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아버님이 과천에 처음 정착하실 때 세 집인가 네 집 있었대. 그때 오셔서 지금이 제일 융성한 거지. 지금 백 여 세대가 되잖아요. 우리 집안에서 박사도 여럿 나오고, 또 내 조카애는 지금 외무고시 합격해 가지고 외국에 나가 있잖아. 자손들이 지금 많이 활동하고 있어. 공무원도 있고...... 전에는 전쟁 나면서 먹구 살기도 어렵고 그 과정을 거쳐서 지금에 온 거지. 자식들도 맘대로 공부하고.....그때가 아무 것두 없을 때야. 먹을 것도 없구......”

 

여기가(광창마을) 송씨 집단취락지역 이예요. 과천서 송씨마을 물어보면 우리마을이예요. 은진송씨. 대전서두 우리 여기 세보들을 알구 있어요. 우리가 9대야. 9대조 할아버지가 요 뒤에 우리 선산이...... 경마장 있는 데가 우리 선산이었어요. 경마장에서 수용하는 바람에 이천 마장면으로 이장을 했지요. 경마장 들어올 때니까 80년도일거예요.”

 

(송억산 : 우리 종뫼 땅 한 삼만 평이 거기 들어갔어요. 거기서 이장 했어요 덕평으루)

 

(광창리 대동계를 소개해주세요.)

 

“6·25 나 가지고요. 9·28때 인민군들이 우리 산에......거기다 진지를 구축했어요. 우면산하고 우리 산하고 구축을 해 가지고 인천에서 상륙하는 그 유엔군 있잖아요. 여기서 교전이 벌어졌어. 마을에 한 10여 채가 불이 났거든요. 타버렸어. 그러고 나서 이제 생활을 하려니까 어렵지 않아요? 집이 10여 채가 타버리고 남은 사람들도 누굴 도와주고 그럴 수 없었어. 어려웠다구요 살기가......거기다가 이제 설상가상으로 언제 전쟁이 여기서 일어나 가지고 불이 타 버렸으니......그 사람들은 숫갈 하나두 못 가지고 나온 거야. 그래서 이제 동네에 어른들이 이대로 우리가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래서 만든게 이 이중계를 조직을 한 거예요. 정말 역사가 깊은 얘기예요.

이 명단이 이중계에 대한 계약이 다 있고 요게 이 계원명부가 있어요. 이 사람들이 만든 거예요. 노인네들 44분이 이렇게 작성을 한 거예요. 이중계를 만들어서 무슨 사업을 했느냐면 그땐 돈이 없잖아요. 그때는 은행이 없었어. 전쟁 통이고.... 그래 누가 병이 나든지 애들이 학교를 가도 돈이 없으니까. 그 당시에는 장리쌀 같은 것도 많이 있었잖아. 그거 가지고는 안 되니까......이 분들이 돈을 각출도 하고......마을에선 예를 들어서 소를 팔잖아요. 그럼 흥정하는 사람이 있잖아. 그럼 거 수수료를 가져가잖아? 그럼 거기서 무조건 10% 떼는 거야. 기금으로 내놓기로 해. 그게 명단이 다 있어요. 그리고 인제 채소밭 채소밭도 인제 팔게 되면 수수료를 얼마를 떼. 그 돈을 모은 거예요. 모아 가지고 10월 음력으로 1020일 날이면 매년 정기총회를 여는 게 여기 나와요. 그래 가지고 전에는 저쪽에 초가집으로 된 회관이 있었어요. 거기서 회원들이 다 만나. 만나 결산도 하고......”

 

그러고 돈을 이걸 갖다가 이제 어려운 사람 있으면 이제 빌려 주는 거예요. 차용을 해 주는데 보증이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냥 떼 먹으면 안 되니까. 꼭 두 사람을 보증을 세워 가지고 돈을 갖다 쓰는 거예요. 그때 돈이 귀해서 구할 수가 없으니까 안 그래도 그 돈을 쓰지 못해서 애쓰는 거야 그래 가지고 늘렸어. 돈을.....그게 하나의 지금 뭐 마을금고처럼.....그렇게 해 가지고 주민들을 자율적으로 이렇게 해결해 나간게 이중계 거든요. 내가 이거 이중계 수필을 쓴 것도 있어요. 금년에 책으로 내가 지금 내려 그러는데.....수필집을 지금 준비 중에 있는데......거기에 이제 정신이 담겨있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하고 마을도 많이 변했다. 마을사람 몇이 이중계를 보전하지 않으면 없어지겠다는 생각에 이어나가기로 했다. 시작한 44명의 마을 주민들 자손 중에 외부에 나간 사람들에게도 알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음력 1020일이면 총회를 하고 제사를 지낸다.

 

이중계비를 보면 계자가 이상하죠? 지나가다가 이게 무슨 계자냐고 물어보러 들어와. 이거는 이 분들이 작성을 할 적에 그게 볏단계예요. 뭐 없으니깐 농사 많이 짓는 사람은 볏단을 많이 가져오고 적은 사람은 적게 가져오고 이래 가지고는 그거를 갔다가 이엉을 엮어서 지붕도 만들고 또 땔감으로도 쓰고 그래서 볏단계를 쓴 거예요. 이거는 사연이 있어요. 나도 이거 좀 이거 찾아봤어. 옥편을 찾아보는데 안 나오는 거야. 계자가 이거 이거 이거 초서로 흘려 써서 보기가 어렵지 않아요? 볕화변이야. 초서로.....이게 볏단계자야. 왜 이 양반들 썼나 했는데.....어렸을 때 보면은 노인네들이 나와서 이엉을 엮어서 지붕을 잇구 그러고 나서 이제 음력 20일 날 인제 제사 지내고 마을 잔치 하고 돈 가지고 간 사람들 돈 또 상환하고 그 다음에 또 갈 사람 가져가고....빚을 가지고 갔는데 갚을 능력이 없는 거야. 그러면 없어져 버려 빚진 사람이. 그럼 노인네들이 보증서는 사람을 갔다가 빨리 가져오라 호통을 쳐.....그렇게 해 가지고 만든게 그 돈 이잖아요. 그 끄트머리로 남은 돈 있잖아요. 그 돈을 가지고 옛날에는 상여 같은 거 있잖아. 마을 밖에다가 놔 두고 놓을 데가 없어가지고 마을에서 땅을 100평을 샀죠? 그때? 100평을 사서 거기 창고를 지었어. 그래가지고 동네 북같은거 그런 걸 갖다 놨어요. 그리고 바깥에 상여를 놨어요. 그렇게 보관해 온거야. 근데 이게 또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그 100평 산데 또 경마장 옆에 있거든 옛날에는 외진데야. 집두 없구 외진덴데....그러니 거기다 상여를 놓은거 아녜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경마장이 생겨 가지고 거기가 요지가 되버렸어. 없던 도로가 확장되면서 땅이 한 30평 들어갔지요? 그리고 도로가 생긴 거지. 그걸 창고로 지금 세를 놨어. 그래 한 100만 원 정도 세가 들어와. 그 돈 가지고 이제 제사도 지내고 그래. 그 자리가 함지박가든 옆이야. 거기 창고 하나 있잖아? 그거를 이 분들이 하던 끄트머리야. 그 돈을 가지고 마을에서 땅을 사 가지고 이렇게 마을에다가는 상여를 놓을수가 없으니까 거기다가......”

여기 이건 차용증이야. 도장 찍고 차용하고 다 갚고 나면 인제 표 하고.....그 당시 세 사람이 동네일을 봤는데 이 김 모 씨가 지금으로 치면 회장이겠지. 여기 이게 문서고 또 색상은 인제 살림꾼 같아 내가보니 살림꾼 같아. 여기 송승준 씨가 우리 아버지예요. 어렸을제 생각해보면 가을 무슨 제사 지낼 적에 보면 이 양반이 저쪽 사셨는데 우리 집에 오셔서 아버지와 의논을 하시던 기억이 나더라구.”

 

1970년대에 송씨는 방산시장으로 출퇴근하며 장사를 했다.

 

서통화학이라고 있어. 옛날엔 거기가 가발하고 그랬어요. 서울통상이라고 거기서 잠깐 내가 있었어. 그러다보니까 회사생활하는 것보다 장사 하는게 낫겠더라구. 그래서 서통화학에서 대리점을 제1호로 가지고 나왔지. 방산시장에 70년도에 한참 경기가 뻗어 나갈 때, 내 서른 아홉인가 서울통상에서는 테이프, 셀로판지 이거 생산을 하고 그 물건을 총판 하는데 있었지. 내가 좀 있다가 총판이 부도가 났나 어떻게 돼가지고 서통화학에 우리 직원들이 회사 가서 일을 했었지. 가만히 보니까 내가 회사에 있어 봐야 발전이 없을 것 같아. 비전이.....그래서 힘은 들지만 위험을 안고 인제 방산시장에 가서 대리점을 열었지. 그게 1호야 서통화학 대리점. 그때는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로 참 좋았지. 미처 생산도 못하고....전국으로 다 이제 물건은 나가고 삼성 현대 큰 회사에 다 조금씩은 납품을 했다고......박스테이프, 셀로판테이프 이런 거.....그때는 없었어. 전부 수입해오던 거를......그런데 수출이 늘어나니까 물건이 없잖아....근데 그 기술이 없어가지고......조금 돈 벌구 그래서 봉고차 하나 끌구 댕겼죠. 그때두 그 봉고차가 드물었어요. 여기 시골에는......그렇게 아이엠에프 날 때 까지.....아이엠에프 나니까 하루 아침에 그냥 막 줄줄이 망해 나가는데 무섭더라구. 하루아침에.....”

 

그때는 전쟁통 아니야? 우리 초등학교 6학년 때 전쟁이 났잖아? 그리고 과천초등학교가 타 버렸어. 수업을 못 하니까 향교 명륜당에서 우리가 이제 수업 마지막 수업을 했지. 그래가지고 국가고시 제1회야. 우리가......안양중학교 밖에 없었어요. 안양중학교가 학생들 연합소야. 여기서 걸어 다니는 거야. 30리가 넘어. 안양중학교가 안양에서도 박달리 양짓말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상당히 거 안양서도 멀다고......여기서 걸어 다녔어요.”

 

옛날에 팔을 다쳐서 병역등급 병정을 받았어요. 어렸을 때 마차에서 떨어져 가지고.....그땐 뭐 병원이 없고....왜정때니까.....6,7세때 그런거예요. 마차에서 떨어졌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논에가서 일하시고 할아버지가 계셨나봐. 할아버지가 널판지 대고 버스나무 껍데기 벗겨가지고 척척 감아 놓은거야. 그때 제대로 뼈가 안 맞춰져서 나중에 내가 20세가 넘어서 백병원에 가서 다시 이거 수술을 받았다고....수술을 받았는데 시원찮더라고..... 너무 늦어서.....”

 

안양으로 학교를 댕기다가 서울 서운동 사는 이모가 있었는데, 나를 데려가서 대동상업에 편입을 시켜줬어. 거기서 고등학교 나온 거지. 그때 취직도 안 되고 대학은 능력이 안 돼요. 돈도 그렇고 먹고 살기도 어렵고......내가 대학을 가게 되면 좀 동생들이 공부를 못 하잖아요. 육남매...... 부모들이 얼마나 고생이 심했어요. 광주리에 뭐 이고 팔러 다니고 아버지는 땔나무 하러 다니고......그래서 고등학교 나온 거 가지고 직장 생활하다가. 또 집에 와서 농사도 하다가 70년도 되고 기업들이 막 일어나고 서통화학 총판을 하게 된 거야.”

 

퇴직하고 나서 사회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웠다, 과천문화원에서 중국 황하유역 문화기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 기행문을 컴퓨터로 썼다. 그것이 사회복지관에 발행한 [시니어헤럴드]에 나고 편집위원을 맡아보게 된다. 이어 과천시 실버기자가 됐다. 그렇게 쌓인 글들이 인터넷 카페에 올랐다. 그리고는 월간세계문학을 통해 등단하게 된다.

 

(2019.5.13. 광창마을회관)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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