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이니까 내 뿌리를 알아야겠다. 전혀 몰랐어요. 난 족보가 없어 뿌리를 몰라. 그래 내가 각 방으로 고민을 하다가 우리 조상님이 용인이라는 걸 알고 그걸 주욱 더듬다가 내가 3대 짼데 한 200년 정도 역사는 알고 있어요. 내가 면장을 했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1887년에 태어나셔서 64년 사셨어. 살아계시면 132세쯤..... 49세에 날 낳으셨어. 10남매를 낳으셨는데 3남매가 남았지. 어릴 적에는 귀하게 자라서 말썽을 많이 부렸지......”

우리 선조가 용인에서 오셨어. 영광스럽게도 과천에서 30대 면장을 했으니까 대학을 나왔다 해서......지금은 면장이 아무 것도 아니라지만......”

초대 문화원장을 하시던 박영재 선배나 농협조합장 같은 분들이 내가 경로효친 사상이 있다고 추천해서 면장이 돼서 열심히 노인들 공경하고, 내가 교편생활도 하고 왔다 갔다 하다가 내가 홀어머니 계시니까 고향으로 가야겠다. 어렸을 땐 막내로 태어나 귀여움을 무척 많이 받았죠. 일제 강점기 우리 집이 부자였어. 집이 몇 채씩 되고 땅도 많이 사고.... 전매사업을 최초로 과천에서 하셨고 일반상업도 크게 하셨고, 크게 융성발전 했었죠. 그러다가 6·25 때문에 아주 망해버렸어요.”

 

미군폭격으로 내 역사가 그때 바뀌었죠.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때 관문리 집들이 많이 폭격에 날아가고...5형제 집이 다 타 없어지고 학교도 못 다니고 그러다가 내가 양지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2학년 때 6·25가 났는데.... 아버님이 폭격에 산화하셨어요. 저희 집이 관문리 87번지인데.... 과천을 어떻게 해서든 일으켜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지. 면장은 일반 공무원이 아니라 명예직인데.....”

 

(교편은 어디서 잡으셨어요?)

양주 풍양조씨 초대 부시장 하시던 조동세씨 본향이 진접면인데 왕숙천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어요. 거기 우리 외갓집이 있는데 내가 명색이 대학국문과를 나왔는데 취직이 안 되가지고 군대 갔다 왔는데 우리 매부가.....풍양국민학교에서 한 3년 교편 잡았어요. 우리 형은 경성제국대학까지 나왔지만 나는 뭐 공부도 못하고 집이 몰락해 가지고...막내라 공부를 안했어요. 제대하고......군대도 우리 어머니께서 막내를 힘든데 안 보내려고 과천에 귀인들이 많아가지고 병무청에 아는 사람에게 남편도 없고 자식 하나 있는데 어떻게 보내느냐고 하셔서 군대를 늦게 갔어요. 27세에 갔어요. 동창들 21살에 군대 갔다 왔는데 늦게 가서 고생 많이 했어요, 빳다도 많이 맞고.....그러다보니까 우리 친구가 윤극노 국회의원이 양지국민학교 같이 다닌 나와 동창인데...”

 

“6·25나던 해 2학년이니까...한강 끊어지고 집이 몰락 한 거지. 땅만 남았지. 학교도 못가고 그러다가 윤극노 하고 안양중학교에서 잠깐 다니다가 나중에 고등학교 가서 학교 다녔지요. 영어를 못 배웠어. 독일어만 배웠지.

우리 형은 수재였어요. 당시 과천에 동경제대 다닌 사람이 둘이었어요. 6·25전쟁 나는 바람에 사상범으로 몰려가지고...... 그땐 혼란기야 해방 무렵에 남로당이 무척 쎘어. 남쪽에선 무척 쎘어. 엊그제 4·3문제도 있었지만 민족적으로 비극이야. 나도 우리 형 잘못되고 우리 아버지 잘못되고......다 내 운명이다. 장씨네는 나 혼자 남았으니까.....운명이다 생각하고 누구 원망하지 않고.....열 다섯에 아버지 형님 여의고 누님도 우리 매부가 과천초등학교 함경북도 사람인데.....집안 참 유복했었는데 해방되기 전까지는 청진에서 방학 때면 누님과 매부가 금강산에서 내 선물 사가지고 오시고.....엊그제 같은데 열다섯에 아주 바보가 되어 버렸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형제도 없고 집이 불타버리고 아무것도 없고 어머니와 저만 남았으니 그런 비극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좌절했었는데.....”

 

나가서 이제 뭘 한다고 친구들하고 이것저것 한다고 했다가 안 되고 마침 정부에서 70년대 초에 대학교출신들 취직 못하고 그런 이들 초등학교 교사가 모자라서..... 양주에 학교에 대학교 나오고 국문과 출신이니까 초등학교 2급 정교사로 갔지요. 그때 친구들 지금은 다 정년 했지만 선생들 많이 하고 교장들 다 지냈어요.

우리 형 친구는 옛날 황철수 국회의원하고 사업도 하고 그랬는데 가까운 형이었는데 교육감도 하고 일본에 가서 외국인학교 교장도 하고 그랬는데 똑같은 일제 강점기에 나서 우리 형만 없어 졌나 그런 생각도 해요.

지금 남양주를 옛날엔 그냥 양주라 했어요. 진접면이 오지인데 매부가 학무과에 다니면서 내가 서울 외갓집에 있었으니까. 풍양국민학교에 가라더라구요. 청량리에서 풍양 진접면 가는 버스가 다녔어요. 당시엔 가난해서 애들이 밥도 못먹구 그런 애들 위해서 일했어요. 부모들이 좋아하고 나중에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부모들이 오고 그랬어요. 초등학교 교사 한 게 큰 보람이야.”

 

의협심이랄까 그런 게 있었어요. 비리가 싫었어요. 학교가 썩었어. 교장이.....옛날 교육자들이 많이 썩었었어요. 사람 차별하는 걸 싫어했는데. 소사라고 있었어요. 그 소사를 머슴처럼 막 부리는 거야. 가을 운동회가 있는데 선생들 체육복하고 운동화를 하나씩 해 주는 거야. 9명인데 소사 몫을 빼는 거야. ‘교장선생님 똑같이 해 줍시다했더니 안 된다는 거야. 버릇없이 기어오른다고 차별해야 된다고..... 그래 그러시면 안 된다고 같이 해주자고 했더니 막 야단을 치면서 안 된다는 거야. 그 길로 사표를 내버렸지.”

 

집에 땅이 많았으니까 아버지가 수원전매서 하치장을 하셨고 상업도 하셔서 땅이 많았지. 안양에 신병희 씨라는 분하고 과천에는 우리 아버지가 하셔서 내 대에까지 내려왔으니까. 일제 강점기 나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5형제가 집도 짓고 그러셨으니까. 나는 막내라서 공부도 안했어요. 그래 우리 형한테 혼이 나곤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10남매 낳아 다 죽고 셋 남으니까 불안하셔서 금지옥엽으로 키우셨지.”

어머니께서는 어려서부터 날 데리고 관악산 연주암엘 다니셨어요. ‘너는 부처님 자식이다하시면서 연주암 역대스님들 열심히 공양하셨어요. 연주암에서 누가 내려오셨다 하면 모시고 올라가실 때도 극진히 모셨지요. 불심이 대단하셨어요.”

 

송원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 직무대행을 하시고 관악산 연주암 주지로 오셨는데 마침 내가 75년에 과천면장을 할 때야. 박정희 대통령할 때 아주 무서울 때야. 도저히 안 될 때야. 우리 형이 사상범으로 몰려 연좌제 때문에 안 된다는 걸 중학교 때부터 알아요. 또 자랄 때도 설움 많이 받았어. 형제도 없고 아무도 없는데 비극이었어요. 그러다보니 국가의식이 생겼고 도덕적인 기준도 갖게 됐고 열심히 살아왔어요. 우리어머니도 절대 그러면 안 된다. 그러셔서 돌아가신 후에도 절에 모시고 송원스님이 여기 주지스님 하시다 불교가 분파가 되가지고...영부인도 불교신자셨는데 박정희 때.....중이라 하지 말아라 스님이라 해라. 서양역사 2백 년 밖에 안 되지 않느냐? 불교 2360년이란 세월 동안에 한국엔 기독교신자는 없었어. 전부 불교신자였지. 네 종교나 남의 종교나 욕하지 말아라.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셨어요. 내가 빨갱이 아들인데 연좌제를 봐서도 내가 어떻게 면장이 될 수 있느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너는 착하게 살아라. 어렸을 때는 버릇없이 자랐는데. 자라는 과정에서 윗사람 공경하고 이웃들 가깝게 지내라하고 기르셨어요. 동기간도 내가 땅이 많았기 때문에 사촌들 다 도와주면서 친구들과도 잘 지냈어요. 사람들이 야 참 쟤는 됐다이러면서 내가 효자상도 탔지요......의료보험조합(지금의 국민건강보험공단) 대표이사로 있을 땐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수 백 명이 모여서 경기도 대표로 뽑혀 가지고 상을 받았지. 당시에 노태우 대통령이 ‘90노모를 업고 설악산에 올라갈 정도로 잘 모셨느냐?’고 그러셨어요.”

 

어머님이 일제 강점기에 매부가 청진사람인데, 6·25전까지는 자주 오곤 했는데 전쟁 나면서 딱 끊어져 가지고 어머니가 딸 보고 싶다고 그러셔서 내가 차를 운전할 때니까 차로 모시고 관악산에는 차가 못 올라가니까 월정사로 가서..... 경내에 못 들어가요. 주지스님을 면담해서 내가 과천 사는 아무갠데 관악산 연주암 신도다. 95세 노모를 모시고 왔는데 누이가 있는 금강산 쪽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더니, 차로 모시고 올라오라고 허락하셔서 경내까지 가서 업고 법당에 모셔서 거기서 절을 하셨죠. 무척 좋아하셨죠. 그리고 얼마 있다가 운명하셨는데 송원스님이 우면산 천봉사 정각사 주지로 가셨어요. 어머니를 거기에 모셨어요. 49제를 지내고 100제를 또 지냈어요.”

 

과천 면장을 5년 했어요. 그땐 2년 못 갔어. 그때는 당시에 망해서 아무것도 없었는데 땅이 있었으니까 토지개혁으로 나가고 해도 남은 게 많았어요. 내가 낭비를 했어도 남은 게 있었어요. 그런데 친구들 하고 친척들 도와주고 사기당하고 해서 그 많은 재산을 다 없앴어요. 사십 전에 면장, 의료보험조합 이사 지내고 사회봉사도 많이 했어요.”

 

의료보험조합 대표이사로 연임을 하고 정년했다. 마지막 임기 중에는 감사를 받았는데 감사관들이 이렇게 깨끗하게 운영하는 곳은 없었다며 돌아갔다고 따님이 회고한다.

 

로타리클럽도 만들고 과천율목회도 창립했어요. 율목회는 어떻게 하게 됐느냐면 그때부터 고향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어떡하던지 내 뿌리를 지켜야겠다. 당시에 류택희 총장(나중에 과천여고가 된 한일중학교 창립자)이라 던지.... 당시에 이기동 장군이 안양에서 군인들 파티를 한다고 오라고 해서 갔는데 과천에 갔다 왔는데 과천이 형편없는 촌구석인데 정부에서 길을 내고 해서 참 좋아졌다하길래 듣기 거북해서 술을 먹고 있는데 당시엔 거기에 아무도 대꾸를 못해요. 시장, 군수들 다 있어도...... 그래 내가 이의 있습니다.’ 했더니 깜짝 놀래지. 현풍설이라고 안양교육장이 앉으라고 말리길래 아니 내가 뭐 죄졌어? 하고는 장군께서 과천을 위해 일하셔서 좋아졌다고 말씀하시는데 과천이 거저 생긴 게 아닙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내 그런 애기를 했어요. 과천은 민비 아시죠. 명성황후. 그 시아버지가 과천현감을 했다 그런 사실을 아무도 몰라요. 난 그런 과천에 자부심을 갖고 있고...... 근데 지금 과천이 한일합방 때문에 퇴락하고 남태령 교통 불편 때문에 정조대왕 능행차길도 저쪽 시흥길로 갔잖아요. 춘향사 같은 역사 보면 다 나오잖아요.”

 

전두환이가 와서 그만두라 해서 과천면장 그만두고 이·취임식 할 때 시흥군정자문위도 주욱 했어요. 처음부터 내 뒤에 면장이 장대흥 인데 안양 시흥군청에서 이임식 대표로 내가 가서 답사를 해야 하는데 ‘70년 만에 과천이 빛나고 있다. 일제가 와서 과천을 촌구석으로 만들어 놨지만 과천이 사실 대단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제야 빛나고 있다뭐 그런 애기를 한 적이 있어요. 과천이 시로 승격이 되고 시흥군이 그대로 있을 때에요. 안양은 읍이었고.....”

 

참 돈 많이 썼어. 시흥군 경찰행정자문위원장 좀 해달라면 과천에서 아무도 할 사람이 없었어요. 사업가가 없으니까......과천경찰서 막 시작할 때 서장자리 만들어주고 그랬으니까..... 그래도 난 남의 돈 착취해서 쓴 게 아니라 내 돈 써가며 일했으니까.....하다못해 과천시에 제1회 가을체육대회를 해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지. 내가 시정자문위원장 할 때에요. 시 예산 2천 몇 백만 원 밖에는 과천에는 기업체가 없잖아요. 그래 우체국장 1만원, 농협장 2만원, 교장들 셋이 1만원씩 뭐 이래가지고 행사를 물르자 이럴 때 오백 만원인가를 냈어요. 당시에 오백 만원은 큰 돈 이야. ‘장면장이 큰 돈 냈다이런 소릴 듣는 게 보람이었지. 차도 좋은 걸 탔어. 아버지는 걸어 다니시면서 만든 재산 가지고 막내아들이 잘 쓰고 다녔지..... 과천시도 돈이 없었어요. 면사무소를 공무원들 7~8명이 했어요. 그래도 진심보국이라고 충성심들이 있었다구. 지금 같은 시대엔 맞지 않는 애기지만...그땐 매를 맞고도 대꾸하질 못했어요. 나도 맞아서 이가 부러져나가고 그래도.....그때는 모내기철이면 물 푼다고 전부들 나가서 일하고 그러다가 물이 터져 나가면 면장 징계 한다고 진짜들 고생했어.”

 

“1980720일에 그만 뒀는데 시흥군에서 모범면으로 상을 탔는데, 그땐 시흥군 과장들이 과천 장면장한테나 가야 얻어먹는다 할 때야. 다른 면장들이 자기 월급 갖고 어려워할 때라. 보사부 같은데서 조사 나오고 한다면 저기 영동에 가서 술 한 잔들 같이하고 그러니 군에서도 과천가야 얻어 먹는다 하니 맨날 과천이 일등이지. 그래도 내 돈 갖고 했으니.....몇 푼 먹고 그랬으면 진즉에 끝났지. 반대당에서도 약점을 잡을래도 돈 안 먹었으니 찾을게 없지. 정직하면 된다 그랬지. 어려워도......”

 

홍수도 크게 났어요. 관문리가 다 떠내려가고 사람들이 죽고 안양, 군포가 다 잠기고....관악산이 원래 돌산이고 소금강이라 했어요. 자하동천이라 해서 자하동이란 정자가 있었죠. 이조시대부터 선비들이 놀던 곳인데 장마에 다 떠내려갔지요.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을 수 있는 건데..... 어릴 적에 어머니께서 이게 장사바위다 뭐다 그러셨는데 그게 다 없어졌어요. 관문리 집 수 십 채가 떠내려가고 없었으니까..... 우리 집도 우물이 없어지고 위에서 흙이 내려와 길이 없어지고 그래서 고통을 많이 받았어요.”

 

주택공사에서 출장소 있을 때 처음엔 지원사업소. 경기도에서 과천출장소. 광명출장소는 크니까 공무원도 많고.... 농촌일은 똑같이 많아 고생 많았어요. 지금 공무원들은 수 백 명 되는데 시대가 다르니까.... 보람은 있어요. 한 점 부끄럽지 않다. 누구를 매도한다든지 못된 짓 하질 않았다. 자부심 갖고 사는데.....어언 팔십이라니 팔십까진 살 생각도.....우리 형이 스물다섯에 떠났으니 날 안 낳을 건데 어머니 아버지께서 열 몇을 낳았는데 죽으니까 너는 연주암 신령님이 점지하신 부처님 자식이다. 은연중에 쇄뇌되어 조심스럽게 살게 되지요. 어언 84년이 됐어요.”

 

왜정 때 요시무라, 요다 선생들 오면 우리 집이 잘 사니까 집 한 채씩 주고.....과천초등학교 지역에 살았는데 아버님이 교육열이 대단하셔서 사촌까지 교육을 해야 된다 그러셔서 우리 형 대학 보내고......할아버님 때 과천 오셔서 족보가 없어.”

부친은 돌아가셨지만 땅이 많으니 사방에서 브로커들이 달려들었다. 등기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으니 5년 선배 하나는 시흥군 장 수자 학자 이름으로 된 문서를 만들어서는 자기 이름으로 땅을 돌려놓았다. 다른 선배들이 장흥수 아버지 명의인데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고 나서 주어서 소송을 통해 되찾기도 했다.

 

시 승격될 때는 정당 관계로 지구당 부위원장도 했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대단했어. 경찰들이 와서 인사하고 일제 강점기 잔재야....... 면장할 때 5,6년 형님들이.... 박영재 원장 춘부장 박시영 공화당 위원장 하시니까 친구아버지...... 대학 나온 사람이 없으니..... 군대도 대학 나와 군대 늦게 가 고생 무척했어........ 출장소 때부터 활동했지. 역대 출장소, 지원사업소장들 도와주고..... 시청 댕기면서 시가 승격하면서 2대 시정자문위원장, 법원 서울지방법원 시흥군 갱생보호위원, 수원지검 검찰 청소년보호위원 별 것을 다했어요. 그땐 전부 돈 들 때야. 공무원들이 경찰이고 뭐고 다 돈 들 때야. 아버지 때문에 과천을 위해서 돈을 쓴 거지 보람은 있지요.”

 

지하철이 처음 개통될 때는 역명을 정하는데도 장회장이 있어야 했다. 함께 일하는 이들이 협조적이지 않을 때면 나는 빠질테니 너희들이 잘 해봐라하고 호통을 치고 두문불출하면 장회장님을 모셔와야 일이 된다며 찾으러 다니곤 했다는 후문이다.

자살을 네 번을 기도 했는데 나무가 두 번 부러졌어요. 사변 나고 나서 전투가 열 번이 났는데 한 번도 안 빠지고 참가한 거야. 그러니 열 번 넘게 살아 난 거지. 어머니 말씀대로 부처님 가호를 받아서 어머니 업고, 생질까지 업고 중학교 다닐 땐데........ 화성군 조암까지 갔는데 얼마나 어려웠는지........아버지가 손을 쓰셔서 12연대 연대장 차를 타고 갔는데 내리라고.... 부산 간다고 해서 수원 가서 내리라고 그때부터 가장이 됐지 아버지는 집 지키시고..... 어머니와 혼자된 형수가 딸 하나. 다섯 달 된 딸이 마마, 우두 맞고 그랬어. 금지옥엽으로 키웠는데.....사촌누이네가 애들 넷인데 하날 두고 가라 그래. 지금 일흔두 살이야. 다섯 번 왔다 갔다 했어. 동문 밖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데......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 1사단 이동하라고 했다고 부대장만 알았지 어떡할 수도 없고 행길에서 내려간 게 동문 밖이야. 헐어진 동문 모습이 보이더라구......지금은 신도시 된 경기도 경찰서청인가 그쪽 이었어. 그 집에서 다섯 번을 조암까지 왔다갔다 죽을 고비 무척 넘겼어. 열다섯에 아들 노릇한 거야. 형수 친정이 영천인데 조암 부자집이었더라구. 어린애 업고 바로 또 어머니가 수원 계시니까 교통사고로 다리 다쳐 걷질 못하시니까...... 수원 오는데 일주일........ 폭격이 심했어. 시체들 많이 봤어.....조암에서 아버지 모시러 과천 왔는데 과천 도착하기 나흘 전에 돌아 가신거야.”

 

연기가 세골 문원동쪽에서 보니까 연기가 나더라구. 초가집은 금방 타는데 기와집은....... 피란 가다가 만난 동네사람이 도련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그래. 집 앞에 시체가 넷이 있더라구. 어려서도 육감이...... 앞니가 없으셨어요. 근데 이가 다 있어 젊은 사람이야. 무섭구 그런 게 없어. 깜깜한 밤이야. 엉엉 울구 앉았는데 사촌이 시신이 지하실에 있다고 그러더라구. 엿새 됐다 그러더라구 그래서 그날을 기억해 제사를 지내.....”

 

그날은 유난히 놀이 붉었다. 따님의 기억으로는 저녁놀이 붉은 날이면 아버지는 할아버지 기억에 아파하셨다고......

겨울 엄동설한에 일사후퇴 때 무척 추울 때야. 황해도 사람들이 과천에 무척 많이 왔어. 우리집에도 무척 많았지. 다 피란가고 없지요. 많이들 죽었어. 큰길 청계산 저 뒤로 해서 열다섯 나이에 산꼭대기로 올라갔는데, 며칠을 밥을 굶었는데 외딴집에 할매가 손주하고 메밀을 갈고 계셔. 어둑어둑한데....... 과천은 이리가면 된다 그런데 전쟁 중이라 과천에 난리 났다는데 거길 왜 가려고 그러느냐셔. 그래서 나좀 자게 해 달라 그랬지. 메밀 가시는 걸 내가 갈게요했더니 메밀 간 걸 끓여서 두 양재기 만드셔서는 할머니는 국물만 자셔. 할머니 이러시면 안 되요 그랬지, 나중에 찾으려다 못 찾았어. 자다가 먼동이 밝았으니 저 산으로 가면 저 너머 청계산이라 그러셔서 그렇게 찾아왔어...... 주암에서 부터 걸어서....... 수원 역전에는 폭격을 어떻게 하던지 말할 수 없었어. 운명이 긴 거야. 팔자지.”

 

피란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공군에 포로가 된 일도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잡혔는데 통역병에게 과천에 사는데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이다라고 사정을 얘기했지만 하루였나 이틀이었나 어린 중학생을 잡아두고는 놓아주지 않더란다. 나중에야 풀려나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뒤였다.

 

(2019.4.4. 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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