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환 씨는 1944년 관문리에서 태어났다. 과천성당 옆 개울이 흐르는 자리에 다리가 있었고 집이 몇 채 있었는데 그곳에서 태어났다. 읍내사람이다. 5남매 중 둘째다.

 

지금 온온사 앞에 있는 비석이 그때는 문원리와 관문리 사이에 있었는데 옮겼다는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과천동주민센터 옆 큰 나무를 본래 자리에서 옮겨다 심은 것을 기억한다. 지금도 101일이면, 마을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그 나무는, 6·25때는 다섯 명이 들어가 숨을 정도로 큰 나무였다고 한다.

 

제대하고 스물일곱에 영등포 사는 전인순 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삼거리 살다가 결혼하면서 살림을 냈다. 당시 독채 전세가 20만원이었다.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새마을운동이 시작됐다. 군대 가기 전부터 농촌계몽운동인 4-H 운동이 있었고, 젊은이들은 자연스럽게 빠져 들었다.

 

그때부터 동네일을 보기 시작했다. 이어 시로 승격이 되고 나서 통장, 주민자치위원 등 지역일을 맡아 하게 된다.

아 뭐 하고 싶어서 했나 할 사람이 없으니까 했지. 주위에서 하도 네가 좀 나서봐라.’ 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지.”

 

과천은 자원봉사가 활성화된 도시다. 자원봉사제도가 지금처럼 점수가 기록되고 포인트를 지역화폐로 환산해서 지역 내에서 쓸 수 있게 제도화된 도시다.

 

그런 가운데 김씨는 각종 자원봉사 기록에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88서울올림픽, 과천축제가 처음 시작할 때도 그는 청소, 질서유지 등 자원봉사자로서 현장에서 봉사해 온 이력이 곳곳에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부림동에서 과천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위해 아침이면 횡단보도에서 등교안전지도를 오래도록 했다.

 

내가 거리질서를 나서는 동안 교장선생님이 여섯, 일곱 명은 지나 갔었어요. 언젠가는 어떤 여자가 차에서 내려서 인사를 해. ‘아저씨 나 시집갔어요.’ 그래 보니 동네 아이야. 어려서 내 신호 따라 길을 건너던 아이가 커서 시집을 간 거야. 오래 했지. 그게 추억이야. 가끔 본수원갈비 가면, 강사장이 '아유 우리 봉사자 오셨어요' 그러고는 공짜로 밥을 줘.”

 

김씨는 자신이 일할 수 있었던 건 주위 사람들이 도와줘서라고 말한다.

 

"부림동에 아동센터를 지을 때야. 한 모씨가 동장할 때였지. 누가 터를 줘서 지을 수 있었어. 노인회관 지을 때도 그랬고...... 자기 땅들을 내 놓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했지.”

 

하지만 과천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고, 외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과의 갈등도 있었다. 지금의 부림동 일대에 지어진 아파트는 당시 원주민들의 농지를 수용해서 지어진 것이었다. 농지를 수용당한 원주민들은 대부분 과천을 떠났고, 지금 관문체육공원 인근 부림동 단독주택지역에 대토를 받아 집을 짓고 옮겨 살았다.

반장을 할 때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하고 갈등이 있었어요. 마을 일에 돈을 거두려면 단독에 사는 이들은 보상을 받아 돈이 많으니 그 돈으로 하라.’며 참여를 거부해서 애를 먹었어요.”

 

김씨는 과천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수용되고 보상 받은 돈으로는 평택 오성면에 땅을 샀다. 벼가 심겨진 논을 현물 포함해서 평당 2,900원을 주었다. 농사짓던 사람이 농사지을 땅을 사야 한다는 생각에 멀찍하게 떨어져서 안성, 평택 일대로 땅을 사러 다녔다. 당시 땅을 사려면 평택역에 내려서 복덕방을 찾아가고 거기서부터 수소문을 한다. 오성면이면 당시 오지여서 포장도 안 된 길을 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서 경지정리도 안 된 논둑길을 들어가야 했다.

 

김씨 혼자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도 과천 토박이 몇 사람은 오성면, 창대리, 안성시 공도면 등에 땅을 가지고 있다.

 

장흥수 면장이 있을 때 그해 가을에 벼를 수매 한다는데, 벼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 나보고 벼를 구해 오라는 거야. 그때는 실적을 내느라고 경쟁이 심했어요. 그래서 평택에서 추수한 벼를 과천으로 싣고 왔어요. 통일벼 공판하는 날 검사하는 사람이 당신 이거 어디서 가지고 왔어하는 거야. 그래 솔직하게 말했지. 수매하는데 쌀이 좀 모자라서 내가 평택에서 땅을 사서 거기 벼를 좀 싣고 왔다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좋은 걸 가져왔다면서 2등을 쳐주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당시 과천 일대 땅이 수용될 당시, 관문리 일대 논은 4,000원부터일 정도로 보상가가 차이가 났다. 김씨 기억에 당시 돼지가 한 마리 18,000원이었는데, 지금의 부림동 일대 논은 8,000원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주거지였던 과천초등학교 인근 주거지는 70,000원 정도였다.

 

김씨가 장가들 무렵엔 있는 집에선 결혼식에 참석하는 친척들 옷을 한 벌씩 해주고 택시를 대절해서 남산으로 드라이브 하고 오는 것이 다였다. 결혼식은 동네에서 구식으로 하거나 남대문에 있는 예식장에서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1961년 군사혁명이 나고 오○○이라는 사람이 시흥에서 안양을 거쳐 관문리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버스노선을 허가 받아 운행을 했다.

버스는 사람이 가득했다. 돈이 얼마나 흔했던지 버스정류장 화장실에 누군가 뒷일을 보고 돈으로 처리를 해서 그걸 본 다른 이가 건져다 씻어서 썼다는 애기도 있었다.

 

남태령을 넘어 다니는 차들은 과천 일대에 채소농사가 성행하면서 운행이 잦아졌다.

옛날 분들은 초식이라고 하는 채소농사는 본래 일제 강점기 지금의 서울 서초동 법원 일대에 일본사람들이 단무지 무 등을 재배하면서 시작한 온상기술을 과천 삼부골 사람들이 배워 오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씨앗을 밭에 직접 뿌리지 않고 발아율을 높이기 위해 따로 심어서 옮겨 심는 것이다. 비닐이 없던 때라 창호지에 기름을 발라 씨앗을 덮어 발아율을 높였다. 그렇게 키운 채소를 실어 나를 때 트럭이 필요했다.

 

고추, 오이 그런 걸 길러서 흑석동, 용산으로 가요. 염천교에 생선시장이 있었어. 거기서 차가 와. 순흥상회라고 있었는데 와서 싣고 가. 아니면 고추 푸대 지고 흑석동까지 걸어가는 거야.”

 

당시 관문리가 100여 호가 살았다. 반장을 하던 김씨는 리세를 걷거나 적십자 회비를 걷으러 다니면서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침에 밥 먹고, 집집마다 들러서 한 바퀴 돌고 들어오면 밤 열두시예요. 힘들었어요. 그렇게 살았어요. 새마을운동 한다고 마을마다 시멘트 보내와. 그러면 그걸 마을회관에 쌓아놓고....... 이게 마르면 굳어요. 그러니 한 번씩 들어서 뒤집어 놔줘야 해.”

 

가을에 하던 체육대회가 큰 잔치였다. 815일에 하는 마을 잔치를 위해 이장, 반장들이 준비며 뒷바라지를 위해 수고를 해야 했다.

 

준비하는데 돈이 없어 쩔쩔매는데 마을에 목장 하는 사람이 100만원을 냈어요. 큰 돈이야. 100만원이면...... 그 돈하고 우리 형님이 100만원 내고...... 우리 집에서 뭐 좀 끓여 갖고 선수들 먹이고 그랬어요.”

 

그렇게 세월이 지나 통장을 하고 주민자치위원을 하고..... 태어나 자란 동네에서 힘 닿는 데까지 동네일을 하며 지낸다.

 

(2021.6.18. 9단지상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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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6월 갈현리에서 났어요. 드라마 용의 눈물에 나온 고려 이 거자 이자 할아버지 후손이죠. 27대조 할아버지께서 이씨조선 개국때 두문동 70인은 고려 때 벼슬했던 사람들이 낙향할 때 과천으로 오신 거예요. 할아버지 본향은 홍성이고...... 보은, 공주, 진천, 천안, 목천이 본향이죠. 청주이씨 과천파예요. 청주가 본래 이름이 상당이었어요. 이거이 아드님이 부마이실 때 한명회 (이방원 계)가 등극하면서 상당군 청주한씨에게 빼앗겨 1대부터 11대까지 실존 위패만 모셔요. 을화산 묻혔다는 족보에는 있지만, 찾을 길 없다고 해요.”

 

정조대왕께서 건륭원 오가실 때 찬우물 지나시면서 저 무덤이 누구 것이냐?’ 물으셨대요. 김상로의 형 김약로 묘지요. 김상로는 영조 때 영의정으로 사도세자 때 뒤주를 짠 사람이죠. 정조가 등극한 후 지금도 짜겠느냐?’하자 김상로가 짜라면 짜야죠하고 답을 하자, 정조가 벼루를 던져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 이후 정조는 영등포 길로 갔다는 말이 있구요.”

 

사파지지 (사방 눈에 보이는 땅은 모두 준다)였던 우리 거를 청풍김씨에게 빼앗기자 청계산으로 옮겼다고 그래서 그곳을 분토골이라 한다고 그래요. 형제로 나서 어머니께서 6학년 때 돌아가시고 새어머니 들어오셔서 낳은 동생 3, 형제 5남매가 있어요.”

 

6·251학년 때 겪었다. 2개 반으로 60명씩이었다. 1반은 남자반, 2반은 여자반. 남자가 많아 일부는 2반으로 나누기도 했다. (40회는 나눴다고 한다) 6학년은 진학반이었다. 당시 서울 중·고등학교는 성적대로 무시험진학이었다. 양정, 경복 같은 데는 무시험이었다. 35회였던 선배는 시험보고 중학교 갔다고 한다.

 

큰길 옆 똘창이 겨울에 얼면 얼음 타고 가고...... 버스가 두서 너 번 다녔으나, 돈도 없고 해서 걸어 다녔지. 당시 자작농은 드물고 왜정 때 빼앗기고 왜놈에 아부한 놈은 땅을 받고 했으니...... 논을 소작하기 위해 6,70%까지 내고 열 가마면 세 가마만 남죠. 양식이 없었어요.”

 

이씨는 공부가 상위그룹에 들어 김석원씨가 세운 성남중·고등학교에 무시험 진학해서 6년 다녔다.

 

아버지가 대학 보내시려고 준비하셨는데, 돈이 많이 들겠다는 생각에 인천 남동으로 도망가 시험 안 봤어요. 친구소개로 남영동 책상 공장가서 에나멜 광내는 일 하루하고 못하겠더라고. 그만뒀어요. 친구가 남산초등학교 밑 세종호텔 맞은편 인쇄소 종문사에 소개해줘서 영문 문선하는 일 했는데, 맨날 꼬붕이라 그 위가 정판(사스까이)하는 일이었는데 배웠지요. 출근 전 8시에 가서, 배워서 페이지를 해주었더니, 2,3개월 했더니 하루 50페이지를 하겠더라고. 그래 사장에게 나 그만 그만둘랍니다.’ 했더니 너 한 시간 전에 와서 일하는 거 봤어. 오늘부터 정판해하더라고......”

 

또 그 위에 활자 집어넣는 것...... 스테키 사이사이 나무로 넣고 얇은 건 종이 한장 넣고.... 해보니 자신 있어 또 그만 둘랍니다했더니 내일부터 식자 해하더라구......”

 

나중에는 동아전과 나오는 동아인쇄도 갔었죠. 당시 권 문교장관 부교재 파동이 있었는데...... 동아 교학사 전과 수련장을 베껴서 동아수련장 2천원 받을 때 1천원 받고 지방에 팔러 다니는 도서판매원을 했어요. 선생을 만나 몇 일 날 올 테니, 5분만 시간을 다오. 돈들이 없을 때라 5,6권 팔고...... 현금치기니 잘 됐어요. 조직을 짜서 다니면서 하다가 부교재 파동으로 철퇴를 맞았죠.”

 

청계저수지서 낚시를 하는데 서울친구가 안양부터 걸어서 찾아와서 간 곳이 세종출판공사라는 출판사인데 명동 모호텔 이 모씨가 사장으로 있고 연대 전 모 교수를 세워놓고 하는데 하루는 조판공이 하는 걸 보니까 답답해하니까 당신이 해보쇼하더니, 내가 하는 걸 보더니 놀라며 납쟁이 하셨습니까?’하길래 웃어줬죠.”

 

나중에 전 모 교수 친구가 서강출판사라고 차려서 불러요. 6만 원짜리 책을 내서 지방에 50%에 파는 월부 책장사를 했죠. 잘됐어요. 편집과 영업 상무를 동시에 맡았죠. 당시 남들은 1개월 어음 받을 때, ‘나는 3,4개월 드리리다. 대신 1백만 원 말고 2백만 원 끊어주쇼했지요. 나중에 사장이 듣고는 장사할 줄 아네.’하더군.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어 재정분과의원을 맡았는데, 한번하고 접더라고요.”

 

금강출판사를 냈는데, 남영동 국보위에서 불러요. 10권짜리 [세계단편문학] 3권에 박 모씨 작품이 들어갔다고 출판허가가 취소된거야. 당시 이 모 국회의장 빽으로도 안 되더라고...... 82,3년 무렵 군포에 집 샀던 거 날리고 나서, 아버지께 들어와야겠습니다.’ 하고는 광을 헐어 방을 들이고, 과천으로 들어왔어요.”

 

이후 둘째동서가 광화문에서 이주공사를 하는 것을 도와주다가, 동창 박 모씨가 시의원 출마 한다길래 선거 일 뒤봐주고 지냈다.

 

어느 날 과천국민학교총동창회 박영재 회장께서 낼 부터 사무국장이야.’하셨다. 박회장과는 같은 동네 살았다. 당시 문화원 사무국장을 공무원 출신이 하고 있었는데, 연금을 반으로 자른다는 소릴 듣고 느닷없이 그만두는 바람에 박영재 원장께서 총동문회에 넣어놓은 이력서를 가져다가 문화원 사무국장을 하라시는 바람에 맡게 됐다.

 

“19931215일인데 1월 정산보고를 해야 하는데, 수중에 7,80만원 있었어요. 문화원 직원과 수원 전 사무국장 집을 오가며 맞췄지만 어려웠어요. 3일 밤을 새서 정기총회를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어요. 박영재 원장님은 깔끔한 분이셨어요. 심계원 출신으로 서류에 띄어쓰기해야 하고 양면괘지에 몇 자 들어가야 하고...... 나중에는 너 나하고 3년만 하면, 어디가도 안 꿀린다 배워라.’하셨어요.”

 

최종수 원장 시절엔 사무국장 상임 부원장을 거쳐 문화원장을 지냈다.

 

1958년 부친께서 몇 백 년 간 실전되었던 연안 차씨네 오산 차천로 선생 묘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알려준다. 중종때 문장가였던 오산은 최립, 한석봉과 송도삼절이라 불렸다. 1556년부터 1615년까지 살고 59살에 죽었다. 문중에서는 몇 백 년 간 실전되었던 묘를 찾게 되자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2020117일 문중시제를 지내면서 이씨에게 초헌관을 맡아 달라고 청한다. 이씨가 초헌관은 못하고 종헌관을 하겠노라 했더니 아헌관을 해달라고 했다. 그래 갔더니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세 헌관에게는 베옷을 해 입히더라고.......

 

당시 동네는 남자들은 땔나무를 해다 팔고 여자들은 산나물을 뜯어다 팔았다. 여자들은 남영동에까지 가기도 했다. 잘사는 사람들이 많았기도 했고, 콩나물공장 같은데가 남영동에 많았다.

 

부친께서는 동대문에서 베를 떠다가 동네 솜씨 좋은 아낙들 대 여섯 분께 부탁해 수의를 만들게 하셨다. 부친께서 돌아가시자 장례 때 꺼내 입혀드렸다고

 

그의 재임기간 과천문화원은 출판물 가짓수가 많고, 수준이 높다. 하지만 예산은 눈에 띄게 적게 들었다. 과천문화원이 인쇄와 출판 분야를 두루 겪은 이씨의 재능과 인맥 덕을 크게 본 셈이다.

 

그런 그지만 돌아가신 아버님께는 송구스러웠다. 부친 생전에 조반 자리에서 너 과천문화원에서 뭐 하고 다니느냐?’고 물으시더란다. 과천 일 혼자 다 하고 돌아 다니느라 밤이고 낮이고 나돌아 다니는데, 집에 돈 한 푼 들여놓지 않으니 며느리가 힘들어 하는 걸 에둘러 꾸짖으신 것이다. ‘아뿔사!’ 돌아보니 문화원 사무국장 하면서 봉급을 한 번도 집에 갖다 준 기억이 없었다. 그래도 그게 밑거름이 되서 과천문화가 살아나는 걸 보니 보람 있다.

 

처음 사무국장 되서 관계자들과 인사는 해야겠단 생각에 밥을 먹고 당시 7만원인가 나와 결재 올렸지. 그랬더니 원장님께서 문화원 돈이 네 돈이냐?’ 하시고는 3일이 지나서야 결재 하시면서 문화원 돈 마음대로 쓰지 마라라고 가르치셨어요.”

 

박영재 원장님은 심계원 출신이라 바늘구멍도 안 들어가. 경기도 감사가 내려와 시청에서 서류 갖고 오라는 거예요. 원장께서 기획실장에게 전화 해서 감사를 원본이 왔다 갔다 하는데가 어딨어?’ 하셔서 와서 보고 갔어요. 지금은 문화원 행사 주최가 과천시잖아요 그때는 문화원 주최, 과천시 후원 그랬어요. 시장, 국회의원 축사 절대 못 넣게 했어요.”

 

우리 문화원 팀장들 어디가도 돋보여요. 과천문화원 출판물들은 주석과 해석의 정확성이 뛰어나단 소리를 들어요. 전국 230여 개 문화원 중 3위예요. 1위가 강릉, 2위 평택, 3위 과천...... 보조금이 줄어드는 바람에 밀리고 있는게 안타까워요.”

 

아버지 이용진 어르신은 과천 새마을운동의 산증인이셨다. 당시 가일리에는 향교터가 있었다.

죽바위에서는 산신제를 지냈다. 서낭당은 으능쟁이고개, 남태령고개 맨 위에 참나무가 서낭당 역할을 했다.

 

(2020.11.9. 과천문화원장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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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재 원장님 계실 때, 제가 87년도에 내려와서 매일 아침 9시면 서울을 갔죠. 생활권이 서울에 있으니까. 당시에는 과천에 문화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91년도에 문화원이 개관하기 직전에 제 언니들과 동창이신 박영재 원장님을 만났는데, ‘나는 공무원으로 퇴직을 했기 때문에 문화는 문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근데 문화원장을 하라니까 해야 되겠는데, 동생이 좀 도와줘야 되지 않겠나.’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박원장님이 우리 언니들과 동창이시고 저와 같은 찬우물에 살았어요.”

 

서울에서 활동하느라 바빠서 못한다고 했지만, 여러차례 찾아와 과천문화원 개관을 돕기로 했다. 문화강좌를 만들고, 시조·풍물·민요·무용반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니 이번에는 시에서 과천시로 승격 되었으니, 예총을 만들어야 한다고 재촉하는 바람에 문인협회 하나 밖에 없던 과천에 국악협회를 만든다. 당시 20대 때부터 서울국악협회에서 20여 년을 넘게 활동하며 이사로 있었으니, 과천국악협회를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다섯 개 협회가 있어야 예총이 되는 거에요. 우리 집 양반이 동양화하고 서예를 했어요. 미협을 만드는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미협은 국전작가가 세 명이 되야지. 그러니까 인천 사는 친구 뭐 이러고, 몇 사람 여기다 주민등록을 옮겨서 등록했어요. 그렇게 옮겼다가 몇 달 있다가 또 옮겨가고..... 그러느라고 한 삼년이 걸렸어요. 또 연극협회를 만들고...... 그렇게 국악협회 원래 있던 문인협회하고, 연극, 음악, 무용 그렇게 해서 다섯 개 협회를 만들어서 ..... 2001년도에 예총을 만들고....그거 만들어 놓고 우리집 양반이 돌아갔어요. 그렇게 예총회장 두 달 하다가.......”

 

“1990년도부터 무동답교놀이를 하는데, 선소리가 거기 중요한 거는 선소리, 산타령이 빠져 있어요. 소리꾼이 없으니까. ○○ 씬가 하는 분이 좀 하셨다는데, 선소리가 없어서 못 했는데 소리꾼이 왔으니까 선소리를 해야 되지 않냐고, 그래서 내가 91년도 문화원 생기면서부터 거기에 들어갔어요. 하지만 선소리를 할 사람이 없고, 문화원에서 민요 가르쳐서 그 사람을 언제 세워요. 그래 신당동에 우리 학생들 20명을 데려다가 했어요. 공연할 때면, 내가 다 안무 짜서 데리고 나가야 되니까. 그렇게 다 데리고 내려와 가지고 연습을 시켜서 무동답교놀이 대회 나가면 우리 학생들이었죠. 그래서 여기 엄마들 몇 사람을 선소리 산타령을 가르쳐서 만들어 가지고..... 중간 중간에 하나씩 끼워 놓고 소리는 우리 학생들이 하고.....그렇게 만들었죠. 그랬더니 경기민속예술대회 할 때, 심사위원들이 저 이들은 전문가들 아니냐?’고 떨어뜨린다고 그랬어요. 전문가는 전문가죠. 학원에서 하던 애들인데..... 전부 쪽지어 놓고 얼마나 이뻐요?’ 그렇게 했는데......”

 

당시에 내가 왜 산타령을 더 잘했느냐 하면... 과천에서 무동답교놀이를 안 하고 있으니까 송파에 사시는 허호영 선생님이라고 그분이 그걸 송파무동답교놀이를 만드는 거예요. 무용제로....그 분이 그걸 이쪽에서 안 하니까 그 분이 머리가 좋으시니까..... 그래 중요를 만들었는데, 거기도 소리꾼이 없으니까..... 안비취 선생님을 모셔다가 우리 다 그 또래 애들이 전부 다 서울에서 같이 활동을 했으니까. 허호영 선생님이 당신이 좀 데리고 하라고....’그래. 우리 다....안 회장님은 장구 메고 우린 소고 들고..... 젊었을 때 20대 때 얘기예요. 그렇게 해서 맨날 송파가서 했거든요. 중요무형문화재 대가 거든요. 그 선생님이..... 그게 단체 종목인데, 혼자 쓰셔 가지고 그게 취소가 됐잖아요. 그랬더니 그때 맨날 이거 거기서 한 거니까, 여기서도 내가 한거잖아요. 제가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수표교 다리를 세운상가 거기 다 복개공사 했었잖아요. 공사해서 수표교 다리를 지금 장충체육관은 옮겨 놓고 거기서 우리가 맨날 연습을 했잖아요. 허호영 선생님이 송파무동답교놀이를 하신다 그럴 때도.... 추운데도 그냥 정월달에도 뭐 방송 찍는다 그러면 그거 같이 안비취 선생님 따라다니면서 고생했죠. 그때 고생한 게 과천이 덕을 본 게 고스란히 그랬어요.”

 

과천무동답교놀이가 문화재가 될 때도 사연이 있었다. 당시 심사위원이 과천팀을 보고, 기량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문화재에 등재될 정도의 기량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네두레패에서 활동하던 지역민들이 만든 과천민속보존회 출신들이 전부였으니, 눈에 차지 않았던거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해체 후에 재구성하는 방안을 택하게 된다. 예산을 지원한 과천시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었다.

 

1990년 임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준보유자가 된다. 묵계월 선생님이 작고하시면 보유자가 될 참이었다. 그런데 1998년 경기도지사가 경기도 무형문화재를 하라고 강권한다. 도립국악단 악장을 할 때였는데, 국가 무형문화재를 포기할수 없다고 세 번을 거절했다. 1999년 경기도는 경기소리전수관을 지어 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임씨를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만든다.

 

그래서 임 지사님이 욕심을 내서 일을 저질러 놓고, 일이 안되고 주저 앉고 그랬죠. 그리고 저는 경기도에 내려와서 일을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인맥이라는 게..... 그 임지사 부인 주애란 박사가 우리 둘째 언니 딸하고 무학여고 동기동창이야. 친한 친구야. 그러니까는 내가 도립에 있을 때 내 분장실을 찾아 왔어요. 우리가 딸여섯에 내가 막내거든요. 우리 조카들이 나를 꼬마이모그러니까 걔도 단발머리할 때 꼬마이모, 꼬마이모그랬거든요. 주박사가 아니 꼬마이모 여기 있으면서 왜 자기는 봤는데도 난 모르는 척하고 그랬느냐...... 우리 조카를 만났는데 야 너는 우리 꼬마이모가 거기 도립국악단 악장으로 있는데 넌 그것도 모르냐?’ 그랬다고 욕을 먹었다고 찾아 왔더라고. 그리고는 이모님 뭐 내가 뭐를 도와주면 좋겠냐?’ 그러더라고. 그때 도립국악단이 70명인가, 72명인가 그랬는데 월급이 최하였었어요. 생긴지가 얼마 안되니까..... 그래서 월급이 너무 적다고 그랬더니 그때 당시에 30%를 올려줬어요.”

 

임씨는 경기도립국악원의 전신인 국악단을 만드는 일에 헌신한다. 임창열 지사 재임시절 관사까지 찾아가며 애를 쓴 결과였다.

 

내가 인생 살 때 70이 넘도록..., 지금 3년만 있으면 80이 되는데, 내가 남한테 나쁘게 안 하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게 그런 일들을 겪었어. 그래도 아는 사람은 다 알죠. 그래서 국악단도 만들어지고 그렇게 해서 지금 후배들이 국악단에 가서 있으니까, 내 나름대로는 좋은데.....”

 

우리 애들이 거기 있는 애들이 둘이나 나왔잖아. 그런데 거기 지금 민요를 더 뽑아야 되는데, 우리 애들이 가서 시험보고 2년을 뽑는다 그래놓고, 한 사람도 안 뽑고 이렇게 올 스톱을 하고 있거든요. 그 전에는 민요 때문에 그걸 만들어 준 건데......”

 

임씨는 경기소리를 위해 도립창극단을 만들기 위해 노력중이다. 경기소리전수관에서 세미나를 열고 억대가 넘는 돈을 들여 6번의 소리극을 열었다. 후학들을 위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늙어 가지고 뭔 욕심이 있겠어요? 애들 저렇게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원까지 나와 지금 박사코스 밟는 애들이 두 명이나 되고. 지금 30명이나 돼요. 내가 초등학교부터 가르쳐서 대학 나온 애들이..... 그러니 내가 얼마나 답답하냐고.... 내 얼굴만 쳐다 보고 있는데 속상한 거야.... 어린 아이들은 고등학교 3학년 언니들이 갈 자리가 없어서 노는 거 보고 다른데로 가는거야. 그러니 얼마나 속상 하냐고..... 애들이 설 곳이 없잖아. 그러니까 학생들이 자꾸 줄어들잖아.”

 

2003년부터는 아이들을 위한 소리극 [낚시대장 얼이]를 만들어 공연중이다.

 

소리 배우기도 힘들었어. 내가 벌어서 공부 하는 것도 내야 되니까, 서울 가서 고생하면서..... 오죽하면 버스 그거 몇 십 원을 아끼느라고 신당동에서 종로 3가까지 걸어 다녔어. ‘그때 뭐 녹음기가 있어요 뭐가 있어요?’ 가서 배우다가 잊어버리면 외우느라고 중얼중얼 하면서 다니다가 오바에 손 넣고 다니면서 외다가 전봇대를 받아가지고 머리가 터질 뻔 했다고......”

 

박동진 선생님, 박귀희 선생님, 김소희 선생님 수많은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명창들이 다 우리 할아버지가 민든 대동가극단의 맥을 잇겠다고..... 내가 70에 공연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3,500석을 채워서 표를 팔아서 8,700만 원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 애들이 6,700만 원을 칠순잔치 적금을 들어서 해다 줘서, 그거 17천을 들여서 과천시에서 2,000만 원 타. 그래 가지고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채워서 공연을 했어요.

대동강 3시간 반 공연... 대작을 만든거예요. 200명이 더 나왔어. [대동가극단 맥을 잇다]를 공연한 거예요. 그 대동가극단 안에는 줄타기도 있고.... 옛날에 연극도 하고, 땅재주도 하고, 모두 다 있다고.....”

 

과천에서 줄타기도 안성에 있는 걸 데려다 놓은거예요. 김대균 씨를 처음에 이쪽으로 모셔오게 한게 저예요. 문화원장하고 같이 이쪽으로 모셔오게 한 거예요. 그래서 안성에 있는 거를 이리로 모셔온거예요. 우리 오촌 당숙 임상문 선생님이 줄을 타고 그 밑에서 김영철 씨는 할머니가 임씨네 딸이야 내가 오빠,오빠하면서 같이 동네에서 자랐잖아. 그 분이 문화재가 된 거야. 임상문 선생님 일찍 돌아가셔서 문화재가 안 되고.....,

근데 그 오빠가 문화재 되는 바람에 지금 제자잖아. 돌아갔잖아요. 찬우물이 원 고향이지. 그거 그게 유네스코까지 갔거든. 그러니 이제는 과천에서 전수관을 지어주어야 해요.”

 

(대동가극단 이야기를 해 주세요)

 

대동가극단은 처음에 찬우물에서 시작해 전국을 다니고 만주, 일본까지 다녔죠. 할아버지께서 시작 하셔서 내가 대동가극단 마지막 세대가 됐던 거고...... 큰할아버지는 단장을 하고, 둘째할아버지는 가야금이 유명 하세요. 그래서 양승희 씨가 죽파류...... 논문쓸 때 첫 번에 김창조씨가 들어가고, 우리 할아버지 함자가 임자 종자 성자신데 그렇게 들어가고, 셋째 할아버지는 또 피리, 새납 그걸 최고로 잘 불었어요. 그 할아버지는.... 마지막 조금앵 단체, 여성국극단 69년 문 닫을 때까지 거기서 새납 하시고..... 둘째 언니도 그 단체를 다녔고.....7살부터 다녔어요....자료가 많았는데..... 우리 언니가 스물네살에 청주공연 갔다 우리 형부를 만나 가지고 형부가 못 다니게 해 가지고 딱 결혼해 들어 앉혀서....그거 광대집 없애느라고 자료를 다 태운 거야. 6·25나고.....자료가 한 개도 없는 거야. 일부러 태워서......”

 

대동가극단 앨범이 있었어요. 내가 누렇게 변한 사진이 있었어. 옛날에는 얼굴을 동그랗게 주욱 있는 사진이..... 대동강 부벽루에서도 공연 끝나고 찍은 사진도 있었고.... 옛날에는 집 대청마루에 사진들 주욱 걸고..... 거기에 언니 사진도 있었는데 그거 다 불태워 버린 거야. 또 집안 여자로 임명월, 임명옥 고모뻘 되는 두 분이 그때 당시에 여잔데도 줄을 타고 소리를 했고, 연극을 했고.... 우리 언니도 창극을 하면 이도령 역할을 했데. 우리 언니가 판소리를 한 거야. 경기 사람이 판소리하는 걸 중고제라 그러잖아. 중고제는 없어졌으니까.....흔적도 못찾아. 중고제 그거 도립에서 세미나 했었어요. 중고제 때문에 왜 찾을 길이 없어서..... CD 하나 남겨 놓지 못해서.... 다들 하긴 했어도 남겨놓질 못하고 돌아가신 거야.”

 

(2019.4.8. 경기소리전수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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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카메라가 처음 나왔을 때 그걸 샀어. 하루 날 잡고 과천을 카메라에 담기로 했는데, 과천에 와서 차가 퍼져버리는 바람에 못했지. 참 아쉬워.”

 

이씨는 과천동 124번지에서 났다. 안양중학교에 다닐 무렵, [일렉트로닉]이라는 외국 잡지를 보게 되면서 전자기술에 흥미를 갖게 됐다. 졸업할 무렵에는 광석라디오 만들기에 도전했는데 과천에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전기납땜인두를 사용할 수 없었다. 궁리 끝에 구리를 불에 달구어 납을 녹이는 방법으로 납땜에 성공했다. 그렇게 만든 광석라디오를 동네 어른들께 몇 대 팔기까지 했으니, 손재주가 좋았다. 그 라디오를 학교 기술선생님께 보여드리고는 이거 하느라 수업을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라고 말씀드려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충무로에 기쁜소리사가 전파사로는 제일 큰 회사였고, 그 다음이 동양전자였지. 들어가고 바로 기술부장을 맡았지. 몇 년 뒤에 사장이 이민 간다고 회사를 접는 거야. ‘그래? 그러면 내 회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청계천에 회사를 차렸지. 한국전파사협회 부회장을 하면서 기술교육을 맡아 했어. 전국에서 수리 못하는 음향기기, TV를 가져오면 밤새 고쳐주고, 기술을 보급하는 일을 했지.”

 

나중에는 한국텔레비전 기술학원에서 강사를 맡아 했다. 전자과가 유명한 한양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씨는 외국서적을 펴놓고. 밤을 새웠다.

 

콘사이스(사전)를 찾아 단어를 써놓고 뜻풀이를 하는 거야. 영어고 일어고 그렇게 해야 다음날 어제 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으니까. 가방끈은 짧지만, 기술 하나는 자신 있었지.”

 

그렇게 전자기기 개발에 매달려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60대 중반 어느 날 아침 손에 쥔 커피 잔이 떨어지더란다.

 

이상하다 싶어서 동네 병원엘 가니까 큰 병원으로 가라고 구급차를 부르더라고. 성심병원에 MRI가 처음 들어 온 날, 내가 첫 시험환자가 됐어. 사진을 찍더니 사타구니 정맥에서부터 머리까지 관을 넣고 약을 넣더라고. 얼굴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 소리를 질렀어. 의사가 더 밀어 넣으면 가는 뇌혈관이 터질 수 있으니 이 정도까지 하자 그러더군. 대 여섯 달 입원하고 재활치료 해서 이 정도까지 산거야.”

 

최근 그의 관심사는 울트라소닉 즉 초음파다.

 

반도체 생산에 들어가는 웨이퍼에 동시에 3천개의 미세한 구멍을 내는 장비개발에 성공했을 때가 제일 기뻤어. 평생 주식도 부동산투자도 안 해 본 나였지만, 그런 성공 부럽지 않게 좋았지.”

 

전자 기술 말고 그가 해 본 외도는 뜻밖에도 다방이었다.

 

읍내에서 우리집이 부림상회라고 유명했어. 학교 후문 앞이니 아이들 문구부터 콩나물까지 팔았지. 아버님이 남대문으로 영등포로 다니시면서 물건을 떼다 파셨는데, 나중에 그걸 엎어버리고 다방을 차렸어. 면사무소 앞이니 면에 오는 손님들 만나는데 다방이 되겠다싶었지. 커피가 한 잔에 20, 30원 하던 시절이었어. 그런데 마담이 수완이 좋아야 한다길래 안양에서 스카웃 해왔는데, 월급이 3만원이야. 나중에 충무로에서 데려다 놓으니, 매상이 올라가는가 싶었는데 월급이 6만원이야. 그러니 한 달 내내 팔아 마담 월급 주고 나면 적자야......”

 

과천의 집과 문원동 초입의 논을 다 팔고 서울로 이사했다. 그리고 정확히 2년 뒤인 1971, 서울대공원 조성계획이 발표되고, 과천신도시계획이 나오면서 과천 땅값은 다락같이 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지만, 이씨는 기술 하나로 부르는 게 값인 시절이었다.

 

전국의 마을마다 앰프를 달았고, 학교에서는 방송장비를 달았어. 방송실 마이크 소리가 50개 교실에서 들릴 수 있도록 신호를 나누는 분배기도 내가 개발했지. 조금 뒤에는 학교에서 교실마다 VTR을 설치하는 일도 했지.”

 

지금은 개발자와 경영자가 나뉘어 각자 제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그렇게 조직적으로 회사를 운영할 생각은 없었다. 오로지 기술개발에만 매달렸다.

 

광학장비에 들어가는 프리즘에 45도 각도의 구멍을 뚫는 장비를 개발했다. 국산비행기를 만드는 KAI에서 회사를 차려놓고도, 처음엔 45도 각도로 볼트를 박는 기술을 익히는 데만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데, 그보다 몇 배 더 어려운 기술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최근에는 의료용 초음파 세척기에 이어, 얼굴을 담그면 모공에 이물질을 빠지게 만드는 미용세안기도 개발했다.

 

이씨는 아직 청년이다. 사무실 옆 개발실에는 웬만한 전자회사 몇 개는 차릴 만큼의 장비를 갖추고, 새로 의뢰가 들어오는 전자기기 제작에 도전한다.

 

내 몸과 나의 싸움이지.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날로 그만두게 되는 거고. 움직일 수 있으면 해보는 거지.”

초음파는 수평으로 작용하지. 이번에 수직으로 파형을 나타내는 기술개발에 성공했어. 수직 초음파는 나선형으로 나가는데, 아래로 가면서 회전이 일어나 그 기술을 활용한 장비를 개발 했어.”

 

(2021.10.14.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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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개성분이예요. 소리 좋아하시고 손이 크고 수완이 좋으셨어요. 8살에 상주로 피난을 갔는데 거기서 처음 본 여성국극단의 창극을 보고 푹 빠졌죠.”

 

상주로 피난 갔던 모녀는 휴전선이 막히자 서울에 자리를 잡는다. 어머니가 삼각지에서 갈빗집을 할 무렵 과천의 신설부대 소대장이던 신동식씨가 자주 드나들었다. 어머니는 신씨가 마음에 들었는지 어린 딸을 인사시켰다. 1962년 강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년 연상의 신씨와 결혼해 과천사람이 된다.

 

하리에서 땅이 많은 부농의 아들 신씨는 사람 좋아하고 젊어서부터 마을 일에 앞장섰다. 남편이 그러니 집안은 노상 손님들이 그치지 않았고 손님상 준비하는게 강씨의 신혼살림 중 큰 일이었다.

 

새마을운동이 과천면에 시작될 무렵 과천에도 새마을부녀회가 만들어졌다. 강씨는 면장 부인이 강하게 권하는 바람에 부녀회일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에는 1주일간의 합숙을 하는 새마을교육을 다녀와야 했다. 강씨는 나중에는 농협에서 만든 주부대학까지 마치며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소리를 좋아했던 강씨는 주민센터에서 민요를 공부했다. 그렇게 공부해서는 군부대로, 양로원으로 위문공연을 다녔다. 소리를 하다보니 흥을 돋우기 위해 사물이 필요했다. 장구를 배우고 본격적으로 사물놀이에 입문한다. 남사당놀이보존회에서 상쇠로 활동하고 과천가락을 잘 하던 임차근씨를 따라 부쇠로 몇 년간 활동한다.

 

1987년 강씨는 당시 경기민요 준 보유자였던 임정란 선생에게 소리를 전수받는다. 임선생은 무형문화재57호 묵계월 선생의 준 보유자로 있다가 경기도무형문화재 31호로 오게 된 때였다. 임선생은 강씨가 자신의 스승인 묵계월 선생에게 사사 받도록 이끌어준다. 이 시기 강씨는 제3호 남사당놀이 무형문화재인 박용태 선생에게 민요와 사물놀이를 사사한다.

 

사물놀이에서 소리, 소리에서 가락장단으로 욕심이 커졌어요. 가락장단은 일정하게 연주하는 사물놀이와 다르게 민요를 할 때 반주의 역할을 하는 장단이라 장구를 칠 줄 안다고 해서 다 가락장단을 칠 수 있는게 아니예요. 그래 1997년부터 백영춘 선생님께 6년을 배웠어요. 백선생님은 과천민속보존회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1981년 이윤영 과천노인회장은 과천민속보존회를 만든다. 70여 명의 과천 토박이 노인들은 마을별 두레패에서 풍물을 하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일제하에 맥이 끊겼던 과천무동답교놀이를 복원했다. 이윤영 회장은 1988년 남편 신씨에게 과천민속보존회를 맡긴다. 신씨는 구전으로 전해져 마을마다 조금씩 달랐던 공연 형식을 일치시키고 문화재로 등재 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과천시민대상, 내무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으나 2002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예산을 타느라 갖은 고생을 했는데...... 그 돈으로 만들어 온 무대장치가 우리 집 양반 마음에 차지 않았어요. 제작업자하고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소리가 나더니 전화기를 떨어뜨리고는 쓰러졌어요.”

 

졸지에 남편이자 민속보존회 동무를 잃은 강씨는 무동답교놀이를 문화재로 만드는 일에 매진한다. 무동답교놀이는 2004년 강명자를 상쇠로 문화재 심사를 올렸으나, 조건부 지정이 났다. 과천시에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2007년 무동답교놀이는 다른 이를 상쇠로 심사를 신청해 경기도문화재가 됐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그러나 어떡하겠어요? 그 뒤로 2010년 문화재청에서 나무꾼놀이를 문화재로 만들자는 제안을 해왔어요. 당시 일처리가 빨랐던 평택에서는 모심기놀이로 금상을 받고, 그해에 평택문화재가 되었다고 해요. 그해 가을 과천시에서 과천시민대상을 받았어요. 1997년 남편이 받은 상이었죠. 부부가 이 상을 받은 건 처음이래요.”

 

그 뒤로 강씨는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경기민요가사교본을 큰 활자로 내고, 학교에 국악강사로 나갔다. 장애인사물놀이반을 10년 넘게 이끌었다.

 

2018년 강명자 씨는 자녀들 도움을 받아 [강명자, 삶을 노래하다]라는 자서전을 낸다. 책에는 무동답교놀이의 유래와 구성 그리고 전승방식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과천민속보존회와 남편 신동식 선생에 대해 나와 있다.

 

강씨는 현재 과천이북도민회장을 맡고 있다.

 

(2022.2.7. 이북도민회사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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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동 최씨네 아파트 베란다에서는 관악산 송신소가 보인다.

 

저녁이면 저걸 보면서 저길 올라가면 내 고향 과천이 빤히 보이는데 하고, 앉아 있곤 해요.”

 

1973년 서울대공원이 들어서면서 그곳에 살던 이들은 집터를 내주고 흩어졌다. 최병호씨가 살던 십리골은 대공원 가장 안쪽 조절저수지 근처였다.

 

서울대공원이 들어서기 전, 청계산 막계리 일대에는 산골마을들이 많았죠. 내가 태어난 십리골 주변에는 어름골, 좁은골, 장치골..... 샘이 많아서 였나 샘말, 양지쪽이라서 양짓말, 응달이 져서 그랬나 응달말 또 피아골이 있었죠.”

 

여섯 집인가 있었어요. 집에서 과천읍내까지가 십리라서 십리골이라 했는지, 집 뒤에 승내사라는 절이 있어서 그랬는지......., 집 뒤로 산길을 따라 가면 의왕으로 용인 고기리로 갈수 있었지. 6·25 전쟁 때는 중공군이 말을 타고 넘어 오기도 하고, 수복 때는 미군이 그리 들어오기도 했어요.”

 

집에는 두 명의 머슴이 있었다. 세경을 착실히 모은 그들은 산 아래 땅을 사들였고, 나중에 정부에 수용되면서 큰돈을 만지게 되어 지금도 그 후손들이 과천에서 살고 있단다.

 

흑석동에 살던 친척들이 십리골로 피난을 오는 바람에 형님들만 피난가고, 어머니와 최씨는 집에 있었다. 중공군 인민군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처음 보는 커다란 무쇠솥을 가지고 와서 밥을 해서는 우리를 주기도 했어요. 어느 날 아침에는 감쪽같이 사라지더라구요. 그러더니 산 뒤로 미군이 들어오더라구요. 형님이 인민군에게서 받은 돈(군표)을 보이시면서, ‘이젠 이거 못 쓰는 거야.’ 하시더군요.”

 

31녀 중 막내였던 그는,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큰형님이 아버지 같았다.

 

큰형님은 대공원이 들어서면서 문원동으로 이주해서 사셨다. 지금은 조카가 있어 명절이면 모인다.

 

과천향교에 큰 제사가 있으면 인근에서 어른들이 많이 모이셨어요.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제관이 국구웅~’하시면 다들 엎드려 절을 하시던 기억이 나요.”

 

문래동에 외가가 있어서 자주 다녔다. 외가에서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아내가 독실한 기독인이었다. 전기도 없는 시골에 온 아내는 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셨고, 온 집안을 개종시켰다. 아내의 전도를 받은 그는, 이후 신학을 하려는 생각을 했고, 의왕 포일리에 3천 평 땅을 사서 신학교를 세울 꿈을 품기도 했었다.

 

제대 후 대학교수가 꿈이었던 그는, 제대 후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밤잠을 아껴가며 공부를 계속 했다. 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대학원에서는 무역학을 했다. 그리고도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국제경제학을 했다. 그 뒤에도 하버드에서는 국제경제학을 했다.

신학을 하면서 박사는 철학으로 학위를 받았지. 철학은 통계학이야. 과학이지.”

삼성물산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박정희 정부는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구호를 걸고 무역을 장려했다. 미수교 국가들을 대상으로 시장을 개척하는데 나서게 했다.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을 비롯해 러시아까지 가서 한국이 수출할 만한 상품을 찾았다.

 

상해시장을 만났어요. 수교가 없으니 신용장 개설이 안 되니, 물물교환 형태로 무역을 하자는데 까지는 합의를 했지요. 섬유수출이 우리나라를 이만큼 먹고사는 나라가 되게 만든 거예요.”

 

일본과의 거래가 많았다. 구로공단 이후 대방동 가리봉동에 공단이 생겼다. 대방동에 집을 사서 세를 놓고 있었는데, 일본 친구들이 독립하라고 재촉했다.

 

집에다 사무실을 차렸죠. 전화도 놓기 어려웠는데, 무역한다고 백색전화를 놓을 수 있었어요. 휴대전화가 나오기 전, 무선호출기(삐삐)와 차에 달아 놓고 쓰는 카폰을 가지고 다니면서 무역을 했어요. 일본친구들이 한국에 오면, 호텔에 안가고 내 집에서 지내면서 근처에 있는 거래처에 가고..... 나도 일본가면 그 친구들 집에서 지내다 오곤 했어요.”

 

한번은 수출한 제품이 클레임이 걸렸어요. 직원 6,7명이 일본 가서 며칠에 걸쳐 AS 해주고도 손해금을 현금으로 물어주게 됐죠. 당시 전자계산기가 없었고, 수동식 계산기가 있었는데, 소수점 세 자리까지 계산해요. 그걸로 계산해서 돈을 보냈죠. 나중에 일본에서 돈이 많이 들어왔다. 계산 잘못한 거 아니냐?’고 물어요. 그 후론 그들에게 더 큰 신뢰를 얻게 됐죠.”

 

가리봉동에 공장을 세워 섬유업으로 돈을 번 그는, 새로운 아이템을 찾다가 미아방지 팔찌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외 무역으로 산 사람에게 내수시장은 전혀 달랐다.

 

해외거래만 하다가 내수시장에 처음 나섰는데 많이 달랐죠. 시장도 작지만 못 팔겠다고 반품이 들어오는데, 당해낼 수가 없었어요. 번 돈이 거기 다 들어갔어요.”

 

과천향우회가 처음 만들어질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었다.

 

사업을 하면서 평생을 보낸 그는 자식들은 순탄하게 월급 받는 직장을 다니길 권했다. 큰아들 인규 씨는 중앙대 경제과를 졸업하고 중국 상해대 대학원에서 한의학을 했다. 작은아들 민규 씨는 동작구의회 부의장이다. 2022년 현재 서울시의회 의원이다.

 

때를 잘 만났어요. 은혜지요. 미리 준비한다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도 했지만..... 감사하지요.”

 

인터뷰 날을 잡고 여러 편의 글을 써뒀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어려서 기억나는 사람들 등 여러 편이 있다.

그 중 내 고향 과천을 옮겨 싣는다.

 

고목나무 느티나무 있던

남태령고개 내고향

서낭신 있던 고목 느티나무

남태령고개 내고향

고갯길 걸어 넘어가며

서낭당에 돌 던지던 신이 있다던 고목 느티나무

남태령고개 내고향

높다 높다하여 숨을 몰아쉬며

걸어 넘어가던

남태령고개 내고향

어두운 밤이면 호랑이 나온다던

남태령고개 내고향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걸어서 넘어가던

남태령고개 내고향

과거보러 한양 간다던 길목

남태령고개 내고향

, 이제는 어데론지 사라져간 고목 느티나무

남태령고개 내고향

, 이제는 그때 그 시절에 꿈에도 믿을 수 없었던

믿어야만 하는 현실에 전철이 달리는

, 이제는 호랑이도

서낭도 볼 수 없는

한양 같고 서울 같은 아름다운 현실에

남태령고개 내고향. 과천!”

 

(2021.10.21.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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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안에서 난 윤씨는 6남매였다. 위로 15대부터 과천서 살았다. 지금 3단지에서 청계산 쪽으로 세곡마을 입구쯤이다.

 

머루와 으름을 따 먹으러 산으로 다니던 때가 최고였지. 밤이면 닭을 노리고 내려오는 살쾡이를 쫓기위해 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고..... 이른 아침에 읍내에 나가는데 커다란 개가 따라와. 돌을 주워 던지니까 달아나는데, 그걸 쫒으러 가니까 원두막에서 참외를 지키시던 동네 어르신이 이 놈아, 저건 개가 아니고, 늑대다.’ 하시던 생각이 나.”

 

휴가를 나왔는데,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어. 세곡마을 동네 아이들이 산에 올라 갔다가 고양이 새끼 같은 걸 안고 내려왔어. 어른들이 범새끼라고 큰일 났다는거야. 그래 장정 여럿이 산에 올라가 주워왔던 자리에 내려놓고 오기도 했어.”

 

초등학교 2학년때 6·25가 났다. 마을에 들어 온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했다. 그해 짓고 있는 농산물은 현 경작자가 갖게 하고 이듬해 부터는 땅을 전부 몰수해서 그 마을 사람 수대로 나누어 주었다.

 

학교엘 갔더니 음악선생이 장백산 줄기따라...... 김일성 장군님......’ 노래를 가르치는 거예요. 지금도 가사를 보면 부를 수 있어요. 학교가 파해서 집에 오니 마루에 비스듬히 누워 계시던 아버지께서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으셔요. ‘학교에 다녀 온다고 했더니, 베고 계시던 목침을 냅다 제게 던지시는 거예요. 달아났죠. 해가 지고 들어가니, 어머니께서 낮에 땅을 모두 빼앗기셨다고 그러시더라구요.”

 

가을이 되자 인민군들이 공출을 나왔다. 밭에서 여물기 시작하는 벼, 조 이삭을 잘라서 낱알을 세고는, 그 밭에서 나올 양을 가늠하고는, 거기 맞춰 자기들에게 내야 할 양을 정해 통보하는 식이었다.

 

나를 밭에 들여 보내 이삭을 뽑아오게 하고는, 저희들이 세는 거예요. 호박도 넝쿨을 따라가며 순을 세어서 이 밭에서 1천개 나겠다. 700개를 공출내라.’는 거예요. 막상 수확해보아서 6백개 밖에 안나면 옆집에서 빌려다 700개를 내야 했어요. 호박은 전시물자였어요.”

 

그렇게 가을이 지나고 1·4후퇴 때 윤씨네도 피난을 갔다. 10살 윤씨는 집안 재산인 회중시계를 업고 충청도 직산까지 갔다.

 

의왕 갈미에서 하루 자고 수원역으로 갔어요. 역앞에 아는 이가 사는 집을 찾아갔는데, 피난가고 집이 비어서 빈 집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아침 수원역으로 갔어요. 열차에 사람이 가득 차서 지붕에 이불이며 짐보따리를 올리고 오르려는데, 아버지께서 날이 춥고 위험해서 안되겠다고 걸어가자셔서 짐을 다 내리고 기찻길을 따라 걸어갔죠. 한 시간쯤 걸었나. 먼저 출발했던 기차가 폭격을 맞아 탈선한거예요. , 머리가 따로 나뒹굴고 피가 흥건해요. 그 곁을 지나서 내려갔어요. 오산 쯤 가다가 쉬는데, 젊은여자가 애기를 업고 머리에는 짐을 이고 아이 하나는 손을 잡고 걸어가더니, 길 옆에 애기를 내려 놓고는 이불로 싸 놓고는 걷는 아이만 데리고 가더라구요...... 평택에 갯골이란데가 있어요. 뻘이예요. 저녁 무렵 건너가다가 빠지면 사람들이 잡아당겨도 빼낼수가 없을만큼 깊은 늪이더라구요. 그 밤에 건너가다가는 죽겠다 싶어요. 아버지께서 날이 밝으면 건너가자 하셔서 그 얼음판에 짚을 깔고 누웠어요. 밤새 누군가 돈암동 아무개야하며 잃은 사람을 찾는 소리가 지금도 쟁쟁해요. 다음날 날이 밝아 다시 길을 나서는데, 얼음판 위로 팔이 나와있고, 저쪽엔 머리 뒤가 보이고, 좀 더 가면 등판이 보이고....., 처참했어요. 그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왔어요. 10살 난 내가 허리까지 찬 눈을 헤치고 걷기 힘들만큼......”

 

과천초등학교 41회를 졸업한 윤씨는 안양중학교 안양공고 전기과를 거쳐 서울 동양금속에 시험을 봤다. 150:1로 공무직에 입사한다. 동양금속은 알루미늄 회사였다. 방위산업체로 재편되면서 야간대학을 졸업한 윤씨는 국산 무기 개발의 주역이 된다.

 

진주에 출장을 가서 회식을 하고 숙소에 들어가니, 내일 아침 10시 전방 ○○고지에 무기 성능시험에 참여하라는 연락이 와있어. 진주경찰서 가서 사정을 설명하니 부산역 가는 택시를 잡아주었지. 부산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아침 6:40에 서울역에 내려서 회사에 전화를 하니, 사장이 차를 보내주대. 그걸 타고 전방까지 내리 달리는 거야. 검문소마다 신분증 내보이고 사정을 설명하고...... 그렇게 바주카포, 수류탄, 나중에는 국산미사일 1호까지 개발하는 일을 했어.”

 

바주카포에 들어가는 60mm 포탄에 화약을 넣고, 터뜨려보는 실험을 안산 고잔에서 했어. 한국화약이 간척한 땅이었거든.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비율은 어떻게 되는지, 아무것도 기본 데이터가 없는 데서 하나 하나 실험해보고 개선해가면서 했지.”

 

윤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농업사회를 중화학공업 사회로 바꾼 지도력을 높게 평가한다.

 

차관을 얻어서 기계를 들여 오고 군수품을 개발하는 회사를 차린 기업들이 처음에는 생산능력에 비해 터무니 없이 작은 정부의 주문에 적자를 면치 못하자, 불평을 해댔지. 그게 대통령 귀에 들어가자, 어느 날 청와대로 불러 모으고는 내가 총알이나 만들자고 기계를 들여오게 한 줄 아느냐? 왜 그걸로 산업장비를 만들어 팔 생각을 못하느냐?’고 야단을 치는 거야. 그때 동양, 풍산 같은 기업들이 선반, 밀링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지.”

 

회사를 나온 윤씨는 창업을 한다. 5명이 시작한 회사는 300여 명의 직원을 두고 코스닥 상장까지 하는 데 성공한다. 과천 출신 창업 기업인으로서는 흔치 않은 케이스다.

 

일본 제품을 수입하는 딜러를 겸했는데, 박람회를 하면 17개국에서 딜러들이 모여. 그 모임에서 회장을 몇 년을 했어. 자존심에 일본말을 않고, 한국말로 했지. 그런데 한국말을 영어, 일어로 통역을 하면 아프리카, 유럽, 남미.... 17개국 서로 다른 말을 하는 딜러들이 서로 통역을 해. 그러면 뜻이 통해. 참 재미있었지.”

 

한번은 내가 만든 밸브를 이탈리아에 수출했는데, 피아트에서 그 밸브를 단 장비를 브라질에 수출했네. 공장이 가동을 못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어. 그래 우리 영업담당하고 기술담당이 로마로 날아가서, 다시 브라질로 가서 고쳐 준 적이 있어. 13천원짜리 밸브를 고치러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찾아간 남한 사람을 보고, 놀라던 브라질 사람들이었어. 그때 남미의 기술력이 그랬어.”

 

65세에 은퇴한 윤씨는 노후를 보낼 곳을 찾아 2년 간 전국을 다닌다. 그러다가 평창 650고지에 자리 잡는다.

 

공기가 좋고 숲이 좋아. 진부까지 10분 정도면 돼고..... 구급차로 강릉을 가는 시간이면, 과천에서 안양 한림대병원 가는 것과 비슷할 걸?”

 

(2021.11.22. 과천문화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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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조부께서 돌아가신 후 할머니께서는 황해도 평산에서 아드님 두 분을 데리고 과천으로 오시고 세거지 선산도 여기야. 중소농 다해야 1만 평도 안 되는 정도였어. 대공원 들어가는 입구에 4천여 평이 수용됐어. 나중엔 서산 가서 목장을 했지. 개인 규모로 몇 만평 소도 1백 여 마리 길렀어. 최종수가 퇴직금으로 옆에다 5천 평을 사서 같이 하기도 했지. 원체 농사꾼이어서 농사 밖에 몰랐어.”

 

초등학교 입학 당시에는 시험을 보지 않고 입학했다. 신씨보다 몇 해 전 입학한 세대는 시험을 보았었단다. 중학교 입학은 시험을 치렀다.

 

잘 생긴 신씨는 따르는 여자들이 많았노라고 웃는다. 공부를 잘해서 경복을 갔는데 가서는 공부를 않고 부모들의 애를 태웠다. 나중에 그걸 속죄하는 마음에서 열심히 살았노라 회고한다.

 

세상을 허투로 살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르러 그때부터 농촌운동을 열심히 하게 된다. 한창 4-H 운동이 발흥할 때였다 신씨는 군 단위 연합회장도 지냈다. 농촌지도자연합회장을 지냈다.

,,,체를 중심으로 한 4-H운동은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 그룬투비 목사가 시작했다. 그 사상은 신씨 사상의 중심이 되었다. 군대 갈 때까지 그렇게 보냈다.

 

제대 후 농사일에 매진할 때,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시작하자 동네에서 신씨에게 네가 젊고 패기도 있으니 해봐라.’해서 떠밀려서 27살 젊은 나이에 새마을지도자로 나섰다.

 

신씨에게는 사명감이 있었다. ‘왜 농촌이라고 못사느냐, 잘 사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느냐?’는 오기가 있었다.

 

이영구 전 문화원장 아버님과 같이 지도자교육을 받으러 나갔다. 하일리에서는 남궁 씨가 지도자로 나섰다.

 

어느 날 이성환 시장은 강화에서 해운업을 하고 있던 신회장에게 과천새마을회장을 맡으라 강권한다.

 

과천새마을회장을 시작할 무렵 횡령사고가 일어났다. 사고를 친 직원에게 말미를 주었으나, 변제하지 못하고 감옥에 갔다. 그 감옥엘 가서 면회를 하고 영치금을 내고...... 신씨가 큰 돈을 대신 변제해 주었다.

 

90년 말 정부에서 새마을진흥법에 의해 년 3,600만원을 보조하지만 그걸론 사무국장 봉급하고 나면 쓸 돈이 없었다. 1년여를 사비를 보태 봉급을 주던 신회장은 경기도에 찾아가 자립기반을 세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전국에 있는 새마을회 회관 중 과천새마을회관 외 몇 군데 만 자체 소유 건물을 가지고 있다. 나머지는 거의 시에서 마련한 청사를 빌려 쓰고 있다.

 

이 일에 대해 신씨는 내가 돈을 낸 게 자랑이 아니라, 자체 회관을 지어야겠다는 뜻을 정하고 방법을 찾아 골몰한 걸 자랑하고 싶다.”고 말한다.

 

새마을회관을 지으면 정부에서 5천만 원을 지원해준다. 그때 신씨는 2천만 원을 먼저 내놓고, 나중엔 1억을 만들어 놓고, 땅을 찾아 다녔다.

 

그 정성을 보고 당시 이성환 시장이 직원들에게 신 회장이 먼저 자기 돈 내놓고, 회관을 지으려 하니 마땅한 땅을 찾으라고 말한다.

 

현재 새마을회관 자리는 본래 마을버스 주차장부지였다. 그걸 길 건너 그린벨트로 옮기고 건축을 시작해 20억원을 지원 받는다.

 

신회장은 “1억 들여서 20억 받는 장사가 어디 있느냐.”며 웃는다.

 

완공 후 단위농협을 1층에 유치하고 2층에는 과천시선거관리위원회를 입주하게 한다. 이 사례는 새마을회 역사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후일 신 회장은 대통령훈장(자조장)을 받는다.

 

사실 그 이전에 지을 수도 있었어. 오래 전에 새마을회가 과천시 주차장관리를 위탁사업으로 하고 있었을 때, 그 수익을 회관건립기금으로 모았더라면 훨씬 전에 지을 수도 있었을거야.”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신씨는 인생을 보는 시각을 달리하게 된 것이 기독교 신앙이었다고 말한다. 선바위 신씨네는 과천에서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교회를 섬기는데 정성을 들였다. 과천기독실업인회(CBMC)도 섬기고 있다.

 

사람들은 신씨는 부자로 태어나 가진 걸 잘 베푸는 사람이려니 생각한다. 그러나 신씨는 자신이 농사지어 번 돈을 좋은 일에 쓸 줄 아는 것이었다. 신씨는 나는 농사꾼이다. 농사가 좋아 평생 땅을 판다. 그렇게 늘린 재산에서 써야 할 때 쓰는 것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인생을 내 욕심만 부리지 않고, 남도 돌아보는 삶을 살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신씨는 가진 사람이 좀 더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 주위가 밝아지고 결국은 자기에게도 돌아온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들이 시카고대학에 다닐 때 미국이란 나라가 유학생인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까지 대주는 걸 보고 신씨는 남의 나라에서 내 자식에게 이렇게 베푸는데 나도 내가 사는 지역에라도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과천애향장학회에 5천만원, 로타리클럽에 3천만원을 내놓는다. 그걸 보고 같은 로타리클럽 멤버인 유모 대표가 신씨의 봉사를 따라서 장학금을 낸다. 한동안 과천에는 줄봉사가 이어졌다.

 

자신을 평생 농삿꾼이라고 여기는 신씨는 노후에도 농사를 지을 요량으로 경치 좋은 양양에 땅을 사고 집을 마련해 막 재미를 붙이려 하는 즈음에 과천문화원장을 맡아 달라는 청이 들어와 과천에 또 붙잡혔다.

 

신씨는 과천줄타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는데 전수관 하나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을 숙제로 삼고 있다.

 

봉사는 마음이 시켜야 하는 거야. 덕불고필유린이라. 덕을 베푸는 이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 애들도 잘 됐잖아? 뭘 더 바라겠어? 베풀 수 있을 때 베풀어야 해. 다 돌아와.”

 

신씨는 삼남매를 두었다. 둘은 미국에서 사는데 아들 하나는 대학교수이고, 딸 하나는 월드뱅크에 다닌다. 큰아들은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아 하고 있다. 손자가 하버드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에 할아버지는 싱글벙글이다.

(2020.11.9. 과천문화원장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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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호씨는 19427월 하리에서 났다. 동네 이름이 지령고개였다. 큰길로 서울에 가는데, 산으로 질러가는 길이라고 지름길이 있었다.

 

고비군수를 지내신 선조께서 과천에 터를 잡으신 이후, 신태호씨가 13대다. 청계산에 누우셨다. 신학수 문화원장과 일가다. 신씨네 일가가 번성해서 하리 인근에 모여 살았다.

 

7남매 중 5째로 났다. 첫째 누님은 2020년 현재 아직 생존해 계시고 내년이면 92세가 되신다. 위에 형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1살 위인 누이가 6·25때 돌아가시고 아래 남동생도 죽어서 아들은 혼자인 셈이다.

 

7살에 과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한내를 건너지 않고, 둑길을 따라서 등교했다.

 

3학년 때 전쟁이 나면서, 학교가 불타서 운동장 바닥에 움을 파고, 가마니를 깐 움막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여름이면 학교 뒤 산소에서 나무그늘에 칠판을 걸어놓고 공부했다. 비가 오면 일찍 파하곤 했다.

 

선친께서는 생전에 베로 도포를 만들어 두시고는 당신께서 돌아가시면 입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옷을 기제사 때면 꺼내 입으시고, 기제사에 임하셨다고 전한다.

진짜 베를 구하시느라고 애를 쓰셨다고. 선친께서도 진짜라고 구해서 입고 돌아가셨던 그 옷도 나중에 납골당 하느라고 파보니, 나일론이 섞였더라고......

신씨는 가족 납골묘를 만드느라 50여 기를 파서 수습했는데, 근래에 쓰신 분들은 거의 다 나일론이 섞였더라고 말했다.

 

신학수 문화원장 부친 돌아가셨을 때, 과천장의사에서 보내온 수의로 최종수 전 문화원장과 셋이서 염을 했는데, 끊어지더라고.....베는 닥나무를 벗겨 가지고 만드는 거라서 끊어지는게 당연한 거였어. 광목이 섞였던거지.”

 

6·25 나서는 소 마차 끌고 청계산 응달말 종수네 동네 하루 자다가 비가 와서 도로 돌아오고. 9·28수복 무렵인가 가을에 사기막골 산꼭대기 광수네 집으로 피난을 갔다. 세 번째는 겨울에 지금 화성시 송산면 사강에 이모가 있는데 거기를 소 마차 따라서 걸어서 갔다.

 

신학수 문화원장네가 큰댁이라 함께 갔는데, 작은댁 소는 인덕원 못미쳐 세골(재경골)에서 내려오는 작은 개울에서 큰댁 소는 약해서였는지 그 개울을 못 건너서 못가고, 신씨네와 작은댁만 내려갔다. 사강 둥그리(동진마을 지금의 화성 송산면)라는 동네에서 겨울을 지냈는데 인민군이나 중공군은 보지 못했다.

 

중학교는 송재수 교장이 계셨던 관악중학교(나중에 한일중학교)를 다녔다.

지게를 교문에 대놓고, 공납금(사친회비) 내고 나오시던 아버지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술회한다.

 

나중에 양재동(당시 광주군 원진면 또는 과천 동면 그리고 말죽거리라 불렀다) 은광중학교(설립자 이강목. 현재 양재사거리에서 성남 방향 7,80미터 오른쪽에 원진국민학교와 같이 있었다.)

 

그때 과천에서는 채미(참외), 오이, 토마토 등 채소농사를 많이 했다. 신씨 선친 어르신들은 마차 끌고 상도동, 영등포, 남대문시장까지 내다 팔았다. 여자들이 이고 다니는 건, 가까운 흑석동이나 상도동, 노량진 잘 가야 용산까지 가는 거였고.....

 

1963년 강원도 인제군 소하면 소하리 최전방 군대에 가서, 1966년에 제대 포병대대 통신 주특기로 갔다. 서울 인근에서 복무하던 군인들은 휴가 나오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신씨가 복무하던 강원도는 사정이 달랐다. 집에 초상이 나도 당시 관보 아니면 집에 올 엄두도 못 냈다.

 

1967년 경기도 광주 색시를 아내로 맞았다. 처가는 신씨 형수 큰아버지와 처의 조부가 동서 간 이었다. 신혼여행은 택시를 타고 남산을 돌아오는 게 최고였다. 그렇게 결혼한 신씨는 아들 둘, 딸 하나, 삼 남매를 뒀다. 그때 한참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산아제한을 할 때였다.

 

1977년 이장이 되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동네일을 봤다. 마을회관을 지을 때도 정부에서는 시멘트와 철근만 주었다. 당시만 해도 부동산 거래가 활발할 때라 복덕방(중개사무소)을 통해 대지도 사고 비용도 거출해서 회관을 지었다. 삼거리에 복덕방이 많아서 그 사람들이 도와줬다. 80년대 초반까지 이장을 봤다. 신씨는 젊은 이장이었다.

 

당시 하리는 17개 반이나 되는 큰 동네라 이장이라고 안하고, ‘하리시장이라고 했어. 한 개 반에 20가구 정도 있었지. 과천서 민방위교육이라도 할라치면 줄이 제일 길게 서곤 했지. 하일리 막계리 유○○ 이장 장막교회 있는데, 관문리...... 문원리 김충원, 김도경씨, 이순기, 주암리 심정섭씨 등이 이장 볼 때였어.”

 

과천에서는 추석 다음 날이면 과천면 체육대회를 했다.

삼거리에 깡패들이 많아서 어거지로라도 이겨야 해서 소란스러웠지. 그리고 동네가 크니까 별의 별 사람들이 많았어. 이장 볼 때 이지익씨가 하일리 마을금고를 설립했어. 그전에는 김충원 씨가 농협을 했다가 강명희 씨가 조합장 할 때 금융사고가 나서 애를 많이 먹었다고..... 이장들이 영농회장 맡아서 메꾸느라 애먹었지.”

 

이장을 마칠 무렵 아내가 유방암에 걸려 11년을 투병하느라 신촌세브란스병원을 다녔다. 아내는 끝내 골수암으로 번져 별세했다.

 

위에 장남은 돌아가시고, 부모님 모시고 농사를 계속 짓고 있었지. 제사를 증조부터 제사를 지내고 있어. 원래는 고조까지 지내야 하는데 제천은 고조항렬이 없어져야 시제로 가는 건데, 큰집 장조카가 고조 5대조 시제로 모시는 걸로 했지.

종사 일을 하다 보니 남태령 쪽으로 산에 가기 어렵고 내가 부산으로 가서 사업을 하게 되니 어렵고....., 지금 자손들이 하나씩이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데다가 남태령 무네미길 올라가는데 있던 산소들을 관리도 어렵고, 그린벨트라 장례도 어렵고......,장사 지내는 인력관계도 어려워서 가족납골당을 3백기를 해서 선산들을 묘를 개장수습해서 모셨어.”

 

신씨는 평생 농사만 지었다.

 

지금 서초동 법원사거리 향나무 근처가 다 채소밭이었다구. 고속터미널 자리에는 일본사람들이 먹는 단무지무밭이었고..... 그 채소를 기르는 방법을 과천 사람들이 배워 와서 과천에서 조를 심던 밭에 채소를 심기 시작했고, 심어 놓으면 상인들이 트럭을 가져와서 가져다가 남대문시장에 가서 팔았지.”

 

직접 씨앗을 뿌리는 방법보다 발아율이 높은 채소모종으로 싹을 틔워 모종을 심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비닐이 없으니, 얇은 노루지에 들기름을 발라 종이가 젖어도 쉽게 찢어지지 않게 한다. 아직 비닐이 나오기 전이다. 들기름도 아까워 석유를 섞어 바르기도 했다. 그걸 씨를 뿌린 뒤 덮어서 발아할 때까지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이후로 오랫동안 과천은 서울사람들 채소 공급원이 된다. 양재에서 시작된 화훼도 그렇게 과천에 전해진 것이다.

 

신씨는 2002년부터 부산에서 특수작물을 재배한다. 부인이 돌아가시고 농장에 다니다가 부산에 시장 조사를 가서 보니 가락동 시장에서 사서는 내려다가 팔고 있었다. 부산에서 하면 운반비만 절감해줘도 되겠다 싶어서 시작했다. 부산에서도 농사지을 땅은 주로 강 서쪽이라 김해공항 쪽으로 부산 외곽에 땅을 구해 특수작물농사를 짓고 있다.

 

옛날에는 초상이 나면 지관이 일진을 봐 가지고 불길한 날 빼고 사흘 장 아니면 오일장이지..... 섣달 그믐에 초상나면 2일장. 해를 넘길 수 없다 해서.... 먹고 살 만한 집은 5일장..... 상 때는 동네서 팥죽, 탁주, 막걸리를 담갔어. 결혼식에는 감주를 담가 가기도 하고..... 부조라는게 국수 해가고 현금도 내고...... 결혼식 장부에 누구 국수 한관적혀 있었어.”

 

우리 형 장인이 신동면 의원 했어. 초등학교 교장이 정용섭 (이영구 전 문화원장이 다닐 무렵에는 교장 고이준)이었고......”

 

찬우물 고개가 높았어. 으능쟁이 고개도..... 그땐 꽁보리밥 싸갖고 금성방직 뒤 안양공고에서 걸어오면 초생달이 뜨지. 배고프니까 왜무 파란 것 뽑아서 까먹으면서 걸었지...... 그때 이웃집에 타작하면 고등어 굽는 게 반찬으론 고급이었어. 홍촌말 사는 친구가 고등어반찬 도시락 해가지고 학교 가는데 가다가 먹느라 한 시간이나 늦게 간 적 있지..... 자전거 타는 아이들 부러웠어. 동네서 안양중학교 다니는 셋만 자전차가 있었지. 훔쳐 타다가 매 맞고 배우려다 넘어져 부서지고......”

신씨네는 198117대조 할머니 글이 보물 728호로 지정된 바 있다. (설씨부인 권선문)

 

(2020.11.9. 과천문화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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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는 아버지가 과천에 이주하시면서 과천에서 자랐다.

 

백학윤 장로의 삶은 과천교회를 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친구를 따라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평생 배필을 얻었다.

 

과천교회는 1949년 토박이 이기증 씨 등이 노회에 청원하면서 시작된다. 이기증씨는 지금 과천노인학교장인 이정달씨 조부다.

 

청원을 받은 노회는 안양 인덕원에 있는 동은교회 전도사였던 조원국 전도사에게 도움을 받는다. 조전도사는 인덕원과 과천을 오가며 교회를 살피다가 전쟁이 끝나고 교인들과 양재천에서 모래를 푸고 산흙을 개서 흙벽돌을 만들어 교회를 짓는다.

 

과천교회에서 야학을 했어요. 정식 학교인가를 내려 했는데, 인근 학교에서 반대해서 못 냈어요. 우리는 돈을 받지 않으니까, 그리 갈 아이들이 우리교회로 오니까, 교육청에 반대의견을 내서 못 냈어요.”

 

읍내에는 동아일보 과천지국이 있었다. 백씨는 군대 입대 전후로 이 보급소 총무로 일한다. 북으로 주암리부터 남으로 재경골까지 걸어서 신문을 배달하고 수금했다. 당시 고 이송산 장로가 지국장이었는데 주재기자 역할도 했다. 백씨는 기사 쓰는 것도 도왔다. 당시에는 전부 걸어 다녔다. 후에 백씨가 사임후에 지국장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소천했다.

동아일보 보급소 일이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됐어요. 날마다 신문을 읽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걸 알 수 있었지. 어느 날 육군에서 타자병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났어요. 이거다 싶었지.”

 

용산 삼각지에 육군본부가 있고 그 부근에 한국행정기술학원이 있었다. 학원을 수료하고 시험에 합격하면 타자병으로 지원입대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등록했다. 저녁마다 학원을 다니며 타자를 익혔다. 시험 날 27명인가 응시했는데, 7명이 합격했다.

 

논산에서 기본훈련을 받고나니 춘천으로 데려가데. 그리곤 며칠 후 제2의무단으로 귀대하라는 명령서를 주는 거예요. 의무단 본부가 춘천에 있다고만 듣고 집으로 왔는데...친구와 과천 집으로 와 하루 자고, 다음 날 그 친구 집으로 가 하루 자고, 월요일 춘천으로 갔어요. 가서야 제2의무단이 춘천이 있다가 몇 달 전에 원주로 이동되었다는 것을 춘천에 가서야 알게 되었어요. 거기 가서야 원주 가는 차가 드물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하늘이 노랗더라구. 탈영병이 된 거야. 오후 3시에 차가 있는데 가면 귀대 마감시간인 5시가 넘게 생겼지. 차를 탔는데 하사들 몇이 타더니 어디 가느냐고 물어. 명령서를 보여주니까, ‘무슨 빽으로 그 좋은델 들어갔느냐?’고 되묻더라구. 그리고는 부대에 도착하면 5시가 넘게 생겼지만, 1군사령부와 의무대가 붙어 있으니 자기가 우리 부대 옆이니까 위병소에 잘 말해주겠다고 하더라구.”

 

부대에서는 신병이지만 나가서 기죽지 말라고 일병계급장을 붙여 주었다. 백씨는 본부 타자병이 됐다. 병원에서 약품수불에 쓰이는 영문타자를 칠 수 있는 수준이 되자 대우가 달라졌다. 당시 공문은 기름종이를 철필로 긁어 등사하는 가리방이 대부분이었는데, 5·16혁명 이후 군 위계질서를 잡는다고 규격과 양식에 엄했다. 규격과 서식이 틀리면 공문 접수도 안하고 규정위반이란 도장을 찍어 다시 해오라고 문서연락병에게 반송하였고 부대장은 시말서를 쓰게 했다. 3회 이상이면 진급이 안되었다. 그걸 상부에서 합격점을 줄 만큼 잘 만드는 부대는 백씨가 속한 부대라는 소문이 나자 주변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애를 썼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군 행정서식과 규정을 정부행정서식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덕분에 사병이지만, 장교들에게 사랑받으며 지냈지. 일거리는 쌓아놓고 하는 판이니까, 적절하게 조정만 하면 휴가를 다녀오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요. 15일 정기휴가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으니 다녀올 수 없지만 잠깐잠깐 짧은 휴가는 다녀올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군에서 행정을 배운 것이 일생 일하는데 큰 도움이 됐어요. 교회에서도 조직, 재정, 출판을 맡게 됐고 교단 노회 사무장을 하면서도 일 잘 한다는 소릴 듣게 됐으니까.”

 

과천교회 40년사를 낸다. 백씨는 실무를 맡았다. 과천 최초의 기록사인 셈이다. 당시 과천교회에는 장로가 없었다. 백집사는 제직회 서기를 7년을 보았다. 제직회 서기록, 주보, 사진, 청년회가 만든 [성화], 중고등부가 만든 [등대]지를 가지고 다닌 것이 도움이 됐다.

 

자료가 없어서 고생했지요. 내가 그때 고생을 해서 과천구술사 만든다길래, 선뜻 응해 준 거예요. 어른들 만나 일일이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서 40년사를 만들었어요. 이후 50년사에는 사진을 위주로 사진집이 나왔고......”

 

과천교회가 커져가면서 다시 크게 짓는 일에 참여하고 교회 행정을 맡아 했다. 과천교회가 노회에 영향력이 커져가면서 노회 사무장으로 추천됐다. 12년을 일했다.

 

회의 자료를 만들어 내고, 노회에서 갓 시작하는 교회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어요. 제도적으로 기금을 만들어 개척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지원 받는 교회에서 다시 개척교회를 지원하는 제도를 만드는 일을 했지요. 당시 노회는 220페이지나 되는 보고서를 연2회 발행해서 총대들에게 보냈어요. 그게 도움이 됐지요.”

 

백장로는 후에 4단지 상가에 부동산중개소를 내기도 했고, 반포에서 기독교백화점에서 덕산공예를 운영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내가 한 일은 없어요. 하나님이 계획이 있으셨고 저를 불러다 쓰셨던 거라 생각해요.”

 

(2021.9.30. 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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