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6월 갈현리에서 났어요. 드라마 용의 눈물에 나온 고려 이 거자 이자 할아버지 후손이죠. 27대조 할아버지께서 이씨조선 개국때 두문동 70인은 고려 때 벼슬했던 사람들이 낙향할 때 과천으로 오신 거예요. 할아버지 본향은 홍성이고...... 보은, 공주, 진천, 천안, 목천이 본향이죠. 청주이씨 과천파예요. 청주가 본래 이름이 상당이었어요. 이거이 아드님이 부마이실 때 한명회 (이방원 계)가 등극하면서 상당군 청주한씨에게 빼앗겨 1대부터 11대까지 실존 위패만 모셔요. 을화산 묻혔다는 족보에는 있지만, 찾을 길 없다고 해요.”

 

정조대왕께서 건륭원 오가실 때 찬우물 지나시면서 저 무덤이 누구 것이냐?’ 물으셨대요. 김상로의 형 김약로 묘지요. 김상로는 영조 때 영의정으로 사도세자 때 뒤주를 짠 사람이죠. 정조가 등극한 후 지금도 짜겠느냐?’하자 김상로가 짜라면 짜야죠하고 답을 하자, 정조가 벼루를 던져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 이후 정조는 영등포 길로 갔다는 말이 있구요.”

 

사파지지 (사방 눈에 보이는 땅은 모두 준다)였던 우리 거를 청풍김씨에게 빼앗기자 청계산으로 옮겼다고 그래서 그곳을 분토골이라 한다고 그래요. 형제로 나서 어머니께서 6학년 때 돌아가시고 새어머니 들어오셔서 낳은 동생 3, 형제 5남매가 있어요.”

 

6·251학년 때 겪었다. 2개 반으로 60명씩이었다. 1반은 남자반, 2반은 여자반. 남자가 많아 일부는 2반으로 나누기도 했다. (40회는 나눴다고 한다) 6학년은 진학반이었다. 당시 서울 중·고등학교는 성적대로 무시험진학이었다. 양정, 경복 같은 데는 무시험이었다. 35회였던 선배는 시험보고 중학교 갔다고 한다.

 

큰길 옆 똘창이 겨울에 얼면 얼음 타고 가고...... 버스가 두서 너 번 다녔으나, 돈도 없고 해서 걸어 다녔지. 당시 자작농은 드물고 왜정 때 빼앗기고 왜놈에 아부한 놈은 땅을 받고 했으니...... 논을 소작하기 위해 6,70%까지 내고 열 가마면 세 가마만 남죠. 양식이 없었어요.”

 

이씨는 공부가 상위그룹에 들어 김석원씨가 세운 성남중·고등학교에 무시험 진학해서 6년 다녔다.

 

아버지가 대학 보내시려고 준비하셨는데, 돈이 많이 들겠다는 생각에 인천 남동으로 도망가 시험 안 봤어요. 친구소개로 남영동 책상 공장가서 에나멜 광내는 일 하루하고 못하겠더라고. 그만뒀어요. 친구가 남산초등학교 밑 세종호텔 맞은편 인쇄소 종문사에 소개해줘서 영문 문선하는 일 했는데, 맨날 꼬붕이라 그 위가 정판(사스까이)하는 일이었는데 배웠지요. 출근 전 8시에 가서, 배워서 페이지를 해주었더니, 2,3개월 했더니 하루 50페이지를 하겠더라고. 그래 사장에게 나 그만 그만둘랍니다.’ 했더니 너 한 시간 전에 와서 일하는 거 봤어. 오늘부터 정판해하더라고......”

 

또 그 위에 활자 집어넣는 것...... 스테키 사이사이 나무로 넣고 얇은 건 종이 한장 넣고.... 해보니 자신 있어 또 그만 둘랍니다했더니 내일부터 식자 해하더라구......”

 

나중에는 동아전과 나오는 동아인쇄도 갔었죠. 당시 권 문교장관 부교재 파동이 있었는데...... 동아 교학사 전과 수련장을 베껴서 동아수련장 2천원 받을 때 1천원 받고 지방에 팔러 다니는 도서판매원을 했어요. 선생을 만나 몇 일 날 올 테니, 5분만 시간을 다오. 돈들이 없을 때라 5,6권 팔고...... 현금치기니 잘 됐어요. 조직을 짜서 다니면서 하다가 부교재 파동으로 철퇴를 맞았죠.”

 

청계저수지서 낚시를 하는데 서울친구가 안양부터 걸어서 찾아와서 간 곳이 세종출판공사라는 출판사인데 명동 모호텔 이 모씨가 사장으로 있고 연대 전 모 교수를 세워놓고 하는데 하루는 조판공이 하는 걸 보니까 답답해하니까 당신이 해보쇼하더니, 내가 하는 걸 보더니 놀라며 납쟁이 하셨습니까?’하길래 웃어줬죠.”

 

나중에 전 모 교수 친구가 서강출판사라고 차려서 불러요. 6만 원짜리 책을 내서 지방에 50%에 파는 월부 책장사를 했죠. 잘됐어요. 편집과 영업 상무를 동시에 맡았죠. 당시 남들은 1개월 어음 받을 때, ‘나는 3,4개월 드리리다. 대신 1백만 원 말고 2백만 원 끊어주쇼했지요. 나중에 사장이 듣고는 장사할 줄 아네.’하더군.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어 재정분과의원을 맡았는데, 한번하고 접더라고요.”

 

금강출판사를 냈는데, 남영동 국보위에서 불러요. 10권짜리 [세계단편문학] 3권에 박 모씨 작품이 들어갔다고 출판허가가 취소된거야. 당시 이 모 국회의장 빽으로도 안 되더라고...... 82,3년 무렵 군포에 집 샀던 거 날리고 나서, 아버지께 들어와야겠습니다.’ 하고는 광을 헐어 방을 들이고, 과천으로 들어왔어요.”

 

이후 둘째동서가 광화문에서 이주공사를 하는 것을 도와주다가, 동창 박 모씨가 시의원 출마 한다길래 선거 일 뒤봐주고 지냈다.

 

어느 날 과천국민학교총동창회 박영재 회장께서 낼 부터 사무국장이야.’하셨다. 박회장과는 같은 동네 살았다. 당시 문화원 사무국장을 공무원 출신이 하고 있었는데, 연금을 반으로 자른다는 소릴 듣고 느닷없이 그만두는 바람에 박영재 원장께서 총동문회에 넣어놓은 이력서를 가져다가 문화원 사무국장을 하라시는 바람에 맡게 됐다.

 

“19931215일인데 1월 정산보고를 해야 하는데, 수중에 7,80만원 있었어요. 문화원 직원과 수원 전 사무국장 집을 오가며 맞췄지만 어려웠어요. 3일 밤을 새서 정기총회를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어요. 박영재 원장님은 깔끔한 분이셨어요. 심계원 출신으로 서류에 띄어쓰기해야 하고 양면괘지에 몇 자 들어가야 하고...... 나중에는 너 나하고 3년만 하면, 어디가도 안 꿀린다 배워라.’하셨어요.”

 

최종수 원장 시절엔 사무국장 상임 부원장을 거쳐 문화원장을 지냈다.

 

1958년 부친께서 몇 백 년 간 실전되었던 연안 차씨네 오산 차천로 선생 묘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알려준다. 중종때 문장가였던 오산은 최립, 한석봉과 송도삼절이라 불렸다. 1556년부터 1615년까지 살고 59살에 죽었다. 문중에서는 몇 백 년 간 실전되었던 묘를 찾게 되자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2020117일 문중시제를 지내면서 이씨에게 초헌관을 맡아 달라고 청한다. 이씨가 초헌관은 못하고 종헌관을 하겠노라 했더니 아헌관을 해달라고 했다. 그래 갔더니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세 헌관에게는 베옷을 해 입히더라고.......

 

당시 동네는 남자들은 땔나무를 해다 팔고 여자들은 산나물을 뜯어다 팔았다. 여자들은 남영동에까지 가기도 했다. 잘사는 사람들이 많았기도 했고, 콩나물공장 같은데가 남영동에 많았다.

 

부친께서는 동대문에서 베를 떠다가 동네 솜씨 좋은 아낙들 대 여섯 분께 부탁해 수의를 만들게 하셨다. 부친께서 돌아가시자 장례 때 꺼내 입혀드렸다고

 

그의 재임기간 과천문화원은 출판물 가짓수가 많고, 수준이 높다. 하지만 예산은 눈에 띄게 적게 들었다. 과천문화원이 인쇄와 출판 분야를 두루 겪은 이씨의 재능과 인맥 덕을 크게 본 셈이다.

 

그런 그지만 돌아가신 아버님께는 송구스러웠다. 부친 생전에 조반 자리에서 너 과천문화원에서 뭐 하고 다니느냐?’고 물으시더란다. 과천 일 혼자 다 하고 돌아 다니느라 밤이고 낮이고 나돌아 다니는데, 집에 돈 한 푼 들여놓지 않으니 며느리가 힘들어 하는 걸 에둘러 꾸짖으신 것이다. ‘아뿔사!’ 돌아보니 문화원 사무국장 하면서 봉급을 한 번도 집에 갖다 준 기억이 없었다. 그래도 그게 밑거름이 되서 과천문화가 살아나는 걸 보니 보람 있다.

 

처음 사무국장 되서 관계자들과 인사는 해야겠단 생각에 밥을 먹고 당시 7만원인가 나와 결재 올렸지. 그랬더니 원장님께서 문화원 돈이 네 돈이냐?’ 하시고는 3일이 지나서야 결재 하시면서 문화원 돈 마음대로 쓰지 마라라고 가르치셨어요.”

 

박영재 원장님은 심계원 출신이라 바늘구멍도 안 들어가. 경기도 감사가 내려와 시청에서 서류 갖고 오라는 거예요. 원장께서 기획실장에게 전화 해서 감사를 원본이 왔다 갔다 하는데가 어딨어?’ 하셔서 와서 보고 갔어요. 지금은 문화원 행사 주최가 과천시잖아요 그때는 문화원 주최, 과천시 후원 그랬어요. 시장, 국회의원 축사 절대 못 넣게 했어요.”

 

우리 문화원 팀장들 어디가도 돋보여요. 과천문화원 출판물들은 주석과 해석의 정확성이 뛰어나단 소리를 들어요. 전국 230여 개 문화원 중 3위예요. 1위가 강릉, 2위 평택, 3위 과천...... 보조금이 줄어드는 바람에 밀리고 있는게 안타까워요.”

 

아버지 이용진 어르신은 과천 새마을운동의 산증인이셨다. 당시 가일리에는 향교터가 있었다.

죽바위에서는 산신제를 지냈다. 서낭당은 으능쟁이고개, 남태령고개 맨 위에 참나무가 서낭당 역할을 했다.

 

(2020.11.9. 과천문화원장실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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