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수씨는 1941820일 생이다. 9남매 장남이었다. 위로 누나가 여섯. “종수를 데리고 다니라고 세 살 위 누이를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을 만큼 귀하게 자랐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에서 회군한다. 당시 청주 살던 최유경(崔有慶)이 군량미 운반책임자로 함께 출정 했다가 회군에 반대하고 낙향한다. 그런데도 이성계는 집권 후에 한양 천도를 하면서 그를 도성영축도감으로 불러올린다. 지금으로 하면 신도시건설 책임자다. 전주가 고향인 이성계는 최유경이 고려 때 전라도 관찰사를 하면서 전주 부성과 지금도 전주에 있는 호남제일성 풍남문을 건축한 걸 알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숭례문 상량문에 기록된 내용이다.

“[경기도지명유래집]에 그런 얘기가 나와요. 최유경이 막계 와서 농막을 치고 살았다. 그래서 장막 막자하고 시내 계자를 써서 막계 리(幕溪里)라고 하고, 농막(農幕)골이라는 지명도 아직 있지요.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때 말 막()자로 바뀌지요. 그 분이 21대조예요.”

 

그래서 막계리에 터전을 잡고 살게 됐는데, 최유경이 태종 때 돌아가지요. 그때 조정에서는 3일간 철조(撤朝:국상을 당했을 때 조회를 멈추는 일)를 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때 나라에서 사패지(賜牌地)를 하사합니다. 용인 기흥에 있는 공세리 산 1-1 번지 임야 43만 평이지요. 그 산이 왕가에서 쓰려고 잡아 놓은 명산이지요. 이 산에 임금이 돌아가면 사용하려던 명당자리가 있는데 그곳에 장사 지낼 수가 없어서 명당의 아래 자리로 내려와 최유경이 영면하게 됐지요. 최유경의 큰아들 최사위(崔士威)는 개경에 있을 때도 아버지하고 같이 출사하고 낙향할 때도 같이 아버지를 모시고 지냈지요. 최사위는 용인 공세리 산에 최유경을 예장한 후 3년간 시묘를 하고 내가 죽으면 시묘하던 여막터에 묻어 달라고, 내가 죽어서도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유언을 남기지요. 최유경은 말년에 처가인 진천에서 살다 돌아가신 후 용인에 묻히게 되고, 아들 최사위가 아버지를 모셨던 효행 일화는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의 유래가 되었고, 최근에 용인지역과 진천의 학자들의 조사, 연구를 통해 고증이 이루어졌고, 생거진천 사거용인 유래비가 세워 졌지요. 그런 이유로 용인 공세동 산 1번지에 21대조 최유경, 20대조 최사위가 묻히고......”

 

저희 19대조 부터는 막계리산에 모셔져 있었어요. 두 분만 용인으로 가신 거고 막계리에 세거하였지요.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 태조 임금 때부터 여기서 살았기 때문에 오래된 집안이지요.”

 

생거진천 사거용인 (生居鎭川 死居龍仁)은 살아서는 진천 땅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 땅이 좋다는 말이다. 최씨의 21대조 최유경은 청주사람이다. 청주에서 가까운 진천에서 고성이씨를 부인으로 맞는다. 아들 최사위가 모시고 진천을 오갔다. 그리고 용인에 묻혔다. 최씨가 전국문화원연합회장을 할 때 진천문화원에서 학술대회를 열었고, 그 이전에 용인문화원에서 생거진천 사거용인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아버지께서는 1973년에 돌아가시고 1977118, 과천 서울대공원을 건설한다는 보도가 신문에 났어요. 서울시에 수용된거죠. 지금 서울대공원 열대 동물관 자리예요. 그때 심은 편백나무, 밤나무가 아직도 있어요.”

 

1979년에 용인으로 종중 묘를 이장한다. 12개 비석은 옮겨갈 수 없어서 한곳에 모아놓고 사연을 적은 표석을 세웠다. 4-5개월에 걸쳐 이장한 사연이 비장하다. 수습한 유골을 관에 모시고 봄비가 오는 날 밤샘을 하며 부인이 시집올 때 가져온 이불로 덮어놓고 화장을 하는 날에는 함석을 깔고 불을 피웠다. 그렇게 120여 산소 중에서 60여 기를 용인 남사면으로 이장했다.

 

과천초등학교를 40회로 졸업한다. 당시 한 반에 35~40명 정도였다 반을 나눠 2반은 진학반이고, 1반은 비진학반이었다. 졸업하고는 영등포중학교를 갔다. 과천 한일중학교가 생기기 전이었다. 고등학교는 친구들과 서울공업고등학교 인쇄과에 간다. 3학년 때 남산동에 국제문화인쇄주식회사에 실습 나가서 1960년 졸업하고 사진제판이라는 전문분야에서 일하게 된다.

 

과천에서 학교 가는 길은 두 가지예요. 영등포중학교를 간 거는 그때 영등포역 근처에 이모뻘 되는 친척이 한 분이 있어서 그 쪽에서 하숙 겸 해서 다녔고, 노량진에서 자취도 하고 신길동에서 자취도 하고 마포에 고모 집에 가서 다니기도 하고 그게 안 되면 막계에서 통학을 했거든요.

 

막계에서 통학을 할 때, 장마가 들면 남태령 고개를 넘기 전에..한내 개울을 건널 때 가방하고 바지는 머리에 이고, 팬티만 입고 건너지요. 남태령 고개 넘어 가서 노량진까지 걸어가면 노량진에서 대방동까지 전차를 타고 가고 대방동에서 학교까지 지금도 한 15~20분 걸어가고 어느 경우에는 사당동에서 숭실대학교 쪽 고개를 넘어 장승배기로 해서 대방동 학교까지 걸어가기로 했지요. 남태령 너머 사당 사거리 가기 전에 채석장이 있었지요. 지금은 상당히 넓은 데 그때는 길만 있었고 좌우에 채석장이었지요. 아침에 가면 돌을 싣는 차가 있어요. 그러면 아저씨한테 차 좀 태워 주세요.’ ‘그럼 너희들 돌 실어 그럼 태워 줄게.’ 그러면 돌을 집어다 주면 태워주고......,흑석동에서 노량진 고개 넘어가는데 그 언덕 위까지 태워줘요. 노량진 가면 전차가 다니는데 검문소가 있었어요. 그래서 노량진 고개까지 돌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요. 그러니 공부가 되겠어요? 그렇게 6년을 다닌 거예요.”

 

나중에 충무로로 출퇴근 할 때는 용산까지 버스가 다녔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안에서는 종갓집, 종손이라고 고모가나서서 최씨를 장가보내려 한다. 최씨는 군대로 달아난다. 196158일 동기, 동문들이 기술병으로 지원 입대한다. 논산 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받을 때 5·16 군사혁명으로 얼마동안 술렁거렸다. 훈련을 마치고 부산 육군인쇄공창에 배치됐다. 생전 처음 갈치국을 먹어 보기도 했다.

 

1963년 복무하고 있는 부대로 어머니 위독 빨리 집으로 오라.’는 전보가 온다. 가짜 전보가 많던 시절 과천면장 도장이 찍힌 우체국관보, 집에 와보니 어머니께서 남양 외가에 가셨다는 것이다. 외삼촌께서는 어머니께서는 화성 비봉면 이모댁에 가셨다는 것이다. 그래 비봉까지 갔더니 향남면 도이리 누님댁으로 가셨다는 것. 누님댁 문 앞에서 어머니와 마주쳤다. 사실 어머니는 앓고 계셨는데 약으로도 안 되니 마지막으로 옛 홍천말 만신을 찾아가 치성을 드리시고는 회복이 되신 것이었다. 누님 댁에 오신 김에 며느리자리를 선 보셨다는 것이었다. 향남면 도이리 신부 댁에 따라가 장인 될 어르신과 인사를 나누고는 그날로 발안 장터에 나가 사진을 찍는 것으로 약혼을 했다. 그 날이 음력 77일 견우직녀 만나는 칠석날이었다. 그리고 8월 추석에 휴가 와서 사주단자를 가져가고, 음력 913일 혼인을 한다. 그리고는 3남매를 두었다.

 

군에서도 인쇄병으로 입대했지만 행정병이 되면서 병장에서 시험을 봐서 일반하사로 근무했다. 평생 여러 조직에서 일하는데 유용한 행정과 관리를 몸에 익히게 된다. 여기에 어려서 배운 한문에 더해 회사에서는 일본어 공부를 더하고,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정신교육을 받기도 하고 삼화왕관에서 근무를 하였다. 1988년 삼보해운 경영에 참여 하였다. 과천문화원과 인연을 맺은 후에는 고위정책과정 등 공부를 그치지 않았다. 90년대에는 석전대제 이수자 과정, 성균관유학대학원 지도자과정 등 부단한 자기개발 의지가 최씨를 이끌어갔다. 1966년 경화기업()에 입사해 10년을 다녔다.

 

“1976년도에 사표를 내고 농사를 지을 계획이였으나, 시작도 못하고 서울대공원 건설로 집, 전답, 600년을 살아온 모든 것과 조상 산소들, 모두 정리하고 떠나게 되었죠.”

 

1977년 삼화왕관에 입사한다. 37세에 제판계 말단으로 입사했지만, 성실하게 일하면서 빠르게 승진이 된다. 회사는 최씨를 일본으로, 영국으로 연수를 보낸다. 다녀오면 직책이 높아지고, 이장하는것과 모든 일을 정리할 수 있도록 배려 해 주었다. 나중에 회사가 두산으로 넘어가고 지금 그 자리에는 두산벤처다임이 들어선다. 지금도 삼화회라는 친목회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 당시 1977년 이제 막 다니기 시작한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서 있는데,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시던 이윤영씨를 만난다. ‘네 아버지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알거 아니냐. 이제 네가 과천 문화에 대해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하신다. 과천무동답교놀이를 배우고 지켜 나가야 된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최씨 인생 후반을 문화에 헌신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86년 과천시로 승격하고, 1990년 문화원이 설립된다. 2003년 과천문화원장이 된 후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말년을 살았던 추사를 기념하려던 과천시는 전시회를 최원장에게 부탁한다. 이렇게 추사 김정희선생 사업을 시작하면서, 일제강점기 때 경성제국대학교 교수를 지내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지츠카 치카시 교수의 일화를 알게 된다. 그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 씨는 그의 아버지를 통해서 추사선생을 알고 있었다. 2006년 후지즈카 가문이 가진 추사 관련 자료를 모두 과천시에 기증하도록 일본을 오가며 큰 역할을 했다. 정부는 아키나오 씨에게 국민훈장목련장을 수여한다. 그 공로로 최원장은 국민포장을 받는다. 2004년 추사연구회를 조직하여 운영하고, 추사학회로 발전시키며, 추사와 관련하여 학술회의, 전시회, 번역사업, 서예대전, 콘텐츠 제작, 방송, 추사공연 지원을 이어 갔고 추사박물관을 세우게 되었다. 추사기념사업회 회장을 하며 국제 학술회의, 추사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송하고, 추사 출생지 예산, 유배지 제주 대정읍, 말년을 보낸 과천에 추사 동상을 건립하면서 추사를 기리는 사업을 이어갔다.

아키나오는 최원장에게 유물을 기증하는 조건으로 몇 가지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을 다 지키지 못한 최씨는 지금도 해마다 일본으로 건너가 아키나오의 묘에 인사를 간다.

 

최씨 네는 효자집안이다. 조선중종 때 최사립이 손가락을 베고 피를 내어 아버지를 구했다는 효행과 칡꽃의 효행담, 수박 이야기로 전해지는 선대의 효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의 효자 정려판이 과천시 향토유적 4호로 지정되어 과천문화원 옆에 있다. 동네에서는 최씨 내외가 백수(白壽)의 모친을 모시던 정성을 안다. 며느리가 효부상을 받았다.

 

최씨는 한국효문화센터를 설립해 잊혀져 가는 효의 가치를 전하는 일에 몰두한다. 서양 어디에도 없는 단어 를 붙들고 산다.

 

과천향교 전교를 지냈고 성균관 부관장, 경기도향교재단 이사장,전국향교재단협의회장 등 성균관 유림들과 교분이 오래됐고, 과천향토사연구회장, 과천문화원장을 거쳐 한국문화원연합회장, 추사기념사업회장으로 문화와 함께 살아 왔으며, 강화도 마니산에서 열리는 개천대제를 28년간 집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개천절에만 단군을 생각하지만, 최씨는 수시로 강화를 오가며 국가행사에 힘을 보태고 있다.

 

(2020.11.15. 과천문화원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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