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안에서 독자로 났다. 위로 누나가 넷이다.

 

동네에 옻 우물이 있었다. 지금 3단지에서 청계산 쪽으로 사기막골과 세곡마을 사이를 모템말이라 했다.

 

청계산에서 내려와 바위 밑에서 우물이 시원하고 맛이 있었다. 외지에서 옻이 오른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몸을 씻고 물을 떠가고 돈이나 과일을 놓고 가기도 했었다. 농사가 달라져 초식(채소)을 하면서 관정을 파면서 물이 마르기 시작했다.

 

청계산에서 나는 물은 암물이고, 관악산에서 나는 물은 숫물이다. ‘무게를 달아보면 암물이 무겁다.’ 일본사람들이 그랬대요.”

 

구리안에서 났어요. 구리안이란 말은 입 구()자를 써서 그랬다는 말도 있고, 정조대왕께서 수원 행궁에 가실 때 지지대 가기 전 옛길이 있었는데 세골 가기 전 방앗간이 가루개에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아홉 번째 맥이 끊긴 곳이라 해서 구리안 이라고 했다고 해요.”

 

구리안에서 새술막, 비석거리를 지나 학교 다녔지. 솜바지 저고리 입고....... 어머니와 큰어머니 밤에 고구마 삶아 학교로 가져오시는데, 늑대가 따라오더래. 그 다음부터는 무서워서 못 오셨지.......”

 

지에무씨(GMC) 트럭이 데꾸보꾸(울퉁불퉁한) 길을 다녔어. 으능쟁이고개(지식정보타운역 예정지)를 오르느라 차가 덜덜 거리면 차 뒤에 매달려 있다가 뛰어내리곤 했지. 근처에 성황당이 있었는데 누군가 배, 사과를 제물로 놔두고 가면 주워 먹곤 했어. 옛날엔 깡패가 많아서 도시락도 빼앗는 통에 잘 안 가지고 다녔어.”

 

갈현리에서 인덕원 지나 안양 가는 길 쪽에 지금 가압장 있는데 거기서 목 매 달아 죽은 사람 시체도 몇 번을 봤어. 옛날엔 소도둑이 많았는데 거기서 소를 잡아 가죽을 벗겨 놓고 가곤 했었어.”

 

“1·4후퇴 때 용인 고기리로 해서 지지대 고개 넘어 팔달문 있는 데로 피난을 갔어. 자루에 양은솥을 담아 가지고 지고 갔지. 솥 안에는 반찬으로 깨소금을 담고....... 큰 기와집에 노망이 난 노인네를 두고 가족들이 다 피난을 가버린 집이 있어서 거기서 잤어. 유엔군이 하늘을 장악해서 중공군들이 도망도 못가고 숨어 지냈지. 눈이 엄청 내리던 날, 밭에 수수깡을 베어서 세워 쌓아 놓았는데 거기서 중공군들이 숨어있다 나오더라구. 바닥에는 중공군들이 통신선인 삐삐선을 깔아 놓았고.....그때 처음 봤어. 의왕 청계리로 해서 구리안에 우리 종산이 있는데로 오는데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았어. 총소리가 들리는데 멀리 날아가는 총알은 하는 소리를 내고 가까이 떨어지는 총알은 소리가 조금 달랐어. 그런데 나무 옆에 솜이불을 둥글게 둘러 놓고 띠를 매서 나무에 묶어 놓고 솜이불을 덮어놨어. 뭔가 싶어서 열어보니 어린애가 미루꾸(캐러멜)을 먹고 있더라구. 눈이 무척 와. 어른들은 빨리 오래지. 총알은 날아오지...... 지금 강릉막국수 있는데서 한 300미터 떨어진데가 우리집인데. 집에 오니 중공군이 쪽마루에 말을 매놨어. 중공군은 미수가루를 담은 자루로 띠를 둘러메고 있었어. 군복을 뒤집어 입으면 하얗게 누빈 옷이 되더라구. 안에는 토끼털을 넣은 구두를 신고 나무 손잡이로 된 권총을 차고 나무방망이 수류탄을 차고.......행랑채에는 피난민들이 가득하고.......우리 어머니와 누님이 우니까 중공군이 이승만 박사가 불쌍해서 우느냐?’고 물어. 그래 우리 아버님이 아니다. 얘들이 불쌍해 운다그러시니까 돈을 주더라구.......피난 가기 전에 광(창고) 바닥을 파고 벼를 묻고 거적을 덮어 놨는데, 중공군들이 꼬챙이로 땅을 찔러 보고는 쌀을 파내더라고.....인천상륙작전 한 3일 동안 포사격이 계속 됐어. 포탄이 관악산을 넘어 연주대 지나 남태령 고개로 떨어지는 게 보여. 야광탄이 관악산 넘어오는 게 보였어. 그러고 나니 논두렁에 소총으로 단독무장한 국군 척후병이 들어오더라구. 그때 집 뒤에 방공호를 파고 있었는데 안쪽에는 굴을 하나 더 파서 여자들이 들어가 숨었고......군인들이 나오라하고 안 나오면 총으로 갈겼어. 그 뒤에 미군들이 모템말 쪽으로 들어오면서 지뢰를 묻고.......”

 

6,70년대 과천에선 채소농사가 잘 됐다. 커다란 가고(대나무로 짠 대형 바구니)에 담아 놓으면 시장에서 상인들이 실어갔다. 저녁에 상회에 가면 전표를 끊어주고 돈으로 받았다.

 

한 해 하면 땅 사고 한 해 하면 땅 사고..... 회사 다니는 것보다 낫다 싶더라구.”

 

그렇게 농사를 짓던 땅이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수용되고 이씨는 물 좋고 평지에서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평택에 땅을 샀다. 당시 평택에 논을 산 친구들이 여럿이었다.

 

구리안 세골은 70년 무렵 사당동 철거민들이 들어오면서 원주민들이 뒤로 물러나 앉는 형편이었다.

 

이씨는 20살이 넘어 안양에 있는 태흥화학이란 델 다녔다. 아버지가 폐암에 걸리시면서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29세에 늦게 군대 가서 수송대에 들어가는 바람에 전국을 돌아다녀보았다. 처가는 광창마을 송씨네다. 장가들고 농사만으론 안 되겠다 싶어서 부동산업에 나섰다. 이씨는 농사만 짓던 자신이 사업에 나서려면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인덕원 집을 지었지. 지으면서 커다란 술독 3개를 묻었어. 술이 익으면 친구들을 불러 술잔을 나누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지. 큰 도움이 됐어.”

그렇게 부동산업에 나선 이씨는 집을 지어 팔기도 하고 상가를 분양받아 임대를 놓기도 했다.

 

상가든 주택이든 위치, 유동인구가 중요해. 그 다음은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수준이 어떤가를 봐야 해. 동편마을을 예를 들어볼까? 처음 입주 초반에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출금 갚느라 돈이 없어. 그러니 상가가 장사가 되려면 한참 기다려야 해. 그걸 생각해서 투자해야지.”

 

이씨는 앞으로 한동안은 경기가 나아지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부동산들을 팔아서 목 좋은 상가를 분양 받아서 프랜차이즈 점포로 세를 주고 있다.

70년대 초에 과천에서 보상 받아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어도 그 뒤에 어떻게 관리했느냐로 갈리더란다. 인덕원 제일 부자가 죽고 나서 자식들 재산싸움에 재산이 3년을 못 가는걸 보면서 이씨는 신중하게 투자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다섯 가지면 셋만 투자해야 해. 전부 다 거는 건 위험해. 그리고 소문 난 데는 함정이 있어.”

 

(2021.9.30.)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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