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환씨는 열일곱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삼남 일녀 중 장남인 이씨가 생계를 이어야 했다.

 

아버지는 과천초등학교 책상을 짜 주시는 등 알아주는 솜씨 좋은 목수셨다.

 

이씨는 화성에서 사슴농장을 하고 있다. 이씨가 사슴을 기르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다. 과천에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새마을운동중앙회에서 우리 농가의 수입 다변화를 위해 사슴을 수입해 키우기로 했고 이씨도 이때 분양신청을 해서 과천에 농장을 마련하고 기르기 시작했다. 한때는 과천농장에서 150여 마리까지 길렀다. 과천지식정보타운 개발이 시작되고 농장이 수용되자 이 사슴들을 옮겨 기른 것이 지금의 화성농장이다.

 

그때 전두환 대통령 동생 전경환 씨가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을 하면서 사슴을 수입하고 그랬어요. 그 바람에 나도 한 마리에 350만원씩 주고 두 마리를 수입해서 기르길 시작했지. 8,90년대 까지만 해도 어느 사슴농장에서 흰 사슴 나왔다 하면 신문사에서 와서 사진 찍어가고 그랬어요.”

 

선대부터 과천에서 산 이씨는 4년 전 화성으로 사슴농장을 옮겼다.

 

이씨는 지식정보타운이 들어서면서 땅을 수용 당하고 기반시설 공사가 끝난 뒤에 집을 짓고 되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정부가 나빠요. 70몇 년도 인가 그린벨트라고 땅을 묶어 놓고는 땅을 수용할 때는 몇 푼 안 쳐주고 되팔 때는 비싸게 팔면서......그것도 20년이 넘게 질질 끌면서.......이리 내려오면서 장안면에 집을 지었는데 여긴 살기가 힘들어요. 병원도 시원찮고......고향에 가고 싶어서 과천 토지수용자를 위한 대토로 땅을 샀어요. 거기에 집을 지어야 하는데 그것도 그래요. 집을 지어봐야 아직 먼지만 날리는 곳이니 세입자가 들어올 리도 없으니 당장 지을 수도 없고.......”

 

과천에서 땅을 수용당한 이씨는 토지중개에 눈을 뜨게 됐다. 이후 수원, 평택, 화성 등을 다니며 땅을 사고파는 일을 했다. 그 무렵 화성 농장자리도 사두었다가 나중에 과천농장 사슴을 옮기게 된다.

 

과천에서 아버지가 사신 땅하고 내가 벌어 산 땅하고 죄다 수용되면서 받은 돈으로 땅장사를 하러 다녔어요. 밥만 먹으면 수원으로 평택으로......집 한 채가 10만원, 5만원 하던 때니까 샀다가 되팔곤 했지. 수원 지금 화장장 입구가 옛날에는 소나무 밭 이었어요. 아래 저수지도 보이고 소나무가 근사해서 샀지. 그랬더니 화장장이 들어서면서 수용되어 버렸지. 지금 이 농장도 그때 사 둔 거였는데, 과천땅 수용되면서 사슴농장을 이리 옮긴 거지.”

 

여덟 살 무렵 피난을 갔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지지대 근처까지 내려갔다. 큰아버지가 손을 잘 못 쓰시는 장애인 이셨는데도 마차를 끌고 가는 길에 따라 갔었다. 아버지는 제2국민역으로 소집되어 나가셨었다. 지지대를 넘어 가니까 인민군들이 벌써 지키고 섰다가 돌아가라고 해서 과천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니까 인민군들이 들어와 차지하고 있었어. 잘해줬어. 장난감도 주고 같이 놀아도 주고......”

스무 살 이전 기억으로는 막계저수지를 막을 때가 생각난다.

 

이 모 의원인가 하는 양반이 그걸 한다. 그래서 구경들 가곤 했어요. 땅 한 평을 파는데 얼마 그랬어요. 웃개돌 이라고 표시를 해 놓고 사진을 찍고 그걸 파내고 지게로 져 나르고 그랬어요. 그러면 밀가루도 주고 설탕도 주고 그랬는데......”

 

스물여덟에 양평에서 군 생활을 했다. 상병이지만 병장 계급장 달고 다니며 군 생활을 했다. 낮에는 일하는데 동원되고 밤에 보초를 서려면 잠이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는 자는데 기간병들이 총을 거둬 갔어요. 아침에 일어나니 난리가 났어요. 총이 없어진 거야. 그때가 김신조 사건 나고 간첩이 왔다 갔다 했던 때라 실탄이 지급 됐었어요. 영창 가게 됐다고 난리가 났는데 나중에 보니 기간병들이 정신 차리라고 총을 숨겼던 거였어.”

 

이씨는 군대 갔다 와서 결혼했다. 부인 이금구씨는 동네 조합장 조카딸 이었다. 5살 아래인 부인과 결혼해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제대 후에도 농사를 지었다. 당시에는 살기가 어려웠다. 집집마다 장내쌀을 얻어다 먹고 가을에 추수해서 갚고 했다.

 

쌀 한 말을 갖다 먹으면 가을에 한 말 반을 갚아야 했어요. 그것도 아무나 안 줘. 아는 사람이나 주지. 그렇게 어렵게들 살았어요.”

 

그때 읍내에 짜장면집이 있었어요. 가끔 읍내 나와 짜장면 한 그릇 먹게 되면 최고였지. 삼거리에 장흥수씨네 담배가게하고 그 옆에 박영남씨네 사료가게가 있었는데 목장 하는 사람들이 아침이면 우유를 짜서 통에 담아다 가게 옆에 갖다 놔. 과천에서 하루 다섯 통이나 나왔을까. 여름이면 개울에 가서 찬물 퍼다 담아놔. 그래도 관리 잘못해서 변질되면 버리는 거지.”

 

당시 이장들은 추수를 하고 나면 리세를 걷으러 다녔다. 그렇게 머리수대로 거둔 리세는 정부에 냈다. 그러고도 기타 명목으로 거둔 돈들이 있었다. 살기가 어려운 지역에서는 이장이 대신 내기도 했다. 하리는 유독 사람이 많아 리세가 많이 걷혔고, ‘하리이장이 과천 면장보다 낫다.’는 말도 있었다. 추수가 끝나 리세를 걷고 나면 이장들이 택시를 대절해서 영등포로 술 마시러 가기도 했다. 대부분 이장 일은 마을을 위한 봉사로 여겨 서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사양하다 사양하다 일을 맡게 되면 그래도 인심을 잃지 않으려고 열심히들 일했다. 이장을 마치면 논을 팔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3단지가 입주를 하면서 세상이 바뀌어 통장제도가 시행된다. 2,3단지 아파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여자들이 통장을 맡게 된다. 많이 배운 젊은 여자들이 통장으로 나서게 되면서 예전의 이장들의 시대가 저문다.

 

궁말에 아버지가 사 놓은 땅하고, 내가 산 땅이 개발되면서 4,900원을 받았어요. 논바닥이라고 5천원이 안됐어요. 그러던 땅값이......”

 

화성 사슴농장에서 벌판을 건너면 나즈막한 야산이 있다. 그 산 일부도 이씨가 산 땅이다. 사슴농장에서 바라다 보이는 야산 모습이 지금 지식정보타운역 예정지에서 청계산 아래를 바라다보는 모습과 비슷하다. 고향 땅 모습과 비슷한 자리를 고른 건 우연일까?

 

인터뷰 초반 이씨는 지금 관문동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 안부를 묻는다. 화성에서 과천. 자주 오가는 거리지만 과천에서 왔다는 필자에게 고향 나무 안부부터 묻는 이씨가 달리 보였다.

 

(2021.6.7. 화성농장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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