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생 송씨는 4형제다. 평생 농사만 짓고 과천 밖을 나간 적이 드물다.

 

청계산 저기서 낭구 해다가 널어서......그걸 또 죄 묶어서..... 흑석동까지 가서 새벽 두 시에 가서 팔구 아침에 또 나무 가서 또 해다가 팔고......땔나무를 하루에 한 두 번씩......아마 열여섯 살 부터 한 거 같아. 그땐 하두 없이 살아가지구.....”

 

(그 당시에는 과천에서 나무해서 내다 파시는 집이 몇 호나 되셨어요?)

 

동네가 거반 다......어르신네들이 땔나무 짊어지고.....여기는 옛날부터 나무만.......가지고 가면 좁쌀......그거 지게에다 달랑달랑 달고 오는거지.”

 

(그때 돈으로 하면 얼마나 받는 거예요?)

 

지금 돈으로 하면 한 15천 원 정도..... 땔나무 한 짐이 10. 아니지 십 환.......”

 

(팔러 가시던 자리는요?)

 

지금 흑석동 시장자리, 노량진 길 옆에 놓고 팔고 그랬어요. 새벽에 지고 가면 날이 훤히 밝아요. 그전에는 탄이 없잖아.....전부 나무 때고 그랬으니....그러면 사러들 나와요. 거기서 팔구 와서 또 땔나무 하러가고.....60년대죠.”

 

전쟁 때 여기도 아홉 채가 불에 탔어요. 그래서 이중계를 하게 됐지. 도와줄 길이 없으니까......방법이 없으니까......”

 

우리 아버지도 끌려 갔었어요. 노력동원인가......그 전에 말하자면 후생사업이지 갔다가 군대 갔다가 겁나니까 지금 나와서 사는 거야. 그러고 돈으로 때우는거야. 돈으로 바치고.....그게 후생사업이지. 붙들려가도 돈으로 메꾸는거지. 옛날에 우리 아버님이 그렇게 했대. 그때 땅 한평 천 원, 이천 원 갈 때야. 그러니 그거 팔아서 디밀고 디밀고 그러니 자식들만 고생이지.....”

 

(70년대 초반에 홍수가 났을 때 이쪽 광창마을이 많이 잠겼습니까?)

 

이 동네는 잠기지 않고 개울......관악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넘쳐서 훼손됐죠. 그 전에 양재동, 사당동 이쪽에는 다 물이 차 가지고 배 타고 다니고 그랬는데 여기는 그래도 지대가 높아 가지고 물은 안 찼어요.”

 

이중계는 어른들이 만드셔 가지고 우리가 보관해 가지고 복원을 한 거지. 마을에서 이거는 후손들에게도 해줘야 하지 않느냐 해가지고......젊은 애들은 몰라요. 옛날에는 기와가 아니고 전부 이엉을 엮어서 했잖아요. 10월 달이면 마을계가 있어요. 곗날이면 농사 안 짓고 나무하는 사람은 산에 가서 땔나무 가져오고 농사짓는 사람은 짚풀 열단씩 가져오고....그래 가지고 그거 모아 가지고 지붕 해 잇고 겨우내 때고 그랬어요. 동네 자금도 지금 이 마을회관도요. 이 땅도 여기 이게 다 그렇게 모은 돈 이예요. 그 끄트럭 가지고 맨들어 논거죠. 지금 젊은 애들 하나도 몰라요.”

 

그리고 여기 송인관 씨는 밖에 나가 사회활동도 하고 그랬지만 우리는 만날 먹구 일 밖에 몰라요. 어디 나가도 이거 대화도 못 해보고 누가 어디 가든 놀러도 못 가고 오로지 땅만 파고 옛날에 그랬더니 그 대신 자식들이 좀 잘살지.”

 

(자손은 많이 두셨어요?)

 

아들 둘, 딸 둘. 둘째 내가 데리고 있어요. 큰 애는 나가 있고 딸들 다 시집 보내고 손주 둘은 군대 가 있고......”

 

(경마장 수용된 자리에는 가옥이 많지 않았나요?)

 

삼부골 능안말 지금은 능안말이 없어졌지요. 마을 자체가 없어졌어요. 그리고 요 동네는 빠진거지.”

 

(송인관 : 여기 송억산 씨는 동네 터주대감이예요. 한 번도 마을에서 떠난 적이 없어요. 지금 오늘도 내가 와 보니까 혼자 지키고 있어요. 그래 가지고 이제 노인네들 이제 식사 같은 거 보게 되면은 반찬이 없잖아요? 집에서 농사를 짓고 그러니까 채소 떨어지면 김치 갖다 채워놔. 오래도록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이왕 그런 좋은 일도 하니 이중계 좀 맡아달라. 우리는 외부에 나가 다니고 나는 문인활동도 하고 그러니까 이건 송씨가 적임자가 아니냐 어렵지만 맡아 달라.’ 해 가지고는 이제 맡았어요.”)

 

(2019.5.13. 광창마을회관)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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