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마골이란 이름도 내가 지은거야. 처음에 하1리였었지. 노인회장 할 때......행운길이란 이름은 집사람이 이 길 다니는 사람들에게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다 해서 행운길이라 지었지.”

 

서상희 씨보다 6년 아래인 조씨는 남태령 미군부대 자리서 두 집이 살았다고 기억한다. 두 집 다 밤나무를 길렀고 집이 미군부대로 수용되면서 삼거리로 나와 조씨의 형이 묵집을 했다.

 

대로변에는 전부 가게였고. 새마을금고 한 모씨가 상남소리사라고 라디오가게 했고......그 옆에서 이 모 회장님은 구멍가게를 했고.....또 그 옆에 호수미용실이라고 해서 미용실이 있었고......그 옆에는 형님하고 하던 남강부동산이 있었어.”

 

시흥군 과천면 하1리에서 1937년에 났어. 2리가 뒷골 3리가 광창마을.......5남매 중 막내야. 아버지가 천안 풍세면에서 과천으로 오셔서 터 닦고 밤나무 농사하고.....일본 왜정 때 비행기가 뜨고 그러면 지하로 숨고 그러던 기억이 나. 6·25 때 그 인민군이 과천국민학교로 들어가는 걸 보고 비행기가 폭격을 해서 국민학교가 탔어. 그 전에는 강습소가 있었구.....국민학교는 전쟁 후에 다시 지었지. 초등학교가 커서 우면동, 양재동, 말죽거리, 사당동까지 과천국민학교로 왔지. 졸업하고는 농사를 지었지.”

 

나무장사 많이 했지. 새벽 1시나 2시에 지구 사당동 가서 팔구 돌아오면 한 2,3시 되면 어머니 아버지가 해 놓으면 또 지구가서 팔구......우리는 밭농사만 지었어도 먹고 사는 게 걱정이 없었어. 콩 팥 수수 조 이게 많이 생산 되니까. 그러니까 가을에는 밤 팔아서 쌀 사서 먹고 그랬지. 밭농사 많으니까 잡곡이 많아 가지고 지내는 건 걱정 없이 지냈지.”

 

“21살에 6사단 금와 사창리에서 군대 생활을 했지. 제대하고 29세에 26살이던 김혜자와 결혼했지. 형수가 천안 광덕면 색시라고 소개해줬어. 아들 셋, 딸 하나. 큰 아들은 낳자마자 죽고.”

 

술집이 이 동네 색시두고 술장사하는 집이 한 일곱 여덟집 됐었어요. 양색시도 집집마다 둘 셋씩은 다 달았지. 지금 도로 위에 술집 이쪽으로 있었고....수원옥이 있었고. 도로 위쪽으로 해서 본수원갈비 쪽으로다가.....쭈욱 내려가면 네 집이 있었고.....빅토리아오토바이 자리가 원일여관이라고 그 여인숙 같은 여관이 있었고 그 다음에 지금 이 모씨네 집 자리가 댄스홀이 있었고......그때 홀이 두 군데가 있었어. 등기소 자리 그쯤에 약국도 하나 있었어. 술집 맞은 편이 삼원여객 종점이었지.”

 

읍내보다 미군부대 있고 그러니 더 번화했지. 사당사거리는 장마만 지면 물이 들어와서 배를 타고 나가서 이수 있는데로 나가서 노량진으로 가고 그랬지. 선바위는 벌판이었고......안양경찰서가 하나있고 과천파출소가 있었는데 지서. 지금은 경찰서가 생기구 그랬지. 그러니까 과천 우면동 막계리 일대에 술집이 많고 여기 색시들이 많잖아? 술 먹으러 오면 우리한테 승인을 맡아야 먹고 가고 그랬어. 우리 술 한번 사 주고 그 다음에 술 먹고 놀러 가고.....그러니까 여기 사람들 건드리질 못 했어. 막계나 우면동, 갈현동 쪽에서 건드리질 못했어. 서울을 가려면 여기를 거쳐야 가니까 건드리질 못했지.”

 

지금 요기 서울로 가는 길에 지금은 도로를 했는데 그게 다리가 끊어졌단 말이야. 홍수가 나가지고. 집들이 여기는 괜찮은데 이 아래루는 많이 떠내려가고...... 어렸을 때 학교 갔다 오다가 보면은 장마가 져가지고 돼지가 떠내려가서 개울에 죽어서 가라앉아 있는걸 보구 그랬거든....그러니까 지금 과천에서도 중학교쪽 올라가는 길에 하천이 있어 그 하천가에 있었던 집들은 다 떠내려 가고 그랬다구 홍수에 비가 많이 와 가지고.....”

 

우리 형님이 사냥을 많이 하셨어. 서울서 포수들 와서 몇 일 씩 묵고 그랬어. 그 미군부대 자리 살 적에.....그러면 산돼지 같은 것도 잡아가지고 그랬거든.....”

 

조씨는 집 뒤 산에서 돌을 캐다 팔기도 했다. 막계저수지가 생기고 양재천 물길이 달라지면서 장마가 지고나면 모래가 쌓였다. 조씨는 면장에게 말하고 그 모래를 내다 팔았다.

 

지금 사당동 가면 이수교 예술인 마을이라고 있어. 그 축대를 다 내가 쌓은 거야. 거기 모래 자갈 돌을 내가 다 들이대가지고 차루......”

 

미군부대에서는 하루는 보니까 휘발유 통이 철조망 바깥에 죽 나와 있더라고. 휘발유가 들었나 안들었나 확인을 해야 될 거 아니야? (손등을 가리키시며) 이 흉이 그냥 있잖아 지금 그때 드럼통이 폭발해가지고 다친 거야. 드럼통에 휘발유가 폭발하니 소리가 좀 커. 부대에서 미군들이 죄 뛰어나오고 사람 손이 피가 막 흐르고 피바다가 내가 아주 난리가......부대로 데리고 들어가 의무병한테 치료를 시키고 그때부터 미군부대를 내 집처럼 들락거린 거야. 미군들이 집에 와서 치료해 주고 그 바람에 6.25때 총 맞은 환자들 여럿 고쳐줬지.”

 

1987년 조씨는 주암리 농업용저수지에서 유료낚시터를 연다. 마을에서 회의를 해서 외지인에게 세를 주는 것보다는 조씨가 낫다는 결론을 낸다. 좌대가 80개나 될 만큼 크고 장사가 잘됐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이들이 그린벨트법 위반, 환경법 위반 등을 이유로 허구헌날 고발을 해서 관에서 나와 철거를 하고 철거반이 돌아가면 비닐하우스를 다시 짓고 영업을 하는 일이 반복됐다. 1990년 중반 손을 뗀다.

 

(남광부동산을 하실 때는 어떻게 돈을 버셨어요?)

 

땅이 하나 나오지? 나오면 전화를 해 서울로. 좋은 게 있으니까 빨리 돈 가지고 와라. 복부인들이 차에다 돈을 싣고 나와. 그래 놓고 영수증 써 달라면 영수증 써 주고 돈 받을 바에는 무슨 돈을 받느냐. 빨리 가지고 가라그렇게 배짱을 부리고.... 그러면 돈 보따리 그냥 놓고 가. 그럼 돈을 받아서 트렁크에다 운전수한테 넣으라고 그렇게 댕기면서 그냥 다 쓰는 거야. 그냥 쓰고 돈은 다 줬는데 땅을 사 줘야 될 거 아니야? 그러면 땅주인 불러갖고 예를 들어 만 원짜리면 만 오천 원짜리 써 가지고 계약서만 보내는 거야. 그럼 얼마 줬다고. 그러고 평당 예를 들어 5천 원씩 그때 돈 5천 원씩이면 땅 한 평에 만 원 할 때 컸다고. 그렇게 해가지고 억수로 벌었어.”

 

그래가지고 한참 계속 부동산이 잘 되는데 차를 두 대를 가지고 용산에 하나 사무실 삼거리 하나 과천에 하나 세 개를 두고 차를 두 대를 가지고 왔다 갔다 했는데.....우리 차 운전수 친구가 사장한테 얘기 했으니까 나가자하고 차를 끌고 나간 거야. 밤에 퇴근 시켰는데 영동 테헤란로에서 15톤 트럭하고 들이 받아가지고 즉사를 해 버린 거야. 동네 사는 놈인데....그러더니 안 되기 시작하더라고....그래서 두들겨 엎어 버렸지.”

 

자식교육에 공을 들인 조씨는 앞 못 보는 자식을 미국에 유학보내 미시간대학에서 박사까지 만든다. 귀국해서 대구대학교 교수로 있다. 막내는 IT개발자로 있다.

 

난 후회라는 건 하나도 없어. 그저 멋있게 벌어서 멋있게 썼구. 멋있게 살아서 후회라는 건 없어. 집사람한테 서운하게 한건 있지만 가정에 소홀하지는 않았어.”

 

따지고 보면 그래 지난 일에 돈 잘 벌고 좋은 시절을 헛되이 보냈다는 생각은 안 해. 후회는 없어. 후회 없이 살았고 남한테 손가락질은 받았을망정 내 가족들 한테는 최소한 하느라고 했어. 어디 나갔다 들어오면 쌀독에 쌀이 있나 연탄이 있나, 그것부터 해결해 놓고 나가서 돌아다녔지.”

 

(2019.10.11. 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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