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숙 씨는 1941년 하2리 뒷골에서 났다.

 

과천초등학교 41회다. 8남매였다. 딸 여섯, 아들 둘, 딸로는 셋째. 어머니는 54살에 돌아가시고 새어머니가 낳은 아들이 둘이었다.

 

대대로 뒷골에서 사셨다. 뒷골 이서방네는 20여 호가 있어서 신서방네보다 컸다. 대 여섯 명씩 같이 초등학교를 다녔다. 한내 따라 밤나무 밭이었고 개울둑 타고 가다가 성당 위로 올라가곤 했다.

 

초등학교는 가운데로 있었고 남쪽으로 교장사택이 있었고 반대편에 작은 건물이 있었다. 6·25로 불나서 움을 파고 봄여름에는 향교 개울가에 돌 깔고 공부하고 여기저기 다니면 야외수업이 많았다. 학교는 졸업하기 전 4학년 때 쯤 다시 지었다.

 

읍내는 드문드문 집들이 있었고 관문리 학교동네는 몇 집들이 있었다. 읍내에 장흥수씨네 담배가게 그 옆에 임한영씨 제중의원과 우체국이 있었다.

 

삼각지 상명중학교를 다녔다. 6학년 때 중학교 가야 하는데 초등 6년 담임이 도중 군대 가버려 담임 없는 클라스가 되었다. 남궁선생이 6-1 담임이어서 이씨가 있는 6-2을 돌봐주셨다.

 

내가 반은 선생 노릇을 하고 지냈어. 올 백점 상태여서 경기를 가고 싶은데 남궁선생은 경기 가면 자가용에 치여 죽어라고 하셨어. 사대부중 전형이 끝나서 가지 못하고 사촌오빠가 신흥대학에 보결 다니고 있었는데 남궁선생이 가까운 상명을 가라고 써줘서 다녔는데 버스도 안 다녀서 걸어 다니고 반포에서 한강이 얼면 질러서 얼음 위를 걸어서 삼각지 교문까지 걸어서 세 시간을 걸려 다녔어. 그때 노량진 한강다리는 전쟁에 끊어져서 고무다리를 놨어. 가고 오는데 여섯 시간이 걸려. 공부를 단어장을 들고 다니면서 공부했어.”

 

중학교 졸업 후 이씨는 안양의 한 상점 점원으로 들어가 1년 동안 돈을 모아서 종로 3가에 있는 명성고등학교(동대부고)를 다니다가 검정고시로 편입해 명성여고를 졸업했다.

고대 여학생 무시험 전형 시기를 놓쳐 성균관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다.

법대를 진학한 것은 자라면서 집안과 이웃에서 억울한 일들을 당하고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 하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쳤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당시 교사가 모자라 학교마다 대학교 졸업자들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 정부는 대졸자에게 교사가 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씨는 과천 관악중학교 교사가 된다. 이어 강남 낙생국민학교의 교사로 옮겨간다.

그러다가 해외개발공사 직원이 된다. 박대통령의 독일방문 이후 간호사, 광부 등 인력파견이 성황을 이룬다. 이주공사에서 그녀에게 유학 가기를 권한다. 독일가서 일하면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유학을 결심하고 수속을 했다. 출국 3일 전 날. 모친께서 한 밤중에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사당동에서 새벽에 자동차에 치셨는데 18살 먹은 아이가 운전연습 삼아 끌고 나온 차에 횡액을 당하셨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고 여동생은 1년 넘게 입원해야 하는 큰 사고였다. 그때 어머니 54세 되시던 해였다.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하던 이씨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추스리고 독일로 떠났다.

처음 베를린으로 가려던 자리 대신에 남부 지방으로 배정되어 갔다. 3년 뒤에 돌아왔다. 그 사이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맞으셨다.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씨는 과천 집을 세를 주고 갓 입주를 시작한 잠실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한다. 새마을부녀회에 관여하게 된다. 5단지 주공아파트 자치관리였다. 5년이 지나 분양전환이 될 무렵 당시 주택공사(LH)와 시비가 붙었다. 주민들은 모임을 만들어 항의를 하게 되고 이씨는 대표가 되어 주민 권익을 대변하는 일을 하게 된다. 데모하다 집시법 위반으로 영창도 갔다. 삼십 대 후반이었다.

 

이를 지켜 본 정치권에서 78년 잠실에서 82년 국회의원 선거때 그녀에게 공천을 줄 테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라는 제의를 한다. 41세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반포에서 역삼동, 천호동, 고덕동 까지 넓은 지역에서 2명을 뽑는 선거였다. 14명이 입후보를 했다. 지금은 선거공영제라 선거비용을 국가에서 지원하지만, 당시는 개인 재력 싸움이었다. 당시 2,500만 원 정도인 아파트 두 채 값을 썼지만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 뒤에 다시 과천에 돌아와 현재까지 옛 집에 그대로 산다. 김영삼당 갔으면 가능성 있었는데 김대중당으로 갔다. 약자 편에 선다고 김대중당을 택했다.

 

과천에서도 지구당 위원장을 맡게 됐고 다시 91년에 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었다. 정주영당이 나와서 박제상 씨에게 2천 표차로 졌다. 국회의원에 3번 도전 했었다. 지방선거에서는 이정찬씨를 공천해 시의회 의장이 되게 했다. 그 뒤에도 이인제 당 후보로 과천시장에 도전했었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는 과천시애향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남태령 본래 길로 이어지는 지령고개가 있었고....뒷골에서 남태령 가려면 서골고개를 넘어야 했고, 성 뒤로 넘어가면 방배동으로 바로 가는 길이 있었다.

 

이 동네는 소들을 많이 키웠어. 젖소. 나무하고 채소 팔러 사댕이 고개 넘어 상도동 흑석동으로 다녔지. 깡조밥이나 깡보리밥을 보리만 두 번 삶아서 깡보리밥을 먹었지.”

 

10살에 피란 갔다. 아산 안골까지 걸어서. 아버지는 제2국민병으로 제주도 가시고 작은아버지는 군대 가다가 꾀병으로 돌아와 함께 갔다. 군포로 해서 마차 뒤를 따라 병마골로 해서 갔다. 둔포에서 폭격을 맞았다. 1·4후퇴 때 였는데 밤에 불들을 피우니까 내리 쏴서 끌고 간 소가 죽었다. 시체를 밟고 다녔다. 작은 집 세 식구, 이씨네 다섯 식구가 피란을 함께 갔었다. 소가 끌고 가던 걸 이고 지고 험한 길을 걸어서 갔다. 아는 사람 아들이 흑석동 살았는데 그 고향을 찾아가 3개월을 지내고 걸어서 돌아왔다.

 

쌀을 묻어 놓고 갔는데 누군가 다 파내갔어. 그래도 경마장 주유소 건너 묻어 둔 무가 효자 노릇을 했지. 아버지는 뒤에 제주에서 장질부사 앓고 돌아오셨지. 나중에 미국 양쌀이 나와 밥을 해서 한 사발씩 먹었어. 여기도 완장 차고 다닌 사람이 인민위원장 하던 이가 아직도 이 동네 살아있어. 인민군 둘이 후퇴할 때 요 산과 요 산에 맞총질해서 논바닥에 사람이 엎어져 죽어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해.”

 

(2020.11.14. 뒷골경로당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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