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에서 태어나 어렵게 살았지. 아버지는 노력동원 나가서 나중에 돌아오시고.....,남들은 중학교 간다 그럴 때 못 가구 땔나무장사를 시작했어요. 농사 지어가면서.... 과천에서 안양으로 먼저 갔어요. 네 시에 일어나 안양 가면 다섯 시 반 구시장 다리 건너 소시장이요. 댕기다가 서울로 흑석동 전철정거장 옆으로 그때는 여럿이 갔지. 마차 끄는 거는 나중이야. 포장도로 말죽거리만 남태령은 도로가 없다고 양쪽 등성이 우측 뻘건 집 하나 있을 거야. 꼭대기에......,이렇게 겨우 사람 하나만 넘어 다니다가.....자꾸 사람이 많이 가니까......, 소 마차가 안댕기구 소등에다가 나무로 엮어서 양쪽에 나무 싣고 가운데 싣고 그리 올라갔다구. 시오리 가다보니까 과천에 아직 전깃불도 안 들어오고..... 전깃불은 청사 있는 쪽.....남태령은 내가 열 네 살인가 길을 뚫었어요. 전기가 늦게 들어와서 우리집 앞으로 해서 끌고 그랬는데......, 남태령도 안양서 버스가 하루에 세 번 다니고 과천에서도 용산까지 세 번 다니고.....,과천에 삼거리 묵장수가 많았어요. 묵 실어다주고 그랬지.....,국회의원 이재영이 이택돈 전에 세사람이에요. 국회의원 나오면 남태령을 뚫어주겠다 그래서 당선이 됐어요. 하루에 세 번 다녔지요. 해방 전에는 차가 다녔는지 생각이 안나. 말죽거리는 막 다녔고.....옛길에는 소 한 마리 다닐 정도였고.......

나무장사 다닐 적에 아버지가 돌아오셨어. 그래서 인사도 안하고 나 내일부터는 나무장사 안해요.’ 그랬던 생각이 나.”

 

그러다 농사짓다가 동네서 누가 돌아가시면 내가 수세를 거둬주고 그랬어요. 왜 수세를 거둬 줬느냐면 시흥사람이 과천 와서 장의사를 하는 걸 내가 지도자를 하기 때문에 과천 거를 웬만하면 다 끌어다 줬다구. 그래 누가 돌아가시면 수세 거둬주고 사잣밥하라 그러고 키에다 사잣밥 놓으라 그러고 동전하고...., 그리고 시체는 안방 윗목에 모시고 장 같은거는 다 내놓고....., 돌아가신 분 이름하고 적삼윗도리 하나 가지고 네 군데다 경기도 시흥군 뭐뭐 하면서.....,대문 앞에 나오면 오른쪽에 사잣밥을 놓고 밖에 나와서 윗도리를 세 번 흔들어. 초를 읽어 가면서......,그리고 지붕 위에 얹어 놓는다구....,

그걸 왜 올려 놓느냐면 시골에는 집들이 주욱 있는데 논,밭에 가다가도 지붕에 옷이 올라 있으면 누구네 초상 났구나.’ 하고 서로들 오지 말래도 다와. 그때는 전화가 없으니까..... 그러면 동네에서 일할 사람을 한 사람을 뽑지. 그때 아마 장대영이가 면장 했을거야. 그때 부고 이렇게 써주면 프린트하고 그랬지 옛날 얘기야. 그렇게 수세 거둬주고 그 이튿날 염도 해주고 염은 언제나 열 두시에 했어요. 돌아가신 날 안하고...,긴 삼일이니까 손님을 저녁때 받고 밤에 해주고 그랬지.”

 

그래 나도 소리를 안했어요. 노인네들이 계시는데 그러다 다 돌아가셔 가지고....., 뒷골 성만식이 어머님인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김충원 씨가 이장을 봤어요. 나는 동네일만 보고.....,근데 상여를 꾸며 놨는데 소리할 사람이 없는거야. 근데 산판이 어디냐면 청계 외미라는 곳이 있었어요. 서씨네 종중 뫼. 그래, 충원이가 몇 마디 하다가 못하겠다 그래. ‘자네가 나아그래 나는 뭐 언제 배웠나. 그래 내가 허구 갔어요. 문제는 뭐냐. 하관을 모신거야. 그래 달구소리를 해야 하는데 사람이 없어. 그래 내가 했어. 그랬더니 노인네들이 부전자전이라 그러더라구.....,그래 내가 할 줄 몰라도 안양까지 가고 주암리에도 가구, 최명식이 사는 동네까지 가서 하고.....,할 줄 몰라도 할 사람이 없어서 갔는데......끝나면 뭐가 나쁘냐 하면 초상나면 돈이 많이 나와......, 그러면 꼭 이 돈을 준다고.....,동네서 오야가 있어요. 오야가 돈을 받아가지고 북치고 그러니까 나 얼마주고 노인네들, 부녀회, 노인정 죄 나눠준다고....,그리고 남은 돈은 초상집에서 그렇게 먹어도 가겟집에 가서 또 먹는다고.....,그러다 80년도엔가 81년인가 내가 새마을지도자로 들어갔어요.”

 

우리 아버님 함자가 이 용자 운자이신데 삼거리 그 양반이 회장 해 가지고 그때도 대회 나가고 그랬지. 우리 아버님이 꽹가리를 잘 치셨어. 그래서 내가 뭘하면 부전자전이란다고.....,사실 소리도 좀 배워야 돼.....,과천수영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200745일 날 최종수가 전국문화원연합회장을 하고 이영구가 과천문화원장 하고 있었는데 찾아와서 좀 도와 달라는 거야. 매일 2시부터 4시까지 문원중학교 체육관에서 연습을 했어. 7,80명이 지게를 열 갠가 엮어 가지고 그걸로 상여를 해가며 소리를 하더라구.....,그리고 뒤에서 장구 치구 또 그 뒤에서 옛날에 그 광주리에 술 그런 거 내오잖아. 그렇게 하더라구. 그래 처음 갔으니까 뒤에 따라 하는데. 아니 이틀도 안 됐는데 종을 갖다 주는 거야. 목청이 좋다고......그렇게 연습을 한참 했어요.”

 

“92일 날 안산 호수공원으로 갔는데....,그때 면..시 그래 가지고 32개 시야. 근데 두 군덴가 한 군데가 안 나오고.....거기서 1등을 했어요. 1등을 해 가지고......,굉장하지 뭐. 그래가지고 도 대표로 뽑힌 거야. 그래서 도 대회를 나가야 되는데 연습을 하는데 청사 마당에서 하니깐 이 상여소리 장구소리 나니까 주민들이 소리 난다고 경찰서로 막 저기 해 가지고 경마장으로 간 거야. 전국대회 나가는데......., 제주도로 간 거야. 경마장에서 하루에 4시간씩 몇 개월을 연습을 했어. 그래서 제주도를 갔는데 한 백 여 명이 갔나봐. 많이 갔어. 거기서 삼일인가, 이틀 연습을 해가지고 이등을 했어요. 일등은 못하고....,이등도 잘 한 거지.”

 

그게 옛날에는 산판을 많이 쓰기 때문에 초상나면 꼭 상여로 해결을 해야 되는데 근데 지금 돌아가시면 화장터로 가니까......누가 배우려고 들지 않아...... 그때 인제 이복술이가 나를 회장을 시키는 걸 나는 회장을 못 한다. 집사람을 간호해야 하기 때문에.....그냥 나는 어디 갈 때는 나오고....., 그 회장은 맨날 나가야 되잖아. 그래서 이복술이를 시켰어요. 내가. 그래 이복술이가 하긴 해. 근데도 꼭 토요일 날, 일요일 날 행사 있으면 꼭 해. 오라 그런다고. 지금도 가서 허구 그러지. 가끔 시간 있을 때는 애들이 집에 있을 때는 가서 연습도 하고....”

 

내가 사실 확인은 그 새마을 때문에 일도 많이 했지만 그때 과천에 그 시청이 가건물이었잖아. 가건물이고 지금 어디냐면 거기가 시민회관 고 아래 가건물로 있었잖아. 그리고 인제 과천동으로 북부 이쪽으로 남부 이렇게 두 군데가 이제 말하자면 동사무소와 마찬가지야. 그때 내가 협의회장을 보고......사실 그때 일들 많이 했어요. 전부 다. 왜 그러냐면 3단지가 5층 건물 아냐. 연탄불 땠는데....,강원도 정선군 하고 자매 결연을 맺어서. 내가 그때 정선군 가서 놀란 게 뭐냐면 거기 지회장 하고 군수래......우리 차가 한 차 갔거든. 나물도 뜯고 그런다고......그런 군수 처음 봤어. 같이 이렇게 밥을 안 먹고 우리 새마을지도자 한 차 간 사람들은 한 군데서 먹고 군수하고 나하고 따로 가서 식사대접을 해주더라구.....,그렇게 잘해줘......그래서 저렇게 이렇게 하다 보니까 서루 거긴 농사 짓는 거 무 그런거 팔 거 있으면 과천에서 다 팔아줬어. 애들 많이 썼지. 쌀이 아무리 반 가마씩 담았어도 이놈의 아파트가 그때는 전부 5층짜리 지구 올라가야......왜 꼭 뭐 팔면 하필 4, 5층에 가......”

 

아버님께서 오시고 징용 나가서 다녀오시고...., 그때서부터 아버님은 농사 같이 지으면서 땔나무는 안했지.”

 

내가 그때 동네일을 시작을 해 가지고.....,그 때는 지도자가 다 전부 인제 일을 하고 그러면 방송을 해. 그러면 노인네가 그래 방송 한다 어이 가봐라.’ 그러면 일하다가 다 가. 그래 동네 뭐 일하면 내가 나이가 제일 어리고 그러니....,돌아가신 세 사람이 있었어요. 박부영이라고 보험 설계하는 사람하고 세 명 있었는데.....,동네 논 매고 그러면 심부름 다 하고.....,한상정은 야 태종아, 지게지고 얼른 가져와라.’ 그럼 벌써 난 알아듣고 누구네 집 가서 이제 꽹가리, 장구 지게에 지고 가는데 그러면 이제 술 먹고 이제 한번 두들기구 그랬어.”

 

왜 과천에 나무꾼 얘기가 많이 나올까? 이게 처음에 문원동에서 나무하러 다니는 사람이 한 대여섯 명 있었어. 그러면 언제든 개구쟁이들이 몇 명 있잖아? 다섯이 가면 지게를 엎어놔. 그리고 이제 작대기 있잖아 그 작대기를 뒤에다 이렇게 놓고 네 명이 이렇게 미는 거야. 그러면 나는 이제 작대기 두드려가며 소리 하고.......그래서 이게 이렇게 된 거야. 그게 과천 나무꾼놀이 아냐? 지금 문화원에 무동답교놀이가 있고, 나무꾼놀이가 따로 있고 그렇지.......”

 

옛날에는 동네마다 행여(상여)가 다 있었어요. 동네서 한 사람이 책임을 지고 동네서 초상나면 이 사람이 끌고 갔다가......,한번 빌려가면 돈 얼마씩 받았어요. 그때 얼마 돈 나온 거로 행여값 따로 주고...., 그 사람 행여 가지고 다닌 사람 얼마 주고 웬만하면 상제한테 돈을 받지만 웬만하면 여기서 다 하고 그랬어요. 과천서 어느 집 가면 누가 잘사느니 어떤 사위가 잘 사느니 하면 돈을 뜯어 가지고 그런 돈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았다가 삼오 날 그냥 그 집 식구들 안볼 제 그 집 큰 아들을 다 주지. 그건 웬만한 사람들은 몰라요. 몰래 몇 사람만 알지..... ”

 

초상이 나면 행여를 미리 꾸며놔. 꾸며놨다가 저녁에 장양을 해요. 그리고 이튿날은 초상날은 그냥 인사만 하고 바로 가고 이제 처음에 초상나고 뭐 하면 행여 꾸밀 때 제일 키 큰 사람이 뒤에 서고 작은 사람의 앞에 서지. 행여를 다 미고 나서 두 번 반을 절을 해. 그리고 상제들하고 전부 다 맞절을 하지. 미구 와서 2번 반을 절을 해. 절을 하면서 내가 이제 종을 치면서 나무아미타불....’ 하면 이제 절하고 또 흔들며 일어나며 두 번 반을 하지.....”

 

(과천홍수이야기)

그 때 관악산이 돌 개울 아녜요? 그래 가지고 그 때도 하천이 좀 좁고 그냥 이렇게 공구리 친 게 없잖아요. 그래 뭐를 걱정을 했었느냐면 이게 인제 하천아냐, 그러면 나무가 떠 내려온다고.....나무가 떠 내려오면 여기가 다 걸쳐서 막히니까 물이 위로 넘어가지고 과천에 집들도 떠내려가고 그랬지. 사당 쪽도 길이 없어지고....안양은 그 한번 되게 크게 망하고 사당동은 고개만...... 장마만 지면은 고개 넘어서부터 배 타고 가야 돼요. 그때들 노인네들 돌아가셨지만 그 배 타고 다닐 때도 고생들 많았지요. 그러고 나두 땔나무장사 할 적에 과천에서 남태령을 걸어 가지고 용산까지 갔었어요. 용산까지 가면은 대리로 안 가고 나룻배라고 있었어요. 뭐냐면 큰 이렇게 나무로 그렇게 뗏목 엮듯이 엮고 판자 얹어서 지렛대 같은걸루 이렇게 서서......”

 

(6·25 이야기)

 

과천 홍천말에서 이쪽 찬우물로 해서 수원으로 피란을 가는데 길에 발 디딜 데가 없어. 사람 죄 죽어서....,폭격을 해가지고.....,근데 그때도요 사람들이 막 뛰고 살려고 그러는데 비행기에서 뛰고 그러는 건 다 쐈어. 그리고 그냥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은 가만두고.....그래서 많이 죽었어요. 말도 못 했어요.”

 

피란 갔다 집에 들어오니깐 중국군이 차지하고 있길래 주인이라고 그러니까 안방을.....,피란꾼이 꽉 찼지. 근데 안방을 싹 비워주더라구.....그때 중국을 다시 본 거예요.”

 

나는 지도자도 하고 그랬지만 안 해 본 건 없습니다. 그 얘기지만 직장에도 기아산업 당기고...... 어디다 이렇게 딱 한 가지만 못한 게 원이 뭐냐면 연탄 장수.....장사도 배추 팔구 그런 것도 해 보고 원체 어려우니까 그냥 시간만 있으면 가서 뭐 하구 그랬어요. 나는 남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댕긴다고 할때 학교도 못 가고 저녁 때 인제 일하면 야간 중학교라고 있었어요.”

그때 한일 거기서 했는데....저녁 일곱시 나 여덟시에 가서 1시간은 하는데 하루 왼종일 일하고, 공부가 들어가?’ 그리고 또 와서 밤새고 또 가을이면 벼 털러 가면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가야 돼. 그러니 조금만 배우다 못한거지......그때 그 학교가 지금 한일고등학교라고 그 뒤에 있었어요. 거기 헐구 다시 지은거죠. 지금 과천 그때 우리 또래가, 향교라고 있죠? 향교 은행나무 밑에서 많이 했지요. 왜 그러냐 하면 학교는 불타서 없지 그 안에서 공부하다 덥고 그럼 관악산 가서 하고 그랬지. 우리가 한 반에 20명은 넘었어요. 1개 반이.....,그때는 2개반 있었거든. 그러면은 학년별로 다 2개 반씩 정도는......그러면은 책가방은 헝겊에다 해가지고 메고 비 오면 부대 이렇게 머리에 얹어 가지고......그리고 운동화 온전한 게 없으니까 집세기도 있구. 겨다(게다) 그런데 검은 신발도 그건 부잣집이나 있지.”

 

이씨는 농사지을 때 소를 몰면서 이려, 이려, 낄낄하고 소리를 내는 대신에 휘파람을 불어서 소를 부렸다. 그걸 지나가던 자가용을 탄 부부가 보더니 서울에서 공연을 하자고 해서 따라가서 공연을 한 적도 있었다.

 

(2019.5.14. 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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