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행
법관이 되고 싶었던 40년 내무행정 전문가 “아직도 할 일이 남았다”
1월 퇴직한 조성행 국장을 만나다.
정남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리 1등을 도맡아 하던 청년은 법관이 되고 싶었다. 진로를 바꿔서 공무원이 된 뒤에도 순수하게 자기실력으로 승부를 내는 근성을 지니고 살았다. 경력을 만들기 위해서 흔한 말로 스펙을 갖추기 위해서 졸업장을 따는 일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맡은 일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전문가이고 싶었다.
사업부서가 아닌 총무,인사,회계 등 순수 내무행정 전문가로 공직을 마치며 오점을 남기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40여년을 지냈다. 전‧현직 시장들과 시의원들과 두루 잘 지낼수 있었던 것은 사석에서는 호형호제 할 만큼 개인적인 친화력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총무과장을 지낼 때는 청사관리를 하는 이들이나 관용차량 기사들과 도청, 검찰청 간부등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았고 사람을 구별하며 사귀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보이며 산 것이 많은 친구를 얻고 그로 인해서 일하는데 도움을 받았던 그였다.
특이한 경력이 많았다. 1년이면 지쳐서라도 바꿔주는 것이 관례인 공보실장을 4년 가까이 지냈다. 관선시장들이 일 잘하는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면장을 나갔다 와야 승진하는 인사 순위에서도 손해를 봐야 했다. 고향에서 면장을 해보겠다는 생각에 고집을 부려서 정남면장을 하기도 했다. 경기도청에서는 읍장을 지내고 돌아와서 국장이 되는 관례를 깨고 면장으로 나갔다가 국장으로 돌아온 특별한 기록을 남겼다.
1999년 씨랜드 참사가 났을 당시 사태 수습을 위해 진을 뺐던 일도 기억속에 남아있다. 2001년 시장이 공석인 상태에서 건설도시국장을 지냈다. “아버지 없는 집안에서 맏아들이 살림하는 것처럼 힘들었어요. 국장실을 점거하는 민원인들이 시간대별로 예정되어 있을 만큼 통탄입주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어요”라고 회고한다. 한밤중에 민원인들에게 끌려가 천안까지 따라가며 곤혹을 치렀던 조국장이었다. 아버님 제사를 모시러 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관선시대를 지나 민선시대를 사는 국장들이 겪는 어려움중 하나가 부하직원들을 다루는 기술이다. 조국장은 “더 노력해야지요. 새벽에 한 시간이라도 먼저 일어나 신문이라도 읽고 나와서 업무를 파악하고 일하면 가능한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선배들이 했던 대로 윽박질러서는 통솔 못합니다. 잘한 점을 칭찬해주고 ‘그런데 이 부분을 이렇게 하면 낫지 않겠어?’라고 말하면 금방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식농사는 성공했다는 평을 듣는다. 부인 이연희씨와의 사이에 낳은 두 딸이 모두 이화여대와 대학원을 거쳐 교사로 그리고 공무원으로 자랐다.
한세상 구름처럼 덧없는 것이지만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 조국장의 보람이다. 항상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먼저 자신을 찾게끔 처신하고 일했다. 이제 할 일을 다했다 싶은데 아직 빈틈이 보인다. 주변에서도 아직 일을 놓기는 아깝다고 지역을 위해 일하라는 은근한 압력이 부담스럽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내무행정을 이만큼이나 깊이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싶은 생각도 한다. 운명이 그에게 요구한다면 의회와 집행부간의 가교 역할을 충분히 할수 있겠다는 그리고 그런 역할이 필요하다는 사명감을 갖게 됐다.
그래서 퇴임이후에 더 바쁘게 불려 다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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