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육군사관학교에 34기로 입학한 이준구 장군. 백골 부대장, 육군본부 군수참모부 장비정비처장, 39사단장, 국방부 군수관리관, 제7기동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군 최초로 유엔군 사령부 주요참모로 앙골라에 파병 근무 후 한미 연합사 처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국제정치학박사.
이장군은 현 추사박물관 아래 건물 2채가 있는데, 그곳에서 1955년에 났고 분당에 산다.
예편 뒤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이 장군 사무실에는 광개토대왕비 탁본이 크게 붙어 있다.
“일본인들의 트라우마는 섬나라로 단절되어 살아서 미개인으로 살았다는 거야. 하지만 일본은 왕조는 끊이지 않는다는 걸 자랑하지. 중국땅은 명칭을 동아시아 대륙으로 바꾸어야 해. 하은주 시절부터 동아시아 대륙의 생존 전쟁으로 요동칠 때 일본은 없었던 거야. 우리하고는 인식이 달라. 한족의 중국도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고 있고.......동아시아 대륙역사와 세계사를 보는 다른 시각이 필요해요.”
구글지도가 다른 한쪽 벽을 채운다.
“고구려의 그 넓었던 영토를 가졌던 한민족 세력이 그 지역을 모두 잃고, 대륙을 감히 넘보지 못했어. 그러니 이성계 같은 인물이 나타난 거지. 절호의 기회였지.......당시 동아시아대륙의 북만주를 이성계는 통치할 자신이 없었지. 돌아보면 점령 후 원 과 명 관계를 이용해 통치가 가능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당시 한반도 지배층 머리에 서계전략이 없었던 이유는 어느 정도 까지는 굉장히 잘하면서도 그 이상 천정을 뚫고 나가려는 생각 자체를 못했기 때문이었을거야......”
군인은 행복한 직업이었다고 회고한다. 치열한 경쟁이지만, 그건 어느 선까지라는 규제된 경쟁이었다. 가장 투명사회가 군 밖에 없다고 한다. 군인은 사실상 개인 사생활이 없다. 자식, 부모, 상하 관계 전부를 노출시켜야 한다. 제대를 하고보니, 몇천 배 생존경쟁이 심각하더라고. 일말의 틈도 없고, 모든 공간이 이익 연결선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알겠더라고. 민간인들이 숨 막히게 사는 이유를 알겠더라고. 얼굴이 찌든 이유를 알겠다고 회고한다.
삼성이 세계시장에 1등하게 된 것이, 그간 한반도 종족의 수천 년 한(恨)이 에너지가 되어 분출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한국인의 열정이 사그라지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은 이제 민주주의를 느끼고 있다. 과거 시대는 이익 아닌 공포와 강요, 부패의 시대였다. 지금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가는 이유는 시대 흐름을 잘못 이해한 지식인들과 정치세력들의 강요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부패행위를 대놓고 할 수 없으니, 이익으로 유혹하는 포퓰리즘이 나타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영원히 소멸할 수 없다. 원시시대부터 발전된 인간 공동체 생존사업기구 운영체제이기 때문이다. 국가통치 권력 중심이 정치세력 집단지배에서 서서이 소집단을 거쳐 개인으로 이동중이다.
“그리스 페리클레스 이후 권력의 운영방식, 힘의 운영방식이 전략이야. 우리나라는 유럽보다 미국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지. 유럽 민주주의는 귀족, 대지주가 살아있어. 유럽 보수파는 귀족과 대지주를 보호하지. 테임즈 강가 곳곳에 ‘이 강과 모든 부속물은 여왕 소유에 속한다.’고 써있어.
조선에서 왕이 준 봉토는 언제든 빼앗을 수 있었지. 북한의 자유는 왕이 허락하는 자유야. 이동도 못하는 자유인 것이지. 그 당시 일본에 갔다가 그 이유를 찾은 것이 이승만이야. 이후 박정희가 나타나 먹고 사는 거 해결했는데, 이명박, 박근혜가 실수하는 바람에 올바른 바른 정치세력이 없으니, 그러니 권력이 좌파로 갈 수밖에 없지. 지금 언론은 민주주의 위기로 보지만, 8,90년대는 독재의 연장이었어. 아직도 대통령을 왕으로 착각하지. 그러나 ‘대통령은 내 대리인이다.’라는 생각을 한국인이 요즘 들어 조금씩 늘고 있지. 한국인이 진짜 자유를 느끼기 시작한 거야.”
이장군은 BTS가 세계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을 예로 들어 한국에 희망이 있다고 전망한다. 혼란이 있을지언정 독재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국가혁신지수 세계 1위가 최근 10년 사이에 한국에서 독일로 넘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IT는 IQ와 직결되어 있는데, 독일이 추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혁신을 주도하는 세력은 기업가들이라 단언한다. 이제는 군사력으로 땅따먹기하는 시대가 아니라, 경제력 기술과 혁신으로 한다는 것이다. 생존 군사전쟁을 경제전쟁이 대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현역시절 부터 목표를 세워 [생존 전쟁 선택 : 손자병법과 대한민국]을 집필 중이다.
“2050년이면 중국은 대국굴기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대전략 최정상 포인트는 미국이냐 중국이냐 결정되는 시기야. 그래서 부제를 [대한민국은 2050년 생존할 것인가?]로 달았어요. 경제력만으로도 안 되죠. 개방성, 투명사회, 경쟁 사회로 가야 되요. 한국은 평등을 강조해요. 일본, 중국은 절대 그렇지 않아요. 동남아 중 유일한 민주주의를 세운 나라예요.”
“이스라엘은 군사력으로 경제력을 일군 나라예요. 군사기술을 경제에 이용한 나라지요. 미국은 독특한 식민지였음에도 영국 보호가 커서 독립하면서 공업기술을 들여와 영국을 벗어난 거예요. 미국의 독자적인 산업혁명은 1776년부터예요. 그 이전 1760년에 산업혁명이 시작됐지만, 영국이 미국개발에 열심을 내면서 영국이 자신들도 상상 못했던 제도를 만든 거예요. 영국이 만든 회사가 미국에 도입됐죠. 그전엔 강제노동 시대였어요. 그러나 잘하는 만큼 자유와 이익을 보장해주는 제도를 버지니아 컴퍼니가 제시하죠. 세계역사상 최초로 노동자들에게 제시하죠. 그것이 인센티브 제도예요. 기존 전통 구조 속에서 ‘개인 자유’를 뽑아 낸 거죠. 버지니아 컴퍼니가 스페인이 남미에 했던 유럽식 강제노동 강요로 안 되니까 인디언과 싸움을 하게 된 거예요.
완전한 자유을 보장하고 인센티브로 모든 노동 통제가 가능하다는 걸 버지니아에서 보여준 거예요. 주민들이 자유인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고 나니 ‘우리 대표는 너희가 아니다. 임금 받고 일해 주는 거다’라는 자치제도가 시작된거죠. 풀뿌리 민주주의가 확산 시작인 거예요.
그러다가 영국이 세금을 올리니, 티파티에서 반발하게 되고 독립혁명이 일어난 거죠. 워싱턴은 독립군 대장으로서 황제의 지위로 오르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어요. 될 수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백인들은 통제 불가능하다는 걸 안 거예요. 그래서 왕이 없는 대통령제를 선택하게 되죠. 워싱턴은 그래서 미국인들의 영웅이죠!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인 것 같죠? 오히려 그런 치열함이 강점이예요. 지금 혼란은 경찰이 수습하지 군을 투입할 생각도 안해요. 저러다 수습이 되요. 민주주의는 인류 지향의 가치라 없어지지 않아요. 인류의 지향점인 자유와 이익 기반으로 돌아 오게 되요.”
그는 지금 과천을 주시한다. 그걸 실현할 여건이라는 것이다. 주암동 인구가 폭발할 것인데. 그 이유는 이익 있는 도시에 몰리게 되있기 때문이라는 것. 대공원이 최고 강점이 될 것이며, 과천 전체가 공원이고, 그 가운데 아파트가 있으니, 집값이 비싸게 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군에 있을 때 부하들에게 자유토론을 하게 했다. 독일이 세계를 제패한 비결이 임무형 지휘라는 것. 1805년 나폴레옹 독일 점령 전까지는 프리드리히 대왕 아래 최강의 군사국가였지만, 피히테의 국민주의(내셔날리즘 민족주의가 아닌 국민주의라 번역해야 맞다) 아래서는 자진해서 입대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소통이 필요하고, 완전소통이라는 개념이 철저한 상명하복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극복한다고 생각하며, 임무형 지휘를 제대로 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한다.
과천의 발전을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게 길이라고 말한다.
“역사의 전개는 이동통로에서 시작됐어요. 도(道) 길, 옛날 길은 육상통로가 거의 없었고 물길이 중심이었죠. 송파로부터 도로는 군사이동 때문에 도로가 닦여지기 시작했어요. 과천의 역사는 고대정부 정책결정 과정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결정되었는지 추적해봐야 해요.”
“시흥군에 과천면을 편입시킨 이유가 뭘까요?’ 일본이 동양척식회사를 내세워 국가 지형 측량을 산악중심으로 경계를 설정했던 거예요. 최초의 과학적 행정구역 경계선이 능선을 중심으로 시·도경계를 이루게 된 거예요.”
“과천 땅값이 서울보다 더 비싼 이유를 이익이 있는 지역으로 모인다는 원리에서 찾아야 해요. 그러면 미래의 과천 이익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요.”
“과천향토사연구회도 앞으로는 사람보다 사건을 찾아야 해요. 서울랜드, 경마장이 없었으면 벌써 과천 인구가 30만 되었을걸요. 그건 과천을 쪼그라들게 만든 사건이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유치하려 했었지...... 과천은 수도권의 오지였어요. 전기, 버스도 안양을 통해 들어왔어요. 1번도로가 시흥군으로 나갔기 때문이예요.
결론은 중심도로나 중앙과 연결되는 중심길을 내야 한다는 거예요. 과천시장들이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내, 미래를 준비해야 해요.”
과천향토사연구회도 유교적 시각에서 전승을 보전하는 데만 골몰하지 말고 흐름을 뒤집어 보고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2020.11.18. 연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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