 쌀 한 가마 씩 내게 하고 나갈 때는 안 태워주는 거야. 나갈 때 안 주는 게 우리 동네 법이다 그러면서.......내가 시의원 할 때 마사회가 도와줘서 마을회관 짓고 그랬지.”

 

과천초등학교 35회 중에서 용산중학교 2명 갔어. 36회는 4,537회가 60명이 갔어. 6·25때 태어나서 부모들이 자식은 가르쳐야 한다고 많이 보냈지. 그전에 훈육소 생기기 전에는 안양으로 다 같이 다니고 그랬어. 그때 4H 바르게살기 하고 그랬지.”

 

우리 동네는 노름 못하게 뺐었어요.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 노름하는 돈 빼앗아다가 동네 돈으로 쓰고.....화투를 못하게 했어. 술 제사, 노름 못하게 하는 삼무운동하고 그랬어요. 그때는 제사 하면 제물을 남이 한자 괴면 두자 괴고 돈이 흔해 그랬는데 그걸 못하게 했지. 그 근덕이 여기까지 남아 있어.”

 

이장도 동네에서 보면 광챙이 이장 보면 논 서마지기 팔아야 하고 말하곤 했어. 면서기들이 점심때면 이리 와서 밥을 먹게 시간을 맞추는 거야......이장 보면 관문 김○○이장은 이백호나 되니까 면장 월급보다 많은데 우리 동네는 논 서마지기 팔아야 이장 잘 보는 거고......그래서 이 동네 사람들이 지금도 서로 안하려고 그러는 거야.”

 

내가 시의원도 하고 그랬지. 경마장 들어올 때도 싸웠어. 마사회 증축반대를 하니까 오경이가 왜 반대하냐고......그때 이성환 시장이 곁에 서 있다가 여기 시장한테 물어봐야지 내가 알아?’하고 농담하고 그랬지. 마사회 86아시안게임 때하고 88올림픽 때 증축했지. 국가사업이라고 그래. 오경이가 2억 주고 마을회관 짓게 하고 주차장도.....그래서 송의원 아니었으면하는 소릴 하지. 김혜경이가 초대하고 내가 3대 때 이정찬이가 4대째 했지. 일을 쑤시고 다니면서 했기 때문에.....”

이성환 시장이 제일 큰 문제가 쌍굴 터널 2대 때는 못 했어. 3대째 송의원 왔으니 한다는 거예요. 주암리 체육공원, 주차장 할 때도 사람들이 송의원은 하기 싫을 때까지 시의원 할 건데 뭘 그래?’하곤 그랬지.....장군마을도 과천시로 들어올 건 생각도 못 했어. 하지만 표가 되니까......”

 

송씨는 아들 넷 딸 하나를 두었다. 막내는 영국 유학 가서 시민권 받아 살고 있다.

 

1970년 초반 정부는 그린벨트를 발표한다. 자세한 내용도 모르고 장래에 미칠 영향도 몰랐던 과천 주민들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 송씨는 이 법이 과천 발전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될 거란 생각에 적극적인 반대운동에 나섰다. 지금은 그린벨트로 묶이는 바람에 땅 값이 형편없이 낮게 묶이는 바람에 팔지 못하고 지니고 있던 이들에게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한다.

 

송씨가 시의원을 지내는 당시 과천은 도시계획이 만들어지는 시기여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10여 년이 지나서 시의장이 된 윗마을 삼부골 이경수 (2022 현 농협 과천지부 조합장)의원은 만날 때마다 "형님이 현직에 계실 때 다 해놓으신 일들 저희 대에서 마무리 작업하는 거예요"라고 말하곤 했다.

 

똑똑한 사람은 땅 죄 팔아먹고 미련한 사람은 남아 있는 거지......서초동 법원 앞 향나무 멍도리 도시계획 할 때 원주민들이 약다고 코너로 받았지. 개발위원들이. 하지만 땅을 확장할 때 가각정리 하니까 대토 못 받아 보상은 현금보상 받게 된 거야.”

 

마을 창고도 괭맹이, 삼부골 세 부락 쓰라고 양회 5백포 나온 거 다 몰아서 짓고 남는 양회 팔아 스레트 사서 지은 거야.”

 

(2020.11.12. 자택)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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