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마을(삼부골)은 강씨네와 이씨네 두 성씨 집성촌이었다. 강씨는 1942년 생인데 호적에는 43년 생으로 등록됐다. 임오생 말띠다.

강신태 씨가 8대고, 아래로 4대가 더 내려갔다.

 

아버님 형제는 3형제였다. 큰집에서 딸만 다섯을 낳자 위로 큰형님은 큰집으로 양자로 입양됐다.

 

큰아버지는 그 시절에 양정을 졸업했을 만큼 배운 사람이었다. 과천면 시절 면의원을 지낸 유지셨다.

 

강씨네는 파주 장단에서 왔다. 콩으로 유명한 장단은 일부가 북한 땅 이었다. 파주에 남은 강씨네는 6·25전쟁 통에 불이 나 족보가 타버리는 바람에 기록이 없지만 파주에서 할아버지들이 조상 중에 과천으로 가신 분들이 계시다는 말을 기억하고 과천에 몇 번을 오셔서 과천 삼부골에 자리 잡은 강씨네를 찾으시고 가성(가계도)을 보시고 베껴 가시기도 했다.

 

파주에서 과천으로 오신 할아버지는 4대를 독자로 내려오셨다. 강씨 증조부가 3형제였다. 증조부는 조부를 양자로 들인 후에 아들을 보셨다. 그래서 강씨 조부는 세간을 내고 종가는 다른 사람으로 세우셨다. 그 아래로 강신우 씨가 종가를 지키다가 과천을 떠나고 강신태 씨가 종가 노릇를 하고 있다.

 

강씨 모친께서 11남매를 낳으셨는데 모두 잃고 다섯이 남았다. 위로 86세이신 누님이 있다. 강씨 부친께서는 36세 되시도록 아들을 기다리시다가 못 얻으시면 새장가를 드시겠다고 공언해 놓으셨다. 36세 되시던 해 겨울에 강씨가 태어났다.

큰집 장남을 대학 보내기 위해서 열 두 마지기(2,400여 평) 논을 팔아야 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한 큰집 큰형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리는 바람에 가문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대신 강씨가 집안 대소사를 챙겨야 했다. 큰집 농사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렇게 일해서 선산을 이천에 마련했다. 시향도 양자해 온 큰 집에서 지내야 하는데 안 지내서 강씨가 지내고 있다.

 

지금 시대에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만이라도 제사를 지내주면 고마운 형편이지. 우리 며느리가 윗 대조를 지내려고 애를 쓰니 고맙지. 아들에게도 손자가 안 지낸다면 시향으로 돌리라고 말하지.......손주 며느리 얻으려면 제사 많으면 안 온대. 시대가 변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말해. 자식들 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같이 살자고 말해주니 고맙지.”

 

삼부골에도 상여각을 지었지. 동네 끄트머리에다가. 초상이 나면 일할거 하다가 연장들 그대로 논밭에 두고 장사집으로 가는 거야. 가서 일을 봐주는 거야. 동네서 일을 안했어. 초상집에서 자고 머리 빗질도 안고 손톱도 못 깎게 하고......염을 해야 조상을 받게 되는 거야. 오일장을 많이 지냈지. 지관도 부르려면 유명한 사람 배웠다는 사람 찾아 파주까지도 걸어서 갔어.”

 

과천 농협이 생긴건 시흥군 과천면시절 집안네서 설립을 했는데 얼마 못가 파산했어. 그리고는 강명희씨가 다시 설립해서 초대 조합장이 됐지. 그 집이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해서 돈 좀 벌었어. 당시엔 농사 안하면 죽는 줄 알았지. 공부보다 농사가 더 중요했어. 지금은 공부가 우선이지. 공부가 그게 재산 물려주는 거야.”

 

큰아버지가 양정 나왔어. 작은집 큰형을 고대 법대 보냈는데 염보현 서울시장과 동기였지. 중부서 남산 명동 330수사대 근무하다 그만두고 미국 가서 41세에 장가들어 성공 했어. 아들 딸 약대 나와 성공 했어.”

 

옆 동네 능안말 하고 하삼포가 열 집정도 경마장으로 들어갔어. 나도 그래서 외지로 나갔다가 9단지 아파트에서 2년 살다가 선바위 87세대를 관리 해줬지. 마사회 살 때. 출장소장 강택선 도우러 가고......”

 

경마장 앞 다리 개울이 마른개울이지만 장마 지면 물 많아. 관문체육공원 앞 큰 개울 나무다리 떠내려가면 매년 다리 놓고 학교 못간 날도 많지. 6·25 때 학교에 불이나 타고나서 각 부락에서 움 하나씩 파주고, 짚 깔고, 멍석 깔고, 위에 서까래 걸고 움 속에서 여름 지내고 온온사 뒤 팔팔 낙지 있는데 산소가 있었는데 가묘였대. 그 밑엔 아들이 들어가 있었어. 그걸 이번에 시에서 샀더라고. 그 잔디밭에서 공부하고 잿더미 옮기고 벽돌 옮기고 뭐 공부나 했어?”

 

과천초등학교 모습은 빨간 벽돌이었던 생각이 나. 원지동, 노량진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이리 오고.......신동면이야. 신중국민학교, 신동국민학교가 나중에 생겼지.......중학교는 은광 과천동 사람들은 은광이나 낙양 가고.......갈현동, 문원동 사람들은 안양으로 갔지. 은광은 남녀공학이야. 이광목 목사가 세운..... 지금은 여고지. 강한석 장군도 거기 다녔지. 내 조카야. 칠촌간이야.”

 

난리 때는 충주로 갔어. 큰어머니가 딸 넷을 낳았는데, 이번엔 아들이라고 같이 가고. 마차 따라 겨울 난리에 아홉에 가서 열 살에 돌아왔지. 쌀을 싣고 지고 가고 돈이 없으니 소 팔고 잡아서 먹고 싸게 사 먹고..... 자는 것도 한데서 짚가리 같은 데나 남의 부엌에서 자고.....충주 가니까 사람들이 좋아. 우리 소 자기네 소죽과 같이 먹여주고......아버지 어머니는 안가시고 큰어머니만 아들 낳을 거니까......나는 아들이라고 살아야 한다고 보내셨지. 그런데 피란 안간 사람들이 고생을 덜했어.”

 

마지막 후퇴 무렵 경마장 광창마을 뒷산은 북한군이 우리집 바로 앞에 있고, 국군은 삼거리 본수원갈비 개천 밤나무 밭에 있었는데, 서로 포를 쏴대니 광창이 불바다가 되고.....그래서 집들을 새로 짓고........ 막계 1리는 동물원 2리는 서울랜드 능안말은 경마장으로 들어갔지. 소방서 앞 궁말까지 막계3리야. 주암2리 여기 장군마을부터 주암리 1번지가 시작돼. 광창리부터는 과천동 번지가 삼거리로 나가지.”

 

인천 상륙작전이 되고 폭격은 한강다리 쪽이 심했지. 인민군들이 말죽거리로 후퇴하면서...... 폭격으로 남태령이 지금처럼 반은 낮아진 것 같아. 서초동 원지동 쪽으로 길이 넓어. 그 도로에서 많이 죽었어. 한강다리 끊어져 북한 사람들과 같이 내려 오는 거야. 송장 지근지근 밟고 넘어왔다는 거야.”

 

인민군보다 여기 사람 더 무서워 아무개 면에 다녔어. 순경 다녔어. 이장 했어.’ 손가락질 하면 죽였어. 눈으로 못 볼 일이었어. 잡으면 벗기고 팬티만 입혀 가지고 한 사람 삽 들고 따라와. 붉은산 골짜기에서 총으로 쏴. 그리곤 가서 묻으라는 거야. 제대로 묻어? 장마 지면 그대로 떠내려 가는 거야. 은광 다닐 적에 양재천에 모래가 많았어. 해골바가지가 돌아다니는데, 공처럼 차고 다녔어.”

 

졸업을 못하고 아버지가 53세에 병환이 있으셔서 일찍 돌아가셨어. 내 나이 20세에......큰아버지가 내 사촌형 고대 법대 가는데 돈들인거로 치자면 여기 땅 열두 마지기 2,400평 팔아서 작은집 조카 가르쳤지만, 미국에 있어서 자주 못보지.”

 

제사도 내가 전부 만들어 놓았지. 시향 지내는 거 집사람이 고생 많았지.”

 

군대 갔다 와서 27세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어. 집사람 고모가 원지동 사는데 우리 동네를 잘 아니까 선도 안보고 했어. 어머니가 보시고 고모 닮았으면 볼 것도 없다하셨지. 휴가 나와서 선보고 제대한 다음 달 결혼했어. 아들 하나, 딸 셋. 아들과 손자 같이 3대가 같이 살아.”

 

논밭보다 산 가진 사람이 부자였어. 농촌부자는 일이 많아. 우리는 논이 많았어. 채소를 많이 했어. 참외, 오이, 토마토...... 서초동 법원 앞에 향나무 있지? 거기가 멍도리라고 해 고속터미널 자리엔 왜무(다꽝)밭이었지. 양회(시멘트)로 노깡(배수관) 만들어 거기서 씻곤 했지.”

 

온상하는 것도 강한석 큰아버지가 배워 와서 여기서 하다가 전국으로 퍼졌지. 그 다음엔 꽃으로..... 과천에 와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어. 집집이 가고(광주리) 같은데 싣고 나가면 차가 실러와. 영등포 노량진 흑석동에서 실으러 와 중개해서 팔아 주지.”

 

“75년에 이장을 봤어. 김도경, 강규형, 동창 장흥수 씨 등과 같이..... 오화선 씨 면장 할 적에.......그만두려니 출장소시절인데 새마을회장을 하래. 86년인가? 그걸 나중에 사단법인이 만들어 지면서 다시 초대 회장이 신학수 씨야.”

 

이장에게는 보리타작하면 한말 벼 타작하면 벼 한말씩 주고.... 돈이 어딨어 봉사지. 새마을사업을 해도 양회나 몇 포씩 주면 모래 실어다가 여자들도 대야에 자갈, 모래 이고 다니면서 길 닦고 초가집들 고치고.......박정희가 수원 벼베기대회 갔다가 고속도로에서 내려와 서울랜드 저수지 간다고 이 앞으로 지나갔어........과천은 청사 들어오면서 부터 잘못 된 거야. 유공 들어오는 자리가 밤나무단지였는데, 처음에는 이장이 애먹었지. 거기다가 뭐라도 묻을까봐.”

“1987,8년에 이장 더 하라는 걸 안한다고 사양하고 강원도 가서 택시사업 하다 왔지. 홍천에 의암운수, 공신운수 등 4개 중 2개를 했어. 돌아왔더니 동정자문위원 해 달라, 선도위원장 해 달라.’ 여태까지 봉사로 왔지. 재산은 안 늘렸어. 꾸러가지 않을 만큼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에게 대학을 다니는 것보다는 자동차정비기술을 배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일주일 뒤 아들은 하겠다고 답하고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군대 가서는 자동차정비 병과를 택해 입대했다. 강씨가 보안대에 아는 이가 있어서 편한 곳으로 옮겨주려 했지만, 아들은 기술을 배우러 왔노라고 거절했다. 아들이 제대하고 부자는 카센터를 차렸다. 든든한 기술이 있었고 발이 넒은 아버지가 있어 시청을 비롯해 인근의 공공청사 자동차관리는 도맡아 했다. 이들 부자를 이겨보겠노라고 경쟁 정비소가 더 큰 돈을 투자해 달려들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손을 들고 말았다.

 

인구는 적어도 단합이 되는 삼포부락은 체육대회를 휩쓸었다. 상장 걸어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이기면 화물차에 사람들을 싣고 동네 와서 어르신들 모시고 잔치하게 했다.

 

다른 데는 후원금이 많아 음료수 사 먹지만, 우리는 커다란 다라(대야)에 물 붓고 얼음, 설탕 먹어가며 1,2등 다퉜어. 그 다음이 홍천말 이었지.”

 

“75년 이장 볼 때는 땅을 살 때, 농지위원 도장이 있어야 하니까 땅 사는 사람들이 돈을 내고 갔지. 그 돈은 부락 예비군에 썼지.”

 

출장소 시절에 북부, 중부, 남부지소로 나눠서 체육대회를 했지.유휴지에도 메밀 몇 가마 심었어. 새마을 할 때 우리 주머니 돈 털어가며 했어. 문원동 김순자 씨 부녀회장 할 때.....오현숙 어머니 나중에 양주부시장까지 했지. 전경환이 회장할 때, 새마을지도자들 외국 구경 갈 때 내가 안가고 우리 지도자들 보냈지.”

그렇게 동네 일에 선배들이나 친구들에게 먼저 하시라고 양보하며 살았는데, 어느 새 이제 내가 맨 앞줄이야.”

 

(2020.11.9.삼포마을경로당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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