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희씨는 1938년 새술막에서 태어났다. 과천초교 39회. 지금 kt 건물자리 근처가 생가 터였다. 전씨는 “집 앞 개울에서 친구들과 멱 감고 놀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과천에 살았다. 아버지는 청계에서 분가해서 과천으로 오셨다. 형제는 7형제 중 네 째로 났다. 동생 둘인데, 막내는 죽었고 바로 밑에는 서울에 살고 있다.
3학년 때 전쟁이 났다. 중학교는 과천에서 다니다가 영등포로 갔다. 60년대 초 서울로 나갔다가 94년 이사 왔다.
“1단지 지금 사는 집이 그땐 공터였는데...... 93년엔 집이 많지 않았지. 고향에 살고 싶어서 2단지 공터가 있다길래 집이 몇 채 있길래 94년 8월 20일 집지어 이사 왔어. 상도동에서 살다가 이사 하던 날 비가 많이 왔어.”
옛날에 과천에서 출퇴근 할 때는 버스가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 세 번 다녔다. 시외버스도 없고 관문에서 안양, 시흥, 노량진 돌아서 갔다. 한 대는 반대로 돌고......겨울이면 차가 고장나면 엔진이 자주 꺼지곤 했다. 꺼지면 내려서 젊은 애들이 스타키(스타트모터)를 돌려야 했다.
처음엔 철도공무원이 됐다. 노량진 중계사업부에 근무했는데 60년 대 5만원에 3천 원짜리 집을 얻어 살았다. 당시 월급이 8,000원. 그걸 박정희가 임금을 올린다더니 87년도에 12,000원, 15,000원까지 갔다. 72년에 그만뒀다. 장학금 보너스도 없었다. 연가 안쓰고 돈으로 탔다. 희망도 없고 자녀교육을 어떻게 시키나 싶어서......
전씨는 자동차학원에서 3주 교육받고 면허를 따서는 기업체 대표 운전기사를 하기도 했다. 이민을 가려다가 월남전이 나는 바람에 못갔다.
“다른 친구가 찾아와 과일장사 해보자 그래. 중앙선 타고 상주에 내려갔어. 철도공무원은 퇴직해도 얼마동안은 열차는 공짜니까. 사과를 사다 팔았는데 둘이서 열 짝은 가져왔나. 나무궤짝으로 열 짝인가를 가져왔어. 가져온 날이 장날이라고 폭락이네. 거기에다 비까지 왔어. 나중에 이십 짝을 가져왔어. 근데 산지에서 비싸게 가져오면 싸고......장사할 게 아니다. 그만두고 말았지.”
“상도동에 살았는데. 무허가 벽돌집. 거기가 양녕대군 땅이 넓거든. 거기 막 짓는 거야. 후배가 ‘하나 사라.’ 그래서 거기 살았는데 누가 ‘을지로로 나오라.’ 그래. 갔더니 충청도 사람이 소장이래. 보험영업을 하면 개인사업이라고 하라는 거야. 언변이 없어 못한다고 그랬지. 교육시켜 준다고 그래 보험회사는 다 도둑놈으로 알고 있었는데......철도에서 나와서 동방생명 퇴직금 보험금 달랬더니 하나도 안주는 거야. 만기 되서 정년 되야 준다는 거야. 그래 한 푼도 못 받았어. 그래 도둑놈인줄 알고 있었지.”
“소장이 여기는 생명보험이 아니고 손해보험이라는 거야. 기업에서 생명보험 하는 여자들은 재수 없어 안 만나고 그래 남자들만 있다는 거야. 회사로 다니면서 명예롭고 좋다는 거야. 안 간다는 걸 며칠 후에 친구와 소장이 다시 찾아왔어. 나가 보니 한 달 다니는 동안에 남들 하는 거 보니까 한 달 수입이 우리 공무원들 1년 봉급보다 많아.”
영업은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기업에 전화해서 힘센 기관이라고 하고는 화재보험 들었느냐고 묻는 거였다. 대연각 화재로 2백명이 죽고 나자 정부가 나서서 화재보험을 들게 했다. 수입이 좋았다.
“영업 원칙이 첫째가 ‘친인척을 찾지 말라’ 그래 99.9% 거절이래. 화재보험은 전화해서 ○○청인데 보험 들었느냐고 사람 보낼 테니 상담해서 보험 들라고 하는 거지. 그런데 안 되더라고..... 변두리 공장 시흥, 상수동, 문래동 공장 많은 데를 갔지. 갔더니 명함 받지도 않고 던져 버리더라고......”
“하루는 큰 기업체를 갔더니 벽에 ‘하면 된다’고 써 붙여 놨길래 여기 사장은 어떻게 이렇게 큰 회사를 일구셨느냐고 했더니 그 표어를 가리키더라고 ‘저거 보세요’ 그래서 ○○방직 하고 몇 군데를 찾아갔어요.”
“○○라면 도봉동 공장. 비포장도로에 비가 와서 황토 흙이 묻어 가지고 수위실에 들어가서 ‘이○○ 회장이 보내서 왔다’고 했더니 들어가라고 그래. 마당 거쳐 들어가니 입구부터 카페트를 깔았더라고. 흙 묻은 걸 화장실 가서 닦고 말려서 들어갔어. 신을 신어도 되는지도 몰랐지. 처음 봤으니까 누가 밟고 들어가길래 나도 들어갔지. 비서실 거쳐 회장실 가니까 저 끝이 안보여. 으리으리해 주눅이 들어 어깨가 처지더라고. 키가 작은 이가 걸어와. ‘이00 회장이 보내서 왔다.’하니까 놀래. 이 회사가 성실하게 커서 가서 얘기하면 도와줄거라고 그랬더니 이회장님이 날 어떻게 아시느냐고 그래. ‘잡아 가지는 않겠지.’ 하고 앉아 있었더니 정부에서 보험 들라기 전부터 공장은 다 들었고 자기 집 들겠다고 경리부장 부르더라고......”
“○○방직에서도 들고 나서 ‘소개해 주십쇼.’ 했더니 어딜 찾아가래. 호박넝쿨처럼 뻗어가. 큰 데만 한거야. 회사 랭킹 1위였어. ○○화재야. 지금 한화가 ○○화재야. 월말에 수당이 대봉투로 한 가득이야. 얼만줄 몰라. 집에 가져 갔더니 집사람이 ‘도로 가져가라고. 어디서 뭘 했길래 이 많은 돈을 가져왔느냐.’고 그래. 집사람을 영업소장에게 데려가 확인까지 시켰지.”
“6대 도시 외에는 보험을 안 받았는데, ○○화재만 영국 보험회사에 재보험을 들었어.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거야. 한 1년을 그랬어.
남대문시장엘 가니까 의류 같은 데는 한 두평 얼마 안되는데 1억, 2억씩 들어. 위층 창고에 가면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원단이 가득해. 77년도에 연납보험료가 2,3백만원이야. 보험금 1억 2억이고 어음도 받았어. 현금이면 12% 떼고 입금 시키는 거야. 거기서 반을 먹는 거야. 3년이면 80%만 줘. 3년, 5년 두 가지야.”
“시흥 갔더니 공단에 강 모 라는 토박인데 공단 입구 삼거리 일대가 그 사람 땅이야. 빌딩 일곱 개를 지었어. 사무실에 갔더니 보험의 보자도 얘기하지 말라고 그래. 가면 고스톱치고 장기바둑 두고 그러길래 한 달에 2,3번 들러 다방에다 커피를 다 돌려. 한 1년 다니니까 노인네가 물어 봐. 불이 날 뻔 했었대. 거기서 6개 건물을 했어.”
“동대문에서는 제일 어려운 게 호수가 있는데 찾아가질 못하겠어.
그래서 보험 받을 때 가보면 책상 만한 금괴가 있는데 위에 뚜껑 열고 돈을 꺼내서 세어 가라고 그래. 서서 영수증 끊어주고. 청약서에 사인도 안 받았어. 한 달 동안 코피가 나도록 돌아 다녔어.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몰랐어. 날아다니는 것 같았지.”
“그렇게 1년 넘었는데 관리소장이 하고 싶었어. 5년을 하면 시험 봐서 영업소를 내준대. 총무부장을 만났어. 그때 마침 소장이 공석이야. 대리나 과장을 타사에서 스카우트 해주느니 나 대리만 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펄쩍 뛰어. 부장과 술 먹다가 정종을 끼얹었어. 사람을 몰라본다고. 그랬더니 중부영업소 전병희는 공갈협박을 한다고 소문났어. 영업이사가 듣고 불러 이력서와 사진을 가져오래. 그래 을지로 허바허바 사진관엘 갔어. 빠르면 이틀 아니면 삼일 걸려. 이틀 후에 가져가니 사업계획서를 써오래. 7,80명 되는 영업소 운영 계획을 알리가 있나? 먼저 소장이 면목동 살았어. 집에 가서 만나서 코치를 받아서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갔어. 그걸 보더니 ‘많이 해봤나봐.’ 그러더라고. 대리를 준대. 사원 3급 20호봉이 말단이야. 그래서 ‘늙어 정년 할 때 대리 다느냐고 지금 안주면 그만 둔다’고 했지. 과장 주려면 돈이 많이 들고 하니까. 3급 10호야 사령장이. 타사로 간다고 그랬더니 결국은 1년 뒤에 대리를 달아 주더라고....”
“전국에서 항상 상위권이야. 회사에서 나 모르면 간첩이야. 그렇지만 소장이 되니까 내 수입이 줄어드는 거야. 원래 내근직은 영업하면 안 되는데 나는 영업을 겸해서 했어. 토요일이면 간부들하고 어울렸어. 주말 저녁마다 같이 놀면서도 실적은 상위권이었지. 전국 소장들 분기별회의 가면 사람이 반은 줄어 3,4개월 실적부진이면 아웃이야. 직원들이 잘해줬어. 잘 먹였어. 운영비 나오면 다 썼어. 그리고나서 어려워지면 직원들한테 말하면 목표를 맞춰주고 그랬어.”
“1978년에 6백 평을 평당 5천원에 동생과 같이 샀어. 7,8년 뒤에 가락시장이 들어선다고 그래. 수용된대. 팔아서 나누자는데 땅을 산 사람이 ○○부 국장 하던 삼일빌딩 상임이사라 그래. 그 부인이 해약해달래 중도금 까지 받았는데 돌려 달래. 사정하다 안 되니까 남편을 만나달래. 갔더니 키 작고 베트콩 같은 사람이 내게 부동산 투기하는 사람이냐고 그래. 그 옆에 앉은 사람이 조사 좀 해봐야겠다며 더 이상한 분위기를 잡아. 모 기관 사람이라는거야.
그래서 그럼 땅 산 부인도 투기 아니냐고 당신네 청장이 나 같은 사람 내사하라고 그랬느냐고 쏘아 붙이고 일어서 나왔어. 나중에는 중도금 절반을 돌려주기로 했지. 보지도 않고 주소만 가지고 사고팔았던 시대야. 그 돈으로 몇 군데 땅을 사고 팔았지.”
93년에 55세 나이로 퇴직 후에는 촉탁직으로 근무를 1년 더 할 수 있었다. 3년이 지나자 회사는 촉탁해지를 통보한다. 전씨는 영업 1위의 기록을 앞세워 사장과 담판을 지었다. 모두 5년간 촉탁직으로 일했다.
“과천문화원이 별양동에 있었고 박영재 초대 원장 계실 때 초대 멤버야. 향우회 초대회장 하실 때 경찰서 옛날 시청 자리서 발족했지. 나까지 9명이 발족했지.”
(2020.11.9. 과천문화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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