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조부께서 돌아가신 후 할머니께서는 황해도 평산에서 아드님 두 분을 데리고 과천으로 오시고 세거지 선산도 여기야. 중소농 다해야 1만 평도 안 되는 정도였어. 대공원 들어가는 입구에 4천여 평이 수용됐어. 나중엔 서산 가서 목장을 했지. 개인 규모로 몇 만평 소도 1백 여 마리 길렀어. 최종수가 퇴직금으로 옆에다 5천 평을 사서 같이 하기도 했지. 원체 농사꾼이어서 농사 밖에 몰랐어.”

 

초등학교 입학 당시에는 시험을 보지 않고 입학했다. 신씨보다 몇 해 전 입학한 세대는 시험을 보았었단다. 중학교 입학은 시험을 치렀다.

 

잘 생긴 신씨는 따르는 여자들이 많았노라고 웃는다. 공부를 잘해서 경복을 갔는데 가서는 공부를 않고 부모들의 애를 태웠다. 나중에 그걸 속죄하는 마음에서 열심히 살았노라 회고한다.

 

세상을 허투로 살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르러 그때부터 농촌운동을 열심히 하게 된다. 한창 4-H 운동이 발흥할 때였다 신씨는 군 단위 연합회장도 지냈다. 농촌지도자연합회장을 지냈다.

,,,체를 중심으로 한 4-H운동은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 그룬투비 목사가 시작했다. 그 사상은 신씨 사상의 중심이 되었다. 군대 갈 때까지 그렇게 보냈다.

 

제대 후 농사일에 매진할 때,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시작하자 동네에서 신씨에게 네가 젊고 패기도 있으니 해봐라.’해서 떠밀려서 27살 젊은 나이에 새마을지도자로 나섰다.

 

신씨에게는 사명감이 있었다. ‘왜 농촌이라고 못사느냐, 잘 사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느냐?’는 오기가 있었다.

 

이영구 전 문화원장 아버님과 같이 지도자교육을 받으러 나갔다. 하일리에서는 남궁 씨가 지도자로 나섰다.

 

어느 날 이성환 시장은 강화에서 해운업을 하고 있던 신회장에게 과천새마을회장을 맡으라 강권한다.

 

과천새마을회장을 시작할 무렵 횡령사고가 일어났다. 사고를 친 직원에게 말미를 주었으나, 변제하지 못하고 감옥에 갔다. 그 감옥엘 가서 면회를 하고 영치금을 내고...... 신씨가 큰 돈을 대신 변제해 주었다.

 

90년 말 정부에서 새마을진흥법에 의해 년 3,600만원을 보조하지만 그걸론 사무국장 봉급하고 나면 쓸 돈이 없었다. 1년여를 사비를 보태 봉급을 주던 신회장은 경기도에 찾아가 자립기반을 세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전국에 있는 새마을회 회관 중 과천새마을회관 외 몇 군데 만 자체 소유 건물을 가지고 있다. 나머지는 거의 시에서 마련한 청사를 빌려 쓰고 있다.

 

이 일에 대해 신씨는 내가 돈을 낸 게 자랑이 아니라, 자체 회관을 지어야겠다는 뜻을 정하고 방법을 찾아 골몰한 걸 자랑하고 싶다.”고 말한다.

 

새마을회관을 지으면 정부에서 5천만 원을 지원해준다. 그때 신씨는 2천만 원을 먼저 내놓고, 나중엔 1억을 만들어 놓고, 땅을 찾아 다녔다.

 

그 정성을 보고 당시 이성환 시장이 직원들에게 신 회장이 먼저 자기 돈 내놓고, 회관을 지으려 하니 마땅한 땅을 찾으라고 말한다.

 

현재 새마을회관 자리는 본래 마을버스 주차장부지였다. 그걸 길 건너 그린벨트로 옮기고 건축을 시작해 20억원을 지원 받는다.

 

신회장은 “1억 들여서 20억 받는 장사가 어디 있느냐.”며 웃는다.

 

완공 후 단위농협을 1층에 유치하고 2층에는 과천시선거관리위원회를 입주하게 한다. 이 사례는 새마을회 역사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후일 신 회장은 대통령훈장(자조장)을 받는다.

 

사실 그 이전에 지을 수도 있었어. 오래 전에 새마을회가 과천시 주차장관리를 위탁사업으로 하고 있었을 때, 그 수익을 회관건립기금으로 모았더라면 훨씬 전에 지을 수도 있었을거야.”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신씨는 인생을 보는 시각을 달리하게 된 것이 기독교 신앙이었다고 말한다. 선바위 신씨네는 과천에서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교회를 섬기는데 정성을 들였다. 과천기독실업인회(CBMC)도 섬기고 있다.

 

사람들은 신씨는 부자로 태어나 가진 걸 잘 베푸는 사람이려니 생각한다. 그러나 신씨는 자신이 농사지어 번 돈을 좋은 일에 쓸 줄 아는 것이었다. 신씨는 나는 농사꾼이다. 농사가 좋아 평생 땅을 판다. 그렇게 늘린 재산에서 써야 할 때 쓰는 것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인생을 내 욕심만 부리지 않고, 남도 돌아보는 삶을 살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신씨는 가진 사람이 좀 더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 주위가 밝아지고 결국은 자기에게도 돌아온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들이 시카고대학에 다닐 때 미국이란 나라가 유학생인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까지 대주는 걸 보고 신씨는 남의 나라에서 내 자식에게 이렇게 베푸는데 나도 내가 사는 지역에라도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과천애향장학회에 5천만원, 로타리클럽에 3천만원을 내놓는다. 그걸 보고 같은 로타리클럽 멤버인 유모 대표가 신씨의 봉사를 따라서 장학금을 낸다. 한동안 과천에는 줄봉사가 이어졌다.

 

자신을 평생 농삿꾼이라고 여기는 신씨는 노후에도 농사를 지을 요량으로 경치 좋은 양양에 땅을 사고 집을 마련해 막 재미를 붙이려 하는 즈음에 과천문화원장을 맡아 달라는 청이 들어와 과천에 또 붙잡혔다.

 

신씨는 과천줄타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는데 전수관 하나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을 숙제로 삼고 있다.

 

봉사는 마음이 시켜야 하는 거야. 덕불고필유린이라. 덕을 베푸는 이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 애들도 잘 됐잖아? 뭘 더 바라겠어? 베풀 수 있을 때 베풀어야 해. 다 돌아와.”

 

신씨는 삼남매를 두었다. 둘은 미국에서 사는데 아들 하나는 대학교수이고, 딸 하나는 월드뱅크에 다닌다. 큰아들은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아 하고 있다. 손자가 하버드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에 할아버지는 싱글벙글이다.

(2020.11.9. 과천문화원장실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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