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흥덕, 심재학 모자를 찾게 된 것은 심재학 씨 부친 심정섭 씨가 워낙 유명해서다. 1990년대 중반 돌아가신 심이장은, 삼부골에서 이장을 43년 지내신 분이시다.

아버지는 하사관으로 제대 하시면서, 서울집을 처분하시고 과천에 자리를 잡으셨대요. 농지도 꽤 있는 집안이라 일이 많았는데,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으셨어요. 술 좋아 하시고, 사람 좋아하셔서, 읍내 나가서 지내시고, 이장 일을 비롯해 동네일에만 신경을 쓰셨지요.”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고단하게 살았죠. 20년 넘게 묵장사 해서 광주리에 이고 서울 가서 팔고 돌아오는 생활을 했어요. 남편이 집에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통에 술상 보는 게 일이었어요. 그래도 묵을 팔고, 버스타고 읍내에 돌아오면 애들 아버지가 마중 나오곤 했어요.”

 

삼부골은 돼지들을 많이 길렀다. 500마리를 키우는 집도 있었다. 마을 양쪽 작은 개울에 돼지똥 냄새가 가득했다. 경마장이 들어서면서 말똥냄새까지 더해지고는, 마을 사람 아니고는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돼지파동이 나면서 하나, 둘 돼지 키우기를 포기하는 집들이 늘어났다.

 

삼포마을은 본래 상삼포, 하삼포로 나뉘었다. 각각 대 여섯 집이 있었는데, 하삼포가 경마장으로 들어가 버리면서 땅을 팔고 떠났고, 상삼포로 집을 옮겨 짓고 산 사람들이 있다.

 

용흥덕 씨는 1936년 원지동에서 났다. 드문 성씨인 용씨는 수원에 세가가 있었고, 원지동 용씨네서 십오리 떨어진 동네로 피난을 갔었다.

 

움을 파서, 여자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숨어 지내다 왔어요.”

 

용씨는 스물두 살 때, 과천으로 시집왔다.

 

청계산에서 취나물 같은 나물을 해다가 팔았어요. 도토리도 주워 다 씻고 말려, 가루 내서 묵을 쑤어서 묵을 만들어 광주리에 이고, 서울 가서 팔았어요. 아이를 업고, 서울 신흥사 앞에 가면, 단골집에서 새댁이 애 업고 왔다며, 자기네 집에서 아기를 봐 줄 테니, 놓고 팔고 와서 아기를 데려가라고 했는데, 혹시라도 아이들 데려갈까 무서워서 업고 다녔어요. 묵에 일체 다른 건 넣지 않고, 값을 비싸게 부르지 않아서 잘 팔았어요. 나중에는 집에서 참외를 따면, 그걸 이고 나가 팔았어요.”

 

큰아들 심재학 씨는 연년생 동생을 1986년 아시안게임 직후, 교통사고로 잃었다. 주암리 앞 큰 길이 생기고 나서, 그 길에서 교통사고가 잦았다. 사고가 잦아 동네에서 굿을 할 정도였는데, 심씨 동생도 밤에 친구와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심씨는 농사를 돕다가 회사를 다녔다. FRP(강화프라스틱)으로 물탱크, 어선을 만드는 회사를 차려 포일리에 공장을 차리기도 했다. 납품하던 건설회사를 드나들다가 그곳 여직원과 결혼했다.

 

김 모 산림간수가 유명했어요. 외지인인데 셰퍼트를 데리고 다니며, 과천 일대 산을 돌며 무단벌목을 못하게 했어요. 나무를 베다가 그 분에게 걸리면, 지서에 끌려가 곤혹을 치렀죠. 그 분도 우리 아버님께는 꼼짝 못했어요. 청계산에서 나무 하다가 그 분이 나타나면, 지게를 숨겨 놓고 달아나곤 했지요. 그러면 아버님이 두둔하고 나서 주시고, 김씨가 사라지면 아버님이 지게 찾아 가거라.’ 하시면 사람들이 숨겨 놓았던 지게를 찾아 가곤 했지요.”

 

1960년 중반 막계리에 장막교회가 들어서면서, 동네가 소란스러웠다.

 

청계산에 기도터를 닦는다고...... 지금도 가면 산 속에 흔적이 남아 있어요. 대공원이 들어서면서 장막교회 근처에 살던 이들이 문원리로 이주했지요. 하삼포 인근에 살던 이들은 원주민들과 사이가 좋을 수 없었어요. 농사를 지어 놓으면, 말도 없이 따가는 통에 많이 다퉜어요.”

 

문원리로 이주하고서도 이들은 서울서 철거민들이 동네에 자리를 잡으려 하면, 자기네 교회로 나오라고 극성을 부렸단다. 문원리 근처 구리안에서 채소 농사를 짓던 이들도 오이가 채 익기도 전에 장막교회 사람들이 따 가는 바람에, 농사에 손해를 입어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삼부골 사람들이 건장하고 운동들을 잘 했어요. 면 체육대회를 하면 씨름, 달리기는 일등을 도맡아 했어요. 하리에 미군부대 사람들이 키가 컸는데, 배구를 해도 그 사람들을 이겼어요. 체육대회를 하면 아버지께서 나서서 젊은 사람들 해 먹이고, 나가서 우승을 하면 트럭에 선수들을 싣고 집으로 돌아 와서, 동네잔치를 벌이시고......”

 

남편이 아는 사람들이 원체 많으니까, 모를 내는 날이면 근처 부대에서 군인들을 대민지원이란 이름으로 자원봉사 인력으로 불러 내셔서, 사람들이 논에 가득했어요. 그 사람들 새참 해 내려면....... 동네 아주머니 몇 불러내서 하루 여섯 끼를 만들어 냈어요. 아침, 새참, 점심, 새참, 저녁을 먹고 일 마치고, 집으로 와서 술들 마시느라 또 한끼......, 반찬이 뭐 있어요? 나물하고 김치 두 어 가지, 돼지고기 볶아내고..... 읍내 학교 정문 근처에 있던 양조장에서 막걸리 두어 통 주문했다가 내고 그랬지요.”

 

(2021.11.4.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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