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오복씨는 1938년 과천 광창마을(광챙이) 태생이다. 지금 광창마을에서 산 쪽으로 올라가 경마장 담장 안쪽에 마을이 있었다. 11녀 외아들이다. 위아래 3대가 독자로 아들이 귀한 집안이다. 송씨가 태어나자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가 생존해계셔서 오복五福이라 이름 했다.

 

1921년생이셨던 어머니 이숙자 여사는 16세에 시집오셔서 18명이나 되는 식구들을 농사를 하시며 뒷바라지 하셔야했다. 1985년 경기도지사 효부상, 1990년 과천시민대상 효부상을 받았다.

 

증조부께서 93세에 증조모께서 67세에 조부께서 59세에 조모께서 93세에 부친께서 58세에 돌아가시면서 초상을 치르는 일이 큰 행사였다.

 

송씨도 서울시장 효행상을, 2녀 효남도 효행상을 수상해 3대가 효부, 효자, 효녀상을 받았다.

 

당시 국민학교 입학은 시험을 봐야했다. 이웃에 사는 고모네, 이모네 아이들과 함께 시험을 치렀는데 송씨만 붙어서 입학을 했다. 한내를 건너서 학교를 가면 조선기와로 지은 이층집을 객사라고 불렀다. 아랫층은 훤하게 트인 건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6·25전쟁이 나자 송씨네도 피난을 가야했다. 전쟁 첫 피난에는 길이 막혔단 소리에 나가질 못했다. 1·4후퇴 때는 이불을 지고 평택까지 가야 했다. 평택을 지나 아산 근처에 가서는 바다를 걸어서 건너가야 하는데 이불을 진 소년 송오복을 어머니가 업고 뻘을 건너다가 나뒹굴면서 뻘 흙투성이가 되어서 몸만 빠져 나오기도 했다.

송씨는 과천국민학교를 37회로 졸업한다. 중학교는 흑석동 낙양중학교를 갔다. 한내를 건너다니기가 힘들었다. 남태령을 건너려면 가끔 커다란 세퍼트 같은 큰 개가 나타나곤 했다. 무서워서 어른들께 어째야 좋으냐고 물어보니 가방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천천히 걸으라고 일러 주었다. 그대로 해보니 한참을 노려보던 큰 개는 물러서더란다. 나중에 보니 개가 아니고 늑대였다.

 

가난한 시골 살림에 월사금이 자주 밀렸다. 부모님 모시고 오란 소리에 아버님이 과천 안골에서 흑석동까지 불려 가시기도 했다. 휘문고에 입학했다. 서울대 공대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서울대는 5대사립학교 출신에게만 가점을 주었다. 부득이 한양대 공대에 입학했다. 2학년을 마치고 돈 때문에 더 다니지 못했다. 군에 가서도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상사의 부탁으로 그의 집에 기거하면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1960년 경기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1965년 지적측량기술원을 수료했다.

 

김명자씨와 1967년 결혼했다. 송씨의 외가가 성남이었는데, 외가에서 참한 색시감이 있다며 선을 보러 오라고 불렀다. 과천에서 외가인 현재 성남비행장에 들러 도착한 곳은 지금 상대원 공단이 있는 산기슭.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걸어 들어가자 신랑감이 왔다며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처갓댁 식구들이 송씨를 반겨 맞았다. 낮 두 시 경이 되어 도착하니 시장하겠다며 밥상을 내왔다. 식성 좋게 밥그릇을 비우자 장인될 어른께선 신부될 아가씨에게 "네 밥이라도 덜어서 주어라"하셨다. 그 전에 신부댁에선 과천 본가를 다녀 가셨다. 살림이 크고 일이 많아서 힘들겠다고 걱정들을 하셨다 한다. 한 달 여가 지나 외가에서 어째 말이 없냐? 싫으냐?” 물으시기에 송씨는 아녜요. 결혼 하지요.”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그 길로 사주단지를 사다가 보냈다. 결혼은 종로5가의 예식장에서 했다. 주례는 연세대 부총장이신 과천 안골의 목사님이 서셨다. 당시 송씨는 안골교회 청년회장을 지냈었다.

 

제대 후에 과천 관악중학교(후에 한일중고등학교) 교사로 3년을 지냈다. 재단이사장과 종친이었다. 당시에는 교사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학교에선 송씨를 불렀다. 처음에는 수학을 가르쳤고, 나중에는 물상 같은 과학과목을 가르쳤다. 그때 제자들 중에는 아직도 스승의 날이면 식사대접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한 제자는 S생명 간부로 성장했는데 찾아오면 들어 준 보험이 3개나 됐다. 3년쯤 지나 이사장과 교장이 다투면서 학교를 그만뒀다.

 

그길로 기술직공무원시험 전문학원에 등록해 6개월 만에 자격증을 따고 1965841의 경쟁을 뚫고 서울시 공무원이 된다. 기술직으로 공직에 입문한 송씨는 서울시청에서 지적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지적계장, 과장을 거치며 지적과련 논문을 발표하고 공무원 창안상을 받는 등 일가를 이루었다. 서울시 공무원교육원에서 9년을 강사로 후진들을 양성했다. 지적관련 승진시험 감독이나 평가관을 하기도 했다. 한국지적학회 이사를 맡기도 했다. 서울시 역대 시장들의 표창에 이어 노태우 대통령표창과 김대중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송씨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재능이 있다. 휘문고를 졸업한 동기들이 사회에 나가 자리를 잡고 안부가 궁금해지면서 동창모임 휘3회가 만들어졌다. 산행을 가는 동안 차 안에서 동기들에게 들려 줄만한 좋은 글들을 모아서 유인물을 만들어 나눠주었다. 반응이 좋아 나중에는 책으로 엮어 내기도 했다. 그렇게 26년을 이어온 동기회는 2020년 코로나19로 정부가 친목산행 등의 모임을 금하는 조치를 취하자 더 이상 산행을 이어가지 못한다. 그때 돌아보니 남은 동기도 7명에 불과해 그저 매주 화요일에 밥이나 함께 먹기로 했다.

서울시 중견간부로 이름이 날 무렵 고향 과천에서 그를 불렀다. 2006년 과천농협 조합원수첩을 보면 자료정리에 열심을 보인 그의 노력을 볼 수 있다. 전 조합원의 주소와 연락처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다. 지금은 개인정보보호 운운하지만 당시로는 조합원들에게 요긴한 자료였다. 과천향우회가 생기면서 사무국장을 맡았다. 나중에 과천시민회가 된 과천향우회는 과천이 시로 승격되면서 중요한 구심체가 된 모임이었다.

과천향우회의 큰 일은 해마다 치르는 체육대회를 후원하는 일이었다. 마을 가장 큰 행사였던 체육대회는 한내를 두고 둘로 나뉘면서 반목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 갈등이 송 사무국장을 힘들게 했다.

 

이 무렵 광창마을을 터전으로 한 송씨네 문중일도 맡아야 했다. 종친회장이 된 송씨는 기존의 한문투성이 족보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사진기를 들고 전국으로 다니면서 가문을 찾아 누빈다. 송오복 종친회장이 1981년 발행한 [광창부락 회덕(은진)송씨 종친회 명부 (내외거주 완결판)]에는 가족사진이 먼저 보이고 그 아래 식구들의 생년과 관계를 넣은 신식 족보가 있다.

 

자식농사도 잘됐다. 딸 셋 아들 하나를 두었다. 모두 서울대, 이대, 숙대를 나와 대학교수, 금융기관 임원 등을 지내고 있다.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닌 아이들은 결혼을 하면서도 목돈을 내놓기도 했다. 팔순 되던 해 결혼기념일에는 자식들이 해외여행권을 내미는 바람에 비행기를 탔다. 송씨네 부부가 맞벌이하는 딸을 대신해 기른 손녀딸 김성이 양은 중학교 1학년이 되자마자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 손녀가 다닌 옥스퍼드 하이스쿨 공원에는 학교를 빛낸 공을 기리는 돌비석이 서 있다. 김양은 곧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송씨는 이렇게 가정을 지키고 아이들을 키워낸 아내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며 산다. 딸 셋을 낳는 동안 병원에도 못가고 집에서 할머니가 산후관리를 해 준 게 전부였다. 아들을 낳을 때는 공무원이 되어 과천을 떠나 신길동 살 때였다. 한 밤 중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해 10분 만에 낳은 아이가 아들이었다. 그렇게 종손을 얻었다.

 

송씨가 일생 잘 한 결정으로 꼽는 건 퇴직연금이다. 199834년 근무하고 퇴직 무렵 다들 목돈으로 퇴직금을 탔는데 나중에 보니 자식들에게 빼앗기거나 장사라도 하겠다고 나섰다가 털어 먹은 이가 대부분이었다. 송씨는 퇴직금 절반은 일시금으로 타고 절반은 연금으로 신청했고 그것이 노후 생활자금으로 긴요하게 쓰인다.

 

송씨 할머니는 항상 손주가 돌아 올 시간이면 대문앞에 나와 기다리셨다. 79세 되시던 해에 기다리시다가 넘어져 엉치뼈가 부서졌다. 워낙 고령이시라 포기하자는 걸 신씨가 신대방동 한독병원에서 40일을 입원하신 끝에 단장을 짚고 퇴원하실 수 있었다. 그때 정성으로 간호 해 준 간호사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다. 당시 간호사나 은행원은 결혼을 하면 퇴사해야 하는 게 보통이었다. 송씨는 김간호사 이력서를 받아서 모 구청 보건소에 넣었다. 나중에 김간호사는 과장으로 정년했다.

 

송씨는 할머니를 업고 설악산 금강굴을 올라가 부처님께 절하고 약수를 드셨다 제주도에 가셔서는 말도 타셨다. 93세에 돌아가셨다.

 

아내와 남쪽 여행을 가던 길에서 만난 청년을 차에 태워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7번국도를 따라 여행하며 숙식을 함께 했다. 나중에 보니 그는 큰 병원 의사였다. 청년의사는 나중에 커다란 상자에 옷가지와 여행용품을 가득 담아 서울시청으로 찾아왔다. 이후 그 의사는 송씨가 보내는 환자라면 더욱 정성을 다해 치료해주고 송씨의 부탁으로 여러 사람을 취직시켜 주곤 했다. 송씨는 좋은 일을 하면 돌아 온다고 믿고 산다.

 

(2020.11.5. 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