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재 원장님 계실 때, 제가 87년도에 내려와서 매일 아침 9시면 서울을 갔죠. 생활권이 서울에 있으니까. 당시에는 과천에 문화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91년도에 문화원이 개관하기 직전에 제 언니들과 동창이신 박영재 원장님을 만났는데, ‘나는 공무원으로 퇴직을 했기 때문에 문화는 문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근데 문화원장을 하라니까 해야 되겠는데, 동생이 좀 도와줘야 되지 않겠나.’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박원장님이 우리 언니들과 동창이시고 저와 같은 찬우물에 살았어요.”
서울에서 활동하느라 바빠서 못한다고 했지만, 여러차례 찾아와 과천문화원 개관을 돕기로 했다. 문화강좌를 만들고, 시조·풍물·민요·무용반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니 이번에는 시에서 과천시로 승격 되었으니, 예총을 만들어야 한다고 재촉하는 바람에 문인협회 하나 밖에 없던 과천에 국악협회를 만든다. 당시 20대 때부터 서울국악협회에서 20여 년을 넘게 활동하며 이사로 있었으니, 과천국악협회를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다섯 개 협회가 있어야 예총이 되는 거에요. 우리 집 양반이 동양화하고 서예를 했어요. 미협을 만드는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미협은 국전작가가 세 명이 되야지. 그러니까 인천 사는 친구 뭐 이러고, 몇 사람 여기다 주민등록을 옮겨서 등록했어요. 그렇게 옮겼다가 몇 달 있다가 또 옮겨가고..... 그러느라고 한 삼년이 걸렸어요. 또 연극협회를 만들고...... 그렇게 국악협회 원래 있던 문인협회하고, 연극, 음악, 무용 그렇게 해서 다섯 개 협회를 만들어서 ..... 2001년도에 예총을 만들고....그거 만들어 놓고 우리집 양반이 돌아갔어요. 그렇게 예총회장 두 달 하다가.......”
“1990년도부터 무동답교놀이를 하는데, 선소리가 거기 중요한 거는 선소리, 산타령이 빠져 있어요. 소리꾼이 없으니까. 이○○ 씬가 하는 분이 좀 하셨다는데, 선소리가 없어서 못 했는데 소리꾼이 왔으니까 선소리를 해야 되지 않냐고, 그래서 내가 91년도 문화원 생기면서부터 거기에 들어갔어요. 하지만 선소리를 할 사람이 없고, 문화원에서 민요 가르쳐서 그 사람을 언제 세워요. 그래 신당동에 우리 학생들 20명을 데려다가 했어요. 공연할 때면, 내가 다 안무 짜서 데리고 나가야 되니까. 그렇게 다 데리고 내려와 가지고 연습을 시켜서 무동답교놀이 대회 나가면 우리 학생들이었죠. 그래서 여기 엄마들 몇 사람을 선소리 산타령을 가르쳐서 만들어 가지고..... 중간 중간에 하나씩 끼워 놓고 소리는 우리 학생들이 하고.....그렇게 만들었죠. 그랬더니 경기민속예술대회 할 때, 심사위원들이 ‘저 이들은 전문가들 아니냐?’고 떨어뜨린다고 그랬어요. 전문가는 전문가죠. 학원에서 하던 애들인데..... 전부 쪽지어 놓고 ‘얼마나 이뻐요?’ 그렇게 했는데......”
“당시에 내가 왜 산타령을 더 잘했느냐 하면... 과천에서 무동답교놀이를 안 하고 있으니까 송파에 사시는 허호영 선생님이라고 그분이 그걸 송파무동답교놀이를 만드는 거예요. 무용제로....그 분이 그걸 이쪽에서 안 하니까 그 분이 머리가 좋으시니까..... 그래 중요를 만들었는데, 거기도 소리꾼이 없으니까..... 안비취 선생님을 모셔다가 우리 다 그 또래 애들이 전부 다 서울에서 같이 활동을 했으니까. 허호영 선생님이 ‘당신이 좀 데리고 하라고....’그래. 우리 다....안 회장님은 장구 메고 우린 소고 들고..... 젊었을 때 20대 때 얘기예요. 그렇게 해서 맨날 송파가서 했거든요. 중요무형문화재 대가 거든요. 그 선생님이..... 그게 단체 종목인데, 혼자 쓰셔 가지고 그게 취소가 됐잖아요. 그랬더니 그때 맨날 이거 거기서 한 거니까, 여기서도 내가 한거잖아요. 제가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수표교 다리를 세운상가 거기 다 복개공사 했었잖아요. 공사해서 수표교 다리를 지금 장충체육관은 옮겨 놓고 거기서 우리가 맨날 연습을 했잖아요. 허호영 선생님이 송파무동답교놀이를 하신다 그럴 때도.... 추운데도 그냥 정월달에도 뭐 방송 찍는다 그러면 그거 같이 안비취 선생님 따라다니면서 고생했죠. 그때 고생한 게 과천이 덕을 본 게 고스란히 그랬어요.”
과천무동답교놀이가 문화재가 될 때도 사연이 있었다. 당시 심사위원이 과천팀을 보고, 기량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문화재에 등재될 정도의 기량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네두레패에서 활동하던 지역민들이 만든 과천민속보존회 출신들이 전부였으니, 눈에 차지 않았던거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해체 후에 재구성하는 방안을 택하게 된다. 예산을 지원한 과천시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었다.
1990년 임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준보유자가 된다. 묵계월 선생님이 작고하시면 보유자가 될 참이었다. 그런데 1998년 경기도지사가 경기도 무형문화재를 하라고 강권한다. 도립국악단 악장을 할 때였는데, 국가 무형문화재를 포기할수 없다고 세 번을 거절했다. 1999년 경기도는 경기소리전수관을 지어 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임씨를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만든다.
“그래서 임 지사님이 욕심을 내서 일을 저질러 놓고, 일이 안되고 주저 앉고 그랬죠. 그리고 저는 경기도에 내려와서 일을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인맥이라는 게..... 그 임지사 부인 주애란 박사가 우리 둘째 언니 딸하고 무학여고 동기동창이야. 친한 친구야. 그러니까는 내가 도립에 있을 때 내 분장실을 찾아 왔어요. 우리가 딸여섯에 내가 막내거든요. 우리 조카들이 나를 ‘꼬마이모’ 그러니까 걔도 단발머리할 때 ‘꼬마이모, 꼬마이모’ 그랬거든요. 주박사가 ‘아니 꼬마이모 여기 있으면서 왜 자기는 봤는데도 난 모르는 척하고 그랬느냐’고...... 우리 조카를 만났는데 ‘야 너는 우리 꼬마이모가 거기 도립국악단 악장으로 있는데 넌 그것도 모르냐?’ 그랬다고 욕을 먹었다고 찾아 왔더라고. 그리고는 ‘이모님 뭐 내가 뭐를 도와주면 좋겠냐?’ 그러더라고. 그때 도립국악단이 70명인가, 72명인가 그랬는데 월급이 최하였었어요. 생긴지가 얼마 안되니까..... 그래서 월급이 너무 적다고 그랬더니 그때 당시에 30%를 올려줬어요.”
임씨는 경기도립국악원의 전신인 국악단을 만드는 일에 헌신한다. 임창열 지사 재임시절 관사까지 찾아가며 애를 쓴 결과였다.
“내가 인생 살 때 70이 넘도록..., 지금 3년만 있으면 80이 되는데, 내가 남한테 나쁘게 안 하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게 그런 일들을 겪었어. 그래도 아는 사람은 다 알죠. 그래서 국악단도 만들어지고 그렇게 해서 지금 후배들이 국악단에 가서 있으니까, 내 나름대로는 좋은데.....”
“우리 애들이 거기 있는 애들이 둘이나 나왔잖아. 그런데 거기 지금 민요를 더 뽑아야 되는데, 우리 애들이 가서 시험보고 2년을 뽑는다 그래놓고, 한 사람도 안 뽑고 이렇게 올 스톱을 하고 있거든요. 그 전에는 민요 때문에 그걸 만들어 준 건데......”
임씨는 경기소리를 위해 도립창극단을 만들기 위해 노력중이다. 경기소리전수관에서 세미나를 열고 억대가 넘는 돈을 들여 6번의 소리극을 열었다. 후학들을 위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늙어 가지고 뭔 욕심이 있겠어요? 애들 저렇게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원까지 나와 지금 박사코스 밟는 애들이 두 명이나 되고. 지금 30명이나 돼요. 내가 초등학교부터 가르쳐서 대학 나온 애들이..... 그러니 내가 얼마나 답답하냐고.... 내 얼굴만 쳐다 보고 있는데 속상한 거야.... 어린 아이들은 고등학교 3학년 언니들이 갈 자리가 없어서 노는 거 보고 다른데로 가는거야. 그러니 얼마나 속상 하냐고..... 애들이 설 곳이 없잖아. 그러니까 학생들이 자꾸 줄어들잖아.”
2003년부터는 아이들을 위한 소리극 [낚시대장 얼이]를 만들어 공연중이다.
“소리 배우기도 힘들었어. 내가 벌어서 공부 하는 것도 내야 되니까, 서울 가서 고생하면서..... 오죽하면 버스 그거 몇 십 원을 아끼느라고 신당동에서 종로 3가까지 걸어 다녔어. ‘그때 뭐 녹음기가 있어요 뭐가 있어요?’ 가서 배우다가 잊어버리면 외우느라고 중얼중얼 하면서 다니다가 오바에 손 넣고 다니면서 외다가 전봇대를 받아가지고 머리가 터질 뻔 했다고......”
“박동진 선생님, 박귀희 선생님, 김소희 선생님 수많은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명창들이 다 우리 할아버지가 민든 대동가극단의 맥을 잇겠다고..... 내가 70에 공연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3,500석을 채워서 표를 팔아서 8,700만 원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 애들이 6,700만 원을 칠순잔치 적금을 들어서 해다 줘서, 그거 1억 7천을 들여서 과천시에서 2,000만 원 타. 그래 가지고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채워서 공연을 했어요.
대동강 3시간 반 공연... 대작을 만든거예요. 200명이 더 나왔어. [대동가극단 맥을 잇다]를 공연한 거예요. 그 대동가극단 안에는 줄타기도 있고.... 옛날에 연극도 하고, 땅재주도 하고, 모두 다 있다고.....”
“과천에서 줄타기도 안성에 있는 걸 데려다 놓은거예요. 김대균 씨를 처음에 이쪽으로 모셔오게 한게 저예요. 문화원장하고 같이 이쪽으로 모셔오게 한 거예요. 그래서 안성에 있는 거를 이리로 모셔온거예요. 우리 오촌 당숙 임상문 선생님이 줄을 타고 그 밑에서 김영철 씨는 할머니가 임씨네 딸이야 내가 ‘오빠,오빠’하면서 같이 동네에서 자랐잖아. 그 분이 문화재가 된 거야. 임상문 선생님 일찍 돌아가셔서 문화재가 안 되고.....,
근데 그 오빠가 문화재 되는 바람에 지금 제자잖아. 돌아갔잖아요. 찬우물이 원 고향이지. 그거 그게 유네스코까지 갔거든. 그러니 이제는 과천에서 전수관을 지어주어야 해요.”
(대동가극단 이야기를 해 주세요)
“대동가극단은 처음에 찬우물에서 시작해 전국을 다니고 만주, 일본까지 다녔죠. 할아버지께서 시작 하셔서 내가 대동가극단 마지막 세대가 됐던 거고...... 큰할아버지는 단장을 하고, 둘째할아버지는 가야금이 유명 하세요. 그래서 양승희 씨가 죽파류...... 논문쓸 때 첫 번에 김창조씨가 들어가고, 우리 할아버지 함자가 임자 종자 성자신데 그렇게 들어가고, 셋째 할아버지는 또 피리, 새납 그걸 최고로 잘 불었어요. 그 할아버지는.... 마지막 조금앵 단체, 여성국극단 69년 문 닫을 때까지 거기서 새납 하시고..... 둘째 언니도 그 단체를 다녔고.....7살부터 다녔어요....자료가 많았는데..... 우리 언니가 스물네살에 청주공연 갔다 우리 형부를 만나 가지고 형부가 못 다니게 해 가지고 딱 결혼해 들어 앉혀서....그거 광대집 없애느라고 자료를 다 태운 거야. 6·25나고.....자료가 한 개도 없는 거야. 일부러 태워서......”
“대동가극단 앨범이 있었어요. 내가 누렇게 변한 사진이 있었어. 옛날에는 얼굴을 동그랗게 주욱 있는 사진이..... 대동강 부벽루에서도 공연 끝나고 찍은 사진도 있었고.... 옛날에는 집 대청마루에 사진들 주욱 걸고..... 거기에 언니 사진도 있었는데 그거 다 불태워 버린 거야. 또 집안 여자로 임명월, 임명옥 고모뻘 되는 두 분이 그때 당시에 여잔데도 줄을 타고 소리를 했고, 연극을 했고.... 우리 언니도 창극을 하면 이도령 역할을 했데. 우리 언니가 판소리를 한 거야. 경기 사람이 판소리하는 걸 중고제라 그러잖아. 중고제는 없어졌으니까.....흔적도 못찾아. 중고제 그거 도립에서 세미나 했었어요. 중고제 때문에 왜 찾을 길이 없어서..... CD 하나 남겨 놓지 못해서.... 다들 하긴 했어도 남겨놓질 못하고 돌아가신 거야.”
(2019.4.8. 경기소리전수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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