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복 씨는 1941년생이다. 생일이 음력 9월 17일 양력으로는 11월 6일이다. 과천 원주민이지만,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다녔다.
중학교를 서울 흑석동에 있는 낙양중학교를 다녔는데 작은아버지께서 철도국에 다니셔서 흑석동 집을 사셔서 그 집에서 다니게 됐다. 그런데 입학 6개월 뒤 철도국에서 화물차 붙이고 떼고 기를 들고 신호하시던 작은 아버지께서 겨울에 미끌어져 다리 한쪽이 레일에 걸려 잘린다. 운전수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 2년 가까이 입원하시는 바람에 작은어머니께서 맨날 병수발 다니는데 있을 수 없어서 6촌 형과 자취를 했다. 동양중학교 위 산꼭대기에서 셋이서 3년을 자취생활을 했다.
“장작은 마차로 실어다 주시면 끌어다 때고......, 곤로에 밥 하고 반찬 갖다 주는 거 겨울 김장김치 먹고 여름이면 냉장고가 없어서 하루 지나면 쉬고......,고추장에 비벼 먹고 셋이 위장병 나기도 하고......,그렇게 3년 뒤 졸업할 즈음엔 집에서 다니는 게 낫겠다 싶었지. 안양공고를 다녔는데 염색과, 전기과 둘 뿐이었어. 진공관 라디오 만들고 하는 전기과를 걸어서 다녔어. 당시 동네서 대학은 한 둘 정도지. 8촌 형들이 중앙대, 고려대. 형들이 잘됐으면 나도 갔을 텐데 형들이 소 팔고 취직 못하고 땅만 날려 버리는 걸 보고 대학 안가고 취직했지. 6촌 형이 종로 평화당인쇄, [주부생활] 나오던 곳이었어. 조각과에 입사해서 활자를 놋쇠에 새기는 자리에 취직했지. 처음에는 문선(원고 들고 활자 뽑는), 조판해서 지형 뜨고 인쇄하는 걸 했지. 1년 뒤에 옵셋인쇄가 생겨서 옵셋기술자가 되어서 결혼했지. 동창 중에선 2번째로......, 동창 최종수가 2년 전 제일 먼저 결혼했구.”
1965년 결혼했다.
“보충역으로 영장이 나왔는데 입대 병력이 남아 순위가 밀려서 결혼하고 2년 지나 큰 애가 2살에 영장이 나온 거야. 1967년에 입대했지. 서울시가 조사해서 기술병으로 논산에서 6주 훈련 받고 강원도 춘천 103보충대로 갔지. 1주일 뒤에 각 부대로 팔리는데 25명 정도 줄을 세우고 지에무시 트럭(GMC)에 전방마다 몇씩 떨어 뜨려 원주 가니까 나 혼자 남아. 1군사령부 7지구 인쇄소 (육본에는 6지구 인쇄소)엘 가니까 입대 전 인쇄소에서 내 밑에 있던 친구가 상병 달고 있더라고. 거기서 3년을 근무했어.
그때 월남 가서 상사 중사로 온 사람들이 하사관으로 있었는데 나를 잘 본 거야. 결혼했지. 과천 농사 많이 짓는다 하니까 특별히 사무 보는 애들한테 얘기해서 ‘이 사병은 1주일에 1번은 집에 보내줘라’해서 외출증 하나 하고 2박 3일 휴가증 2개를 끊어줘. 원주에서 외출증 보여주고 기차타면 완행이 용산에 27번째 정거장이야. 점심 지나 밤에 도착하지. 용산에서 과천오는 버스가 없어. 사당에서 내려 밤에 남태령을 걸어 넘어와. 집에서 자고 이튿날 열두시까지 가는 거야.”
선임하사집이 원주 시내인데 청자 담배 한 보루와 3만 원짜리 과자를 사서 그 분 집에 놓고 들어가곤 했다.
“총 들고 근무 하는 게 아니어서 내무반에 카빈 총 하나 꽂아 놓고 가서 일하고 그랬어. 4:6 군속이 6 군인 4라서 군속들이 도시락 싸오면 1군사령부 식당가서 밥 타다 바꿔 먹곤 했어. 그렇게 3년 군생활을 마친 후 회사에 재입사했지.”
“지금은 4색 칼라 6색 칼라 시대지만 그전에는 2색 그저 4칼라도 드물어. 단색기로 돔보 맞춰 8번 찍어야 하니 시간이 오래 걸려. 2부제야 일주일 밤일, 1주일은 낮일. 그렇게 회사 생활을 했지.”
제대 후에 인쇄소를 27년을 다녔다. 평화당인쇄가 양평동 해태제과 옆에 건물을 사서 윤전기를 설치했다. 그때 최종수씨가 그 옆에 삼화왕관에 있었다.
“당시 칼라잉크라고는 국산은 대한잉크 하나여서 칼라인쇄는 일본 동화색소 도까시키소 잉크를 수입했는데, 두 사람을 초청 했어. 제판 하나, 인쇄 하나. 제판은 사장 동생이 갔지. 일본에서 1977년 겨울부터 78년 봄까지 3개월 연수를 했어. 잉크회사 초청으로 갔지만 마쯔다인쇄에서 근무했지. 다녀오니 옵셋 기술자 자리에 누가 있더라고 그러니 회사에서 사무실로 올라가 관리부장이 되고 2년 후에야 2부제 근무 면하게 됐어.”
그런 가운데 1994년 아버지 위암이 걸리셨다. 장남이라 부득이 57세에 정년퇴직을 하게 됐다.
“남동생과 20살 차이가 나고. 어머니께서 일찍 결혼하셔서 나하고 19살 차이 나고. 어머니께서 ‘내려와라 장남이니까’ 과천 집 헐리면서 개봉동에 집을 샀는데, 동생 주고 1년 병간호 하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1975년에 정년을 2년 남기고 내려왔지. 동창들 만나고....., 1,200평 농사지었지. 구리안에 3단지가 들어오면서 별양동에 단독필지를 제비 뽑아 단독 2층집 짓고 살아. 1995년 아버지 돌아가시고 4년 정도 지났나. 박영재 초대문화원장께서 과천유도회 지회장이셨는데 나더러 총무를 보라 그러셔. 친구 신태호가 유도회 하다가 나보다 한참 먼저 총무 겸 재무를 봤는데.....,그 뒤에는 향교에서 재무를 봐달라고 그래. 초대농협조합장 강명희, 이규창이 총무를 맡았고 내가 재무를 맡은지 2년 후 전교 권광환씨(22회)가 재무총무를 합쳐 사무장으로 자리를 만드셨지. 그때부터 사무장을 맡았지.
과천향교 사무장을 11년 봤는데 7개시 관내라 7개시 지회의 과천지부장으로 최종수 뒤에 3년을 지부장을 지냈지. 전교 연임 6년 하고 나서 99년부터 2019년까지 20여년을 전교를 끝으로 마무리 했어. 당시 이성환 시장이 예산을 크게 만들어 주어서 건물을 고치고 새로 짓고 했던 기억이 나. 내 인생은 인쇄 20년, 군대 3년, 과천향교 20년으로 이력서 끝이야.”
1·4후퇴 때 중공군을 피해 피란을 갔다. 의왕 바라산으로 가다보니 중공군과 같이 걷고 있었다. 수원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은 피란민 차지가 돼 있었다. 그 사람들 내보내고 중공군들과 같이 지냈다.
“밤 12시쯤 되면 쌀 가져가려고 난리야. 나무광 바닥 파내고 쌀가마 그 위에 덮고 해도 꼬챙이로 쑤셔 대는데. 낮에는 폭격하니까 안 오고......그래 피란 나온 젊은 사람하고 뒤란 장독 옆에 구덩이 2개를 파서 쌀가마를 하나씩 묻었지. 할아버지가 중공군들에게 하나를 파게끔 안내하고......,큰집에 방공호 파서 옮기고 그 속에 들어 앉아 있곤 했어. 그래도 중공군은 피해 준 게 없어. 쌀 가져가면서 준 이북 돈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
과천초등학교가 폭격 맞아 뼈대만 남아서 3년 뒤 지어질 동안 가마짝 깔고 공부했다. 수업은 조금 하고는 종일 벽돌을 깨는 게 일이었다.
“개학 하니까 동창 하나가 팔목이 없어. 김종규라고 수류탄에...... 나무하러 갔다가 주워서 애들이 둘러앉아 두들겨 보다가.....구리안에 33집인가 있었어. 김충원 씨네 방앗간 자리 있었고. 윤재로라고 식당하던 3,4년 후배...... 그 형 윤기로가 동창인데 인민군하고 아군이 집에 총을 쏴 집에 불이 나 아침에 일어나니 죽었다는 소릴 듣고 비통했지.”
“당시 한 반에 7,80명 신동면에는 은광중학교가 있었고, 광주군 경계까지가 신동면이야. 서초동엔 신중국민학교가 있었고......,80명 중에 중학교 갈 애들 안 갈 애들 따로 반을 했지. 밤에 남포 불 켜놓고 공부하면 부모들이 밤에 이고 와서 먹을 걸 가져다 주시곤 했지.”
(2020.11.9. 과천문화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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