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골 이씨네는 기골이 장대한 장사들이었다. 이씨의 부친도 씨름을 했다. 이씨는 18살에 과천면 체육대회에서 1등을 했다. 이어 면사무소 직원 오토바이를 얻어타고 안양 가서 시흥군체육대회에서도 1등을 했다. 면대회에서 1등하면 부상이 삽이나 괭이였단다.

 

씨름, 모래가마들기를 하면 삼부골 이기는 동네가 없었지

 

샅바를 잡고 흔들어 보면 감이 와. 이건 내가 자빠뜨릴수 있겠다.”

 

미군부대에서 더플백을 얻어다 쌀을 담았어. 한 자루에 여덟 말이 들어가. 그걸 들어다 마차에 올리면 마차바퀴에서 비명이 났지.”

 

피난을 가려고 마차에 짐을 다 실어놓고 출발하려는데 중공군이 들이닥쳤다. 마차 끌 소를 풀어다 뒷곁에 매고는 자기네가 타고 온 말을 집 앞에 매더란다. 그래 가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관악산, 우면산에서 이쪽으로 포를 쏘고, 이쪽에선 그리로 쏘고.......”

 

중학교를 다닐 무렵부터는 운동을 했다. 지금의 과천향교 아래 관악중학교가 있었는데 선배가 교장의 허락을 받고 교실에서 공수도를 가르쳤다. 4년 정도를 다니며 운동했다. 빨간 벽돌 2장 정도는 정권으로 깰 수 있었다. 양재동 ○○○학교에는 유도부가 있었고.....”

 

눈이 내리면 올무로 토끼를 잡곤 했어. 뒷산에 토끼가 많았어. 하루는 살쾡이를 잡았어. 진돗개를 데리고 낫을 들고 갔지. 사람을 보고 벼랑 위로 올라 가려고 바등거리는 걸 낫을 던졌는데 빗나갔어. 바위틈에 숨어 들어가는거야. 솔가지를 모아다 불을 피우니까. 연기에 못 견디고 뛰쳐나오는 걸 낫으로 목 뒤를 친다는게 빗맞아서 허리를 부러뜨렸더라구. 나중에 잡고 보니까 벼랑에 오르느라 발톱이 전부 뒤로 제껴져 있더라구.....”

 

살쾡이를 잡은 이씨는 그 겨울에 호랑이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발자국이 송아지 발자국 만큼 커. 발자국이 토끼처럼 이리저리 나는게 아니라 한 줄로 똑바로 나더라구. 눈이 쌓이면 눈을 밟고 올라가더라구. 눈 위에 싸놓은 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더라구.......몇 시간을 산을 헤매고 다녔는데 끝내 못봤어. 이듬 해 창경원엘 가서 호랑이를 보는 순간 아이고 저런 놈을 내가 쫓아 다녔구나싶더라구.......”

 

22살에 군에 갔다. 체육부대 격으로 전국으로 대회를 다녔다. 당시 한국전력에 실업팀이 있었는데 대회 때면 이씨를 데려가 출전시켰다. 제대 후에는 홍천군 선수로 강원 7개 시 대회을 거쳐 전국체전에 나가곤 했다.

 

“190cm160kg 나가는 장사야. 그때 내가 174cm105kg이었는데 지금처럼 체급이 나뉘어진 것도 아니어서 당해낼수가 있나........전국체전 나가면 송아지를 탔는데 돈으로 쳐서 8만원인가를 주더라구.”

 

스물여덟 되던 해에 방아다리 한씨네 규수와 중매로 결혼해 아들 셋을 두었다. 30년 방앗간을 해서 세 아들 모두 대학원까지 가르친게 일생 큰 일이었다.

 

강남역과 역삼역 사이에 국기원이 있지요. 그 아래가 방아다리였어요. 거기서 과천을 오면 말죽거리 지나 과천에 오면 10여 호 집이 모여있는 동네가 열두 군데라 해서 열두우마니라 했어요. 뒷골, 안골, 삼부골.......열 두 군데.......과천읍내에 제중의원이라고 병원이 하나였는데 거기 이만영씨가 용했어요.”

 

서울 금호동에 터를 잡은 이씨는 상계동에 제과점, 종로에 제화점을 하다가 성수쇼핑센터 관리주임 자리를 제안 받는다. 군시절 동료가 그의 운동실력을 알고 시장 운영질서를 잡기 위해 그를 추천했다.

 

상인이 거칠어서 임대료를 올리면 관리실로 몰려와서 같이 죽자고 덤벼들고...... 통로에 내놓은 좌판을 안으로 들이라고 하면 네가 뭔데하고 대들곤 했지. 한 놈을 메다 꽂으니까. ‘관리소에서 깡패를 불러왔다소문이 나대. 쇼핑센터 2층에 맥주홀이 있었는데 저녁마다 성수동, 화양리 건달들이 싸움이 붙어. 그래 나도 싸우고......그렇게 10년을 하다가 시장 한 쪽에 자리를 잡고 방앗간을 했지.”

 

새벽 2시에 일어나 6시면 쌀 두 가마를 떡을 만들어 놓고 낮에는 손님들의 주문을 받는 생활을 30년을 했다. 제법 장사가 잘 됐다. 그러다가 부인 한씨가 위암에 걸렸다.

 

병원엘 갔는데 응급이라며 바로 수술을 해서 위를 들어 냈어요. 그 참에 방앗간 문을 닫고 요양을 겸해서 한 10년 중국에서 지내다가 여기 용인으로 온 거예요.”

 

군시절 상관인 오모씨가 이씨를 장군이라 부르며 과천 집에 인사 오는 등 친하게 지냈다. 월남에 파병 가서 죽었다는 소릴 들었다. 충무로에서 제화점을 할 때 누가 오씨가 중령이 되어 중부경찰서에 있다는 얘길 하길래 찾아 갔더니 출타중이라 연락처를 남기고 돌아왔더니 잠시 후에 오중령이 전화를 해왔다. 다리에 총을 맞고 후송됐는데 전사로 처리했었단 소릴 하며 차를 보낼테니 보자더란다.

하사가 지프차를 몰고 왔는데 보안대 차야. 보안대 중령이 중부서에 파견 나가 있었던 거야. 그땐 보안대가 쎘어. 신호고 뭐고 내달려도 아무도 뭐라 안하고...... 그날 저녁에 술 한잔 같이 하는데 10만원짜리가 두둑한 지갑을 내보이며 재벌들이 술값 하라고 준 돈이니까 맘껏 마시자고 종로 니나노집에 데려 가더라구. 옆에 아가씨를 앉히고 양주를 마시고 노는데 거기선 희안하게 양주를 따뜻하게 데워서 내놓더라구. 나오면서 오씨가 10만원을 내니까 2만원을 거슬러 주더라구.......그렇게 다시 인연을 이어 가는데 어느 날 같이 과천엘 가자는 거야. 오중령 지프를 타고 과천에 와서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그랬는데 내게 삼부골 사정을 물어 누가 땅을 얼마나 가졌는지 동네 어른이 누구신지...... 그리고는 나더러 돈 있으면 초가집 하나라도 더 사라는거야. 그때 초가집 10만원도 안 가던 때지만 장사하고 먹고 사느라 그럴 여유가 있나?.......나중에 알고보니 오중령이 예편을 하고 마사회에 들어가서 삼부골 땅을 수용해서 마사를 짓는 일을 하게 된 거였어.”

 

그때 주암리 돌무께에서 삼부골을 지나 광창리로 가려면 곧바로 길이 있었어. 그래서 오씨에게 그 길을 그대로 쓸수 있게 수용해 달라고 했지만 그 아래 까지 수용되면서 지금처럼 길이 삼부골 아래로 빙 돌아가게 됐지.”

 

아랫삼부골은 마사회가 들어오면서 없어지고 윗삼부골은 1990년대 기무사가 들어서면서 지금의 동네가 작아졌다. 기무사로 종중산이 들어가면서 선산을 수습해 납골묘를 조성했다.

 

큰할아버지가 삼부골에 한약방을 하시며 전국을 다니시는 유명한 지관이셨어. 그 분이 6대조 할아버지부터 유실된 조상 묘를 찾아 주셨지. 장마로 개울이 넘쳐 떠내려간 묘를 어디 얼마쯤 내려가면 얼마 깊이에 있다그래서 수습할수 있었지.”

 

(2021.11.16. 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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