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웅씨는 1941년생이다. 인덕원 사거리(안양읍) 못미처 갈현리 297번지(과천면) 경계지역인 재경골 마을에서 태어나 으능쟁이고개를 넘어 3km가 넘는 과천초등학교를 다녔다. 안양읍 말무덤(현 관양동)에 관양국민학교가 있었으나 행정구역상 과천면이 아니어서 먼거리 과천으로 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제외하고 안양읍과 생활권이 편리했다. 방앗간이나 시장이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7남매 중 장남으로 막내동생과는 26년 차이가 나는데 그 당시에는 대부분 자녀가 많은 때였기에 대부분 식구가 많았어요

 

다섯 살 때 마을에 일본인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6·25 전쟁이 나면서 재경골 앞 수원 가는 신작로는 서울 피난민으로 꽉차서 떠밀려가고 있었어. 인산인해로 아비규환이었어.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식구를 잃어버리고 목이 메이도록 식구를 찾는 소리, 아이들 우는 소리가 대단했지. 피난민 대열에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고 어머니가 업고 가던 갓난아이를 길가 산소 옆에 버리고 가는가 하면 서울에서 장사하던 분들이 상품(머리핀, 인형 등)을 자전차에 싣고 가거나 재봉틀을 이고지고 가다가 힘에 부쳐 내버리고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많았지......그런 와중에도 버린 물건을 주워오는 이들도 있더라구......이북에서 쳐들어 왔다는 소리에 동네주민들은 그날 밤으로 피난을 가야되지 않겠느냐고 하며 재경골에서 3집 식구들이 그 밤에 청계산 이미골로 멍석을 지게에 지고 가서 겨우 하룻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이튿날 귀가했지.”

 

그 후에 우리 선친께서 어머니와 3자녀 막내삼촌과 같이 안양역에 가서 피난열차를 타려고 하는데 그때 마침 마지막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들이 후방으로 후퇴하는 열차를 타게 됐지. 워낙 피난민이 너무 많아 할 수 없이 객차 지붕 위로 간신히 매달려 타고 가는데 터널을 지날 때면 석탄기관차라 연기로 뜨겁고 냄새로 숨을 쉬지 못할 고역을 겪었지. 대전이 종착역이라 내려서 충남 논산군 광석면 득윤리 외가까지 이틀을 걸어서 갔지. 하룻밤을 잤는데 이튿날 인민군이 그곳까지 점령했다고 또 난리가 났어. 외가에서 이틀 후에 선친께서 죽어도 고향에 가서 죽자.’고 하셔서 피난보따리를 짊어지고 걸어서 과천 재경골까지 하루 100리 또는 힘들면 60리도 걷고 그렇게 12일 만에 도착했지.”

 

돌아오니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더라고. 1·4후퇴 때 전쟁을 그대로 목격했다. 재경골 가루개 옥탑골은 인민군 없이 내무서원 몇몇만 있었고 중공군들은 전부 나이가 16,7세 정도였다. 재경골 앞 모락산이 격전지였다. 밤에는 중공군이 모락산으로 가는데, 대나무방망이 수류탄 들고 가고 낮에는 후퇴하고......중부전선에는 미군들이 전선을 지켰는데 모락산 옥탑골 뒷산에서 보름 정도 전투가 심했다. 지금도 유골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경골 앞 낮은 산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보름 동안 잔인한 전쟁터였다. 모락산과 마주 닿는 산에 밤에는 인민군이 재경골 앞 언덕길에 지뢰를 파묻고 말마차를 끌고 갔다. 내무서원들이 정보원 역할을 하고.... 일꾼으로 어렵게 살던 사람들 흔히 완장 찬 사람들이 누구네 집이 어떻다고 정보를 주었다.

 

나중에 찬우물 가루개에서 색출됐는데, 구뎅이 파고 복숭아나무 몽둥이루 마구 패서 죽여서 쓸어 묻었지. 억울하게 죽은 사람 많아. 치안 문제로. 그래도 갈현리 희생자가 많지 않았던 게 그 일을 맡은 이가 아군 편이어서 사람들을 뒤로 살려내곤 했어.”

 

내무서원들이 벼 이삭를 세는데, 물꼬 있는데 잘되는데서 훝어다가 수확이 많은 걸루 치니까.... 조 몽뎅이도 잘된 거 따다가 세어서 보고하고...... 다 빼앗기고 자기들은 공정하게 한다고.... 벼 안 찧은 거 방공호에 묻은 거. 걔들이 커다란 꼬챙이나 나무기둥으로 쿵쿵 굴러봐. 소리가 이상하면 파게 해서 다 파가. 그래도 쌀은 파가지만 메밀은 안 가져가. 그래서 피난 갔다 와서 메밀만 먹었어. 중국 애들 안 가져가. 걔들 군법이 그런가봐. 부녀자 희롱은 없되, 먹는 거만.....원적(소풍) 갈 때 처럼 자루 차고 그 속에 멸치, 꽁치, 쌀 담아 다니다가 그릇만 있으면 물 잔뜩 붓고 죽을 쑤었어.”

 

중공군들이 숫자가 적으니까 밤에 꼭 싸움을 해. 호적, 피리, 꽹가리를 막 쳐. 미군이 엄청 많은 줄 알고 겁을 먹고 못 들어와. 그리고 중공군은 따콩총 숫자가 적으니까 방공호를 파고 차돌을 들고 8~10명 들어가. 딱총은 하나야. 총소리가 적으니까 차돌을 부딪쳐서 소리 나게 하지. 여기저기서 꽹가리, 호적, 피리 소리로 숫자가 많아 보이게 야밤을 흔들면 겁을 내고 미군이 못 들어와....... 그리고 우리들은 무서움이 없었어. 3,4학년 때 그걸 구경 다녔어. 어른들은 나가면 죽는다고 야단하시고......”

 

전쟁통에 자란 아이들은 전쟁터 한가운데서 놀았다. 총알이 날아오는 소리만으로도 알았다. 고씨는 총소리가 ~’ 하는 소리를 내면 멀리 날아가는 거니까 안심해도 되고 ~’ 하는 소리가 나면 근처에서 떨어지는 거니까 몸을 피해야 한다는 걸 아이들은 다 알았다고 회고한다.

 

안양중학교를 걸어 다녔다. 과천국민학교보다 멀었다. 안양중 2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 쪽으로 가려는 생각에 영등포로 전학가서 4시 반 통근차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선친께서는 기술계통이셨는데 대구로 이직하시는 바람에 고교 3년을 대구서 다녔다. 대학을 동기들보다 1년 늦게 1961년에 갔다. 2학년 다니고 63년에 입대해 65년에 제대해 복학했다. 소득이 없으니 등록금을 못내 휴학하고 대구집으로 내려가 고등전수학교 선생을 1년 간 봉직해서 돈을 모아 등록금 내고 복학해 1968년 졸업했다.

 

고씨는 2020년에 부모 산소를 다시 수습했는데, 1967년도에 돌아가신 분들의 옷은 순수한 삼베라 전부 다 썩었는데 1986년에 먼저 간 부인의 경우 큰 돈을 주고 베옷을 입혔는데도 개장해 보니 나일론이 섞여 새까맣게 남았더라고 전한다. 그러면서 고씨는 장사하는 집에서 며느리를 얻어 오지 말라던 옛 말을 덧붙였다.

 

당시 어른들은 나무를 하고 채소농사를 해서 사당동을 넘어 동지기(동작동) 예수교(이수교)로 가거나 남태령 넘어서 신림동 쪽으로 해서 쑥고개를 넘어가서 팔고 돌아오곤 했다. 제일 많이 다니던 곳이 용산, 남대문시장이었다. 아낙네들은 관악산은 나물이 많지 않아서 청계산에서 다래순 같은 나물들을 뜯어다 삶아서 죽을 지어서 광우리에다 이고 남대문으로 갔다. 남대문 근처 가정집 대문마다 들여다보면서 나물 사세요, 나물 사세요.’했다. 그걸 팔아야 곡식 같은 걸 사서 돌아올 수 있었다. 솔가지나무 전을 쳐서 가져다 팔기도 했는데 그건 부피가 크니까 나무를 잘라서 쪼꼬리(장작)를 패서 팔았다.

 

68년 풍문여고에서 국민은행 입사시험을 치르게 된다. 당시 은행원은 월급이 박해서 다른 직군에 비하면 쌀 한 가마 반값이 적었다. 입행한지 3개월 만에 그만두고 교사로 전직했다. 첫 부임이 되면서 고3 담임을 맡아 근무했다. 영등포 방직회사 다니시던 삼촌의 중매로 결혼했는데 신부는 은행원과 결혼한 지 몇일 만에 교사 부인이 되어 있었다.

 

고씨는 14년의 교직 중에 대학원 석·박사과정을 이어갔다. 후에는 한양대학교 및 연성대학교에서 재직하다가 퇴직했다. 정년퇴직 무렵 1984년 영등포에서 안양 석수3동 충훈부로 이사했다. 재직시와 재직 후에 삼성전자, 중소기업연구소, 생산성본부, 표준협회의 출강과 초청강연 등 연구활동을 하였다. 안양문화원 요청으로 안양연구소장으로 있었다.

 

1984년 무렵에 고향인 과천에서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이 있었다. 향우회장을 4년 간 맡게 되면서 외지에 나간 사람들로 구성 되었던 향우회를 과천에 사는 사람도 포함되는 것으로 넓혔다. 과천시민회로 개칭한 2012년 명칭이 바뀌었고 참여회원은 30여 명이 안 될 정도였다. 과천초등학교 출신을 포함해 과천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범위 넓혀 놓고 시민회를 알리는 홍보 행사를 열었다. 동창인 40회 장학기금도 마련하고, 시민회 창립 힐링콘서트 행사도 성황리에 마칠수 있었다.

 

(2020.11.9. 과천문화원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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