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는 부천 대장동에 쌀농사를 하러 다닌다. 젊어서 마련해 놓은 땅에 하삼부골 집앞 논이 경마장으로 들어가면서 받은 돈으로 땅을 더했다. 남에게 맡겨 두었다가 은퇴 후, 과천에서 오가며 농사를 짓는다. 이번 가을에도 김포 정미소에서 도정한 쌀을 실어와 주문했던 이웃에 갖다주고, 한숨 돌리던 강씨를 만났다.

 

“‘저 놈이 강명희 조합장 큰아들이다.’ 라는 말 때문에 매사에 조심스러웠어요. 서울 직장 다닐 때도 술이라도 마신 날에는 행여 실수라도 할까 싶어서, 일부러 늦게 집에 돌아왔어요. 그래서 친구들도 최근에야 제가 술을 마신다는 걸 알아요.”

 

1946년 아버지가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하실 때 중림동 약현성당 근처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난 그는 1·4 후퇴 때, 전주로 피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과천 본가로 돌아왔고 전쟁이 끝나고 과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45회 졸업생이다. 150 여 명이 함께 졸업했다.

 

지금 경부고속도로 근처로 강남대로로 길이 나 있는데 왼쪽은 서초구 오른쪽은 강남구죠. 왼쪽은 시흥군 신동면이고 오른쪽은 광주군 언주면이었죠. 신동면에서도 과천초등학교를 걸어서 왔죠. 지금의 이수교 있는 데인 동작동에서도 왔고......”

 

삼부골에서 과천읍내를 나오려면 십여리를 걷는 중에, 강씨네 땅을 밟지 않고는 걸을 수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부자였다. 오촌당숙 댁에는 바쁠 때는 머슴이 둘, 한가할 때는 머슴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도 외지에 계셔서 외삼촌들이 농사를 도맡아 하셨었다.

 

큰댁 할머니께서는 시집오셔서 막내삼촌을 젖을 물려 키우셨대요. 막내삼촌에게는 큰형수가 엄마였죠. 아버님은 청진 소재 비스코스 인견공장에 다니시다가 경성전기(한전)를 거쳐 한국동란 무렵에는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하셨죠. 그러다가 할아버지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시고 난 뒤에 장사를 정리하고 돌아오셔서 농사를 맡으시고 동네일을 보셨죠.”

 

넉넉하게 지냈죠. 명절에 과천에서 설 쇠고, 다음 날 중림동 외가에 가면 어른들이 많이 세배하러 오시니까, 주머니가 두둑했지요. 남대문 아버지 가게에서 염천교 건너 가방가게에 봐 둔 가죽가방을 사러, 외숙모와 갔던 기억이 나요. 동네에서 가죽가방을 맨 사람이 없었어요.”

 

삼부골은 강씨와 이씨가 많이 살았다. 강씨네와 이씨네는 서로 도우며 우애있게 잘 지냈다.

 

전쟁 때 인민군들이 이 모씨에게 인민위원장을 맡겼는데, 동네 젊은이를 인민군으로 차출하는 일에 나서지도 않았고, 얌전했대요. 전쟁이 끝나고 부역한 사람들 재판하고 처형하고 그랬는데, 강씨네가 나서서 삼부골 이씨를 그런 사람 아니다나서서 변호해 주는 바람에 화를 면했대요. 이씨는 서울로 이사가셨는데도, 강씨네 일이라면 끝까지 나서서 해주셨고...... ‘강씨네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강조합장은 산으로 둘러싸인 과천에서, 마을마다 제수에 쓰일 어물을 흥정해 단체로 사다가 나누는 구판장을 만들었다.

 

삼부골 동네 구판장을 사람이 착실하다는 이 모씨에게 맡겼다. 구판장은 지역농협의 전신으로 마을마다 있었다. 그러나 마을마다 운영 노하우가 차이가 나니 자본금을 들어 먹고 적자로 주저 앉은 조합도 있었다. 그 중에는 금융사고도 있었을 테고..... 정부가 나서서 지역농협 통폐합에 나서고, 강명희씨는 초대 조합장이 된다.

 

당시에 금융사고가 난 걸 정리하려니, 사고 낸 사람을 형사처벌하던가 돈을 채워 넣던가 해야 했고, 강 조합장 재산이 많이 축이 났다. 아버지는 당신이 이룬 재산 네 아들에게 물려주는게 줄어들어 면목 없어 하셨다.

 

삼촌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길래 그건 아버님 재산이시니까 처분 하시는 건 아버님 뜻대로 하시는 거지요.’ 했어요.”

 

(2021.11.11. 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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