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동 최씨네 아파트 베란다에서는 관악산 송신소가 보인다.

 

저녁이면 저걸 보면서 저길 올라가면 내 고향 과천이 빤히 보이는데 하고, 앉아 있곤 해요.”

 

1973년 서울대공원이 들어서면서 그곳에 살던 이들은 집터를 내주고 흩어졌다. 최병호씨가 살던 십리골은 대공원 가장 안쪽 조절저수지 근처였다.

 

서울대공원이 들어서기 전, 청계산 막계리 일대에는 산골마을들이 많았죠. 내가 태어난 십리골 주변에는 어름골, 좁은골, 장치골..... 샘이 많아서 였나 샘말, 양지쪽이라서 양짓말, 응달이 져서 그랬나 응달말 또 피아골이 있었죠.”

 

여섯 집인가 있었어요. 집에서 과천읍내까지가 십리라서 십리골이라 했는지, 집 뒤에 승내사라는 절이 있어서 그랬는지......., 집 뒤로 산길을 따라 가면 의왕으로 용인 고기리로 갈수 있었지. 6·25 전쟁 때는 중공군이 말을 타고 넘어 오기도 하고, 수복 때는 미군이 그리 들어오기도 했어요.”

 

집에는 두 명의 머슴이 있었다. 세경을 착실히 모은 그들은 산 아래 땅을 사들였고, 나중에 정부에 수용되면서 큰돈을 만지게 되어 지금도 그 후손들이 과천에서 살고 있단다.

 

흑석동에 살던 친척들이 십리골로 피난을 오는 바람에 형님들만 피난가고, 어머니와 최씨는 집에 있었다. 중공군 인민군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처음 보는 커다란 무쇠솥을 가지고 와서 밥을 해서는 우리를 주기도 했어요. 어느 날 아침에는 감쪽같이 사라지더라구요. 그러더니 산 뒤로 미군이 들어오더라구요. 형님이 인민군에게서 받은 돈(군표)을 보이시면서, ‘이젠 이거 못 쓰는 거야.’ 하시더군요.”

 

31녀 중 막내였던 그는,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큰형님이 아버지 같았다.

 

큰형님은 대공원이 들어서면서 문원동으로 이주해서 사셨다. 지금은 조카가 있어 명절이면 모인다.

 

과천향교에 큰 제사가 있으면 인근에서 어른들이 많이 모이셨어요.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제관이 국구웅~’하시면 다들 엎드려 절을 하시던 기억이 나요.”

 

문래동에 외가가 있어서 자주 다녔다. 외가에서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아내가 독실한 기독인이었다. 전기도 없는 시골에 온 아내는 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셨고, 온 집안을 개종시켰다. 아내의 전도를 받은 그는, 이후 신학을 하려는 생각을 했고, 의왕 포일리에 3천 평 땅을 사서 신학교를 세울 꿈을 품기도 했었다.

 

제대 후 대학교수가 꿈이었던 그는, 제대 후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밤잠을 아껴가며 공부를 계속 했다. 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대학원에서는 무역학을 했다. 그리고도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국제경제학을 했다. 그 뒤에도 하버드에서는 국제경제학을 했다.

신학을 하면서 박사는 철학으로 학위를 받았지. 철학은 통계학이야. 과학이지.”

삼성물산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박정희 정부는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구호를 걸고 무역을 장려했다. 미수교 국가들을 대상으로 시장을 개척하는데 나서게 했다.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을 비롯해 러시아까지 가서 한국이 수출할 만한 상품을 찾았다.

 

상해시장을 만났어요. 수교가 없으니 신용장 개설이 안 되니, 물물교환 형태로 무역을 하자는데 까지는 합의를 했지요. 섬유수출이 우리나라를 이만큼 먹고사는 나라가 되게 만든 거예요.”

 

일본과의 거래가 많았다. 구로공단 이후 대방동 가리봉동에 공단이 생겼다. 대방동에 집을 사서 세를 놓고 있었는데, 일본 친구들이 독립하라고 재촉했다.

 

집에다 사무실을 차렸죠. 전화도 놓기 어려웠는데, 무역한다고 백색전화를 놓을 수 있었어요. 휴대전화가 나오기 전, 무선호출기(삐삐)와 차에 달아 놓고 쓰는 카폰을 가지고 다니면서 무역을 했어요. 일본친구들이 한국에 오면, 호텔에 안가고 내 집에서 지내면서 근처에 있는 거래처에 가고..... 나도 일본가면 그 친구들 집에서 지내다 오곤 했어요.”

 

한번은 수출한 제품이 클레임이 걸렸어요. 직원 6,7명이 일본 가서 며칠에 걸쳐 AS 해주고도 손해금을 현금으로 물어주게 됐죠. 당시 전자계산기가 없었고, 수동식 계산기가 있었는데, 소수점 세 자리까지 계산해요. 그걸로 계산해서 돈을 보냈죠. 나중에 일본에서 돈이 많이 들어왔다. 계산 잘못한 거 아니냐?’고 물어요. 그 후론 그들에게 더 큰 신뢰를 얻게 됐죠.”

 

가리봉동에 공장을 세워 섬유업으로 돈을 번 그는, 새로운 아이템을 찾다가 미아방지 팔찌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외 무역으로 산 사람에게 내수시장은 전혀 달랐다.

 

해외거래만 하다가 내수시장에 처음 나섰는데 많이 달랐죠. 시장도 작지만 못 팔겠다고 반품이 들어오는데, 당해낼 수가 없었어요. 번 돈이 거기 다 들어갔어요.”

 

과천향우회가 처음 만들어질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었다.

 

사업을 하면서 평생을 보낸 그는 자식들은 순탄하게 월급 받는 직장을 다니길 권했다. 큰아들 인규 씨는 중앙대 경제과를 졸업하고 중국 상해대 대학원에서 한의학을 했다. 작은아들 민규 씨는 동작구의회 부의장이다. 2022년 현재 서울시의회 의원이다.

 

때를 잘 만났어요. 은혜지요. 미리 준비한다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도 했지만..... 감사하지요.”

 

인터뷰 날을 잡고 여러 편의 글을 써뒀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어려서 기억나는 사람들 등 여러 편이 있다.

그 중 내 고향 과천을 옮겨 싣는다.

 

고목나무 느티나무 있던

남태령고개 내고향

서낭신 있던 고목 느티나무

남태령고개 내고향

고갯길 걸어 넘어가며

서낭당에 돌 던지던 신이 있다던 고목 느티나무

남태령고개 내고향

높다 높다하여 숨을 몰아쉬며

걸어 넘어가던

남태령고개 내고향

어두운 밤이면 호랑이 나온다던

남태령고개 내고향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걸어서 넘어가던

남태령고개 내고향

과거보러 한양 간다던 길목

남태령고개 내고향

, 이제는 어데론지 사라져간 고목 느티나무

남태령고개 내고향

, 이제는 그때 그 시절에 꿈에도 믿을 수 없었던

믿어야만 하는 현실에 전철이 달리는

, 이제는 호랑이도

서낭도 볼 수 없는

한양 같고 서울 같은 아름다운 현실에

남태령고개 내고향. 과천!”

 

(2021.10.21. 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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