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술막에서 났어. 남한산성에서 과천 와서 27대야. 우리 아버지가 9명을 낳았는데 6남매가 남았어. 돌아가신 분이 많아. 우리 큰 형은 지금 살았으면 91세야. 외아들로 자랐다가 내 막내가 나하고 열 여덟 살 차이나지..... 해방 될 때가 열 살 쯤 됐지.”

 

“6·25 때가 열 네 살이야. 피란은 요 동네루 갔었지. 우린 길가니까 새술막이.....인민군, 중공군 죄 같이 있었으니까......피란은 청계루 한 번 갔었지. 뭐 중공군 인민군이 앞서 있으니까. 갔다가 다시 돌아왔지. 집으로 청계 의왕 학의리 거기가서 한 보름 있었다구. 친척집에 우리 네 가족이 글루 갔으니까. 아버지가 모시고 도루 집으로 온 거지. 우린 뭐 그때 논농사하고 밭하고......나무장수는 아버지는 댕겼지만 우리 나이는 그렇게 안됐지. 많이는 안했지.”

 

아버지가 인저 소 가지구 나무 팔러 가고......마차루 남태령 넘어 흑석동으루......나무장사두 아버지두 많이 안했어. 상도정 고개 글루 많이들 다닌거지.”

 

(정재성 : 원래 동네에서 큰 부농이셨어요)

 

그때만해도 살림이 많고......6·25땐 사실 아버지가 네 식구를......우리 작은 집, 큰 집 또 우리 큰 집이 경만네야. 그게 큰 고모네야 국수집이라고 있잖아. 거기 맞은편에 그래 우리 큰집 이가 추씨네 작은 집이야 그래도 우리는 고생을 덜한 셈이야.”

길가에서......외아들로 죽 사는 게 용식이 삼촌하고 나하고 18살 차이나요. 막내로 태어난 거야. 22살에 군대를 갔지. 27살에 결혼했어. 중매로......신림동 자동으로...... 서울대학교 있는데.....”

 

(정재성 : 다리도 끊겼다고 그래요.)

 

“6·25 지나고 홍수가 크게 나서 관악산 물이....관문리에 집이 18챈가 몇 채가 떠내려갔지.......광챙이(광창) 그쪽으로는 큰 지장 없고.....관문리 지금 교회자리 그때 사태가 나 가지고.....개울이 넘쳐가지고 관문리 집 몇 채가.....열 대 여섯채 떴지....”

 

출장소는 우리 당시 개발 될 때 새술막에 출장소가 생긴거고...그래서 보상관계두 여기서 했지.....우리 생견말하고 새술막 사이에 출장소가 생기고....그때만 해도 군인 갔다 와 가지고 농사 짓고...출장소 관계를 많이 또 드나들었지....보상관계로 해서 출장소 직원들하고 많이 관계가 되서....마을 일에 협조를 많이 했지. 그때 당시 강석이가.... 윤재 아버지가 회장하다 한경이가 회장하고...같이하고 심웅섭 씨가 이장 보고.....그 당시 우리 재성이가 또 동네를 잘 알지.”

 

방아간 만흥네가 방아간 하고...누가 또 사기막골 영수네가 했던 방앗간이... 그때만 해도 관문리 보다 우리 새술막 쪽이 많이 모든 게 많이 앞서갔지. 그 당시 동네 일은 내가 주동을 하고 선두자가 됐었지. 심웅섭 씨가 내가 없으면 뭐든지...또 동네 일이면 앞장서서 그때나 이때나 어려운 사람들 보면 밥 한 그릇이래두 같이 이렇게 하고 또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살기도 하셔서......재성이두 우리 집에서 산게 저 배랭이 거기서 잠깐 살았어. 재성이 엄마가 아버지가 딸 같으니까 방 하나 달라 그래 가지고......‘그래 줄게 와라그래 가지고 산 게 아마 20년 가까이 살았어.”

 

소장수도 내가 많이 했지. 군인 갔다 와서 스물여섯 살부터 했어. 그걸 왜 하게 됐느냐? 우리 아버지가 이제 벌중개들이 해서 아저씨 내가 한번 같이 한다고 해서 같이 하게 됐지. 벌중개들이 여기서 사가지고 수원, 오산, 시흥, 안양으루 댕겼지. 우시장이 안양에 있었어.”

 

(정재성 : 새벽에 소를 끌구 가시는 모습을 어렸을 때 봤어요)

 

우리 아버지들이 많이 다녔지.”

 

(정재성 : 그때 소 한 마리 값은 얼마나 됐나요?)

 

그땐 가격이 뭐 지금 돈으로 아마 몇 십 만원이야. 쌀루 치면 한 여나믄 가마.....송아지는 5,60만원....그러면 과천 근동에서 기르고 있는 걸 사 모아서 이제 오산 안양으루 실려 보내는거지.”

 

(2019.5.21.) 노인회관에서. 정재성 향토사연구회장, 이정달 노인대학장 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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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1936년 태어난 곳 주소와 현주소가 같다. 인구의 10%1년에 1번 이상 이사를 하는 우리나라 통계에 비하면 특별하지만 부러움을 사는 경우다.

 

전주이씨야.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드님 방의 후손으로 5대조 할아버지께서 과천에 자리를 잡으셨어요. 안골을 중심으로 선바위 쪽부터 식유촌 있는데 까지......전에는 신동면이었는데.... 뒤에 산을 포함해서 28천 평이야. 손자까지 7대가 이 자리에 고대로 살고 있어요.”

 

옛날에 다 집성촌이었지. 여기 10여 호 집들이 다 집안네야. 전주이씨.....선바위에는 뒷골 협촌(합천)이씨, 고령신씨네가 살았고 삼거리에는 남궁씨네 광창이에는 송씨네가 살았었지.”

 

“5백년을 여기서 산거야. 문중산이 있으니까....... 하지만 요즘엔 벌초하기도 쉽지 않아서 15년 전 쯤 돼서 내가 문중회장을 할 때 150여기를 수습해서 저기 전라도 화장장에 가서 화장을 해서 납골묘에 모셨어요.”

 

과천 다른 동네는 도시계획으로 수용되고 살던 사람들이 터전을 내주고 옮겨 살아야 했지만 이곳 안골은 아무런 변화 없이 시간을 그대로 쌓아가며 살고 있다.

 

“1965년에 예전 초가집을 헐고 한옥을 지었어요. 뒷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깍귀로 일일이 다듬는데 백일이 걸렸고 거기다 석 달이 더 걸려 한옥으로 지었어요. 그걸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는데 1970년대 들어서 취락구조 개편사업을 한다고 해서 지금의 집으로 고쳐 지었지요.”

 

이씨네 집은 안골 맨 안쪽 산허리에 탁 트인 광창마을 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간식으로 내주신 감은 마당 한쪽에 심어 놓은 것으로 실하고 달다. 뒤쪽에는 밤나무가 울창하다.

 

밤이 잘 됐어요. 삼태기로 주워다 뒷마당에 수북하게 쌓아놓고 풀을 베다가 덮어놓았다가 밤송이를 발라내고 내다 팔았지. 남대문에 몇 가마씩 팔곤 했어요.”

 

아버님께서 한학을 하셨어요. 서당을 하셔서 광창마을, 주암동, 읍내에서 온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셨지요. 곁에서 도우면서 나도 맹자까지는 뗐어요. 나중에 크게 도움이 됐지요.”

 

이씨는 과천초등학교 36회 졸업생이다. 입학할 때는 시험을 봐서 합격자는 초등학교를 다니고 불합격자는 공회당에 있는 강습소를 다녔다고 한다. 1945년 해방되고 이씨가 3학년이 되던 해에 강습소 다니던 아이들은 과천초등학교를 함께 다니게 됐다.

 

갈현리 오씨네가 집안이었어요. 오교장께서 봐주셔서 입학이 됐는지 어쩐지 합격이 됐어요. 청계, 말죽거리에서 전부 걸어서 과천초등학교를 왔어요. 광챙이, 괭맹이에서도 오고.... ”

 

6·25 전쟁이 나자 이씨네는 친척이 있는 경기도 광주로 피난을 갔다 왔다.

 

당숙께서 서울에서 말 달구지를 가지고 장사를 하셨어요. 그 달구지에 짐을 싣고 피난을 갔죠. 돌아오니 집에는 피난민들이 가득 했어요.”

 

사내아이 넷을 키웠어요. 애들 가르치느라 목장을 한 10여 년 했어요. 젖소 여덟 마리에서 하루 1,2통 우유가 나오면 남태령 아래나 삼거리 박씨네 비료가게 옆에 갖다 놓으면 서울우유협동조합에서 가져갔지요.”

 

막내아들은 이씨 집 옆에 산다. 작은아들이 과천시의원을 지낸 이원희씨다.

 

원희가 과천청년회의소를 다닐 무렵 출마한다고 해요. 안전하게 과천동에서 하랬더니 중앙동에서 출마해서 당선됐죠. 임기를 마치더니 제주도 가서 사업을 한다 그러더니 녹차재배에 빠져 지내요.”

 

이씨는 젊어서 이장을 하고 바르게살기협의회장, 시정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평화민주당 시흥군 부위원장, 과천면책도 지냈다. 1991년에는 무소속으로 기초의원에 출마하기도 했었다.

 

친구들이 살만한 사람이 왜 야당하느라 고생을 하느냐?’며 여당으로 옮겨서 직접 출마하라고 하곤 했어요. 왜 정치에 들어서게 됐는고 하니 산본에 이재형 국회의원과 종친인데 그 분이 이 모씨가 과천에 국회의원으로 나가게 됐는데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게 됐지요.”

 

과천 대부분이 도시계획으로 땅이 수용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옮겨 살게 된 이들이 많다. 이씨네는 그 영향을 거의 입지 않고 지낸 경우다.

 

(2021.10.18. 안골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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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생이예요. 본적은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이고요. 거기가 원래 아버지 고향이시고.....아버님께서 서울로 이주를 하셔서 우리 형제들이 7남매. 그 중에 장남. 아들이 넷 딸이 셋이예요.”

 

휘경동에 태창방직이라고 있었어요. 아버님이 거기서 근무를 하셨어요. 그래서 거기 사택에서 살았어요. 바로 위가 청량국민학교. 중학교는 경동중고등학교.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졸업하고 군대갔다 와서 바로 시험봐서 공무원이 됐지.”

 

공무원 시험은 국무원 사무처 그 전에 내각사무처였어요. 혁명 전에 장면 정부때 그때 함석헌 씨, 김영선 장관 태완선 장관 장준하 씨 그 팀들이 주력부대였어요. 장준하 씨가 그때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사상계를 하시고 함석헌 씨는 씨알의소리 하시면서 주축이고 장관으로서는 김영선씨 태완선씨가 부흥부장관하고.....그때 국무원에서 대학출신 학사출신 공채를 했는데 그때 내 기억으로는 2,100명인가 합격을 했어요. 그때 희망부서를 내무부에 써 냈는데.....내무부 써 내면 내무부 본부 을지로로 가는 줄 알았지. 그랬더니 경기도에 배속을 한거야. 경기도에 떨어졌는데 경기도에 사업소에 떨어졌어. 안양 종축장이라고 있다구. 종축장이 뭐 하는지도 모르고 들어 간 거야. 종자개량하고 보급하는......종축장에 배속이 되서 5·16이 난 거야. 우리는 31일자로 해서 국토건설추진위원회라고 해 가지고..... 3개월 수습을 했는데. 용인에서 3개월 수습을 하고 51일에 안양종축장에 배속이 됐는데 거기서 5·16이 나가지고 내 자리가 없어졌어. 그런데 나를 화성군청으로 보낸 거야. 화성군청이 수원에 있었어. 그 다음에는 경기도청으로 갔지.”

 

그때 경기도청이 광화문에 있었어요. 청와대 경무대 앞에 지금 종합청사 맞은편에......집에서 다녔지. 근데 68년이 되니까 도청이 이전하는거야. 수원으로. 그래 또 이전을 하는 거지. 그래 출퇴근이 어려우니까 수원으로 이사 간 거지. 수원집 팔고 방배동으로 이사 갔다가 그 다음에 이제 또 방배동에서 87년도에 도에 국장할 때 과천으로 이사 한 거야. 그래 국장하면서 출퇴근 한 거지.”

 

몇 군데 군수를 하고 국장으로 경기도에 들어 온 거지. 가평군, 남양주군, 시흥군 하고 국장이 됐다가 국장도 두 번 거쳐 지역경제국 내무국 거쳐가지고 그 다음에 미금시장하고 교육 갔다가 오산시장 갔다가 과천시장 왔다가 기획관리실장 했는데.....또 그 다음해에 선거가 있게 되니까...이제 내가 그때 한 4년인가 남았어요. 그땐 만60세 정년인데 4년인가 남았는데 박제상 의원이 공천 줄 테니까 출마하라고 다 도와주겠다고.....몇 번을 처음엔 사양했다가.....4년 남았는데. 그땐 시장 임기가 3년이니까 손해란 말이야? 그러다가 나왔는데 그랬더니 도와주기는 뭐 다 자기가 하는 거지. 당에서 도와주는 건 뭐 없어. 다 자기가 하는 거야. 그래 가지고 초대민선 하고.....2대도 사실은 내가 할래서 한 게 아니구. 여기 이용석 사장하고 얽힌 얘긴데. 돈 주고 받고 주유소 허가 관련해서 투서가 검찰에 들어가 가지고 이사장하고 나하고 얽혀가지고 수원교도소에 가서 한 8개월 있었지.”

 

그래 가지고 그 고생을 하고 있었어요. 무죄로 나오고 나니까 주위에서 명예회복 해야 될 거 아니냐 그래서 재선 나오게 된 거고. 그 다음에 3선 나올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주위에서 권유도 하고 그랬는데 내가 뭐 명예회복하고 했으니 사양했지요.”

 

지금의 과천. 에어드리공원, 과천지식정보타운, 관문체육공원, 과천과학관...... 이성환 시장이 30년 전에 만들어 놓은 이름인데 지금도 전혀 낯설지 않다.

 

그때 시장하면서 이제 우리 과천의 교육, 문화, 체육 이 부문에 중점을 두고서 그래서 교육적인 측면에서 학교지원을 많이 했고, 초등학교 무상급식도 전국에서 처음으로 했지. 도서관도.....체육공원도 두 개.....거기 역점을 뒀지. 애향장학금은 내가 있을 때 원래 1천억 목표였어요. 그런데 내가 세워놓고 나온 게 200억원이었는데 지금도 200억원 그대로야. 소각장도 원래 그 전에서부터 지지부진 했어. 나 있을 때 짓기 시작해 가지고 사람이 죽기도 했잖아? 그래서 문원동에 보상도 여러가지 하고......그 새마을회관두 사실은 나 있을 때 시에서 지어줬거든. 건물은 시에서 지었지만 신학수 회장이기금을 많이 내고 해서 그래서 그게 세워 진거야. 그래서 과천시새마을회관 꺼떡없이 자생해서 잘 운영되고 있지.”

 

지금과 다르게 당시 공무원들은 이용석씨 표현대로 거의 미치다시피 일했다. 경기도 사회과장을 할 당시 안양·시흥지역에서 수해가 크게 났는데 수습하느라 20여 일을 꼬박 사무실에서 자면서 일하곤 했다. 일을 하기 위해서 예산을 타내기 위해서 상급기관을 찾아다니며 졸라야 했다.

나중에 민선시대가 되고나선 경기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일할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공무원을 시작하면서 다른 길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돈에 눈을 돌렸더라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회없이 일했다. 지방자치제가 시작되지 않았더라면 부지사까지는 했을거란 생각을 한다.

 

두 번째 선거때 당을 옮겼는데 그때 난 안 간다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 멤버들 있잖아 측근들이 너나 할거 없이 다 옮겨야 된다는 거야. 나 한사람만 반대야. 날 도와주는 사람들이 똑같이...... 그래 내가 그걸 어떻게 이기느냐고? 이구동성으로 그러는데 도리없이...... 그러고나니까 어려움이 산적했어. 근데 거기도 벌써 하려는 사람이 있고...... 그런데 지역위원장은 내가 온다면 아주 대환영이라는거야. 내가 감으로써 여러 가지 희생이 따르고.... 그러면서도 그때도 내가 그 사람들한테 공약한 거는 나는 이번 한번만 하고 말겠다. 거기서도 그 약속을 내가 한 거고. 내가 인제 그 약속한 게 가장 중요한 거고. 그 다음은 내가 날 돌아보더라도......내가 그러면 70이 넘어요 나이가. 3선을 해서 업무를 수행하면 70이 훨씬 넘는다고......그게 둘째고 그 다음에 시대가 많이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거 아니냐? 그러면 새사람이 해야지. 또 자라 나오는 사람도 있고...... 이런 이유가 합해져서 난 더 안 한다. 3개 군수하고 3개 시장하고 여기서 2번 민선시장 했으면 난 할 만큼 다 했잖아? 뭘 거기서 더 욕심부리느냐구.”

 

이시장 때 과천초등학교축구부, 문원중학교축구부, 과천고등학교축구부가 생겼다. 버스 사주고 합숙소도 만들어 주는 등 지원을 많이 했다. 그 결과 국가대표, 프로축구 선수들이 배출된다. 장애인단체 등 각종 단체들의 요구도 최대한 들어주려고 애썼다.

당시는 경마장 마권세가 있어서 여유가 있었다.

 

옛날 공무원 생활은 어땠을까? 대우는 좋았을까?

 

좋은 편이 아니었지. 우리 때 들어간 사람들이 30년 생부터 35년 생들이야. 들어간 그때 서너댓살까지 차이가 나. 우리 동기들 보면 34년생이 제일 많았어. 60년도에 시험봐서 합격자 발표하고 61년에 수습 나가고..... 그때 월급이 21,000원이야. 그때 광화문 공무원 할 땐데 그때 밀가루 배급도 주고 그랬어요. 내가 말단 아냐? 계장이 어디 출장 간다 그러면 수중에 돈이 없잖아? 그러면 전당포 가서 시계를 맡기고.....버스비가 없어서....그래 가지고 출장 다녀오고 나중에 정산되면 찾아오고 그랬을 때야.”

 

관선시장과 민선시장을 다 해본 그에게 장단점을 물어봤다.

관선시절이 좋았다는 얘기는 울타리가 있었다는 얘기야. 예를 들어 내가 시장인데 조금 뭐 불리한 게 있고 그러면 도지사가 커버해 주는 거야. 공무원끼리 커버해주는 거야. 민선은 그게 없지. 근데 민선은 일을 하는 데는 자기 소신껏 자기 책임 하에 일할수 있지. 지금이야 지방자치제가 발전되서 의회에서 통과 시켜주지 않으면 시장이 하고 싶어도 일을 못하잖아?”

 

(재임하시는 동안 큰 재난은 없었나요?)

 

수해 한번. 과천동에 수해 한번 크게 났었지. 그래서 그 뒤로 거기에 담을 쌓았잖아?”

 

(2019.10.22. 해원(옛 그레이스호텔 지하 일식집)

이용석, 정재성, 김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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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이니까 내 뿌리를 알아야겠다. 전혀 몰랐어요. 난 족보가 없어 뿌리를 몰라. 그래 내가 각 방으로 고민을 하다가 우리 조상님이 용인이라는 걸 알고 그걸 주욱 더듬다가 내가 3대 짼데 한 200년 정도 역사는 알고 있어요. 내가 면장을 했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1887년에 태어나셔서 64년 사셨어. 살아계시면 132세쯤..... 49세에 날 낳으셨어. 10남매를 낳으셨는데 3남매가 남았지. 어릴 적에는 귀하게 자라서 말썽을 많이 부렸지......”

우리 선조가 용인에서 오셨어. 영광스럽게도 과천에서 30대 면장을 했으니까 대학을 나왔다 해서......지금은 면장이 아무 것도 아니라지만......”

초대 문화원장을 하시던 박영재 선배나 농협조합장 같은 분들이 내가 경로효친 사상이 있다고 추천해서 면장이 돼서 열심히 노인들 공경하고, 내가 교편생활도 하고 왔다 갔다 하다가 내가 홀어머니 계시니까 고향으로 가야겠다. 어렸을 땐 막내로 태어나 귀여움을 무척 많이 받았죠. 일제 강점기 우리 집이 부자였어. 집이 몇 채씩 되고 땅도 많이 사고.... 전매사업을 최초로 과천에서 하셨고 일반상업도 크게 하셨고, 크게 융성발전 했었죠. 그러다가 6·25 때문에 아주 망해버렸어요.”

 

미군폭격으로 내 역사가 그때 바뀌었죠.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때 관문리 집들이 많이 폭격에 날아가고...5형제 집이 다 타 없어지고 학교도 못 다니고 그러다가 내가 양지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2학년 때 6·25가 났는데.... 아버님이 폭격에 산화하셨어요. 저희 집이 관문리 87번지인데.... 과천을 어떻게 해서든 일으켜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지. 면장은 일반 공무원이 아니라 명예직인데.....”

 

(교편은 어디서 잡으셨어요?)

양주 풍양조씨 초대 부시장 하시던 조동세씨 본향이 진접면인데 왕숙천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어요. 거기 우리 외갓집이 있는데 내가 명색이 대학국문과를 나왔는데 취직이 안 되가지고 군대 갔다 왔는데 우리 매부가.....풍양국민학교에서 한 3년 교편 잡았어요. 우리 형은 경성제국대학까지 나왔지만 나는 뭐 공부도 못하고 집이 몰락해 가지고...막내라 공부를 안했어요. 제대하고......군대도 우리 어머니께서 막내를 힘든데 안 보내려고 과천에 귀인들이 많아가지고 병무청에 아는 사람에게 남편도 없고 자식 하나 있는데 어떻게 보내느냐고 하셔서 군대를 늦게 갔어요. 27세에 갔어요. 동창들 21살에 군대 갔다 왔는데 늦게 가서 고생 많이 했어요, 빳다도 많이 맞고.....그러다보니까 우리 친구가 윤극노 국회의원이 양지국민학교 같이 다닌 나와 동창인데...”

 

“6·25나던 해 2학년이니까...한강 끊어지고 집이 몰락 한 거지. 땅만 남았지. 학교도 못가고 그러다가 윤극노 하고 안양중학교에서 잠깐 다니다가 나중에 고등학교 가서 학교 다녔지요. 영어를 못 배웠어. 독일어만 배웠지.

우리 형은 수재였어요. 당시 과천에 동경제대 다닌 사람이 둘이었어요. 6·25전쟁 나는 바람에 사상범으로 몰려가지고...... 그땐 혼란기야 해방 무렵에 남로당이 무척 쎘어. 남쪽에선 무척 쎘어. 엊그제 4·3문제도 있었지만 민족적으로 비극이야. 나도 우리 형 잘못되고 우리 아버지 잘못되고......다 내 운명이다. 장씨네는 나 혼자 남았으니까.....운명이다 생각하고 누구 원망하지 않고.....열 다섯에 아버지 형님 여의고 누님도 우리 매부가 과천초등학교 함경북도 사람인데.....집안 참 유복했었는데 해방되기 전까지는 청진에서 방학 때면 누님과 매부가 금강산에서 내 선물 사가지고 오시고.....엊그제 같은데 열다섯에 아주 바보가 되어 버렸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형제도 없고 집이 불타버리고 아무것도 없고 어머니와 저만 남았으니 그런 비극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좌절했었는데.....”

 

나가서 이제 뭘 한다고 친구들하고 이것저것 한다고 했다가 안 되고 마침 정부에서 70년대 초에 대학교출신들 취직 못하고 그런 이들 초등학교 교사가 모자라서..... 양주에 학교에 대학교 나오고 국문과 출신이니까 초등학교 2급 정교사로 갔지요. 그때 친구들 지금은 다 정년 했지만 선생들 많이 하고 교장들 다 지냈어요.

우리 형 친구는 옛날 황철수 국회의원하고 사업도 하고 그랬는데 가까운 형이었는데 교육감도 하고 일본에 가서 외국인학교 교장도 하고 그랬는데 똑같은 일제 강점기에 나서 우리 형만 없어 졌나 그런 생각도 해요.

지금 남양주를 옛날엔 그냥 양주라 했어요. 진접면이 오지인데 매부가 학무과에 다니면서 내가 서울 외갓집에 있었으니까. 풍양국민학교에 가라더라구요. 청량리에서 풍양 진접면 가는 버스가 다녔어요. 당시엔 가난해서 애들이 밥도 못먹구 그런 애들 위해서 일했어요. 부모들이 좋아하고 나중에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부모들이 오고 그랬어요. 초등학교 교사 한 게 큰 보람이야.”

 

의협심이랄까 그런 게 있었어요. 비리가 싫었어요. 학교가 썩었어. 교장이.....옛날 교육자들이 많이 썩었었어요. 사람 차별하는 걸 싫어했는데. 소사라고 있었어요. 그 소사를 머슴처럼 막 부리는 거야. 가을 운동회가 있는데 선생들 체육복하고 운동화를 하나씩 해 주는 거야. 9명인데 소사 몫을 빼는 거야. ‘교장선생님 똑같이 해 줍시다했더니 안 된다는 거야. 버릇없이 기어오른다고 차별해야 된다고..... 그래 그러시면 안 된다고 같이 해주자고 했더니 막 야단을 치면서 안 된다는 거야. 그 길로 사표를 내버렸지.”

 

집에 땅이 많았으니까 아버지가 수원전매서 하치장을 하셨고 상업도 하셔서 땅이 많았지. 안양에 신병희 씨라는 분하고 과천에는 우리 아버지가 하셔서 내 대에까지 내려왔으니까. 일제 강점기 나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5형제가 집도 짓고 그러셨으니까. 나는 막내라서 공부도 안했어요. 그래 우리 형한테 혼이 나곤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10남매 낳아 다 죽고 셋 남으니까 불안하셔서 금지옥엽으로 키우셨지.”

어머니께서는 어려서부터 날 데리고 관악산 연주암엘 다니셨어요. ‘너는 부처님 자식이다하시면서 연주암 역대스님들 열심히 공양하셨어요. 연주암에서 누가 내려오셨다 하면 모시고 올라가실 때도 극진히 모셨지요. 불심이 대단하셨어요.”

 

송원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 직무대행을 하시고 관악산 연주암 주지로 오셨는데 마침 내가 75년에 과천면장을 할 때야. 박정희 대통령할 때 아주 무서울 때야. 도저히 안 될 때야. 우리 형이 사상범으로 몰려 연좌제 때문에 안 된다는 걸 중학교 때부터 알아요. 또 자랄 때도 설움 많이 받았어. 형제도 없고 아무도 없는데 비극이었어요. 그러다보니 국가의식이 생겼고 도덕적인 기준도 갖게 됐고 열심히 살아왔어요. 우리어머니도 절대 그러면 안 된다. 그러셔서 돌아가신 후에도 절에 모시고 송원스님이 여기 주지스님 하시다 불교가 분파가 되가지고...영부인도 불교신자셨는데 박정희 때.....중이라 하지 말아라 스님이라 해라. 서양역사 2백 년 밖에 안 되지 않느냐? 불교 2360년이란 세월 동안에 한국엔 기독교신자는 없었어. 전부 불교신자였지. 네 종교나 남의 종교나 욕하지 말아라.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셨어요. 내가 빨갱이 아들인데 연좌제를 봐서도 내가 어떻게 면장이 될 수 있느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너는 착하게 살아라. 어렸을 때는 버릇없이 자랐는데. 자라는 과정에서 윗사람 공경하고 이웃들 가깝게 지내라하고 기르셨어요. 동기간도 내가 땅이 많았기 때문에 사촌들 다 도와주면서 친구들과도 잘 지냈어요. 사람들이 야 참 쟤는 됐다이러면서 내가 효자상도 탔지요......의료보험조합(지금의 국민건강보험공단) 대표이사로 있을 땐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수 백 명이 모여서 경기도 대표로 뽑혀 가지고 상을 받았지. 당시에 노태우 대통령이 ‘90노모를 업고 설악산에 올라갈 정도로 잘 모셨느냐?’고 그러셨어요.”

 

어머님이 일제 강점기에 매부가 청진사람인데, 6·25전까지는 자주 오곤 했는데 전쟁 나면서 딱 끊어져 가지고 어머니가 딸 보고 싶다고 그러셔서 내가 차를 운전할 때니까 차로 모시고 관악산에는 차가 못 올라가니까 월정사로 가서..... 경내에 못 들어가요. 주지스님을 면담해서 내가 과천 사는 아무갠데 관악산 연주암 신도다. 95세 노모를 모시고 왔는데 누이가 있는 금강산 쪽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더니, 차로 모시고 올라오라고 허락하셔서 경내까지 가서 업고 법당에 모셔서 거기서 절을 하셨죠. 무척 좋아하셨죠. 그리고 얼마 있다가 운명하셨는데 송원스님이 우면산 천봉사 정각사 주지로 가셨어요. 어머니를 거기에 모셨어요. 49제를 지내고 100제를 또 지냈어요.”

 

과천 면장을 5년 했어요. 그땐 2년 못 갔어. 그때는 당시에 망해서 아무것도 없었는데 땅이 있었으니까 토지개혁으로 나가고 해도 남은 게 많았어요. 내가 낭비를 했어도 남은 게 있었어요. 그런데 친구들 하고 친척들 도와주고 사기당하고 해서 그 많은 재산을 다 없앴어요. 사십 전에 면장, 의료보험조합 이사 지내고 사회봉사도 많이 했어요.”

 

의료보험조합 대표이사로 연임을 하고 정년했다. 마지막 임기 중에는 감사를 받았는데 감사관들이 이렇게 깨끗하게 운영하는 곳은 없었다며 돌아갔다고 따님이 회고한다.

 

로타리클럽도 만들고 과천율목회도 창립했어요. 율목회는 어떻게 하게 됐느냐면 그때부터 고향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어떡하던지 내 뿌리를 지켜야겠다. 당시에 류택희 총장(나중에 과천여고가 된 한일중학교 창립자)이라 던지.... 당시에 이기동 장군이 안양에서 군인들 파티를 한다고 오라고 해서 갔는데 과천에 갔다 왔는데 과천이 형편없는 촌구석인데 정부에서 길을 내고 해서 참 좋아졌다하길래 듣기 거북해서 술을 먹고 있는데 당시엔 거기에 아무도 대꾸를 못해요. 시장, 군수들 다 있어도...... 그래 내가 이의 있습니다.’ 했더니 깜짝 놀래지. 현풍설이라고 안양교육장이 앉으라고 말리길래 아니 내가 뭐 죄졌어? 하고는 장군께서 과천을 위해 일하셔서 좋아졌다고 말씀하시는데 과천이 거저 생긴 게 아닙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내 그런 애기를 했어요. 과천은 민비 아시죠. 명성황후. 그 시아버지가 과천현감을 했다 그런 사실을 아무도 몰라요. 난 그런 과천에 자부심을 갖고 있고...... 근데 지금 과천이 한일합방 때문에 퇴락하고 남태령 교통 불편 때문에 정조대왕 능행차길도 저쪽 시흥길로 갔잖아요. 춘향사 같은 역사 보면 다 나오잖아요.”

 

전두환이가 와서 그만두라 해서 과천면장 그만두고 이·취임식 할 때 시흥군정자문위도 주욱 했어요. 처음부터 내 뒤에 면장이 장대흥 인데 안양 시흥군청에서 이임식 대표로 내가 가서 답사를 해야 하는데 ‘70년 만에 과천이 빛나고 있다. 일제가 와서 과천을 촌구석으로 만들어 놨지만 과천이 사실 대단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제야 빛나고 있다뭐 그런 애기를 한 적이 있어요. 과천이 시로 승격이 되고 시흥군이 그대로 있을 때에요. 안양은 읍이었고.....”

 

참 돈 많이 썼어. 시흥군 경찰행정자문위원장 좀 해달라면 과천에서 아무도 할 사람이 없었어요. 사업가가 없으니까......과천경찰서 막 시작할 때 서장자리 만들어주고 그랬으니까..... 그래도 난 남의 돈 착취해서 쓴 게 아니라 내 돈 써가며 일했으니까.....하다못해 과천시에 제1회 가을체육대회를 해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지. 내가 시정자문위원장 할 때에요. 시 예산 2천 몇 백만 원 밖에는 과천에는 기업체가 없잖아요. 그래 우체국장 1만원, 농협장 2만원, 교장들 셋이 1만원씩 뭐 이래가지고 행사를 물르자 이럴 때 오백 만원인가를 냈어요. 당시에 오백 만원은 큰 돈 이야. ‘장면장이 큰 돈 냈다이런 소릴 듣는 게 보람이었지. 차도 좋은 걸 탔어. 아버지는 걸어 다니시면서 만든 재산 가지고 막내아들이 잘 쓰고 다녔지..... 과천시도 돈이 없었어요. 면사무소를 공무원들 7~8명이 했어요. 그래도 진심보국이라고 충성심들이 있었다구. 지금 같은 시대엔 맞지 않는 애기지만...그땐 매를 맞고도 대꾸하질 못했어요. 나도 맞아서 이가 부러져나가고 그래도.....그때는 모내기철이면 물 푼다고 전부들 나가서 일하고 그러다가 물이 터져 나가면 면장 징계 한다고 진짜들 고생했어.”

 

“1980720일에 그만 뒀는데 시흥군에서 모범면으로 상을 탔는데, 그땐 시흥군 과장들이 과천 장면장한테나 가야 얻어먹는다 할 때야. 다른 면장들이 자기 월급 갖고 어려워할 때라. 보사부 같은데서 조사 나오고 한다면 저기 영동에 가서 술 한 잔들 같이하고 그러니 군에서도 과천가야 얻어 먹는다 하니 맨날 과천이 일등이지. 그래도 내 돈 갖고 했으니.....몇 푼 먹고 그랬으면 진즉에 끝났지. 반대당에서도 약점을 잡을래도 돈 안 먹었으니 찾을게 없지. 정직하면 된다 그랬지. 어려워도......”

 

홍수도 크게 났어요. 관문리가 다 떠내려가고 사람들이 죽고 안양, 군포가 다 잠기고....관악산이 원래 돌산이고 소금강이라 했어요. 자하동천이라 해서 자하동이란 정자가 있었죠. 이조시대부터 선비들이 놀던 곳인데 장마에 다 떠내려갔지요.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을 수 있는 건데..... 어릴 적에 어머니께서 이게 장사바위다 뭐다 그러셨는데 그게 다 없어졌어요. 관문리 집 수 십 채가 떠내려가고 없었으니까..... 우리 집도 우물이 없어지고 위에서 흙이 내려와 길이 없어지고 그래서 고통을 많이 받았어요.”

 

주택공사에서 출장소 있을 때 처음엔 지원사업소. 경기도에서 과천출장소. 광명출장소는 크니까 공무원도 많고.... 농촌일은 똑같이 많아 고생 많았어요. 지금 공무원들은 수 백 명 되는데 시대가 다르니까.... 보람은 있어요. 한 점 부끄럽지 않다. 누구를 매도한다든지 못된 짓 하질 않았다. 자부심 갖고 사는데.....어언 팔십이라니 팔십까진 살 생각도.....우리 형이 스물다섯에 떠났으니 날 안 낳을 건데 어머니 아버지께서 열 몇을 낳았는데 죽으니까 너는 연주암 신령님이 점지하신 부처님 자식이다. 은연중에 쇄뇌되어 조심스럽게 살게 되지요. 어언 84년이 됐어요.”

 

왜정 때 요시무라, 요다 선생들 오면 우리 집이 잘 사니까 집 한 채씩 주고.....과천초등학교 지역에 살았는데 아버님이 교육열이 대단하셔서 사촌까지 교육을 해야 된다 그러셔서 우리 형 대학 보내고......할아버님 때 과천 오셔서 족보가 없어.”

부친은 돌아가셨지만 땅이 많으니 사방에서 브로커들이 달려들었다. 등기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으니 5년 선배 하나는 시흥군 장 수자 학자 이름으로 된 문서를 만들어서는 자기 이름으로 땅을 돌려놓았다. 다른 선배들이 장흥수 아버지 명의인데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고 나서 주어서 소송을 통해 되찾기도 했다.

 

시 승격될 때는 정당 관계로 지구당 부위원장도 했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대단했어. 경찰들이 와서 인사하고 일제 강점기 잔재야....... 면장할 때 5,6년 형님들이.... 박영재 원장 춘부장 박시영 공화당 위원장 하시니까 친구아버지...... 대학 나온 사람이 없으니..... 군대도 대학 나와 군대 늦게 가 고생 무척했어........ 출장소 때부터 활동했지. 역대 출장소, 지원사업소장들 도와주고..... 시청 댕기면서 시가 승격하면서 2대 시정자문위원장, 법원 서울지방법원 시흥군 갱생보호위원, 수원지검 검찰 청소년보호위원 별 것을 다했어요. 그땐 전부 돈 들 때야. 공무원들이 경찰이고 뭐고 다 돈 들 때야. 아버지 때문에 과천을 위해서 돈을 쓴 거지 보람은 있지요.”

 

지하철이 처음 개통될 때는 역명을 정하는데도 장회장이 있어야 했다. 함께 일하는 이들이 협조적이지 않을 때면 나는 빠질테니 너희들이 잘 해봐라하고 호통을 치고 두문불출하면 장회장님을 모셔와야 일이 된다며 찾으러 다니곤 했다는 후문이다.

자살을 네 번을 기도 했는데 나무가 두 번 부러졌어요. 사변 나고 나서 전투가 열 번이 났는데 한 번도 안 빠지고 참가한 거야. 그러니 열 번 넘게 살아 난 거지. 어머니 말씀대로 부처님 가호를 받아서 어머니 업고, 생질까지 업고 중학교 다닐 땐데........ 화성군 조암까지 갔는데 얼마나 어려웠는지........아버지가 손을 쓰셔서 12연대 연대장 차를 타고 갔는데 내리라고.... 부산 간다고 해서 수원 가서 내리라고 그때부터 가장이 됐지 아버지는 집 지키시고..... 어머니와 혼자된 형수가 딸 하나. 다섯 달 된 딸이 마마, 우두 맞고 그랬어. 금지옥엽으로 키웠는데.....사촌누이네가 애들 넷인데 하날 두고 가라 그래. 지금 일흔두 살이야. 다섯 번 왔다 갔다 했어. 동문 밖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데......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 1사단 이동하라고 했다고 부대장만 알았지 어떡할 수도 없고 행길에서 내려간 게 동문 밖이야. 헐어진 동문 모습이 보이더라구......지금은 신도시 된 경기도 경찰서청인가 그쪽 이었어. 그 집에서 다섯 번을 조암까지 왔다갔다 죽을 고비 무척 넘겼어. 열다섯에 아들 노릇한 거야. 형수 친정이 영천인데 조암 부자집이었더라구. 어린애 업고 바로 또 어머니가 수원 계시니까 교통사고로 다리 다쳐 걷질 못하시니까...... 수원 오는데 일주일........ 폭격이 심했어. 시체들 많이 봤어.....조암에서 아버지 모시러 과천 왔는데 과천 도착하기 나흘 전에 돌아 가신거야.”

 

연기가 세골 문원동쪽에서 보니까 연기가 나더라구. 초가집은 금방 타는데 기와집은....... 피란 가다가 만난 동네사람이 도련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그래. 집 앞에 시체가 넷이 있더라구. 어려서도 육감이...... 앞니가 없으셨어요. 근데 이가 다 있어 젊은 사람이야. 무섭구 그런 게 없어. 깜깜한 밤이야. 엉엉 울구 앉았는데 사촌이 시신이 지하실에 있다고 그러더라구. 엿새 됐다 그러더라구 그래서 그날을 기억해 제사를 지내.....”

 

그날은 유난히 놀이 붉었다. 따님의 기억으로는 저녁놀이 붉은 날이면 아버지는 할아버지 기억에 아파하셨다고......

겨울 엄동설한에 일사후퇴 때 무척 추울 때야. 황해도 사람들이 과천에 무척 많이 왔어. 우리집에도 무척 많았지. 다 피란가고 없지요. 많이들 죽었어. 큰길 청계산 저 뒤로 해서 열다섯 나이에 산꼭대기로 올라갔는데, 며칠을 밥을 굶었는데 외딴집에 할매가 손주하고 메밀을 갈고 계셔. 어둑어둑한데....... 과천은 이리가면 된다 그런데 전쟁 중이라 과천에 난리 났다는데 거길 왜 가려고 그러느냐셔. 그래서 나좀 자게 해 달라 그랬지. 메밀 가시는 걸 내가 갈게요했더니 메밀 간 걸 끓여서 두 양재기 만드셔서는 할머니는 국물만 자셔. 할머니 이러시면 안 되요 그랬지, 나중에 찾으려다 못 찾았어. 자다가 먼동이 밝았으니 저 산으로 가면 저 너머 청계산이라 그러셔서 그렇게 찾아왔어...... 주암에서 부터 걸어서....... 수원 역전에는 폭격을 어떻게 하던지 말할 수 없었어. 운명이 긴 거야. 팔자지.”

 

피란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공군에 포로가 된 일도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잡혔는데 통역병에게 과천에 사는데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이다라고 사정을 얘기했지만 하루였나 이틀이었나 어린 중학생을 잡아두고는 놓아주지 않더란다. 나중에야 풀려나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뒤였다.

 

(2019.4.4. 자택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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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에 가일리 357-8에서 태어난 이순기 씨는 길 건너에 산다. 밭을 하던 자리에 집을 짓고 산다.

 

그렇지 과천에서만 살았지. 과천에 살고...원래 우리는 전주이씬데 태종대왕 헌릉가면...세곡동 가지? 그 태종대왕의 일곱째 아들.... ”

 

(정재성 : 아 세종대왕의 동생 되시는.....)

 

(김용현 : 그렇게 일곱 째 아드님 때부터 누대로 과천에서 사시고......이제 또 집안들은 용인시에 많이 살고 있고 산소들이 거기 많고..... 세곡동으로도 제사 지내러 가고 또?)

 

우리는 세곡동 헌릉 그 아래도 있고 용인 새로운 도시가 돼서 판교에서 용인으로 넘어가는 동네 좀 더 가서 왼쪽으로 더 가서 돼지고개라는 고개 거기에서 살았고....”

 

(김용현 : 어르신네 집안은 여기에 이제 터를 잡고 쭉 사시고 그러면은 어르신도 그 예전에는 농사 지으시면서 나무도 하시고 그러셨어요?)

 

그럼요 나무야 저 관악산에 가서 나무하고

 

(김용현 : 남태령 넘어서 내다 파시는 것도 하셨어요?)

 

그것도 했어요. 소마차로다가 해서 끌고 고개를 넘어가서 노량진 가서 팔고 영등포 가서 팔고.... 전철이 댕겼어요. 왜정 때 우스운 얘길 하면 나무를 해서 끌고 솔가지를 해서 그렇게 해서 열 덩어리를 해서 딱 실어서 가는데 이렇게 전철을 가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옆으로 이렇게 소를 끌고 가니까 이게 뭐 덩치가 묵직한 게 뚝 떨어졌어. 이상하다 하고는 솔가지로 건졌다고.....조금 있다가 어떤 놈이 헐떡거리면서 뛰어와서 돈 보따리 못 봤느냐고 하는 거야. 그래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그냥 내줬지. 전철 타고 가다가 돈 훔치느라고 빼서 던진 거 같아. 그렇다고 내가 돈을 달랠 수가 있어 뭐...... 그때 나이가 열 여덟 살이나 됐나.”

 

(김용현 : 그러면 나무 팔러도 다니시고 그렇게 지나시고 논 갈고 그냥 그렇게 지냈어요. 당시에 우마차 끄실 정도면 형편이 좋으셨네요?)

 

네 그땐 괜찮았었어. 6·25나기 전에는 장흥수, 강규형이 이기옥이 한기영이 다 같이 안양공업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국회의원 이영섭씨가 만들어서 그래서 그때 안양중학교 댕겼고 댕기다 열 여섯 먹어서 소마차 그놈을 끌고 다니고....학교는 여기서 아침에 보리밥 먹으면 둘러메고 그냥 뛰는 거야. 양짓말 거기서 이제 먼 사람들은 저기 하리에 이기옥이나 강규형이나 그런 사람들도 거기서 뛰어오고 난 여기서 가고 그렇게 댕겼어.”

 

(김용현 : 그 길이 동편마을로 가는 샛길이었나요?)

 

안양으로 해서 인덕원 사거리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 때는 도로가 왜 생겼느냐 하면 그때 인제 각 구역 구역 그 자갈을 이렇게 펴고 동네 사람들이 이렇게 예를 들어서 한 10미터 쯤 돌을 갖다 깨뜨려서... 부역으로 그거 해서 갖다 놓으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그때는 자갈을 깔고 길을 닦었고.... 안양길도 그렇게 닦고.... 여기 과천도 그렇게 하고....”

 

4남매 중 장남인 그는 여덟 살에 과천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왜정때다.

 

오병선씨가 교장 하실 적에 시험을 보는데..... 돼지 닭 뭐 이렇게 그려 놓고 이게 뭐냐? 개는 다리가 몇이냐? 그러고 물어 봐......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시험을 봤어. 그땐 나보다 두세살 더 먹은 사람도 있었어.”

 

한 반이 43명에 2개 반이니까 80명 뽑는데도 숫자가 많으니까 나중에는 그 전에는 이쪽에 강습소라고 향교에 올라가는데 느티나무 있고 우측으로 강습소가 있었어. 강습소라고(학교) 가기 전에 미리 가르치고...... 하도 모르니까...... 왜놈 말을 가르치니까 일본말을 가르쳐야 되니까 그때만 해도 왜놈 말을 가르쳤으니까..... 한국말로 하면 돈 내라 그러고 벌점 내라 그러고...... 그러다 해방 되서 2학년 올라갔지. 그 장흥수는 한 살이 아래지. 장흥수, 맹천호, 이형구, 이흥구 형제들이 나이가 한살 덜 먹었어. 그때 같이 들어왔어. 그런 사람들은 실력으로 들어온 거야. 흥수도 그렇고 한기영이도 한살 아래야. 장흥수 한기영이 맹천호 다 동기야. 맹교장님 손자....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16명인가 그것 밖에 없어. 외지 나가서 살고......”

 

(정재성 : 혹시 아버님 어렸을 때 과천 가일에 향교자리가 있었다그러던데 그런 말씀 들으신 적 있으세요?)

 

향교는 없고 향교는 지금 있는 향교가 있었고 그 아래 옛날에 과천이 그 아래 (관아가) 있었다 그랬는데 모르고 그 아래 가면 그 석씨네들이 살았어. 향교 있고 일본 놈들 덴노헤이까 라고 (신사) 그거 있고 거기에 인제 석씨네들이 살았고 그리해서 돌아서 내려가면 바로 옆에 면사무소 꼭대기에 면사무소고 그 옆에 바로 파출소 있고 바로 앞에 그 병원 제중의원 그이가 있었고 그러고 여기는 아무 것도 없었어.”

 

(김용현 : 그러면은 가일 그 때는 초등학교 다니실 무렵에 집 주변에 몇 집이나 있었어요?)

 

그때보다 지금 집이 줄었어. 왜 줄었느냐? 살기가 어렵고 이제 저거 하니까 그냥 나이 먹고 그러니까 집에 헐렸고. 요 건너에도 있었고 그 전에 있었던 집이 한 내가 알기로 한 70여 호 밖에 없었고..... 나 이장 볼 무렵에 70호 있었고......”

 

(정재성 : 그럼 컸네요. 마을이.)

 

군부대가 있어. 군부대도 들어온지 얼마 안 되고 헐렸지. 땅 뺐겼지. 그 위로 꼭대기 올라가면 함정희라고 있었어. 그 사람이 거기 이렇게 있었고 장문성이가 살았는데 오창서씨하고 거기서 살고 해서 너 덧 집이 거기 있었고 이 아래 집 있었고....그리고 가일 본말로 집 있다가 죄 헐려서......그래 오순묵 씨라고 면장 봤던 사람이 저 위에 있었고...요리로(가일경로당) 내려가서 넘어오면 면장했던 박시형씨......그 위로 집들이 지금 찬우물 새마을 사업해서 마을을 이렇게 옮기라고 해서 그래서 집을 한데 모으라 그래서 그것이 과천의 우리 갈현리 이기옥이네 동네 하리 하고 또 남태령 있는데 신양호가 나하고 셋이서 이장 뽑혀서 마을회관 지었지. 여기 박시영씨네 저 가장자리 쪽에 이원구 살고 그쪽으로 아홉 집인가 있었지 그래서 새마을 사업하면서 댕기면서 땅을 그 말죽거리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데 땅 주인한테 땅 간신히 팔라고 해서....변재현 이라고 있어 면장하던.. 그이하고 나하고 다니면서 같이 가서 그 취락구조사업 내가 그거 했지.”

 

(정재성 : 홍광표씨라고 아세요? 부면장 하시던...홍윤표씨는 홍촌말 사시던 분이시고 홍성웅이 아버님이시고....홍광표 씨라고 읍내 사시던 분이 계시더라고요.)

홍광표? 면사무소에 있었던? 부면장이 아니고 6·25전쟁 나서 그 사람이 이북사람이야. 이남으로 넘어와서 군대 들어갔다가 오갈데가 없으니까 면사무소에서 살았고.....그리고 지금 국수공장하던 용훈이가...바로 옆에 솜틀집이 있어 거기 외딸이 있는데 거기하고 결혼했지.”

 

(김용현 : 그러면 당시는 이 지역에서 크게 농사를 지으시고......)

 

농사를 크게 하고 소마차 크게 하다가 경운기로 농사짓고 한 백여 마지기 농사짓고 그렇게 지내고 콤바인 사가지고 벼 베다가 손을 다친 거야. 툭 건드렸는데 잠바가 딸려 들어가서 반이 잘렸지. 나이 59에 이렇게 됐어.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못하고....이장 보고 할 무렵에 내가 또 다니면서 여기 올라가자면 저쪽 마을회관이 있어. 그리고 이쪽 마을회관이 있는데 그거는 마을회관을 지을 제 큰 도로가 나가는 그 앞에 과천에서부터 큰 도로가 나가기 때문에 고기 마을회관이 손정태가 지었는데 도로가 나면서 헐리니까 돈을 안 줘. 돈을 줘야 그거를 갔다가 뭘 할 텐데. 그 노인정도 내가 제일 먼저 과천에서 노인회를 해서 노인정을...... 근데 뭐 돈을 줘야지 어떻해 땅도 없지 땅은 강원용 씨라고 이 옆에 있는 이가 안양 그 백화점 하는데 박준영 씨라고 있어. 안양역전 옆에 있어 화신백화점이라고 커. 그이한테 얻어서 처음에는 백 평 준다 그랬어. 준다 그랬는데 주변 사람들이 못 주게 해서 60평을 받아 가지고 와서 두 사람 세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얘기해 가지고 같이 강명수씨가 다니다가 이제 이기주하고 이제 같이 나는 나이가 적게 먹었으니까 나이 먹은 사람을 데리고 다녀야 할텐데......이기주라고 있었어. 지서주임 그이가 여기 살았어. 그이하고 같이 다니면서 그걸 얻어서 기증서를 받아가지고 마을회관을 짓는데......돈이 없어 내가 당기면서 그때는 여기 땅들을 서울 사람들이 많이 팔았어. 그 사람들한테 다니면서 마을회관이 없어졌으니까 좀 달라고 해서 찬조를 받은 것이 50만 원 100만 원 이렇게 받고......십 여 사람 받았어. 그때만해도 많은 돈을 그렇게 받고 그래서 500만원을 집터를 위에 여기 가면은 그 오○○씨네 면장하던...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밭이 있는데 새마을사업으로 도로를 내 달라고 그래 내주는 조건으로 해서 집 짓게시리 내 주는 조건으로 해서 500만원을 받아서 나중에 짓다가 돈이 없어. 그래서 개인적으로 2만원 1만원 다 받아서 집집마다 다니면서 돈 거둬서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이쪽에 건물이야.”

 

(김용현 : 6·25때 얘기 좀 해 주세요 어르신이 초등학교 졸업 하신 게 열 다섯 쯤에?)

 

“16살 때...모를 심는데 그해는 가물었어요. 논에 물을..... 과천 남태령서부터 탱크가 월그덕 월그덕 하더라구요. 인민군이 쫓아오고.... 그렇게 넘어와 가지고 대구 부산까지 갔다가 결국은 미군이 인천으로다가 포 쏘고 하니까 여긴 중간이 되고 하니까......이북으로다가 남한으로 쳐들어가니까 꼼짝 못했죠. 그래서 올라오면서도 걔네들이 이렇게 서로 맞불질하고 해서 남태령 고개에서 쏘고 이 아래에서 쏘고..,,,.그렇게 가면서 전쟁이 벌어졌지.”

 

(김용현 : 그때 이 동네에서 그대로 있는데 중학교를 다니시면서 농사 도우시고 그러실 때예요?)

 

아니 그때 난 학교 다니다가 6·25가 났으니까 못 다녔지 다닐래야 아버지가 나이가 잡숫고 그랬으니까 그 돈을 대줘야 가지. 2학년 올라가다 그만뒀지.”

 

(김용현 : 그 인민군들이 하리나 광챙이나 그쪽은 중공군도 들어와서 방 내놓으라고 하고 살고 그래서 광챙이나 막계 쪽에서는 동네에서 이렇게 피난두 내려가고 그랬단 말이에요. 근데 이쪽 동네에서는 그 동네 사람들 같이 이렇게 피난들 안 가셨어요?)

 

피난들 갔어도 얼마 안가서 도로 들어왔지.”

 

(김용현 : 이승태 어르신 말로는 지지대 고개 가니까 인민군이 막아서 우리가 다 점령했으니까 도로 가라고...)

 

그래 같이 살 거니까 도로 들어가라고...그래서 들어온 거고 그 당시 인민군들이 총 들고 집집마다 군인 있나 해서 돌아다니고...그러니까 탱크 타고 내려가고 그만이지. 가기 전에는 여기 한강에서 이제 호주 비행기 쌕쌔기들이 있어. 그 비행기가 여기 지금 가마솥회관 있는데 첫 집 있지? 도로 옆에 그 앞에서 군인차들이 국군이 여기 있었어. 한강 이북을 거기를 치래는데 여길 와서 폭격을 해가지고 장교가 하나 죽었어. 비석하나 거기 있어. 그래서 그 비석이 어린이회관 있는데 마을회관 들어가는데 공지가 남았어. 거기 있는 걸 외관상 보기 싫다 얘기해서 그 묘를 도로 옆에 거기다 썼어. 그렇게 했어. 올라갈 때는 뭐 여기는 하니까 남태령하고 저쪽 광챙이 저쪽으로다 우면산으로다가 그렇게 싸웠지. 여기는 별로....”

 

(김용현 : 그렇게 그래도 가일리 이쪽은 그렇게 크게 피해가 있거나하지는 않으셨네요?)

 

그건 없었어요. 지금 남태령 그쪽으로는 걔들이 올라가면서 쏘고 내리쏘고.”

 

(김용현 : 그리고 그 전쟁 중에도 부역한 사람들 청년대들을 해 가지고서 뭐 서로 이렇게 잡아다가 모두들 때리고 뭐 이렇게 인민군 들어와서 못살게 굴고 이렇게 그런 일들이 이쪽이 좀 덜 했나 봐요.)

 

그때는 그게 없었는데, 즉 치자면 양반 상놈이 있었잖아. 그거 차별을 많이 하니까 없는 사람이 머슴 살고 그러지 않았어? 이런 사람들을 갖다 감투를 씌워놨으니까 왔다갔다 그렇게 했었구. 여기도 그렇게 해서 원주민 하나하고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하고 세 명인가 죽었어. 왜 그러냐면 인제 인민군 다 올라가고 그러니까 빨갱이 짓 했다고 그런 일이 있어서 몽둥이로 패서 죽인 일이 있어. 서로 국군으로 올라와서 그 형이 그 죽였으니까 여기 와서 그 청년대장인가 본 사람 죽이려고 하다가 그냥 서로 그러면 안 된다고 그냥 말았어. 서로 죽이려고 들고 하다가 결국 몽둥이로 패서 죽였어. 세 사람을... 묻어놓으니까 사람이 벌떡벌떡하고....”

 

(김용현 : 그게 어디서 그랬어요?)

 

지금도 저쪽 건너보면 상회 있어. 지금 아파트 새로 짓고 있어. 거기가... 옛날 서낭당고개 저기서 오면 서낭당고개라고 과천 오면 여기서부터 긴다고 그랬거든. 성황당 고개 있는데 그 위에 상여막 있고 그랬으니까......”

 

(김용현 : 그래도 전쟁 때 가일리가 큰 저기는 없었고?)

 

큰 저거는 없었어. 그 세 사람만 죽이고... 저기 아랫녘 사람인데 죽고 그리고 여기 사람도 하나 끼워서 죽고, 김씨네... 죽었는데 그냥 서로 저거 하고 말았지. 피해가 없었어.”

 

(김용현 : 그렇게 전쟁 끝나시고 안양공고 생겨서 공고 가셨어요 아니면 군대 가셨어요?)

 

가지 못했지. 20세에 영장 나와서....휴전되고 바로 군대 갔지. 군대에서 336개월.”

 

(김용현 : 어디서 군생활 하셨어요?)

 

철원서 근무하다가 포천 이동 있어. 이동 철원서 인제 후방이니까 인제 포천 이동서 한 6개월인가 8개월인가 있다가 전방으로 또 들어가는 거야. 어디로 갔느냐 화천발전소 그 안에 거기 가서 근무를 하다가 제대했지. 2사단 31연대 3대대.”

(정재성 : 갔다 오셔서 결혼하셨어요?)

 

가기 전에 군대 있을 때 아버지가 환갑이 넘고 해서 군대 있을 때.”

 

(김용현 : 그러면 뭐 휴가 오셔서 선 보시고 그 다음에 휴가 받아서 결혼식 하시고 그렇게? 사모님은 아버님께서 그 어디 분을 어떻게 중신을 들어오신 거래요?)

 

동네 사람이 여기 하나 살았는데, 천안에 천안 성거읍면에 사는데 그이가 여기서 사는 것은 이제 밭도 그렇고 논도 남 주고 그걸 하니까 자기가 고마워서 그 사람이 정씨네서....그래서 천안 가서 보고 그렇게 했지. 여자가 귀해서....결혼해서 여기서 아버님 모시고 여기서 고대로 살았지.”

 

(김용현 : 제대하신 게 혁명 때가 아직 안 됐네요.)

 

혁명 나기 전에 나왔지 뭐야. 박정희 혁명할 적에는 그때는 우리는 군번이 96인데 그때는 100원짜리 들이지.......그래서 그렇게 해서 그냥 다 와서 농사짓고 45살에 내가 갈현2리 이장을 볼 때, 그때는 이게 동이 안 생기고 남부지소 북부지소 출장소 그랬는데 지금 생견마을 있는 데가 출장소고 그리고 저 지금 동사무소 자리가 남부고 북부지소는 저쪽 남태령 등기소 있는 자리였지.”

 

아침에 일어나면 면사무소에서 일하나? 각 부락마다 가서 풀 깎으라고 아침이면 일찌감치 나와서 풀 깎으면 밥 해대야 하잖아? 면사무소 면직원들 그러면 아휴~’ 아주 그냥 우리 마누라가 밥 해대기 죽을 맛이야......가면 또 어디가 밥먹나 그 사람들이....그렇게 한 10년을 했어. 그 후로는 새마을지도자 보고.... 동네 새마을사업 한다고 길을 닦잖아? 길도 60평 그대로 뺏겼어. 60평 앞에 있는 길이 조리로 나가서 여기 마당 주차장 있는 자리를 그건 그냥 시에 희사했지. 면에서는 찬조를 받아라고 했는데 그냥 희사했지.”

 

(김용현 : 그리고 71년엔가 그린벨트 지정되면서 온 동네가 땅들 다 꼼짝도 못 하고 그럴 때가 이장 보실 때 였나요?)

 

지정될 땐 이장 안 봤어요. 그것도 문원동 저쪽으로 하고 지정을 했으면 그 당시 그거를 들어가는데 도시다 개발이다 하니까 그까짓 것 쉽게 생각한 거야. 쉽게 생각 했는데 그린벨트 책정하고 보니까 지금하기 전에 문원동 그쪽으로 다 했거든. 들어가는 거 아니야 그렇게 과천시가 다 들어갈 건데 그렇게 설마 해서 그렇게 들어간 거야. 누가 도시 될 줄 알았나? 나중에 그거 그린벨트 책정 하다 그렇게 된 거지.”

 

(김용현 : 같은 과천도 저쪽 광챙이나 막계 이쪽에는 그 77년에 인제 대공원 들어오고 그러면서 인제 한번 그 문원리로 이주를 하시잖아요. 그리고 난 다음에 82년에 여기 인제 신도시 한다고 그때 한번 또 그 토지 수용 하고 한참 난리가 나고 근데 희안하게도 이쪽 찬우물 이쪽으로는 그런 바람이 안 불었어요?)

 

그때 만해도 그린벨트 생기고 나서도 도시계획 한데만 이렇게 하니까, 이렇게 지금처럼 이렇게 개발이 되고 땅 바람이 불질 않았지. 땅 바람 불기 전에는 지금 저기 말죽거리에서 저 쪽으로 내려가면 나루터...... 압구정하고 이 아래 이수교 그리고 그 북쪽에서부터 다 수용하다시피 땅금이 올라서 판 거야. 그 사람들이 판 그 돈 가지고 와서 산 사람들이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이 마을회관도 지은거야.”

 

(김용현 : 서울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산 땅 가지고 땅주인들을 찾아서.....)

 

그래서 돈 찬조를 받아서 그렇게 해서 집 지은 거야. 그때 한참 저거 할 적에... 과천 사람들도 땅을 가지고 용산 가서 판 거야. 저기 뭐야 다방에서 쓰고 다방에서 두 번, 세 번, 네 번 씩 넘어가고... 등기권리증만 가지고 가면.... 막 팔았으니까......”

 

(김용현 : 근데 그때 어르신은 여기서 그때 그 땅 팔고 떠나실 생각은 안 하셨어요? )

 

안했지. 여기 떠나면 죽는 줄 알고. 그냥 아버지가 지었으니까 그냥 여기서 살고, 열심히 그 논갈이 하고 경운기 가지고 논갈이 하고, 그렇게 해서 남고 그러면 과천 가다 보면 이장 보니깐두루 땅 어디 나오는 거 있느냐고 말죽거리 사람들이 하면 여기 어디 온다는 게 있다고 하고 그땐 뭐 팔지 못해. 그때는 뭐 씨지. 그거 파는 거 지금 가지고 있다가 지금 한 300만원 받았으니 얼마예요? 50만 원 40만 원 그거 받아서 한 것이 지금 몇 배가 올라갔으니......”

 

관악산을 떠난 사람은 못 돌아와요. 사람 욕심이... 남이 장에 간다니깐 홍시 팔아 가지고 간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아. 왜냐면 여기 고향을 떠나면..... 안양 가면 잘 살 줄 알고 팔아 가지고 가서 비싸게 주고 샀는데 그게 올라야 뭐 얼마나 올라. 그러니 여기는...... 그렇게 해서 못 산 거예요. 여기서 떠난 사람들은 못 사는 거야. 오씨네가 한 집만 살고 요기가 오씨네 터거든. 오씨네 하고 김씨네가 많이 살고 했는데 그이들 다 떠나고 외지사람들이 다 차지 한 거예요. 사람들이 다 앞으로 내가 치는 거예요. 돈은 돌고 금전은 왔다 갔다 한다고 그러잖아요.”

 

혁명 직후 부천에 있던 통신사령부가 가일리로 들어 온다. 남태령 아래 미군부대는 그 뒤에 들어 온다. 그때는 반대도 못했다.

 

반발할 수가 있나? 뭐 몇 몇 집 거기 들어가니까 돈 주고 뺏으니 뭐... 아야 소리도 못하지.”

(김용현 : 그렇게 해서 그러면 910년 이장 보시고 그러시고 이제 그 이장 마치실 무렵에 팔 다치시고 그러니까 농사일도 조금 덜 하시게 되고......)

 

그 전에는 그냥 꼬박 그냥 아침에 나가면 그냥 점심 한 숟갈 먹으면 종일 일했지. 뭐 그래도 내가 이렇게 산거는 그래도 그때 다치는 바람에 일을 덜하니까 지금 살아 있는 거야.”

 

이 동네에선 내가 지금 나이 제일 많이 먹고 그렇지만서도 사실 6·25 전에 얘기하자면 이 그 향교란 것이 그 양반들만 그 향교에 다녔던 거야 나이 먹고 한 사람들이 양반이나 갔지. 못 가. 거기에 보면 여기 과천에도 보면 그 유지 이름들이 다 있고...요기 오씨네 보면 효부상이... 향교에서 주는 것이 있는 집이 오학선 이라고 오학선씨 어머니가 넓적다리를 칼로..... 옛날엔 고기를 못 먹어서 베어서 드렸어. 그래서 그 효부상 받았고... 여기 우리 아버지도 공부는 못하셨는데 한내 신씨 그 나이 먹은...신 누군가 있어. 그 할아버진가 아버지한테 배웠어. 그전에는 서당 다니고....아버지가 그리로 다녔어.”

 

그래서 신성재는 지금 농협에 다니는 아버지 재작년인가 죽었고, 그리고 그 윗집인가 누군가에게 아버지가 거기서 하고 그래서 한문을 제일 잘 알고 하기는 우리 아버지가 가르쳐서 여기서도 공부를 가르쳐 줬던 동네서도...가르쳤으니까...지금 김갑권이 우리 아버지한테 배워서 선생님 선생님 그러고...”

 

이씨는 서른 한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생계를 맡아서 고생을 했다.

 

그렇죠. 그러느라고 농사만 하느라고 애들하고 이럭저럭 크면 내 동생하고 사니까 한 십 여 명이다 보니까, 가서 하루 물 푸고 하루 종일 일해야 돈 500, 쌀을 사려면 1,500원 아녜요? 사흘 품 팔아야.....사흘 가서 낑낑 매고 가서 사다 놓으면 돌아서면 없고.... 그때 생각하면 참 기가 막혔어. 그래도 이러니 저러니 해도 박정희가 정치하면서 외국 저거하고 월남 전쟁에 해서 들어온 돈 하고........그래서 그 박정희 때문에.....밥도 잡곡 밖에 없었어. 조밥.....”

 

(김용현 : 그때 만해도 남태령 나무해갖고 건너가면 조 두된가 그저 쌀도 못 사고 조 한 두 어 되 바꿔 가지고 온다셨다는데 그래도 어르신네는 그때 마차로 가니까 열 짐 이상은 이렇게 싣고 갈 만큼 됐잖아요?)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괜찮게 사셨으니까....그런데 나이 잡숫고....전에는 왜정 때 그 돈 많은 사람 만나서 땅들을 사주고 그래서 논 좀 갖고 계셨어. 그래서 해서 일 안하고 일꾼 두고 했었는데 우리 자라서는 애들하고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까 못 찾고 있는 거 팔아가지고 그러다 이제 우리 자라고 나서 이제 내가 장남이니까 벌어서 그거 낑낑해야 사흘 품 팔아서 쌀 한 말 갔다가... 있는 집 가서 두말 서 말씩 갖다가 먹으면 그 일을 죽도록 해 주는 데 바구미난 쌀... 그거를 갖다가 까부르면 얼마가 없어져? 그런 시절을 참....”

 

(2019.11.12.) 자택에서 정재성 과천향토사연구회장, 김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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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옆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화제가 된 사람.

그의 목을 매다는 퍼포먼스를 했던 활동가는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문을 닫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괜찮은 인간을 만난 적이 없다' 말했다.

프랜시스 콜린스 전 국립보건원장은 '내가 아는 가장 헌신적인 공무원'이라 칭했다.

저명하고 겸손한 공직자가 곧 54년 공직 생활의 마침표를 찍는다.

시사in 2022.12.13 김연희 기자가 쓴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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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동사무소 자리에서 났어요. 그전엔 문원 2리지. 과천 읍내에서 비석거리로 해서 나온 데가 문원 3리야.”

 

강 회장은 15살 중학교 2학년 무렵에 6·25를 겪었다.

 

내가 막내였어요. 형제가 많았죠. 운이 좋았는지 이리저리 잘 풀렸어요.”

 

과천에 버스 다닐 무렵에는 버스가 안양으로 해서 영등포로 돌아서 다녔다. 과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공부하고는 서울서 교직생활을 했다. 강씨는 원효초등학교, 송전초등학교, 문백초등학교에서 교장을 지냈다. 1999년 문백초등학교에서 교육공로표창 받고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에는 매봉경로당 회장, 5단지 노인회장을 하면서 대한노인회 과천지회 부회장을 거쳐 2012년도에 노인회 지회장이 됐다. 2010년 무렵에는 노인회 건물이 문원동에 있었다. 그라운드골프 회장도 맡았었다. 인터뷰 당시 과천노인회장을 맡고 있었다.

 

(노인대학장 : 그러니까 과천면 분회 였다가 시되면서 시 지회가 된거죠. 그전에는 시흥군지회의 분회였을거고....노인회 일을 보시기 전에는 평생 서울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거구요. 젊었을 땐 서울서 사셨고 정년 즈음에는 서울로 출퇴근 하셨죠. 1955년 당시의 사범학교는 사범대학이 아니고 고등학교 과정의 사범학교예요. 당시에는 사범학교 학교 졸업하면 초등학교 교원 자격을 줬어요. 그 이전에 아마 20세 전후로 해서 선생을 하셨을거예요. 18세 만 되도 가능했으니까...)

 

서울에 집안 친척들도 많이 살고해서 서울에서 집을 얻어서 다녔죠....결혼 전부터 선생을 했어요. 보통 평교사에서 그 당시에 교장까지 승진하려면 그래도....운이 좋은지....”

 

(노인대학장 : 운이 아니라 열심히 하셨어요. 연구학교 시범학교 그런 과제를 많이 하셨어요. 서울은 오지 점수는 없고. 지방 경기도 같은 데는 이제 섬에 가서 근무하던가 강원도 같은 데는 산 깊숙한데.....경기도 선생님들 가운데는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진급이 빨라요. 그게 왜냐면 전남이나 경남이나 이런데 가면 섬들이 많잖아. 오지점수를 충분히 다 가지고 와 가지고 오히려 그분들이 여기 있는 사람들보다 점수관리가 잘 되는 거야. 교장 교감 나오는데는 그래 호남분들이 많지. 그리고 해방 후에 일본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그래서 선생이 부족했어요. 당시에 고등학교 나오고 강습소라는게 있어서 한 6개월 공부하고 선생된 분들도 있었죠. 그리고 그 당시에는 좀 일찍 관리자가 교장 교감도 되고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 회장님은 그 세대 보다는 조금 아래 세대기 때문에 선생을 거쳐서 교장이 되신거죠.)

 

“2000년 초반에 이제 퇴임하고 내려와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죠. 그랬더니 후배들이 외지에 가서는 여러가지 하더니 고향에 와서는 아무 것도 않느냐?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퇴직 후 노인회 활동 말고도 과천향우회, 과천시민회 등에서 활동했다. 지금도 경기도민회 이사로 있다. 경기도민회는 경기도에서 연 4천만원 정도를 지원받아 관내 장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한다.

 

(평생 교직에 계셔서 그랬는지 뭐 정치나 뭐 이런 쪽에 관여 안 하시고 노인분들 복지를 위해서만 일을 하신 편이신 거예요?)

 

그렇지요. 내가 뭘 정치 쪽으론 생리도 안맞고....그곳에 관심도 안 가지고.....”

강회장은 평생 원하던 바를 거의 다 이루었다고 자평한다.

 

"교직을 한 거 자체가 그렇고...... 내가 담배 술을 아예 배우질 않았어요. 그래서 젊어서부터 아예 술 담배 안 하겠다 결심을 하고 평생 그걸 지킨거고......건강관리는 내가 달리기 선수였어요. 대회에 나가고 그랬죠."

 

평생을 순탄하게 산 강씨에게 비결을 물었다.

 

내 욕심을 안 내면 내가 하는 일에 거부감 갖는 사람이 적지요. 교직에 있을 때도 그랬어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같이 하고.....협력하면 일단 인정을 받잖아요?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고 내가 꼭 필요한 곳에서는 내 위치를 다 하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든지 폐를 끼치지 않고 살면 평생 크게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노인회를 맡아 할 때는 갈등을 중재하는 일을 많이 했다.

 

3자 입장에서 이게 옳다. 이대로 하면 된다 싶으면 그런 점을 이해 시켜주는데 애를 썼어요. 과천에서 만이 아니고.......서울에서도......그런 일이 있으면 일단 내 욕심을 일단 접어 놓고 이렇게 하는게 좋지 않겠느냐?’ 이해를 시키려고 애를 썼지요. 나중에는 상대가 스스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는거지요.”

 

(2019.5.21 노인회관에서 석용훈 부회장, 이정달 노인대학장 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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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아버지(빛날 찬 쌍토 규)가 수원금융조합에 근무하시며 수원시 인계동 소재 셋집 사실 때인 19352월에 태어나 2개월 뒤 수원시 영화동 소재 일본식 독립가옥(북문밖 국도1호변 약 200M 서북쪽 지점)을 구입해서 그리 이사해 성장해 수원 신풍소학교 4학년 2학기인 19459월 아버지가 귀농(김녕김씨 충의공파 26세 지손으로 12대 종손)하신 해에 과천초등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서울 관악구 대방동 소재 서울공립공업중학교 2,3학년 시절에는 수원 영화동에서 형들과 같이 살며 기차통학을 하기도 했다.

 

수원 살 때는 과천 고향집에 오려면 버스나 기차를 타거나 걸어서 지지대고개, 사그네를 거쳐 군포까지 와서 안양형무소 근처 민배기 그리고 인덕원, 찬우물을 거쳐 오고 갔지요.”

 

“8·15 해방되던 날도 여름방학 중 큰아들 집에 오셨던 할머니(이원영씨 여주분)를 모시고 오는데 인덕원(당시는 산모퉁이 고개길)고개를 돌아오는데 관악산 쪽 높은 하늘에서 하얀 물체가 흰연기를 뿜으며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할머니께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지만 글쎄다. 그게 뭐냐?’ 하셨고 물체는 날아가서 안보였어요. 집에 당도해 할아버지(김형만씨)께 여쭈어보니 그게 미국비행기 B-29였을게다라고 알려 주셔서 미국비행기는 높이도 날아가는구나하고 생각했지요. 과천 할아버지댁에는 넷째삼촌이 라디오를 팔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는 가게를 하셔서 조그만 단파라디오를 듣고 계셔서 뉴스를 듣고 세상사 흐름을 잘 알고 계셨어요. 할아버지께서는 뉴스에서 대동아전쟁이 끝났고 일본 천황이 항복했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신사참배를 왜놈들은 진자 산빠이라고 그랬는데 그걸 방학때도 참배를 하고 도장을 받아가야 학교에서 수신점수를 깎지 않았어요. 조선말 했다고 수신점수 깎고...... 그런데 과천에 전학오니까 그리 심하지는 않더라구요. 수원은 도회지라 그랬는지 학교에서도 일체 조선말 못하게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방학 끝나고 학교가니까 담임선생이 우리 조선말을 하더라구요. 그래 이상하다고 말하니까 이제 해방됐다고’......태극기를 들고다니고 그랬지요.”

 

선친이 과천면 의회 의장도 하시고 연이어 과천수리조합장을 하시며 과천저수지를 건설하실 때 지금 대공원 자리 벌판에 천막을 치시고 거기서 지내시면서 공사감독을 하셨고 내가 주말에 어쩌다가 집에 오면 공사장에 가서 아버지 먼저 뵙고 산 하나 넘어서 집으로(지금 경마공원연습장) 가곤 했어요.”

 

제방을 만들 때는 암석이 나오도록 바닥을 파내고 진흙을 다져넣었다. 당시 민둥재(지금의 9단지 뒷산)에 그대로 굽기만 하면 빨간벽돌이 되는 붉은 찰흙이 있어서 그 흙을 가져다 물에 이겨 암석틈을 막았다고 전한다. 저수지 공사를 위해 허가까지 약 2, 공사가 약 4년 정도 걸렸다. 5·16 혁명이 나고 부친은 안양까지 불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김씨는 19618월 국가재건최고회의 행정요원으로 취직했다. 주말이면 동료들과 천렵을 하곤 했다. 과천저수지와 청계산 개울이 맞닿는 자리에 깻묵을 이겨 넣은 어항을 드리우고 2,30분만 기다리면 송사리가 가득 잡히곤 해서 능내 집에 미리 부탁해서 준비한 양은 솥에 고추장에 파, 마늘 등 양념을 넣고 매운탕을 끓여 먹곤 했다.

 

아버님이 낚시를 좋아하셨어요. 은행에 다니실 때도 토요일 출근하시면서 어머니께 낚시밥을 부탁하셨어요. 어머니께서 들깻묵을 사다가 어른주먹만하게 3개 정도 만들어 놓으시면 아버지께서 퇴근하셔서 점심드시고 자전거에 낚시도구와 미끼 그리고 저녁도시락을 싣고 나가시면서 가시는 곳이 수원 광교나 서호저수지 어디쯤이라고 말씀하시면 일요일 아침에 낚시 좋아하는 내가 도시락과 내가 쓸 송사리 낚시대 둘러메고 찾아가서는 아버지께서 조반 드시는 동안 그 근처에서 송사리 낚시 하루종일 하다가 아버지와 돌아오곤했지요. 일동저수지나 물왕리까지 다니곤 했어요.”

 

1990년대 초 박영재 문화원장이 과천시 재경향우회를 만들었다. 서울에 사는 과천출신 인사들이 1년에 3,4회 모임을 갖고 고향발전을 상의하곤 했다. 1996년 박원장이 김씨에게 향우회장을 맡아 줄 것을 강권한다. 극구 사양했으나 그해 6월 정년퇴임을 하게 되자 더는 피할 수가 없었다. 과천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도 19974월 정기총회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총회장으로 추대해 3,44년을 역임하고 그후로도 8회에 걸쳐 16년을 명예회장으로 자문에 응했다. 일을 제대로 하려고 과천소방서 근처 명문학원및 별양동 과천오피스텔에 사무실을 내고 2012.4.1. 역사적인 과천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사업등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도록 지원했다.

 

공무원으로 재직 중 월급만으로는 3,4명의 동생들과 같이 기거하기에는 어려웠다. 약사인 부인(변삼자)이 집을 고쳐 진삼약국이란 약국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약국이래야 김씨네 형제가 학교에 다니기 위해 아버지께서 흑석동 길가에 사두셨던 15평 크기 한옥이었다. 그 집을 당시 돈 500만원을 아버지께 빌려 5평 정도를 약국으로 고쳤다. 남들 보기에는 안팎으로 돈을 버니 넉넉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일가친척들이 오면 약은 전부 거저 가져가고 형제들이 공동으로 부담해야 할 일이 생기면 김씨네가 맡아야 했으니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아버님 병수발로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결혼 후 유산으로 받은 과천 산골 논 800(4마지기)을 팔아도 남는게 없었다. 그 무렵 6·25 전쟁 당시 함께 학도의용군으로 종군했던 선배가 고향집 뒷동산에 있는 적산임야를 불하 한다는 소식을 전해 줬다. 15천 여 평을 12만원 정도에 불하 하는데 6년 분할이라는 것이었다. 그걸 아버지께 사드리는 것으로 약국 한다고 빌린 500만원을 갚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 땅이 경마연습장 서남쪽 뒷산인데 예전에는 능안마을이었고 경마공원으로 편입됐다. 김씨는 그 뒤로도 7년을 봉급 때마다 조금씩 갚아나갔다.

 

지금도 경마연습장에 가면 옛생각에 눈물이 나요. 산 앞으로 연습장 바닥에 집들이 조르란히 있었는데....동북쪽에서부터 집들이 있었는데 우리집이 3번째 집으로 제일 크고 기와집에다 마당도 제일 넓었어요. 뒤곁에는 감나무 고목이 세그루 있었는데 지금도 감이 열리고 경마장 인부들이 관리하는 것 같더라구요.”

 

김씨는 돈 만드는 재주는 없었다고 자평한다. 그러니 절약을 하며 살 수 밖에 없었고 머리를 써야 했다. 해외근무를 세 번, 13년을 하는 동안 은행돈을 빌려 벤츠를 사서 2년을 타다가 팔 때 일본돈으로 80만엔을 더 받고 판 적도 있었다. 그렇게 아끼고 살았어도 아이들 학비 때문에 융자를 받기도 했고 1996년 퇴직금으로 청산할수 있었다.

19966월 김씨가 국가재건최고회의 행정요원으로 들어갈 때 12,000여 명이 응시해 1차로 75명이 합격했다. 그 중 4명이 서약서에 서명할 수 없다고 해서 합격이 취소됐다. 71명이 서약서를 쓰는데 3시간이 걸렸다. 이유는 최고회의 행정요원으로 응시했는데 임무가 특수(정보?)라니까 망설이느라고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이었다.

 

과천초등학교 뒤 좌측에 신사가 있었고 우측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었죠. 학교 오른쪽으로는 과천지서(경찰서)가 있었고 그 오른쪽 앞에 제중의원이라고 한옥을 일부 개조한 병원이 있었어요. 학교 앞 큰 길 오른쪽 사거리 근처에 조그마한 우체국이 있었고요. 학교 주변에 관공서가 모여 있으니 과천 변두리 거주민들은 민원일을 보려면 관문리로 오곤 했어요.”

 

옛날에 서울이 무서우니까 과천서부터 기어간다는 말이 있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도 우리 형들 친구들이 방학때 과천으로 놀러 오면 과천 주막거리에서 건달들이 시비를 걸어서 싸움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어요. 그래서 아무개 이름(할아버지 김형만씨)을 대고 그 집 손자를 만나러 왔다고 말하면 무사히 지나갈수 있었어요. 옛날에는 과거 보러 가려면 과천을 반드시 지나야 하고 시흥쪽 길은 왜놈들이 들어와서 만든 길이고 그 전에는 과천을 지나야 하니까 과천서부터 기어야 과거를 볼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과거도 보지 못하고 얻어맞고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여기 과천이 주막거리예요. 남태령고개쪽으로 가면 한내삼거리가 있는데 주막거리고, 고개를 넘어가면 남태령 전철역 있는데 거기도 집이 한 30여 호 있었는데 거기도 주막거리라. 또 그 밑으로 내려가면 사당사거리가 심방뜰이라는 동네였는데 집이 한 4,50여 호 있었는데 주막거리이고......주막거리가 4곳이나 조르란히 있었어요. 그러니 서울을 가려면 과천을 거쳐야 하고 지나는 곳마다 술을 한순배 내거나 선물을 주어야 지나갈 수 있었지요. 그때 동쪽으로 우면산 모퉁이에는 말죽거리(현재는 양재)가 있었지만 남쪽으로 뚫린 큰 길이 없었기 때문에 왕래가 많지 않았고 6·25 이후에 번화가가 되었지요.”

 

·고등학교 다닐 때 여름방학이면 참외, 수박을 팔러 서울 남대문, 영등포시장이나 멀리는 하인천시장까지 10번 이상을 다녔어요. 아버지께서 농업중학교 다니셨고 과천에서 농사를 지으실 때 쌀·보리 농사 만으로는 아이들 학비 조달이 어려우니까 참외, 수박, , 토마토, 호박, 당근, 고추 등 소채작물 밭농사도 겸하셨는데 트럭에 짐을 싣고 화주로 따라다니면서 아버지를 대신해서 한몫을 하곤 했지요.”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남들은 시계도 차고 가죽구두도 신고 그러는데 아버지가 은행에 다니실 때 같으면 떼를 써보겠지만 농사지으시느라 머슴 셋 데리고 허구헌날 애를 태우시는데 그거 사달라는 말이 안 나오더라구. 그래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작은형과 우리 산에서 나무를 해다 집 뒷켠에 쌓아 두었다가 나무장수에게 팔아서 일제 세이코 시계와 구두를 사서 형과 나눠 가졌죠. 작은형은 그 시계를 잘 차고 다니는데 나는 그 시계가 돌아가는게 하도 신기해서 분해를 했다가 다시 조립을 못해서 결국 시계병원에 가서 고쳐왔던 기억이 나요.”

 

6·25 전시에 고등학교를 다니던 김씨는 능안말 집에서 대방동 성남고등학교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어느 토요일 후배학생들과 삐삐선(군용야전 전화선)으로 직접 재 보았다. 300m 길이의 삐삐선 양 끝에 나무말뚝을 묶어 약 3시간에 걸쳐 재보니 14km 하고 750m가 나왔다. 왕복 70리를 매일같이 걸어다닌 것이다.

 

“9·28 수복후에 고향 선배들 종용으로 학도의용군(국방부 정훈국 소속)에 나가야 했어요. 3개월간 학도의용군 신분증을 갖고, 칼빈총에 대검도 차고 다니면서 공비토벌에도 참가하곤 했어요. 1·4 후퇴 때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과 피난을 가던지 군에 입대해 국방부 지시를 받던지 하라더군요. 그래서 15명 중 4,5명은 국방부로 갔고 나와 나머지는 식구들과 피난가는 길을 택했지요.”

 

피난은 친족 김녕김씨가 많이 사는 상주(거주마을 종가를 목표로)로 가기로 했다. 아버지와는 상주에서 만나기로 하고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동생 4명이 집을 나섰는데 출발 직전에 같은 동네 김대성씨네도 마차에 짐을 조금 싣고 떠나면서 김씨네 짐을 실어주길래 같이 떠났다. 과천읍을 나오기도 전에 길이 꽉 막혀 군·관에서 인도해 주는 길로만 갈수 있었다. 군포에서 수원쪽으로 가려 했으나 남양쪽으로만 갈수 있었다. 수원행은 오솔길이라 사람만 갈 수 있다고 해서 어머니와 식구 4명은 수원으로 가고 김씨는 마차를 따라 남양으로 갔다. 저녁 무렵 남양 쪽 길가 동네에서 노숙을 해야 할 참이었다. 김씨는 짐을 지고 30여 리 떨어진 수원을 향해 걸었다. 12시 경 수원 영화동 영말 외가댁(외삼촌 임수광씨)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식구들은 4시 경에 출발해서 남양으로 함께 걸어서 동네에서 함께 출발했던 이웃들과 만났다. ·관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평택 서편을 돌아 둔포 시내로 들어 선 것이 오후 5시 경이었다. 불과 30여 분 전에 앞서가던 피난민들 속에 중공군 선발대 2개 분대가 섞여 있었는데 발각되어 UN군 공중 기습으로 몰살당했다. 시신 수 십여 구가 보였고 길바닥은 온통 유혈이 낭자했다. 비위가 약한 누이(당시 21세 정도)가 구역질을 하며 혼수상태가 되었다. 우선 누이를 누이려고 길 가의 집을 찾았지만 집집마다 시신이 10여 명씩 쓰려져 있었다. 10여 곳을 뒤지다가 둔포초등학교로 들어갔다. 교실마다 피난민 2,30여 명씩 웅크리고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하룻밤을 지내고 날이 밝자마자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김씨도 지쳐 길옆에 쓰러져 애를 먹었다. 길 가 방앗간 창고에서 여섯 식구가 웅크리고 쉬었다가 날이 밝자 다시 2,30m를 가다가 쉬기를 반복하며 내려갔다. 남의 집 사랑마루를 빌려 밤이슬을 피하기도 했다. 김씨가 탈진해서 쓰러지자 어머니는 흰죽을 쑤어다가 머리맡에 놓고 신령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밤새 두손모아 비셨다. 그 밤 김씨는 돌아누워 울면서 어머님의 정성을 보아서라도 부모 앞에서는 아프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김씨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말짱해졌다.

다음 날 길을 따라 내려 간 곳이 봉담면 덕리였다. 오씨네 빈 집이 있었다. 마침 동내에서 같이 내려간 사람 중에 오씨가 있어서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안방에는 김대성씨네와 오차복씨 모친이 딸 2명과 같이 기거하고 건넌방 1칸에 김씨네 6식구가 피난생활을 하게 되었다. 덕리에서 온양쪽으로 1.5km 고개 하나를 넘으면 이순신 장군묘가 있었다.

피난길에 나설 때는 상주에서 아버지를 만나기로 했고 돈은 아버지가 갖고 계셨으니 김씨네 6식구는 생활이 곤란했다. 다행히 가져 온 짐 속에 누이 시집 보낼 때 쓰려고 사 두었던 혼수감이 있었다. 그걸 헐값에 팔아서 연명하면서 김씨는 솔가지 땔나무를 해다가 둔포시장에 내다 팔아서 쌀 1되를 사서 죽을 쑤어서 아침저녁 2끼만 먹었다. 말이 죽이지 쌀알이 수영한다고 할만큼 멀건 죽이었다. 그걸로도 안되서 온양시장에서 엿을 받아다 팔기도 했다. 3개월쯤 지나자 방물장수들이 서울탈환 소식을 전해주었다.

소마차를 끌고 함께 과천에서 출발했던 김대성씨네와 오씨네가 돌아가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출발해 성환, 공도, 양성, 용인, 기흥, 수지를 거쳐 돌아오기로 하고 떠났다. 짐은 1/3이 안될 만큼 줄어서 식구들이 나누어 지고 떠났다. 용인쯤 왔는데 아버지께서 마중 보내신 김형달 작은댁 할아버지와 집에서 잔일하던 머슴 박씨와 만났다. 모두들 무사하시다는 반가운 소식에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왔다. 해질 무렵 3개월만에 그리던 아버지를 만나고 고향집에 돌아오니 이젠 살았구나싶어 기분이 홀가분해지고 살 것 같았다.

아버지께선 일부러 늙어 보이라고 수염을 기르셔서 눈··입만 보일 정도였다. 아군이 서울을 수복할 때도 중공군 1개 중대가 동리에 주둔해 있다가 퇴각하면서 그날도 김형달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짐을 지워 남태령을 넘어 가다가 아군의 기총사격을 받게 되었다. 짐을 진 채로 길 옆 개울에 엎어져 30여 분을 꼼짝 않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중공군들은 달아나고 없었다. 형달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짐을 버리고 남태령 산길을 따라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 소리를 듣고 식구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전쟁터가 북으로 가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쟁기가 헐어서 쓸수 없었다. 밭이 15천여 평이 넘고 논도 8천 평이 넘었다. 아버지는 수원, 안양, 영등포 시장을 다니며 쟁기를 찾았으나 구할 수 없었다. 김씨는 아버지가 쟁기를 구하러 나가신 사이에 밤나무 통나무를 깎아 쟁기를 만들었다. 헌 쟁기를 옆에 놓고 집에 있는 연장으로 깎아나갔다. 지나던 동네 어르신들은 코웃음을 치셨다. 하지만 오후가 되어 쟁기가 모양을 갖춰 나가자 신통해 하시며 김씨의 손재주를 칭찬하셨다. 해질 무렵 돌아오신 아버지는 감격해 하셨다. 다음 날 대장간에서 쟁기 앞에 보습과 바닥만 만들어 붙여서 그해 농사를 무사히 지을 수 있었다.

 

김씨가 아버지를 놀라게 해드린 것이 더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수원농업중학교에 다니던 큰형이 일본 자매학교에서 새끼 암컷토끼 100마리를 보내왔다며 가져다 길러서 암컷 1마리만 학교에 돌려주고 나머지는 기른 학생이 가져도 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김씨가 등교 전후로 풀을 베어다 놓으면 어머니가 때 맞춰 먹이를 주며 길렀다. 반년도 안되서 토끼는 새끼를 낳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번 꼴로 한번에 열 마리 정도로 토끼가 불어났다. 김씨가 과천소학교로 전학할 4학년 무렵에는 어미만 27마리가 됐다. 팔려나가지 않을때는 마당에 10여 마리 토끼들이 뛰어 다니곤 했다. 한달에 세 번 서는 수원 장날이면 어머니는 돈지갑이 두둑해 져서 좋아하셨다.

 

초등학교 2학년 겨울이었다. 아버지는 큰형, 누이, 작은형까지 스케이트를 사주시고는 김씨는 어려서 위험하다며 사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형들이 스케이트를 타면 따라가서 형들이 쉬는 사이에 신어보고 타보려면 날을 버린다며 눈치를 주곤 해서 서러웠다. 어느 날 작정을 하고 식구들 모르게 곳간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버지가 학창시절 쓰시던 캐처용 야구글러브를 해체해 그 가죽을 이어붙여 구두를 만들었다. 구두바닥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가죽구두는 형편이 좋은 사람들이 신었고 보통은 헝겊구두에 종이창을 댄 것이었다. 구두방에서 헌 종이창을 얻어다 붙였다. 스케이트날은 형들이 타다가 썰매에 붙이라고 준 것을 다시 뜯어서 갈아서 붙였다. 하루종일 그 모습을 지켜 보시던 어머니께서 대견해 하시면서도 아버지께 야단 맞지는 않을까 걱정하셨다. 그날 저녁 자초지종을 들으신 아버지께서는 관대히 넘어가 주셨다. 2년 후 해방되던 해 겨울 작은형이 큰형에게서 물려받게 되면서 스케이트를 물려주어 과천의 김씨네집 앞 큰 논(한배미가 약200평 정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겨울을 보냈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2019.1.9. 과천오피스텔에서)

 

Posted by alli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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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경씨는 1934년 갈현동에서 태어났다. 문원동 910번지는 샛골 제비울이라 불렸다. 5남매중 4째로 태어났고, 아래로 여동생이 하나 있다. 위로 8대조 할아버지대에서부터 과천에 사셨다.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에서 올라오셨다고 전해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때 해방이 됐다. 과천초등학교 35회다. 당시 6학년은 100명 정도였다. 1반은 남자반, 2반은 여자반이었는데 여자아이들이 수가 적어서 1반 남자아이들 몇은 2반으로 편성했었다.

 

안양중학교 가서 시험을 봐서 합격이 됐는데.....우리가 농사가 많고 소를 기르는데 어떻게 다니느냐고.....못갔지. 아침이면 친구들이 모자쓰고 안양으로 주욱 걸어가는데......나는 화장실로 숨었다가 애들 지나가면 나오고......2년을 놀다가. 죽어두 중학교 문앞에 가서 죽겠다 해가지고 안양중학교를 갔어요. 둘째 형수가 아들이 없고 딸만 5형제야. 그래 시동생 겸 아들처럼 챙겨주셨지. 학비도 대주고 군복 물들여 옷도 해주고 미군 가방도 구해다 주시고.....”

 

고등학교는 안양공업고등학교를 갔다. 나이가 들어 입학한 탓에 학교 다닐 때 입대영장이 나왔다. 그래서 졸업하고 가겠다 연기신청을 해서 졸업 후에 바로 입대했다.

군대 가던 해 724일 과천에서 5,6명이 함께 입대했다. 광주 포병학교 가니 삼각함수를 아는 이들은 실내교육을 받고 나머지는 땡볕에서 포병교육을 받았다. 의정부 3보충대로 가게됐다. 새벽 6시면 준위가 플래시를 번쩍 거리며 기상을 시켜서는 사방이 지뢰밭이니 나가면 죽는다고 겁을 주었다. 아침을 먹고나면 산에 가서 밥 지을 나무를 해오는게 일과였다. 26사단에 배치가 됐는데 집이 수도권이고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 사단 행정병이 되어 편안하게 군생활을 했다. 제대 무렵에 3·15부정선거가 있을 때였다. 휴가 나왔는데 부대에서 대신 투표해줄테니 귀대하지 말라고 해서 그대로 제대했다.

 

맹 교장이라고 왜정 때 교장을 하다가 나중에는 면장을 했었다구. 그 양반이 서울 사는데 마차에 짐 실러 갔다가. 거기서 그냥 납치 된 거예요. 그래서 그 어머니도 실성을 하셨어. 밤이면 산등성이에서 우리 집 내려다보면서 이름을 부르면서 재원아 재원아 하시는 거예요 악을 쓰고 우시는거예요. 멀쩡한 사람이 갔다가 없어졌으니.....”

 

김도경씨 부인 유재환씨는 친정이 화성 장전이다. 큰어머니가 조카딸을 소개했다. 딸 셋에 아들 둘 5남매를 뒀다. 신랑보다 5살 어렸다. 22살에 결혼했다.

37년을 정미소를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정미소를 하게 된 계기는 과천에서 방앗간을 하던 김충원씨 소개로 하게 됐다. 안산에 방앗간을 하다가 문을 닫게 된 것이 있었다. 그걸 뜯어서 마차로 실어와서 집앞에 설치했다.

 

우리 당숙이 여기다 해라 그래가지고 기술자 하나도 안 대고 집짓는거구 뭐고 거기서 다 뜯어다가 하나씩 하나씩 그냥 비닐루 덮어 놨다가 그냥 쌓는 거 그냥 하나씩 하나씩 맞춰 가지고....기술자 하나도 안 대고 했다고....눈썰미가 있어서 뭐든지 한번만 보면은 뭐든지 할 거 같아. 그래서 둘째 작은 아버지가 너 옛날서부터 열두 가지 재주 가진 놈이 조석이 간데 없다고 그러는데 너 재주 좀 덜 좀 부려라그래. 그래도 한번만 보면 뭐든지 하겠는걸 어떡해요.....그래가지고 방앗간 하면서 내가 또 집짓고 지붕하고....새마을사업 하면서 내 손 안 간데 없어. 갈현 2통이구 어디구.....”

김씨는 정미소를 하면서 이장을 9년 동안 했다. 노인회 총무를 9년을 하다가 회장이 되어서 8년을 더 봉사했다.

김씨는 전쟁 이야기를 하다가 찬우물에 있는 전사군인의 비석에 대해

찬우물 여기 군인들이 후퇴할 적에 무전을 잘못 쳐 가지고 아군들이 여기저기 길 옆에다가 차를 세워 놨는데 그냥 비행기가 우리 큰집 여기서부터 기관총을 내리 쏴서 소위가 전사했어. 그래서 찬우물 거기다가 묻었지. 지금 거기 비석이 있어. 비행기가 지에무씨(GMC) 트럭 수 십 대를.....과천부터 인덕원 내려가는데까지 수 십 대를 다 바숴 버렸다구. 그때 학교도 그냥 타버렸지. 읍내는 다 타고.....이쪽 동네는 괜찮았지.....”

 

김씨 또래 중에도 생일이 빠른 이들 몇은 제2국민역으로 끌려 나가서 고생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민군을 만나면 죽게 되니까 피난 가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미 동네에는 인민군, 중공군이 내려와서 마을 사람들과 같이 지냈다. 김씨도 밤에는 산에 가 있고 아침이면 밥먹으러 내려오곤 했다. 찬우물에 들어 온 인민군은 몇 사람에게 무슨무슨 위원장 감투를 씌워줬다. 나중에 수복이 되고 나서 동네사람들에게 맞아 죽기도 했다.

 

피난은 학의리. 거기 갔었는데 거기 그냥 간신히 걸어서. 소에다가 짐을 싣구서 나가는데 막 과천 여기까지 왔다 이거야. 막 내쫓길래......갔는데. 어두워졌어. 어떻게 아는 집이 가서 뭐 땔나무간 소외양간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그냥 노인네들은 방 한 칸 사랑방이 한 칸인데 그냥 빡빡하게들 앉아서 얘기들 하시고 그 옆에 책상 앞에 앉아서 얘기들 하시는거 듣고 하는데...근데 바깥에 왔다갔다 해 아침에 나가봤더니 그 앞에다가 굴을 팠는데. 눈이 이렇게 쌓였는데....어디 가서 굴이 있는지도 몰라 그냥. 밤새도록 우당탕탕 파더니 일개 소대가 들어가도록 굴을 팠어. 그러고 그 위에다 서까래 기둥 같은 걸....멍석을 해가지고 흙을 덮구서 구멍만 막으면 몰라. 감쪽같아. 아침에 밥을 끓여 먹고 지지대 고개를 넘어 가려고 그러는데 양쪽에 중공군하고 인민군하고 서 가지고......자기네가 이겼다고. 여기까지 처들어 왔는데 어디로 가려고 그러느냐. 집으로 돌아가라 이거야. 그래 이렇게 비행기가 뜨고 막 그러는데 어떻게 가느냐고....좀 쉬었다가 어둡거든 집으로 가야지......딱 못가게 하는걸 어떡해.”

 

집으로 돌아와 굴을 파고 숨어있다가 밥 먹을 때만 몰래 나와보는 생활을 몇 달을 했다. 영등포에 살던 둘째 형님은 인민군에 끌려가다가 돌아가셨다. 당시 폭격으로 읍내 여러 집이 불타는 바람에 집을 잃은 사람들은 폭격을 피한 집 문간방 신세를 져야 했다. 나중에 집을 지을 때는 흙 올리고 기와를 올릴 때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도와주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당시에 과천에 방앗간이 많았지. 과천면 소재지에 거기도 있었고 한내 거기도 있었고 주암리에도. 광챙이도 있었고 또 막계에도 있었고 거의 마을마다 있었다고 마을마다 허가가 되니까. 거기 동네에서 찧어 먹어라 했으니까......인덕원에는 없고 저 동편에는 우리 형님하고 동창이신 분이 계셔서 내가 가서 기계도 봐주고....그리고 평촌에도 큰게 있었고. 전기로 하는....그리고 요 포일리 들어가는 길 옆에도 있었고...... 또 저 한직골이라고 거기도 하나 있었고....그때는 우리 방아간 하던 사람들이 모임이 있어서 회장을 하나 뽑고 1년에 2번씩 회의를 해가지고....서로 만나서 인사하고 그랬는데 정부에서 수매를 하면서 다 파산했지.”

 

방앗간 하면서 한 3,500. 농사 지어서 애들 공부도 가르치고 그렇게 한 거야. 셋째 형님이 내가 제대하고 오니까 면에 다니시더라고. 나더러 면에 들어가라시는 걸 한달에 15만원 준다고 해서 안한다고 했지. 군대에서 3년 행정을 봤는데.....여기 과천 출신들 휴가증을 댓 개씩 끊어줘서 집에 다녀오게 하고 그랬어. 크리스마스가 되면 위문품이 들어오면 높은 놈들이 자루를 끌러서 좋은 거 꺼내가면 나는 밤새 앉아서 자루 꿰매고.....나중엔 잘 한다고 장기하사 하라는 걸 나는 집에가서 부모님 도와서 농사 해야 한다고 하고 나왔지. 인사계가 장기복무하면 전라도 사는 자기 처제를 소개 준다는걸 너무 먼데라고 거절하고는 그냥 제대했어.”

 

19717월 그린벨트가 지정되면서 김씨네 땅은 다 들어간다. 돼지우리 하나도 심지어는 화장실도 못 짓게 단속을 하고 극성을 부리더니 지식정보타운이 되면서 LH에 수용이 된다.

 

지금도 그렇지 뭐야. 지금도 정부에서 수용 했는데 그냥 강제로 뺏는 거나 마찬가지야. 거기에 양도세까지도 안겨놓으니까. 우리가 팔고 싶어서 파는거야? 정부에서 장사하려고 하는 건데 거기다가 양도세를....그리고 전에는 농사꾼들이 8년 이상을 짓게 되면 세금을 많이 면제해 줬는데 지금은 1억까지 해주는데 1억이라야 땅 몇 평이야? 300만 원씩 30. 괜히 감해준다는 말만 하는 거지. 그리고 여기 250만 원씩 보통 250만 원씩 도로변에는 300만 원씩 나가는데 지금 사려면.....그러니 우리는 그냥 내버린거지.”

 

70년 대에 과천신도시가 되면서 오른 땅값에 팔아서 돈을 들고 편하게 산다고 다들 외지로 나갔지만 김씨는 농사를 지으면 밥은 먹겠다 싶어서 그냥 주저 앉았다. 그런데 나간 사람들 대부분 그 재산을 다 지키지 못했다는 소문을 들을수 있었다.

 

내가 이장 볼 때 박정희 대통령 우리 동네 와서 모를 내고 그러는데 그걸 한달 전부터 경비를 하더라구. 그냥 겹겹이 겹겹이.....그러구서는 한 150평 그 정도 되는 땅에 물도 없는데 상수도를 끌어다가......그리고 그 가장자리로다가 뱀 나온다고 백반을 트럭으로 실어다가 뺑 둘러서......나도 그때 혼났다고. 직원이 나와서 그러는데 가만 있을수가 없어서. 같이....그땐 뭐 식당이 어디 있어요? 우리집 와서...집사람이 참 애썼지. 우리집에서 밥 안 먹은 직원들이 없어. 다 먹었지. 11시 반 만 되면 그냥 오토바이들 타고 우~ 오는거야. 우리집 사람 없으면 그냥 저희들이 꺼내다가 고추장 찍어 먹고.....”

(2019.10.4. 부인 유재환. 정재성 향토사연구회장, 김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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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분 어르신은 1926년 안양 박달리에서 났다. 15살 무렵 담안으로 이사했다. 장내동 중앙시장 인근이었다.

 

22살에 과천 이씨네로 시집왔다.

 

과천 부잣집이라는데 와보니 30칸 짜리 겹집이었어. 벌판 한 가운데 집이 네 채 있는 동네야..... 우리 서방님 바깥 일만 하시는 양반이라 일이 어찌나 많은지......”

 

전주이씨 효령군파였다. 조상 중에 무과급제하신 분이 계셔서 이선달네라고 불렀다. 지금 과천과학관 돔 아래가 그 집자리다.

 

위로 첫아들을 어려서 잃고 지금 장남 정달씨를 업고 과천에 들어서던 날 부리부리한 눈매를 본 동네 어른이 이선달네 자손이로구나하셨다.

 

김씨의 시아버지는 일찍 깨신 분이셨다.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우물이 대부분이던 시절에 동네서는 처음으로 뿜뿌(펌프)를 달았다. 그 집 물이 달고 벌판 한 가운데 있으니 오가며 농사짓던 이들이 모두 그 집에 들러 물을 마셨다. 그래 화장실을 하나 더 지어야 할 정도였다.

 

작은 아들(이정달님 작은 아버지)이 정신이 온전치 못해 병을 고치러 백방으로 찾아다니다가 의왕 학의리 성결교회에서 고친다. 병이 나은 후 정신이 온전해지다 못해 더욱 총명해져서 83세에 인터넷 검색을 익히실 정도였다니 짐작이 간다.

195022일 이기증씨네 사랑방에서 10여 명이 첫 예배를 드렸다. 과천에 교회가 생기게 된 첫 신호다. 호주선교사들이 서울에서 내려가면서 과천에 선교하러 왔다가 매를 맞고 돌아갈 정도로 어려운 지역이었다. 과천 최초의 교회는 논란이 있으나 감리회 벌떼교회 연혁을 보면 19547월 연세대학교 기독학생회가 하리에서 김창국 전도사를 모시고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을 보면 과천교회가 먼저고 그 앞에 이기증씨네 사랑채가 시작이었다.

 

시누이(이경녀)가 과천교회 예배당 지을 때 흙벽돌을 날랐지. 그 뒤에도 행상을 하면서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열심이었지. 나중에 미국가서 살면서도 멕시코에 예배당 짓는 일에 헌신했어.”

 

남편 이경승 씨는 나중에 서울공과대학이 된 태릉에 있는 서울공업전문학교를 중퇴했다. 시흥군에서 알아주는 달변이어서 선거 때면 선전부장이 되어 연설에 나섰다. 초대 과천면의원을 지냈다. 이윤형, 김창진씨 등과 함께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송재수씨가 관악중학교를 세울 때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이경승씨 동생은 서울공고 전기과를 나와 전기기사로 재주가 좋았다. 큰아들 이정달씨는

작은아버지는 안양 삼덕제지가 들어설 때 전기설비를 맡아 할 정도로 실력있는 기술자셨어요. 나중에 설악산 권금성 케이블카 공사를 맡아 하셔서 놀러가면 태워주시곤 했어요.”

 

이런 남편이 집안일을 전념할 리가 있나.

 

참을 해서 들에 이고 나가 보면 남편은 논둑을 베고 누워 자는 거예요. 그때는 농악을 한다고 일하다가 한바탕 풍악을 울리며 놀기도 했고......저녁이면 일 보러 나가신다고 나가 주무시고는 아침에 오셔서 식사를 하시고 눈을 붙이시면 뒷바라지 해야 하고....”

 

그 와중에도 김씨는 동네 여느 아낙들처럼 청계산에서 나물 해다가 엮어서 남태령을 넘어 서울로 내다 파는 일도 했다.

 

그땐 다 그랬어. 나중엔 동네 아줌마들하고 앉아서 내가 하도 넘어 다녀서 남태령이 낮아진거야하고 웃으며 얘기하지. 버스가 다니기 전이어서 남대문까지는 예사로 걸어 다녔지.”

 

일이 많아 나중엔 머슴을 얻어서 농사를 해야 했다.

 

당시 머슴 새경이 쌀 5가마였어요. 쟁기질 못하면 3가마.....모판 낼 때는 소두 2. 가을에 타작하는 날은 후하게 주어서 벼 한말이었지요. 그런 마당에 가게까지 열어서 바빴어요. 집에는 포도, 살구 과수원도 있었고......”

 

우리 논이 삼부골 아래도 다섯마지기 짜리가 있어서 참을 내가는 것도 큰 일이었지요. 우리 며느리(권혁희)가 처음 시집와서는 스탠그릇에 8명 밥을 이고 오다가 넘어져서 죽을 뻔 했다고 울기도 했어요.”

 

(2021.11.17. 과천교회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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