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씨는 옥탑골에서 났다. 지식정보타운 학교부지가 그의 집터다. 5대조 할아버지께서 과천에 터를 잡으시면서 농사를 지으셨다. 고조할아버지께서 지으신 초가를 아버지께서 기와집으로 고쳐 지으셨다. 서울서 전에 살던 한옥을 해체해 옮겨와서 모자라는 나무를 더해 지으셨다. 그 집을 70년대, 90년대에 고씨가 고쳐 짓고 살았다. 지식정보타운이 들어서면서 땅을 내주게 되면서, 셋골에 옮겨 살고 있다. 대토를 받아 2023년에는 이주단지에 집을 지을 생각이다.

“3살 때, 6·25가 났어요. 아버지는 군인 나가시고, 할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와 내가, 피난을 가야했지요. 쌀 세말을 엿을 고아서 지게에 얹고, 그 위에 쌀 세 말을 얹고, 이불 얹고.....그리고 그 위에 세 살 난 나를 올리고 피난을 가셨데요. 인덕원 쯤 나가서 할아버지께서 무거워서 엿을 길 옆에 내려놓고 가셨는데, 따라 오던 동네 사람이 지고 오더래요. 그 해 겨울이 엄청 추웠대요. 만삭이신 어머니께서 가시던 도중에, 내 동생을 낳으셨어요. 길 가다 낳았다 해서, 그 아이 이름이 길자예요.”

 

우리집 부엌이 3칸 반이었으니, 제법 컸지요. 한가운데 땅을 파고, 쌀 세 가마를 묻고, 나무로 덮어놓고 피난 갔다 돌아오니 누가 다 파 가고, 집에는 피난민들이 방마다 가득 자리를 잡고 있었대요.”

 

대농이었다. 쌀농사도 지었고, 초식(채소)농사를 지으면 시흥 등지에서 상인들이 차로 실어 갔다. 고씨는 일찍부터 동네일을 봤다. 이장, 통장, 새마을지도자, 영농기술자회 등에서 회장직을 역임했다.

 

고씨는 과천소각장이 들어설 때도 일을 맡았다. 입지선정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박모씨가 시의원이 되고, 그의 집 자리를 중심으로 입지가 결정되자, 마을주민 44명이 반대기금을 모으면서 일이 커졌다. 정부는 소각장 반경 500미터 내의 주민들을 위한 보상을 하게 됐고, 대책위가 만든 조합에 소를 사 주고, 각종 농기구를 제공해 공동사업장으로 운영하게 했다.

 

소가 한 때는 500여 마리까지 됐지요. 소에게 먹일 밀을 심기 위해, 소를 팔아 근처 땅을 산 것이 문제가 돼서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어요. 나중엔 그 땅이 전부 지식정보타운으로 수용되면서 마무리 됐어요. 소각장 인근 언덕 넘어 세곡마을에서는 당시에 7가구가 소를 키우고 있어서 소는 필요 없으니, 마을길을 넓히는 등 몇 가지 사업을 해주는 것으로, 보상협의가 마무리 됐어요. 그때 70억 정도가 투자됐어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정부보조금 사업에 눈을 떴다. 당시 비닐하우스는 대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비닐을 씌워 놔서,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바람에 날아가는 판이었다. 고씨는 파이프하우스에 눈을 돌렸다. 작목반을 만들어 보조금을 통해 파이프하우스를 지었다. 당시 이성환 시장님의 결단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그 바람에 갈현동 말고도 문원동, 과천동, 주암동, 화훼단지 등 과천의 많은 농민들이 혜택을 받고 경제적인 기틀이 되어 지금의 시설채소와 화훼농가로 번창하게 되었죠.”

 

그 뒤에 농민들이 기른 채소들을 팔기 위해서, 지금의 굴다리 시장이 만들어졌다. 시장 아래쪽에는 상인들이 자리 잡고, 위쪽에는 농민들이 직거래용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거기도 판매를 위해 시설채소작목반이 조직되었다.

 

과천초등학교 총동창회가 창립되고,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시작할 때도, 선배들이 일은 벌여 놓고 도중에 문제가 생기면, 그를 불러다 뒷수습을 맡겼다. 그는 그렇게 묵묵히 뒤에서 수습하는 일을 감당했다.

 

어느 해엔가 박정희 대통령이 동네에 모내기 시범을 한다고 하더니, 한참 전부터 사복을 입은 형사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이장인 나한테 동네 개들을 좀 묶어 놓고 길러라.’고 참견하고.....그래서 그랬어요. ‘시골에서 누가 개를 묶어 놓고 기르느냐고.....’”

 

군사정권 덕을 보기도 했다. 지금 지식정보타운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당시 50미터 도로라 해서 넓게 닦아 놓는 바람에, 양쪽을 오가는 노인들과 학생들 여럿이 죽고 사고가 잦았다. 오죽하면 이웃동네에서는 사고 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길에서 굿을 다 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온다니까, 그 전에 김계원 비서실장이 내려왔어요. 동네 유지들을 모아 놓고는 무엇을 도와 줄까?’고 물어요. 그래서 ‘50미터 도로에 사고가 잦다. 조치 해달라. 그리고 동네 전화가 없으니, 사고가 나도 면사무소가 있는 읍내까지 나가야 한다. 불편하다.’ 했더니, 다음날 50미터 도로에는 사이카가 양쪽에서 나와 있고, 몇 일 뒤에는 마을회관에 백색전화가 나오더라구요.”

 

65년에 마을 마다 리동조합이 있었다. 농협사업의 시초다. 71년에 통폐합 되어 강명희 씨가 1대 조합장이 된다. 당시 농사를 짓던 이들 대부분이 조합원이 된다.

 

조합이사가 될 무렵에, 감사를 지내신 분이 대단한 어르신이셨어요. 70년 초반 신도시 수용에 땅이 수용되고, 거액을 과천농협에 맡기셨어요. 당시 그 분과 비슷한 거액을 보상 받으신 분은 다른 땅을 사두었다가, 건물을 짓고 값이 올라 큰 부자가 됐어요. 10년 넘게 예금해 두신 감사님은 이자로 생활하시고 계셨죠. 그런 선배를 찾아가 이제 다른 후배에게 감사 자리를 양보해 주십사부탁드려야 하는 일을 내가 하게 됐지요.”

 

2012년 고씨는 1,300여 명이 조합원인 과천농협 12대 조합장이 되어 14대까지 조합장을 역임했다. 들어가서 보니 부실대출이 너무 많았다.

 

조합장은 대출에 관여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결재는 상임이사가 하고, 조합장은 대출심사회의에도 참여할 수 없어요. 그래도 부실대출을 정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2021.10.28. 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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